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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3화 (13/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3화

(13)

거구의 기사가 얼굴을 굳혔다.

“텐티아 경은 오늘 훈련을 마친 뒤 서궁 경비 근무를 서고, 곧바로 이 붉은 달무리 궁으로 왔다네.”

나는 그가 반박할 논리를 만들 시간을 주지 않고 쏘아붙였다.

“유물을 훔칠 시간도, 빼돌릴 시간도 없었다는 걸 정말 모르겠는가?”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저었다.

“황궁은 넓습니다. 중간에 만난 누군가에게 넘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빨리 그 누군가를 찾아야겠군. 손에 든 것도 없는 텐티아 경 대신.”

“…….”

“내 말이 틀렸나?”

“아닙니다.”

나는 그의 얼굴에 곤란한 기색이 감도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에게 바싹 다가가 목소리를 착 깔고 이야기했다.

“나도 알고 있네. 알고 있다고. 지금쯤 폐하께서 격노하셨겠지. 그대가 누구라도 빨리 잡아가야 하는 상황임을 알고 있어.”

“……!”

“게다가 본래 서궁은 그대 휘하의 흑철 기사단이 관리하는 곳이었지? 이참에 백금 기사단에게 서궁의 관리를 되찾아오고 싶은 마음도 이해하네.”

거구의 기사가 이를 갈았다.

순간 갈무리되지 않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다리를 후들후들 떨면서도 그에게서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도 같은 기사들끼리 이렇게 물고 뜯으면 되겠는가? 폐하께서 그대들을 굳이 한곳에 묶어놓지 않는 이유가 있으실 텐데.”

경쟁은 조직과 개인을 발전시키나, 과하면 제 살을 깎아 먹는 법이었다.

내 말을 들은 바르바토스가 새어 나온 살기를 갈무리했다.

“대공 전하의 말이 맞습니다. 추태를 보였군요.”

됐나?

“그런데 언제부터 전하께서 이리도 명민해지셨습니까?”

“……!”

“두어 달 전부터 망나니가 되셨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아무래도 헛소문인 거 같습니다.”

거구의 기사가 짐승 같은 눈을 번뜩였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골랐다.

야단났다.

망나니란 생각 없이 욕망만 가지고 움직이는 자.

애초에 의심을 받으면 안 된다.

누구 한 명이라도 나를 주시하는 순간 모든 계획이 허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나는 바르바토스에게 더더욱 다가갔다.

그가 입은 판금 갑옷에 내 몸이 닿을 정도였다.

몇몇 기사들이 칼자루에 손을 올리거나,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황족의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진 시대였다.

그 눈길을 무덤덤하게 흘리며 나는 바르바토스에게 속삭였다.

“자네 정말 이럴 건가?”

“예?”

“내가 텐티아 경과 잘해보겠다고 오늘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는가?”

거구의 기사가 놀란 눈을 부릅떴다.

“훈련하는 내내 달라붙어 달콤한 말을 속삭이고, 저 비싼 포도주까지 내놓았네.”

바르바토스가 흘깃 눈을 돌려 내가 피워놓은 미혼향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그의 눈빛에 경멸의 감정이 떠올랐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라고 소리치고 싶은 거 같았다.

그렇게 하라고 효과도 없는 걸 굳이 피워놓은 거였다.

텐티아에게는 안 보이고 그에게는 보일 만한 위치를 물색하느라 고생 좀 했지.

“그런데 굳이 오늘 이 시간에 내 방에 쳐들어왔어야 했나? 물론 알고 있네. 폐하께서 진노하셨겠지.”

하지만, 하며 나는 말을 이었다.

“어차피 그녀는 수도의 자택이 아니라 기사단 숙소에 사네. 내일 와도 되지 않았겠는가? 오늘 밤은 그 정체 모를 내통자를 찾는 데에 집중하고 말이야.”

나는 불명예스럽고 추잡한 말 사이에 옳은 말을 섞어 내뱉었다.

이 화법에는 맞는 말도 틀린 말처럼 느껴지게 하는 힘이 있었다.

“전하. 참으로 대담하십니다.”

바르바토스가 기가 차다는 듯이 내뱉었다.

“칭찬으로 듣겠네.”

나는 비릿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바르바토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텐티아 경.”

“예. 바르바토스 단장님.”

“부름이 있을 때까지 경의 방에서 대기해 주시오. 우리 쪽 기사가 붙을 거요.”

“이해했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이만하면 성공이었다.

전생에서는 당장에 끌려 나가 본궁 지하 감옥에 던져졌으니까.

“그리고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

“왜 그러시오. 바르바토스 경?”

“그리 살다가는 반드시 곤혹을 격을 날이 올 거요. 폐하께서 언제까지 그대의 망나니짓을 봐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시오.”

“웃기고 있네.”

나는 한껏 빈정거렸다.

바르바토스의 얼굴이 썩어들어가고 텐티아 경이 내게 다가왔다.

“전하. 이게 무슨 일인가 싶습니다.”

“좋은 술만 아깝게 되었군.”

“바르바토스 경께서 오해를 하신 거 같으니 금방 풀려나겠지요. 그때 다시 와도 되겠습니까?”

“그대 같은 미인은 언제든지 환영이네.”

미래의 소드마스터라면 더더욱.

텐티아 경이 피식 웃으며 흑철 기사단의 기사들과 함께 방을 나섰다.

바르바토스가 마지막까지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문이 닫히는 순간 나는 중얼거렸다.

“대단한 기사야.”

흑철 기사단장 바르바토스.

휘하 기사들을 제 몸보다 아끼는 단장.

훗날 폭군의 철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리게 되나, 좋은 아버지이자 좋은 상관이었다.

회귀 전에는 소드 마스터가 된 텐티아 경의 손에 죽었지.

이번 생에는 반드시 둘이 어깨를 맞대고 싸우게 하겠다.

“루디. 방 치우는 거 도와줘. 바닥에 발자국투성이다.”

나는 옆문을 향해 외쳤다.

옆문이 드르륵 열리고, 복도 사이의 작은 틈에 숨어 있던 루디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화났어?”

“…….”

그녀가 말없이 가짜 미혼향들을 불 없는 벽난로에 던지고, 물걸레를 가져와 바닥을 밀었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마시다 만 술과 안주를 정리했다.

바닥이 거울처럼 빛날 무렵 루디가 입을 열었다.

“그 미혼향 아무 효과 없는 거 알고 계셨죠? 아니, 일부러 아무 효과 없는 걸로 사 오라고 하신 거죠?”

나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응.”

“바르바토스 님 보라고 산 거예요?”

“황족이 이성을 유혹하려는 게 딱히 망나니짓은 아니잖아. 그 정도는 써 줘야지.”

“왜 말 안 해 주셨어요?”

“…….”

“발렌 님을 원망했잖아요. 진짜 나쁜 사람인 줄 알았잖아요. 왜 제가 그런 생각을 하게끔 하신 거예요?”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머뭇거렸다.

한 번 죽고 나서야 되찾을 수 있던 어린 날의 추억.

살아 돌아온 추억 앞에서 내 인생 가장 끔찍한 순간의 모습을 재현하기 싫었다.

모두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면서도, 다 연기라고 나에게 속삭이면 웃을 수 있었지만, 네 앞에서는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망나니짓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었다.

“미안하다.”

그래도 거짓말하는 건 더 싫었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괜찮아요. 제가 불충한 탓이죠.”

루디가 녹색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잠깐 무서웠던 거 같아요. 변하셨잖아요.”

“그랬지.”

“제가 알던 발렌 님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이상했어요.”

“그래.”

“이제 좀 정리된 거 같아요.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주시든지 믿을게요.”

“고맙다.”

“텐티아 경의 누명을 벗기시려는 거 맞죠? 혹시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나는 잠시 전생의 사건을 회상했다.

이때쯤이면 고문의 후유증으로 한참 골골대고 있었을 때였다.

그래도 워낙 큰일이어서 몇 가지는 기억이 났다.

서궁 시녀 하나와 수도의 빈민 조직, 그들을 사주하고 매수한 정체 모를 자들이 얽힌 사건이었다.

사주하고 매수한 진범을 찾을 수 있으면 제일 좋겠지만 그건 아직 무리였다.

“서궁에 친구가 있다고 했지?”

“네.”

“새벽에도 서궁에 머무는 시종이나 시녀들이 있어?”

“많지는 않지만 몇 명 있어요.”

“그 애들 명단을 알아봐 주라. 황궁 밖으로 자유롭게 나갈 수 있을 만한 애들이 누구인지 알아야 해.”

“네. 전하.”

“무리해서 알아내려고 하지는 마. 진범을 잡는 게 아니라 텐티아 경의 누명만 벗기면 되니까.”

애초에 이미 절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해도 되었다.

전생에서는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던 텐티아 경이 숙소에만 연금되었다.

동선을 조사하다 보면 도저히 딴 곳으로 셀 수 없다는 사실도 금방 드러나겠지.

그럼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을 기사가 궁에서 쫓겨나는 일은 없을 거다.

* * *

다음날 나는 백금기사단의 연무장에서 본넬 경을 만났다.

어젯밤 있던 일이 이미 화제에 올랐는지, ‘백금’ 기사들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텐티아 경이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지.”

본넬 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이상한 생각이라도 있으십니까?”

“자네들끼리 서명운동이라도 하는 게 어떤가?”

본넬 경이 잘못 들었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이성적인 분이네. 텐티아 경이 진범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계실 수도 있어.”

“으음.”

“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풀어준다면 바르바토스 경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나?”

실적에 눈이 멀어 같은 기사를 마구잡이로 잡아 왔다며 대놓고 면박을 주는 꼴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자네들이 탄원을 넣는다면 자네들의 탄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풀어 준다며 바르바토스 경의 체면을 살려줄 수 있지.”

“그런…… 생각은 못 해 봤습니다.”

“어서 움직이게. 백금기사단장도 지금 심란할 거야. 눈도장 찍어야 하지 않겠나.”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도 서명하시죠.”

“아니. 나는 안 되네.”

본넬 경이 다시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텐티아 경과 그날 단둘이 만난 사이야. 자칫하면 내가 유물을 빼돌렸다는 누명을 쓸 수도 있네.”

“그렇겠군요.”

“안 그래도 폐하께서 나를 백안시하시고 계신데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지.”

“아무 생각 없는 망나니이신 줄 알았습니다.”

“뭐라?”

“생각 많은 망나니셨군요.”

생각이 많으면 망나니가 아니건만.

본넬 경이 아릿하게 웃었고,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생각 많은 악당이지.”

서궁 시녀들을 조사한 루디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기에, 나는 슬슬 물러서려 했다.

“어디 가십니까?”

훈련용 갑옷과 납덩이를 가져온 본넬 경이 나를 막아 세웠다.

“어제 너무 늦게 자서 피곤한데, 오늘은 쉬면 안 되겠나?”

나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말했다. 본넬 경이 하얗게 웃었다.

“대공 전하. 얼토당토않은 소리 하지 마십시오.”

“이, 이럴 때가 아니네. 경도 어서 서명판을 돌려야 하지 않겠나?”

“다들 연무장으로 훈련하러 나올 겁니다. 그때 서명받으려면 제가 여기 있어야지요.”

“꼭 훈련을 하고 있어야겠나?”

“선배들이 다 검을 휘두르고 있는데 저 혼자 펜이나 놀리고 있을 수는 없잖습니까?”

발렌 대공 살려.

훈련을 마친 나는 소금에 절여진 채소처럼 늘어졌다.

“전하-!”

“루디.”

달려온 루디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로 돌아갔다.

“누우세요. 알아 온 거 이야기해 드릴게요.”

루디가 제 허벅지를 두드렸다.

“나 지금 땀에 절었는데?”

“상관없어요.”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허벅지에 뒤통수를 눕혔다.

“없어진 유물이 뭔지부터 말씀드릴게요.”

“그래. 부탁해.”

루디가 숨을 가볍게 들이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인 울그림의 펜촉’이 없어졌어요.”

“폐하께서 진노할 만도 하네.”

그게 이번에 없어진 거였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온 세상을 알고 싶어 하던 거인 울그림은 세계를 떠돌았고, 여행 내내 지도를 그렸다.

아름다운 풍경을 앞에 두고 종이만 보고 있는 게 싫었던 울그림은 제 펜에 고대 마법을 걸었다.

그 펜은 일대의 지형을 분석해서 스스로 지도를 그리는 마도구가 되었다.

지금은 울그림도 전설 속 이름이 되었고, 펜대는 썩어 금속 펜촉만 남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 펜촉에는 고대 마법이 남아 있었다.

“워낙 서궁 깊은 곳에 있던 물건이라 정확히 언제 없어진 줄도 모르고 있더라고요.”

“전날 밤까지는 있었지?”

“네. 전날 밤까지는 확실히 있었다고 해요.”

“서궁 시종이나 시녀 중에 자유롭게 나갈 수 있는 애는 누구야?”

“없어요. 대부분 숙소에서 살다 주말에만 외출, 외박할 수 있는 애들이에요.”

서궁은 황족이 살지 않았다.

그곳에서 일하는 시종들도 대부분 아무 연줄 없는 하급 귀족 출신이었다.

“내 생각에는 분명히 시종 중에 한 명이 빼돌린 거 같거든.”

“기사들도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루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황궁 어디에 숨겨놓았을 가능성은 없을까? 일단 상황을 넘겼다가 나중에 빼돌리는 거지.”

“그럴 만한 배짱이 있는 애들이 아니에요. 제 친구도 엄청 겁쟁이고요. 안절부절못하는 게 얼굴에 다 드러날 거예요.”

나는 눈을 몇 번 감았다 떴다.

“그럼 어떻게 밀반출한 걸까? 울그림의 펜촉은 꽤 크잖아?”

거인의 펜촉은 손바닥 두 개보다 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오거의 창촉인 줄 알 정도였다.

“제가 서궁 시종이고, 뭔가를 뺴돌려야 한다면, 황궁에 들락날락하는 상인에게 부탁하겠어요.”

“내 마도서 처분해줬을 때처럼?”

“네. 하지만 서궁은 딱히 그럴 만한 상인도 없어요.”

“그럼?”

“저라면 밖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친구에게 부탁하겠어요. 황족을 모시는 시녀들이요. 급한 소포 같은 걸로 위장해서…….”

말을 잇는 루디의 얼굴이 점점 흙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루디.”

“…….”

“어제 아침에 소포 하나 전달하고 오지 않았어?”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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