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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4화 (14/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4화

(14)

전생의 이 시기에 루디는 이미 죽은 몸이었다.

얼마 전 있었던 ‘1차 대공들의 난’.

전생의 나는 그때 이도 저도 택하지 못하고 양쪽 모두에 발을 걸쳐 놓은 채로 우물쭈물했다.

그리고 루디는 내가 그렇게 우물쭈물 거리도록 놔둔 죄, 나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로 죽었다.

‘중립이라는 건 적이 아니라는 게 아니라 우리 편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세상에 중립 따위는 없다. 짐의 편이 아니라면 적이다.’

경험이라는 교사는 소중한 사람의 목숨이라는 값비싼 수업료를 받았다.

그래서 나는 이번 생에서 확실히 편을 정했다.

이복남매인 대공들을 버리고 나의 여동생, 솔레타라스 제국의 황제 제이릴리스의 편에 서기로.

그 덕에 소중한 사람을 구했고, 그 탓에 내가 알던 역사가 미묘하게 틀어졌다.

“루디?”

나는 황망한 표정으로 세 살 연상인 내 시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루디의 뽀얀 얼굴이 시시각각 노란색 갈색 회색을 거쳐 창백한 색으로 질려 갔다.

“루디! 숨 쉬어! 숨.”

나는 그녀의 무릎에서 일어나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전하. 어쩌죠? 제 탓에 전하까지 피해를 보게 생겼어요.”

루디의 녹색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나는 일단 고개를 들어 마부가 우리의 대화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부터 확인했다.

얼굴색 하나 달라지지 않은 걸 보니 아직 아무 말도 못 들은 거 같았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루디가 호흡을 가다듬더니 곧 처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하. 어서 가서 저를 신고하세요. 전하라도 사셔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대로라면 전하가 유물을 빼돌리려 했다는 누명을 쓰실 수도 있어요. 평판도 안 좋으시잖아요.”

“…….”

“제가 부덕하고 경솔하여 전하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죄송할 따름입니다.”

“……!”

나는 전생에서도 그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할 말이 남았느냐?’

‘제가 부덕하고 경솔하여 전하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죄송할 따름입니다.’

이를 악물며 고개를 저었다.

전생에서 이 일을 의뢰한 진범이 잡혔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서궁 시종이 펜촉을 훔쳤다는 사실 역시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알려졌지.

하지만 이번에도 시간 속에 묻히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루디가 소포를 들고 황궁 밖으로 나가는 걸 누군가는 봤을 테니까.

이제 텐티아 경의 누명을 벗기는 걸로는 부족하다.

생각을 마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차 창문 밖에서 네댓 명씩 갈라진 병사 무리가 황궁 안을 여기저기 활보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황궁 전체에 병사들을 풀었다고 생각하면 족히 천 명은 넘을 거 같았다.

‘거인 울그림의 펜촉’은 그만큼 중요한 마도구였다.

요새를 포위하고 사용하면 적들의 비밀 통로 같은 걸 다 알아내 버릴 수 있었으니까.

“루디. 네 친구는 아무래도 제대로 된 친구가 아니었나 보다.”

“네. 전하. 전하께 폐가 되는 자를 어찌 제 친구라 하겠습니까. 반톤 그놈이……!”

루디의 녹색 눈에 핏발이 솟았다.

나는 어둑해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낮부터 서명을 받았을 테니, 지금쯤이면 텐티아 경의 연금이 풀렸겠지.

“루디. 병사들이 너를 쫓거나, 그놈이 잡혀서 네 이름을 팔기 전에 그놈을 잡아야 해.”

“네. 전하.”

“내가 먼저 서궁으로 갈 테니까 기사단 숙소에 가서 텐티아 경을 태우고 와.”

“텐티아 경을요? 알겠습니다.”

“반톤이라고 했지? 인상착의가 어떻게 돼?”

“검은 머리, 순하게 처진 눈에 마른 체형이에요. 눈동자 색은 짙은 갈색. 이런 짓 할 거처럼 생기지는 않았어요.”

* * *

백금 기사단 숙소는 연무장 옆에 있었다.

방금 왔던 곳으로 돌아가라는 말에 마부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여기서 내리겠다.”

나는 서궁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내렸다.

“충성.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그래. 늦은 시간에 수고가 많다.”

“지금 서궁에서 마도구 분실 사건이 일어나서 이 구역을 봉쇄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아무도 통행하실 수 없습니다.”

이미 펜촉이 황궁 밖으로 나갔는데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여기가 내 집인데 내가 가지 못하는 곳이 있다는 건가?”

나는 턱을 쳐들며 고압적으로 일갈했다.

병사들이 ‘본넬 경’, ‘카지노’ 하며 중얼거렸다.

“그럼 송구하지만, 몸을 수색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양팔을 벌리며 호탕하게 대답했다.

“직무에 기꺼운 모습이 보기 좋구나.”

내 제복 주머니 이곳저곳을 확인한 병사가 다시 경례를 올렸다.

“예. 가시면 됩니다.”

“그래. 혹시 범인의 윤곽은 잡았나?”

“어제 서궁 정원에 묘목을 새로 심었습니다. 그때 서궁의 시녀와 시종 중 몇몇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였다는 보고가 있어 그쪽을 중심으로 수색 중입니다.”

“묘목이라니?”

잠시 머뭇거리던 병사가 입을 열었다.

“묘목 오백 그루를 새로 심었습니다. 그 구덩이 안에 마도구를 숨겨놓았다가 차후 빼돌릴 가능성이 있어, 모든 묘목을 다시 파내는 중입니다.”

“…….”

완전 삽질만 하고 있었군.

“마도구가 이미 황궁 밖으로 나갔을 가능성은 없는가?”

“서궁의 시녀와 시종들은 모두 주말에만 외출할 수 있습니다. 하녀와 하인들은 마도구를 보관해둔 구역에는 출입이 불가하고요. 마도구가 황궁 밖으로 유출되지 않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알겠네. 수고하게.”

‘서궁 앞에서 주면 되지 뭘 그렇게 멀리 불러내는지.’

루디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 * *

천 년 제국 솔레타라스의 황궁은 광활했다.

어지간한 성벽보다 높은 담장의 둘레는 장장 13킬로미터에 달해, 그 자체만으로도 작은 도시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황제가 기거하는 본궁은 수도가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있었으며, 그 뒤 평원에 붉은 달무리 궁과 같은 별궁과 넓은 잔디밭, 인공적으로 조성한 숲과 호수가 있었다.

사암과 포석으로 정돈한 길은 사두마차 세 대가 나란히 지나갈 만큼 넓었다.

그 옆에는 멋들어진 가로수가 긴 팔을 벌려 밤바람에 춤추었다.

낮에 태양 빛을 모아두었다가 밤에 내뿜는 마도구 가로등이 줄줄이 늘어선 덕에 밤에도 캄캄하지 않았다.

수도의 어지간한 부촌에서도 기름등을 쓰는 걸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사치였다.

가로등 불빛 저 멀리 보이는 서궁을 향해 발렌시아누스는 걸었다.

서궁은 본래 양위한 상황 일가나, 상황 사후 과부가 된 상황의 비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그러나 선황과 황후는 1년 전 제이릴리스에게 목숨을 포함한 모든 걸 넘겨주었다.

선황 역시 그의 아버지, 즉 발렌시아누스의 할아버지가 죽고 나서 황위를 물려받았다.

서궁은 오랫동안 주인을 모시지 못했고, 필요하지만 당장은 안 쓰는 마도구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전락했다.

주인 없는 궁. 뒷배도 연줄도 없는 한미한 가문의 여식들과 공자들이 시녀와 시종으로 오는 출세의 무덤.

그런 곳에 상황 일가가 머무는 곳이라는 상징 때문에 거액의 궁 관리비가 주어졌다.

보고 즐길 사람도 없는 묘목 몇백 그루를 심을 정도로.

“모르기는 몰라도 엄청나게 해 먹었겠지.”

발렌시아누스는 옛 기억과 마담 라베시아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제가 관리하는 돈과 제 돈을 혼동하고, 제가 관리하는 물건과 제 물건을 혼동한 끝에 황실의 마도구에까지 손을 댔을 게 뻔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

“고생이 많군. 더 고생하게나.”

서궁 잔디밭 앞에 병사들이 모여 있었다.

이 더운 밤에 땀을 뻘뻘 흘리며 묘목들을 파내는 중이었다.

전신 판금 갑옷을 입은 백금 기사들도 몇 보였다.

“빨리 파라! 빨리 파! 찾지 못하면 너희가 그 구덩이에 들어가게 될 거다.”

“거인의 펜촉을 어디에 넘겼지? 바른말을 할 때까지 매우 쳐라!”

“관리비 장부 다 가져와! 이것들이 마도구 하나만 해먹은 게 아니었네.”

그래도 귀족 출신이라고 시녀와 시종들은 궁 옆 숙소에 일단 감금만 해 놓았다.

하지만 하녀와 하인들은 이미 죄다 끌려 나와 달밤에 삽질하느라 분노한 병사들과 기사들에게 이리저리 치이고 있었다.

“치안총감님에게 지원 요청을 보내야겠군. 뭐가 뭔지 알아볼 수가 있어야지.”

“동감이네. 엇? 전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관리 장부를 보며 신음하던 기사 둘이 다급하게 외쳤다.

숙소로 향하던 발렌시아누스는 의뭉스럽게 웃으며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잠시만 갔다 오겠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억지 부리지 마십시오. 울그림의 펜촉을 찾기 전까지 서궁은 봉쇄입니다.”

발렌시아누스는 기사가 들고 있던 서궁 관리비 장부를 슬쩍 빼앗았다.

“이걸 어떻게 읽는지 알려 주겠네.”

“예, 예?”

“함부로 보시면 안-”

“이쪽이 들어온 돈일세. 이쪽이 나간 돈이고. 이건 꼬박꼬박 나가는 돈, 이건 매월 달라지는 돈이야.”

그 역시 한때 수도에서 둘째가라면 억울한 망나니, 희대의 양아치였다.

전생에서 붉은 달무리 궁 관리인이랑 짜고 예산을 남김없이 털어먹은 적도 있었다.

수십 년간 감사 한 번 받지 않고 자기들의 세상에서 살아오던 서궁 시녀 시종들.

그들의 얄팍한 머리와 나태한 손길로는 그 제이릴리스를 상대로 줄타기를 하던 망나니 발렌시아누스의 눈을 피해갈 수가 없었다.

“의자를 새로 샀다고 하는데 수령 장소는 양조장이군. 여기는 수량도 적혀있지 않아.”

“아.”

“고아원에 일정 금액을 기부했다고 하는데 다음 달 회식비가 이상하리만큼 늘었어. 그런데 정작 회식을 가느라 쓴 마차 대여 비용은 없지. 기부금을 고아원과 나눠 먹은 거네.”

“그렇군요.”

“가구 파손 신고를 했지만 폐기 기록은 없군. 아마 새로 구매한 기록도 없을 거네. 가구를 빼돌린 거야.”

“!”

“이럴 수가.”

기사가 같은 장부를 보면서도 모르고 있었다며 자책했다.

그런 기사에게 발렌시아누스는 교단의 성자와도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네들의 장기는 회계가 아니라 검 아닌가? 이런 걸 몰랐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네.”

“언제, 언제 이런 걸 배우셨습니까?”

기사 하나가 뒤늦게 의구심을 표했지만, 이미 동료 기사들은 발렌시아누스에게 앞다투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게 중요한가?”

그 질문들에 웃으며 답하면서도 발렌시아누스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중요한 건 황제 폐하께 올릴 보고서가 더 두꺼워지리라는 사실 아닌가? 설령 마도구를 끝내 찾지 못한다 해도, 다른 방향에 주목하며 말을 돌릴 수도 있겠지.”

“예?”

“어제 바르바토스 경이 텐티아 경을 연금하지 않았나? 자네들도 실적을 올려야지. 흑철 기사단이 다시 서궁 경비를 맡는 걸 막아야 하지 않겠나?”

꿀꺽. 여기저기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금 기사단으로서는 흑철 기사단이 다시 황궁 안으로 들어오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찬란하게 빛나는 백발 뒤로 구원자 같은 후광을 드리우며 발렌시아누스는 말했다.

“단순히 없어진 마도구 하나를 쫓지 말고, 서궁의 비리를 총체적으로 처리하게. 이번 기회에 자네들이 단순한 검객이 아닌, 이성과 판단력을 겸비한 고결한 기사들임을 증명할 수 있으면 좋겠군.”

세 치 혀를 돌린 발렌시아누스는 빙긋 웃으며 뒤돌았다.

“전하! 감사합니다.”

“저, 저분이 정말 본넬 경의 가랑이를 걷어찬 그 망나니가 맞는가?”

“말씀에 감복했습니다!”

시녀 숙소로 향하며 발렌시아누스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좀 더 거친 표현을 사용했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의 조언이 아니라 기사들이 알아서 깨우친 듯한 느낌을 주어야 했었다.

“시간이 없어.”

언제나 그게 문제였다.

“공이 급한 그들이 내 이름을 말하지는 않을 테니.”

실수가 실수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발렌시아누스는 쥐 죽은 듯 고요한 복도를 걸었다.

청은, 백금, 흑철, 황동, 네 기사단의 견제와 경쟁, 그리고 도 넘은 대립은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었다.

백금 기사단은 발렌 대공의 도움 없이 스스로 서궁의 비리를 해결했다고 주장할 게 분명했다.

그 사실만을 믿으며 발렌시아누스는 한 방문 앞에 섰다.

“우리 어떡해?”

“몰라! 모른다고! 대체 누구야?”

“아무리 그래도 마도구를 건들면 어쩌자는 거야.”

“걔 하나 때문에 우리까지 다 망하게 생겼어.”

“그런데 누구냐고? 하녀나 하인들은 근처에 가지도 못하잖아. 우리 중에 있다는 거야.”

“빨리 나와! 자백하라고!”

“카지노 가는 애가 했을 거 아니야? 여기 카지노 다니는 애 누구야?”

“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짜증과 두려움이 섞인 대화를 들으며 발렌시아누스는 문고리를 돌렸다.

단단히 잠긴 고리는 돌아가지 않았다.

와드득, 그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더니 나무 조각과 금속 부품이 부스러졌다.

“어, 어?”

“대공 전하?”

발렌시아누스는 방 안에 둘러앉은 시녀와 시종들을 무심하게 흘겨보았다.

마도구 도둑이 아니라고 해도 모두 횡령범일 뿐이었다.

“반톤이 누구지?”

“제, 제가 반톤입니다.”

한 시종이 손을 들었다.

검은 머리에 처진 눈매, 갈색 눈동자.

루디의 말대로 순하게 생긴 소년이었다.

“잠시 따로 볼 수 있겠나?”

“죄송합니다. 이 방에 모여 있으라는 명령을 받아서-”

“부탁으로 들렸나 보군. 따라와라. 명령이다.”

“……!”

반톤이 일어났다.

모여 있던 시녀와 시종들이 걱정과 의심, 의문이 교차하는 눈빛을 보냈다.

발렌시아누스는 근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누가 사주했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답을 들은 발렌시아누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날카롭게 찌르는 불꽃.”

작살과 같이 길어진 불꽃이 그의 어깨 위에서 일렁였다.

순하던 반톤의 눈매가 독사의 그것처럼 날카로워졌다.

발렌시아누스는 그의 손이 허리춤으로 들어가는 걸 똑똑히 보았다.

평범한 시종 따위로는 보이지 않는 능숙한 움직임이었다.

‘계획적으로 들어왔나?’

하지만 그는 소드 엑스퍼트 최상급까지 올라갔던 검객이었다.

퍽, 그는 반톤이 단검을 뽑기도 전에 이미 반톤의 무릎 아래를 걷어차고 있었다.

“흐, 흐흐흐흐흐흐흐.”

단검을 놓치고 나무 바닥에 거세게 쓰러진 반톤이 웃었다.

“뭐가 그리 웃기는가?”

“전하께서는 전하의 시녀를 버릴 마음이 없으신 거 같군요. 소문으로는 구차하게 살아남으려고 이복 남매들을 다 팔아넘겼다는데, 의외로 정이 깊으십니다.”

정곡이었다.

“루디, 였지요. 네. 루디. 저를 잡을 생각이셨다면 그냥 밖에 깔린 기사들에게 말하면 그만이지요. 하지만 혼자 들어오셨네요?”

“…….”

“저는 혼자 죽을 생각 없습니다. 잡히는 순간 다 불 겁니다. 전하의 시녀도 같이 끌려 나가겠지요. 아시겠습니까? 저희는 이제 한배를 탄 사이입니다.”

“…….”

“전하의 시녀와 친해진 보람이 있군요. 당장 내일 저와 함께 외출해 주십시오. 하루빨리 이 궁을 떠나야 할 거 같으니까.”

“싫다면?”

“마음대로 하시면 됩니다. 머지않아 어떤 시녀가 소포를 들고 궁 밖으로 나갔다는 목격담이 퍼질 테니까요. 물론 그다음에는 저도 잡히겠지만요.”

발렌시아누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걸 항복이라 생각한 반톤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전하의 뜻대로 제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워 줄 그런 분은 이 궁에 없습니다. 전하 같은 망나니를 어떤 기사가 따르겠습니까?”

저 아래에서 군홧발 소리가 났다.

익숙한 발걸음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며 고개를 저었다.

“있다면 어쩔 건가?”

“!”

잿빛 섞인 붉은색에 약간 부스스한 쇼트커트 머리카락.

늠름함과 처연함을 겸비한 대장 늑대와 같은 인상의 기사가 완전 무장을 하고 방에 들어섰다.

“발렌 대공 전하.”

“텐티아 경.”

가볍게 목례를 마친 텐티아는 쓰러진 반톤에게 다가갔다.

“네놈이 내게 누명을 씌웠느냐?”

“자, 잠깐!”

그리고 강철 군화로 그의 얼굴을 걷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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