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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5화 (15/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5화

(15)

기사의 미덕 중 하나는 잔혹함이었다.

혹자는 자비라 하겠지만, 그는 반만 옳고 반은 그른 말이었다.

기사의 자비는 오로지 항복한 자에게만 주어졌다.

적이 감히 반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적이라도 자비를 받기 충분한 상태가 되도록, 적을 자근자근 다지는 건 기사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텐티아 경은 엘리트 교육을 받은 기사 중의 기사였다.

퍽! 쇠를 덧댄 군화 앞코가 횡령범 시종의 배에 사정없이 꽂혔다.

“악! 아아악! 아악!”

“버텨. 배 차이다 복근에 힘 빠지면 복막 찢어진다. 그럼 혈마법사나 사제님을 불러야 해. 너도 알잖아. 여기에 그런 사람을 부를 수 없다는 거.”

순하게 생긴 소년의 비명에도 텐티아 경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제국에서 검 하나로 올라올 수 있는 가장 고결하고 고귀한 일자리를 이깟 시종 하나의 모함으로 날려 먹을 뻔했다고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슬슬 말려야 하나? 일단 갈비뼈 몇 대는 확실히 부러졌을 거 같은데.’

발렌시아누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민할 정도였다.

그때 반톤이 발렌시아누스에게 표독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발렌시아누스는 텐티아에게 눈짓했다.

“경. 죄인의 눈빛이 살아 있군. 아직 자비를 원하지 않는 듯하오.”

“예. 대공 전하.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백금의 품격을 보여 드리지요.”

그렇게 말한 텐티아가 발뒤꿈치를 쳐들었다.

“히이익!”

“이 악물어라.”

구타는 숙소에 동료 기사들이 들어올 때까지 이어졌다.

“경! 참으시오.”

“일단 자백은 받아야 할 거 아니오!”

“살려는 놓으시오! 살려는!”

동료 기사 둘과 선임 기사 하나가 눈이 돌아간 텐티아 경을 붙들었다.

“반드시 제가 심문하게 해주셔야 합니다!”

“화가 많이 났나? 그러나 이렇게 화풀이하는 건 기사답지 못한 일이네.”

“저놈 때문에 우리 백금 기사단이 흑철 기사단에게 서궁 관리를 빼앗길 뻔한 거 아닙니까?”

“……반으로 접어 버리게.”

선임 기사가 제 손으로 일으켜 세우던 반톤의 뺨을 후려쳤다.

“죽어라!”

“경!”

이번에야말로 발렌시아누스가 말릴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흥분하고 말았습니다.”

“자네들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네. 부디 저 죄인을 엄히 치죄해 주기 바라네. 악마가 깃들었을 저치의 혀 놀림에 넘어가지 말고.”

“예. 알겠습니다.”

“아. 펜촉은 이미 팔아넘겼다더군. 실행만 맡은 말단이었던 모양이야.”

“!”

축 늘어진 반톤이 끌려 나가면서도 눈꺼풀을 움찔했다.

텐티아 경이 선임 기사와 눈을 마주쳤다.

“이렇게 말하기는 뭐하지만.”

그녀가 먼저 운을 뗐다. 발렌시아누스는 그 내용을 대충 짐작했다.

“펜촉이 수도 뒷골목으로 흘러갔다면 사실상 회수는 불가능합니다.”

끄덕. 선임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텐티아 경이 발렌시아누스와 선임 기사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유흥비를 위해 공금을 횡령하다 황실의 유물에까지 손을 대었다. 그렇게 보는 게 맞겠지요.”

“현상금은 걸되, 추적은 포기하도록 하지. 녹일 수도 되팔 수도 없는 게 언제까지 숨어 있겠나. 몇 년도 되지 않아 돌아올 거네.”

“서궁의 비리 공개에 집중하도록 하지요.”

“맞는 말이네. 찾지도 못할 유물에 괜히 힘 빼지 말자고.”

선임 기사와 텐티아 경이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었다.

황제의 혈육 앞에서 보고 방향을 조작한다고 봐도 될 행위였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걸로 텐티아 경과 빚을 주고받은 셈이었다.

게다가 저 정도 배짱은 있어야 폭군의 기사라고 할 수 있었다.

‘다 잘됐네.’

일단 루디는 이만하면 무사하겠지.

발렌시아누스는 두 기사의 사려 깊은 결론에 만족했다.

울그림의 펜촉은 진귀한 마도구였다.

상대 요새의 비밀 통로를 찾아낸다는 사용법은 언제나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제국은 더 이상 상대의 비밀 통로를 찾아 공략할 필요가 없을 만큼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했다.

본래 기능대로 지도를 만들기에도 시원찮은 성능이었다.

지금은 고대와 달리 와이번을 길들여 하늘을 날며 마법 없이도 상세한 지도를 만드는 시대다.

소중한 유물이었으나 그렇게까지 집착할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황실 유물임을 모두가 알고 있으니 대놓고 사용할 수 있는 세력 역시 없을 게 뻔했다.

배후로 추정되는 세력은 있었으나, 지금 당장 건드릴 상대는 아니었다.

“텐티아 경.”

“예. 대공 전하.”

“일이 마무리되면 다시 초대하겠소. 못 마신 포도주나 마십시다.”

“그때는 저도 좋은 술을 들고 가겠습니다.”

“기다리겠소.”

발렌시아누스는 시녀 숙소 밖으로 나섰다.

익숙한 갈색 머리가 보였다.

루디가 정원 옆에서 마부와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용케 들어왔네. 텐티아 경을 태워 온 덕이겠군. 하고 중얼거린 그는 마차에 올라탔다.

“가서 자자. 다 끝났다.”

마차가 붉은 달무리 궁으로 향했다.

마부가 하품을 연달아 내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졸음 운전하다 사고 내는 건 아니겠지? 발렌시아누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반톤은 어떻게 됐나요?”

그때 루디가 툭 던지듯이 물었다. 발렌시아누스는 무심하게 답했다.

“텐티아 경에게 죽도록 맞았지. 악이 바칠 대로 받쳐 있으니까 좋은 대접은 못 받을 거야. 사형 판결 내려오기도 전에 옥사하지 않을까 싶은데.”

황궁도 감옥의 질은 처참하기 그지없으니까.

“…….”

루디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에 걸려?”

“아니요. 그냥. 사람의 속이라는 건 정말 알 수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

“그 애는 한 번이라도 저를 친구라고 생각했을까요?”

“친구니까 이용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놈들도 있어.”

“네?”

“세상에는 이상한 놈들이 많아. 하나하나 너무 마음 쓰지 마.”

발렌시아누스는 56살까지 살았던 전생을 회상했다.

회귀한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까마득한 옛날 같았다.

어떨 때는 회귀를 한 게 아니라 예지몽을 꾼 거 같기도 했다.

‘몸이 어려졌다고 마음도 어려졌나?’

하지만 그렇게 흐릿해지는 기억 속에서도 불꽃같이 선명한 상이 있었다.

주로 그에게 원망의 눈길과 저주의 육성을 퍼붓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발렌시아누스, 폭군의 애증 어린 총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들을 지옥 불구덩이로 걷어찼다.

그는 황제에게 영원히 갚을 수 없는 짐을 지고 사는 자였다.

그걸 고려해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그런 일들을 저질렀으니, 정말로 ‘이상한 놈’은 그 자신일지도 몰랐다.

‘선택했으니까.’

루니는 자신보다 세 살 어린 대공 전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가 한없이 연상으로 느껴졌다.

꾸민 듯한 경박함 뒤로 어린 치기와 기묘한 절박함이 공존하던 사내의 표정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런 얼굴을 먼발치에서 몇 번 본 적 있었다.

수많은 전쟁을 해치고 돌아온 고참 기사들이 술자리에서 그런 표정을 지었다.

“대공 전하?”

“어, 어.”

“왜 그러세요?”

“아니. 잠깐 딴 생각을 했어. 내일은 희망 카지노를 갈지 미래 카지노를 갈지 고민되어서.”

“전하!”

* * *

그러나 나는 카지노를 가지 못했다.

날이 밝자마자 백금 기사단원들이 붉은 달무리 궁 내 방에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경들. 이게 무슨 일인가?”

“…….”

기사들은 묵묵부답이었다.

하나같이 투구의 얼굴 가리개를 눌러 써 표정을 읽을 수도 없었다.

“대공 전하. 제가 모르는 사고를 치신 게 있나요?”

루디의 녹색 눈동자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최근에는 사고 친 게 없다.

반톤 때문인가?

사정 청취를 들으러 왔다기에는 너무 많다.

적어도 텐티아 경 이상의 실력자로 보이는 기사가 여덟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들의 가슴 견장을 확인했다.

백금색 보름달 배지. 소드 엑스퍼트 상급이라는 뜻.

마나 블레이드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진짜’ 기사다.

어지간한 반란도 홀로 갈아버릴 실력자들이었다.

횡령 ‘따위’의 작은 사건에 동원될 만한 이들이 아니었다.

“!”

나는 굳어버린 손을 움직여 루디를 불렀다.

“전하?”

“옷 갈아입는 거 좀 도와줘.”

“네?”

“만에 하나 끌려 나간다고 해도, 잠옷 바람으로 끌려 나갈 수는 없지.”

나는 거리낌 없이 옷을 벗었다.

기사들은 눈을 돌리지 않았고, 나는 그들의 시선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높은 신분의 사내가 아래 신분의 사람들에게 몸을 보이는 건 꽤 흔한 일이었다.

루디가 들어 준 셔츠와 바지를 입고, 멋들어진 제복을 걸치고, 걸쭉한 향유를 발라 머리를 넘겼다.

대공 작위를 증명하는 반지를 엄지에 낄 무렵 어딘가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착. 하며 멈춰 선 본궁 시종장이 내리깐 목소리로 장중하고도 위엄있는 소개를 시작했다.

“다섯 종족의 지배자이시자 사상 최연소 소드 마스터, 상아탑주가 인정한 대마법사!”

아니.

잠깐만.

“영원히 얼어붙은 산맥, 거인의 사막, 황금 옥토, 용 군도, 강철 계곡, 거대수림의 소유자!”

이건 아니잖아.

“백금, 청은, 황동, 흑철. 네 기사단의 레이디!”

왜 네가 여기 오는 건데?

회귀 전에는 이런 일 없었잖아.

“황금옥좌의 주인이시자 47번째 솔레타라스이시다!”

또각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들의 걸음걸이와 달리 가벼웠으나, 느껴지는 존재감은 방에 모여 있는 어떤 기사보다도 거대했다.

시종장이 마지막으로 소리 높여 외쳤다.

“제이릴리스 황제 폐하 납시오!”

얼굴이 파랗게 질린 루디가 그대로 실신했다.

나는 재빠르게 그녀를 부축해 침대 뒤에 숨겼다.

동시에 내 여동생이 방 안에 발을 들였다.

제이릴리스는 얇고 하얀 드레스 위로 제 눈동자만큼 진한 금빛 솔을 걸치고 있었다.

걸음걸음 내디딜 때마다 길고 하얀 허벅지가 드레스 자락 밖으로 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백금발은 찬란하고 황금빛 눈은 용의 그것처럼 번뜩였다.

벽에 걸린 촛불도, 창밖의 태양도 빛을 잃은 거 같았다.

“황제 폐하! 만수무강하소서.”

나는 그 자리에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가장 가까운 혈족인 만큼 본래 이렇게까지 예를 취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잔뜩 겁먹고 있었다.

색정, 횡령, 폭행, 폭음, 악식까지.

전생에서 내가 생각해도 도를 넘은 일탈을 일삼고 다녔어도 그녀가 날 찾아온 적은 없었다.

설마 들킨 건 아니겠지? 시녀 하나 때문에 이럴 리가 없는데.

자신을 기만했다고 생각하면 누구라도 목을 날려버릴 황제였다.

그런 그녀도 욕망이 아니라 애정에서 비롯된 일탈은 나름 귀엽게 봐주었다.

그래서 제 주군의 복수를 위해 포도주에 독을 탄 시녀에게도 자결을 허락해줬었고.

그러니까 제발.

“발렌시아누스 대공.”

많은 걸 알고 있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예. 폐하.”

“일어나게. 그대의 뒤통수와 등을 보러 이리 걸음을 옮긴 게 아니니.”

나는 즉시 일어나 고개를 들었다.

나와 꼭 닮은, 약간 선이 가는 얼굴이 흥미롭다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리 얼굴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군.”

“실로 그러하옵니다. 폐하.”

“짐은 그대가 보고 싶었네. 그대도 짐이 보고 싶었나?”

목소리에 고저가 없어 농담인지 아닌지 쉽게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는 이 목소리를 40년 동안 옆에서 들으며 살았다.

“예. 폐하. 밤이면 밤마다 폐하의 용안과 옥음을 떠올렸사옵니다.”

“기쁘구나. 하지만 말했지. 비밀은 사내를 매혹적으로 만들어주지 않는 법이다.”

황제의 목소리 끝이 살짝 올라갔다.

그 입가가 보기 좋게 씰룩였다.

죽일까 말까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발렌 대공. 책임은 결과에 지는 것이다. 알고 있겠지?”

“예. 폐하.”

“그러나 짐의 위신이 있다. 기사들의 위신이 있다. 그대의 위신도 있다. 그러니 이제 펜촉이 다른 길로 흘러나갔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런 표정 짓지 마라. 무슨 말인지 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짐의 영악한 오라버니여.”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혔다.

거기서 그녀의 말이 끊어졌다.

용과 같은 금빛 눈동자가 아찔하게 희번덕거렸다.

잠시 고민한 나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다른 길이라니요? 저는 폐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짐의 착각이라는 말이냐?”

“무엇을 착각하셨습니까?”

“그대는 실로 잔망스럽구나.”

제이릴리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짐은 애정이라는 가치를 높이 사는 자다.”

그랬지.

“그대의 시녀는 그대의 버팀목이자 목줄이로구나. 그대는 그녀가 짐의 손에 부서지게 놔두지는 않을 거 같은데, 맞는가?”

“실로 그렇사옵니다.”

제이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되었다. 결과가 좋으니, 살려는 주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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