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2화
(12)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여름 초입이었다.
“발렌 님. 저 출근했습니다. 죄송해요. 많이 늦었죠?”
루디가 더운 숨을 몰아쉬며 인사했다.
“그래. 친구는 잘 만나고 왔어?”
한참 불꽃 마법을 익히던 나는 고개를 삐죽 내밀고 물었다.
“네. 죄송해요. 그 친구가 워낙 바빠서 부모님께 소포 하나 부칠 시간이 없다네요. 서궁 앞에서 주면 되지 뭘 그렇게 멀리 불러내는지.”
그녀는 오늘 아침 서궁에서 일한다는 친구의 소포를 부쳐줬다고 한다.
“그래. 친구의 부탁은 들어주면 좋지. 언젠가 나도 도움받을 일 생길 텐데.”
“하하.”
“잘했어. 황족 따위는 궁에 버려두는 일이 있더라도 친구 부탁은 들어줘야지.”
“네, 네?”
루디의 녹색 눈이 걱정스럽게 깜빡였다.
어깨가 축 처지려 하기에 나는 다급하게 얼굴을 폈다.
“농담이야. 농담! 미안해.”
“술 안 사드릴 거예요.”
“다시는 이런 농담 안 할게. 어? 뭐 들고 왔네? 그건 뭐야?”
루디가 더러운 상자를 들고 온 걸 본 나는 다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
다행히도 루디는 눈을 한 번 흘기며 넘어가 주었다.
“발렌 님 앞으로 소포가 와 있더라고요. 되게 무거워요.”
“누가 보냈다고 되어 있어?”
“적가면이요.”
나는 마도서를 집어던지듯 내려놓고 루디에게 달려갔다.
“왔네. 왔어.”
상자를 냉큼 받아 들었다.
그 무게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게 뭔데요?”
“지난번에 희망 카지노에서 딴 돈일 거야. 벌금 내고 폭삭 망해버린 줄 알고 내심 포기했는데, 다행히 왔네.”
검술 수련 허가를 받은 걸로 만족하려고 했건만.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낡은 나무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은 외관과 달리 말끔했다.
두툼한 가죽 주머니와 편지, 나선 문양이 양각된 배지가 들어 있었다.
[조언 덕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귀인께서 내려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따신 돈을 보냅니다. 말씀드린 대로 환전 수수료는 떼지 않았습니다. 다시 와주신다면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다음에 갈 때는 일이 더 잘 풀리겠네.”
나는 조직의 손님임을 의미하는 나선 배지를 품속에 소중하게 챙기며 중얼거렸다.
황족인 내가 홍등가 범죄 조직 따위의 손님 배지를 소중하게 챙겨야 하다니.
운명이 나를 비웃을 거다.
생각하면 할수록 환장할 거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엮일 곳이니까.
“얼마나 따 오신 거예요? 은화여도 양이 상당할 거 같은데요?”
루디가 가죽 주머니를 꺼내며 물었다.
나는 내 앞에 쌓여 있던 칩들을 떠올렸다.
마담에게 딴 칩이 은화로 350여 닢.
그 앞에 사람들에게 딴 칩도 은화로 대충 100여 닢.
“금화로 마흔다섯 닢은 넘을 거 같은데?”
루디가 주머니를 떨어트렸다.
녹색 눈동자가 은쟁반만큼 커지고 입이 쩍 벌어졌다.
“발렌 님. 같이 희망 카지노 갈까요?”
“루디!”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게 지금 제 몇 년 치 연봉인데. 이제 이걸로 뭐 하실 거예요?”
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도움이 될 만한 마도구 몇 가지를 떠올렸다.
“나중에 거기까지 가서 설명해 줄게. 지금 수도에서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가서’요? 저랑 같이 나가시려고요?”
“당연하지. 지난번에 돈 생기면 같이 나가자고 했잖아.”
루디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언제쯤 시간 나실 거 같아요?”
나는 달력을 흘깃 보고 답했다.
“내일부터 1 근위대랑 같이 검술 훈련을 받거든.”
“네.”
“평일 동안 그 훈련을 버티고 주말에 기운이 남으면 가자.”
“한동안 못 간다는 뜻으로 생각해두고 있을게요.”
루디가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내 신세야.
돈이 없을 때는 시간만 많고, 이제는 돈이 이렇게 많은데 쓸 시간이 없었다.
“아. 루디. 그리고 이거 몇 개만 사 와 줘.”
부탁하기 조금 민망한 물건이라서 원래는 혼자 나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작은 공책에 명단을 적어 건넸다.
“이런 게 왜 필요하세요? 이런 게 효과가 있다고 믿으시는 거예요? 아니. 효과가 있다고 해도 이 가격대에 나오는 건 다 가짜예요.”
마지막 물건을 확인한 루디가 얼굴을 굳혔다.
나는 속으로 머리를 그녀의 발 앞에 조아리며 뻔뻔하게 말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줄래.”
“제 눈빛이 어때서요.”
“벌레 보는 거 같잖아.”
“전하. 저질이에요.”
* * *
“발렌 대공 전하! 더 빨리 뛰셔야 합니다.”
“발렌 대공 전하! 제 가랑이를 걷어차던 순간의 속도는 어디 갔습니까!”
해가 지평선 너머로 뉘엿뉘엿 떨어졌다.
35kg 훈련용 갑옷과 20kg 어치 납덩이, 합 55kg의 중량이 내 팔다리와 몸통을 짓눌렀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저물어가는 해 근처의 아지랑이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렸음에도 붉은 노을의 잔상이 눈앞을 따라왔다.
아무래도 눈에 문제가 생긴 거 같다.
목이 까끌까끌하고 다리가 후들거렸으며,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아니. 눈에만 문제가 생긴 게 아니겠군.
“폐하! 왜 저를 여기에 보내셨습니까!”
진심 반 연기 반이었다.
즉, 반은 진심이었다.
나와 결투했던 반삭 머리의 본넬 경과 그의 선임인 붉은 머리의 텐티아 경이 내 등을 떠밀었다.
“더 빨리 뛰십시오!”
“이제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시겠습니까!”
왜 이렇게 된 걸까?
제이릴리스가 개발한 제국 검술을 다시 제대로 익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국 검술 훈련은 언제나 육체 단련과 함께 이뤄진다는 건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이렇게 단련한 게 미래에 일어날 전쟁에 큰 도움이 된다는 걸 안다.
아는데도 힘들어 죽겠다.
또래보다 월등히 많았던 마나는 어느새 바닥을 보였다.
잘 단련된 탄탄한 근육도 움직일 때마다 비명을 질렀다.
“이번 바퀴만 돌면 제국 검술 2단계를 연마할 수 있습니다.”
텐티아 경이 내 옆에 붙어 등을 밀어주었다.
나는 턱을 당겨 호흡을 고르는 동시에 앓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것도 이 갑옷 입고 납덩이 차고 하는 거잖나!”
“옆에서 자세는 봐 드리겠습니다.”
“고맙네. 텐티아 경.”
“대공 전하는 끝나면 돌아가 쉬실 수 있지요?”
“그래. 시녀 루디가 해주는 마사지를 받으며 쉴 수 있네.”
그 덕에 내가 아직 살아 있지.
“저는 또 서궁 순찰 근무를 서려 가야 합니다.”
그러니 우는 소리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저런. 내 말로라도 위로해 주겠네.”
나는 못 알아들은 척 유들유들 내뱉었다.
“말이 끝입니까?”
“말이 아니면 몸으로 위로해 주기 바라나?”
텐티아 경이 강철 장갑으로 내 등갑을 후려쳐 큰 소리를 냈다.
쾅! 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등이 얼얼했다.
“이 정국에 폐하의 새언니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물론 발렌 님의 몸은 좋지만, 돈으로 위로해 주시면 더 좋을 거 같군요.”
“지난번에 받은 황무지의 눈물이 아직 남아 있는데, 한 잔 어떤가?”
돈 주고도 못 사는 값비싼 포도주의 이름을 들은 기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오늘 근무 끝나고 찾아가도 되겠습니까?”
그 순간 마지막 노을의 조각이 텐티아 경에게 쏟아졌다.
잿빛 섞인 붉은색에 약간 부스스한 쇼트커트 머리카락, 깊고 진한 최고급 루비와 같은 빛의 눈동자와 입술.
늠름함과 처연함을 겸비한 대장 늑대와 같은 인상의 미인.
“기다리고 있겠네. 안주는 뭘 좋아하나?”
“치즈와 햄, 그리고 혹시 얼음포도가 있으면 준비해 주십시오. 없으면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얼음포도? 포도주 안주로 포도?”
“기막히게 잘 어울립니다.”
렌티아 경은 성실하고 황가에 충심 깊은 기사인 동시에 철학이 확고한 애주가였다.
“제국 검술 2단계 준비하겠습니다!”
“아악! 팔, 팔이 안 올라가.”
“턱 당기고 가슴 펴십시오!”
그런데 나 이 상태로 술 먹어도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며 정신 없이 검을 휘두르다보니 이내 저녁놀 조각마저 지평선 아래로 사라졌다.
“아이고 죽겠다. 죽겠어.”
나는 팔다리에 찬 납덩이를 풀고, 일부러 무겁게 만든 훈련용 갑옷을 벗어 정리했다.
“몸 풀고 가겠습니다!”
마차로 도망치려는 내 뒷덜미를 텐티아 경이 붙들었다.
“여기서 나를 더 굴릴 생각인가?”
“스트레칭 안 하시면 내일 근육이 굳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겁니다.”
“내 시녀 루디가 마사지를 해줄 거네.”
“그 정도 마사지로는 이 훈련의 피로가 가시지 않습니다.”
나는 끅끅거리며 스트레칭을 마쳤다.
그제야 텐티아 경이 나를 놓아주었다.
“그럼 근무 끝나고 붉은 달무리 궁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숙소서 씻고 나가면 자정은 될 겁니다.”
“그래. 기다리고 있겠네.”
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올라타는 순간 다리가 풀려 넘어질 뻔했다.
루디가 챙겨준 소금 한 티스푼을 입에 털어 넣었다.
바다 향과 짜디짠 맛이 입 안에 퍼졌다.
큰 물통을 집어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마차 안에서 얼음이 다 녹아 이미 미지근해졌다.
그래도 입을 뗄 수가 없는 맛이었다.
“하아.”
물병을 완전히 비웠다.
깊은 한숨을 내쉬자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어지간히 피곤한지 잠이 솔솔 왔다.
그래도 며칠간 꾸준히 했다고 첫날보다는 버틸만했다.
그때는 마차에 타자마자 기절하듯이 잠들었지.
졸린 머릿속으로 텐티아를, 그 늠름한 얼굴을 떠올렸다.
잿빛 섞인 붉은색에 약간 부스스한 쇼트커트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그녀는 조만간 누명을 뒤집어쓰고 숙청당할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반역 황자 유스티아누스와 만나 그의 오른팔이 된다.
그리고 더 먼 미래에 솔레타라토 제국의 열 번째 소드마스터가 된다.
텐티아, 지금의 너는 상상조차 하지 못 할 이야기겠지.
나는 서궁을 바라보며 입 안에서 중얼거렸다.
너는 앞으로 20년 뒤에 반역 황자 유스티아누스를 지키고 황제의 손에 죽는다.
너와 반역 황자를 상대하려 황제가 수도를 비우고 남하했을 때 북쪽의 야만족들과 마수들이 장벽을 넘어온다.
절대 그렇게 두지 않겠다.
네 누명은 내가 풀어 줄게.
일단 술자리에서 알리바이부터 만들자.
“가서 텐티아 경이 올 때까지만 자자.”
오늘 밤도 어지간히 길어지겠지.
* * *
“일어나세요. 대공 전하.”
루디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나는 단숨에 몸을 일으켜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 창밖은 캄캄했다.
“아침까지 자버린 건 아니라서 다행이네. 지금 11시 정도 됐나?”
“네. 전하. ”
나는 적당히 깔끔한 셔츠로 갈아입고, 단추 세 개를 푼 뒤, 머리를 뒤로 넘겼다.
“내가 말한 건 어떻게 됐어?”
루디가 단조롭게 답했다.
“황무지의 눈물이랑 안주랑 커피술 준비해 뒀어요.”
커피술은 달고 향이 짙어 술술 넘어가지만, 예상외로 도수가 높다.
편한 자리에서 이성과 같이 먹기에 최고…… 라고 수도의 바람둥이들에게 들었다.
“그게 다야?”
“그리고 마지막에 말씀하신 그것도 사 왔습니다!”
루디가 정말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향 몇 개를 내밀었다.
미혼향이라고도 불리는 향초.
이성을 매혹해 제정신 못 차리게 한다는 향이었다.
물론 그건 어지간한 고가품이나 가능하고, 뒷골목에서 파는 이따위 물건에는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전하. 텐티아 경에게 뭔 짓을 할 생각이세요!”
그녀가 노기 어린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귀찮다는 듯이 몸을 돌리며 루디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옆문 밖으로 나가 있어.”
“전하!”
“어서.”
“발렌 님. 실망이에요.”
루디가 자리를 박차고 옆문을 거칠게 닫았다.
쾅!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계산된 행동이었고, 예상된 반응이었지만, 심장을 저미는 듯한 이 기분은 어찌할 수가 없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니, 그저 떠안을 뿐이다.
창밖 저 멀리 텐티아 경으로 보이는 기수가 달려오고 있었다.
“늦었습니다. 전하.”
“아닐세. 기다리는 동안 즐거웠네.”
나는 텐티아 경을 내 앞에 앉히고 잔에 황무지의 눈물을 따랐다.
“어서 들지. 향이 다 날아가겠어.”
“예. 전하.”
그 포도주의 색을 본 텐티아 경이 기쁘게 웃었다.
향을 맡으려 잔을 든 그녀가 만족스레 웃었다.
“향기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이런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할 뿐입니다.”
“혼자 먹다 보니 아쉽더군. 앞에서 얼굴 맞댈 상대가 있기를 바랐네.”
우리는 잔을 맞댔다. 챙, 하는 맑은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살짝 젖힌 나는 값비싼 액체를 천천히 목구멍으로 넘겼다.
찬란한 향이 머릿속으로 퍼져나갔다.
몇 잔 더 술잔을 기울이는 동안 그 향에 취하며 생각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그 말에 화답하듯 군홧발 소리가 들려왔다.
거친 발소리에 텐티아 경이 잔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벌컥! 다음 순간 문이 열리고 무장한 기사들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온몸을 감싼 판금 갑옷이 촛불을 반사해 요란하게 빛났다.
“신발은 벗고 들어와 주면 좋겠는데.”
나는 방 안을 가득 채우는 덩치들을 향해 무신경하게 말했다.
막 방 안으로 들어서는 사내가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하더니, 신발을 벗었다.
“‘흑철’ 기사단장 바르바토스입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 텐티아 경을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사자의 갈기 같은 적갈색 머리와 형형한 검은 눈동자를 빛내는 사내.
야성과 지성을 겸비한 거구의 기사. 바르바토스.
“어째서인지 물어도 되겠나?”
나는 아쉽다는 기색을 온몸으로 흘리며 말했다.
바르바토스의 눈이 나와 내 방을 훑었다.
야밤, 한참 때의 남녀 단둘.
단추 세 개를 풀어 쇄골을 드러낸 옷차림.
최고급 포도주와 유혹용 커피술.
곳곳에 언 듯 보이는 싸구려 미혼향.
다시 나를 본 바르바토스가 경멸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발렌 대공 전하. 텐티아 경은 서궁에 보관 중인 황실의 유물을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텐티아 경이 입을 쩍 벌렸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럴 리가 없잖은가!”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자네는 도둑질을 한 날 황궁 안에서 한가롭게 술이나 마실 수 있을 거 같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