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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6화 (16/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6화

(16)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는 말입니까?”

“그래. 허튼 생각 하지 말라는 뜻이지.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네. 혹시 경도 압박을 받지 않았나 싶어 이야기하는 거야.”

훈련을 마친 나는 연무장 가장자리에 앉아 거친 숨을 내쉬었다.

옆에 앉은 텐티아 경이 섬뜩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실은 저 역시 단장님께 불려가 비슷한 말을 들었습니다. 위신상 넘어가겠다. 좋은 게 좋은 거니 용납하겠다. 그런 내용이었지요.”

“두 분 다 상당히 많이 알고 있으시겠지?”

“예. 본궁에서 서류로만 세상을 살피시면서 어찌 그런 통찰력을 가지고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역대 최연소 소드 마스터가 아니신가? 통찰력이 검 실력의 절반만 되어도 충분한 일이지.”

“행정과 통치는 재능의 영역이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즉위 전에 어느 파벌에 속해 계셨죠?”

“1황자 파벌의 신성이셨지. 황태자와 1황자 모두에게 견제당하다 먼저 검을 뽑으셨지만.”

나와 텐티아는 잠시 침묵했다.

“전하. 이제 어쩌실 겁니까?”

“살던 대로 살아야지. 놀고먹고. 이성 교제는 삼가야 할 듯하네. 잘못해서 애라도 생겼다가는 폐하의 성미 상 그 여자까지 죽어 나갈 테니.”

“저는 그러지 못할 거 같습니다.”

“당연하지. 경은 기사가 아닌가?”

텐티아 경이 눈을 흘겼다.

“그게 아니라. 살던 대로 살지 못할 거 같다는 말입니다.”

“설마 펜촉을 찾아오라는가?”

“현상금을 거는 쪽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다만 미리 적극적인 탐색 활동을 펼치라는군요.”

“그게 그 말이잖은가? 경 같은 기사에게 시킬 일이 아니군.”

거친 마디의 손과 포도주처럼 붉고 짧은 머리, 빼어난 실력과 잠재력을 가진 기사.

텐티아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기사의 일은 탐색 활동의 결과로 드러난 수상한 자를 족치는 거지, 탐색 활동을 하는 게 아니었다.

이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치안총감에게 공문이라도 보내는 게 어떤가?”

“그는 흑철 기사단 휘하입니다. 뭐가 좋다고 저희에게 협조해주겠습니까? 얼씨구나 하고 저희의 무능력을 성토하며 황궁 안까지 들어오려 할 겁니다.”

“백금기사단 휘하 자체 정보조직은 없나?”

“있습니다. 죄다 다른 영지로 나가 있지만요.”

“다른 영지?”

“선황 황비들의 친정입니다.”

“반역을 일으킬까 감시하고 있군.”

“그렇습니다.”

텐티아 경은 내게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상황이 곤란해졌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기사가 되어 열일곱 살 소년 대공에게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기사인 이상 명이 내려지면 따라야 한다.

골치 아픈 임무였다.

얼마나 시간을 써야 ‘적극적인 탐색’으로 인정해줄지도 몰랐다.

사실상 벌이었다.

나는 치솟는 죄책감에 이마를 짚었다.

죄책감이 없어지기를 바란 적도 있었지만, 동시에 이건 내가 최후의 선을 넘지 않게 해줄 보루이기도 했다.

이미 늦었을 수도 있겠지만.

“경.”

“예. 대공 전하.”

“날도 좋은데 내일 데이트나 하지 않겠나?”

“예?!”

“완전 무장하고 나오게.”

* * *

황제가 준 외출허가증은 여전히 유효했다.

나는 마차를 타고 황궁 밖으로 나가 북적이는 시가지에서 내렸다.

‘적극적인 탐색’ 임무를 받은 텐티아 경이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주술 회로가 새겨진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의 모습에 행인들이 눈을 내리깔았다.

나는 맑은 하늘과 반짝이는 판석으로 포장된 도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전하. 이제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텐티아 경이 물었다.

나는 사거리 한쪽에 솟은 커다란 석조 상가 건물을 가리켰다.

텐티아 경이 정문으로 들어가려 하자,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쪽이 아닐세.”

“예?”

건물과 건물 사이, 잡초가 무성한 그늘 길로 들어갔다.

불량배라도 하나둘 있을 만도 했지만, 수도의 치안은 아직 훌륭했다.

나는 건물 뒤쪽에 있는 작은 문을 열었다.

어두침침한 아래쪽에서 습습한 물 냄새가 물씬 올라왔다.

다시 맡게 될 줄 몰랐던, 그립기까지 한 냄새였다.

“무슨?”

“경은 솔레타리온 지하수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지하에 깊은 굴을 파고, 강물을 끌어들여 오수를 흘려보낸다. 그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충분하네.”

“그런데 왜 이런 곳에……?”

“…….”

루디가 보낸 소포의 주소가 이 건물이었다.

당연하지만 이 건물 상가에 울그림의 펜촉을 보냈을 리는 없었다.

나는 전생에서 다양한 용도로 지하수로를 애용했다.

루디에게 소포를 부친 주소를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놈들은 분명히 이곳을 통해 펜촉을 빼돌렸다.

물론 그걸 저 늠름한 기사에게 어떻게 설명하는지는 별개의 일이었다.

내심 고민하고 있자니, 텐티아 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선배들에게 들은 게 있습니다. 홍등가에서 지하수로를 통해 불법적인 약이나 이종족 여자를 운반하기도 한다지요.”

“그렇지.”

“전하께서 이런 곳을 어찌 알고 계신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나.”

나는 음흉한 웃음을 꾸며냈다.

텐티아 경이 잠시 머뭇거렸다.

“기름 등잔이나 마석 등잔이라도 가져올 거 그랬군요.”

“그럴 필요 없네.”

“예?”

나는 앞장서서 지하수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텐티아 경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따라 들어왔다.

“상당히 깊군요.”

그녀가 말했다.

“지하실보다 깊어야 하고, 상수도보다도 깊어야 하니.”

우리는 계단을 네 번 정도 틀어 내려왔다.

“지하수로에 온 걸 환영하네. 텐티아 경.”

“이렇게 넓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녀가 놀란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 역시 오랜만에 내려온지라 감회가 새로웠다.

수로는 도움닫기를 해야 간신히 건너뛸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양옆 인도는 두 사람이 지나가기에는 좁고 한 사람이 지나가기에는 넓었다.

천장도 머리를 숙이지 않아도 될 정도로는 높았다.

“흙벽이 아니군요.”

텐티아 경이 명백한 탄성이 어린 어조로 말했다.

“대지 마법사들을 여럿 동원해 만든 수로라고 알고 있네.”

“게다가 생각보다 어둡지도 않습니다. 벽과 바닥이 빛을 내는군요.”

색을 구별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밝은 달빛 정도의 훌륭한 밝기였다.

“마법으로 만들어낸 이끼라고 하네. 초롱아귀의 피를 섞었다지.”

“놀라울 뿐입니다.”

나는 인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수도 빈민가는 저쪽일세. 홍등가 옆에 붙어 있지.”

“그럼 마차로 빈민가까지 이동해도 되지 않았습니까?”

텐티아 경이 의아함을 드러냈다.

“그랬다가는 차 한잔할 시간도 되지 않아 백금기사단의 기사가 왔다는 걸 빈민 만 명이 알게 될 거네. 펜촉을 빼돌린 빈민가 패거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겠지.”

“그런데…… 놈들이 황궁 시종을 매수했을 거 같지는 않습니다. 빈민가 조직 따위가 어찌 그런 돈이 있겠으며, 어찌 황실에 연이 닿겠습니까?”

텐티아 경이 목소리를 낮췄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놈들은 빼돌리는 쪽, 추적에 혼동을 주기 위한 중간 마디일 뿐이겠지.”

“진범 찾기는 물 건너갔군요.”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펜촉을 찾고 놈들 두목을 심문하다 보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을 거야.”

아직 전달이 완수되지 않았을 날짜다.

아슬아슬하지만 시간은 있었다.

그녀의 흡족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좋습니다. 갈 수 있을 때까지 가보죠.”

“그래. 그런 반응을 원했네.”

빈민가 방향으로 세 시간쯤 걸었을까, 텐티아 경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신기하게도 아무 냄새도 안 나는군요.”

“무슨 말인가?”

“이곳은 하수도 아닙니까? 오물과 분변이 가득할 줄 알았습니다.”

“예전에는 나도 그리 생각했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한 마리도 안 보이는군.”

“예?”

“아. 마침 저기 한 마리 있네. 보게나.”

나는 막 인도로 기어 올라온 젤리형 생명체를 손가락 끝으로 가리켰다.

크기는 대형 사냥개 정도, 어두워서 색을 구별할 수는 없지만, 녹색이라는 걸 알고 있다.

놈은 몸을 늘였다 줄였다 하며 천천히 이동했다.

“슬라임이 아닙니까?”

텐티아 경이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궁중 마법사들이 슬라임을 마법으로 개조해 만들어낸 생명체일세. 분변, 곰팡이, 나무토막, 오물, 이끼까지 다 먹어 치우지. 수도 출신이 아닌가? 사용한 지 꽤 오래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들어본 적 있는 거 같습니다. 어릴 때 언니가 겁을 줬었죠. 못된 짓 하면 화장실에서 기어 올라와 저를 잡아먹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녀가 잠시 진절머리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무심코 피식 웃고 말았다.

“뭐가 웃기십니까. 전하.”

“미안하군. 경은 오거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거 같았는데.”

“어릴 때였잖습니까. 어릴 때.”

“그래. 혹시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살아 있는 인간은 공격하지 않으니 안심하게. 당연히 화장실로 기어 올라오지도 않는다네.”

“전하!”

“미안하네! 미안!”

텐티아 경이 역정을 부렸다.

대공만 아니었어도 수로에 던져버릴 듯한 태도였다.

“조용히 하게. 지하여서 잘 울린다네. 아예 진군나팔이라도 불지 그러나?”

“의외로 전하도 비꼬기를 잘하십니다?”

“누구 오빠인데. 당연히 잘해야지.”

“그 발언은 불경죄에 해당할 거 같군요.”

“준 반역죄도 넘겼는데, 불경죄 따위에 내가 눈 하나 깜짝할 거 같은가?”

“대단하십니다.”

모퉁이를 도니 수로 저 앞에 줄사다리가 보였다.

줄사다리가 내려온 구멍으로 흐릿한 빛기둥도 보였다.

어딘가 지하실에서 줄사다리를 내린 게 분명했다.

“전하.”

텐티아 경이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슬슬 다 온 거 같군.”

“어떤 놈들을 찾아야 합니까?”

나는 잠시 전생의 기억을 회상했다.

황궁 시종이 빈민가 조직을 통해 황실 유물을 빼돌린 이 사건.

이 사건에 동원된 조직은 분명히.

“왼손 손목에 붉은 가죽끈 팔찌를 찬 놈들. 매듭이 있어야 하네.”

“이름도 있습니까?”

“심심하면 두목이 바뀌는 놈들에게 이름은 무슨. 그냥 임시로 매듭 패라고 부르게.”

“용하게도 정확하게 찾아오셨습니다. 저도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 감이 안 오는데.”

경도 한 5년만 이 수로를 애용해 보면 거리감이 생길 거야, 라는 말이 목젖까지 올라왔다 들어갔다.

* * *

발렌시아누스가 먼저 줄사다리를 잡았다.

텐티아는 그와 천장의 구멍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황궁 밖으로는 제대로 나가본 적 없을 대공이다.

그런데 지하수로 정비공들이나 쓸 통로를 알고 있고, 이용도 자연스럽다.

그가 두어 달 전부터 비행에 빠졌다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 눈을 번뜩이며 조용히 줄사다리를 타는 몸놀림은, 그 정도 비행으로 몸에 새겨질 만한 게 아니었다.

마치 공성전을 여러 차례 수행한 기사나 숙련된 암살자의 몸놀림을 보는 거 같았다.

발렌시아누스는 줄사다리에서 삐걱, 이나 끼익, 같은 소리 하나 나지 않게 움직였다.

‘위에 어떤 놈들이 있을지는 모른다.’

그가 아무리 지하수로를 자기 집처럼 드나들고, 망나니 시절 신분에 맞지 않는 자들과 접점이 있었다 해도 모든 빈민가 조직의 세력도와 은신처를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한 다리 건너 알고 있을 사이다.

게다가 발렌시아누스는 빈민가 패거리들을 다루는 방식에 익숙했다.

줄사다리 끝까지 올라온 그는 손을 내밀기 전에 잠시 멈춰 서 귀를 기울였다.

“언제쯤 오는 거야?”

“오늘 오후에야 온다고 했어. 기다리고 있어. 그게 한두 닢짜리도 아니고.”

“얼마 전에 그 동네 전체가 뒤집혔는데 아직도 물량이 남아있나?”

“어떻게든 끌어모았겠지. 돈이 어지간히도 급하신가 봐. 이 동네 닳을 대로 닳은 구리 동전 한 닢까지 다 긁어가려는 걸 보니.”

“하양이야 빨강이야?”

“하양.”

발렌시아누스는 오랜 경험으로 놈들의 대화를 이해했다.

‘세 놈 정도. 각기 다른 패거리에 속해있는 놈들이야. 마약 거래 중이다. 출처는 홍등가. 마담 라베시아 사건 이후에 많이들 조사받고 벌금도 맞았다고 했었지.’

허리춤에 건 검에 한 번 눈길을 주었다.

‘본래는 귀족 손님들에게만 소량 판매했었지. 지금 자금난이 어지간히도 심한가 보군. 홍등가 밖까지 기어 나오다니.’

말소리가 울리는 걸 듣고 셋이 앉아 있는 방향을 파악하고.

‘적가면에게도 말해 놔야겠어. 혹시라도 손댈 생각 말라고.’

휙! 단숨에 구멍 밖으로 몸을 날렸다.

사내 셋이 구석에 모여 앉아 있었다.

남루하고 수수한 옷차림과 달리 눈빛은 충혈되어 번들거렸다.

한 놈은 목에 이름 문신, 한 놈은 얼굴에 십자 문신, 한 놈은 손목에 가죽끈 매듭 팔찌를 차고 있었다.

“찾았다.”

발렌시아누스는 오랜 경험에 따라 움직였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검부터 뽑아 든 것이다.

‘약간의 피는 건설적인 대화에 있어서, 녹슨 검에 뿌리는 기름과 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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