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7화 (17/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7화

(17)

장검은 좁은 지하실에서 싸우기에 썩 좋은 무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발렌시아누스는 도구에 그리 구애되지 않을 정도로 숙련된 검객이었다.

“어떤 놈이야!”

“야! 잠깐만.”

세 빈민 패거리가 흠칫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들이 일어나기도 전에 움직였다.

양손으로 자루를 쥐고 검을 내질러 얼굴에 십자 문신을 한 사내의 목을 찔렀다.

목뼈를 가르지는 않았으나, 정확히 굵은 혈관을 헤집는 효율적인 일격이었다.

“하나.”

“커어억!”

“이 자식이!”

목에 이름 문신을 한 놈이 단검을 뽑으며 일어나려 했다.

발렌시아누스는 검을 거두는 동시에 그의 턱을 걷어찼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이름 문신을 한 사내가 휘청였다.

발렌시아누스는 무심하게 검을 내질러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갈비뼈 사이로 들어간 검이 폐를 부드럽게 가르는 감각이 느껴지자 그는 검을 뽑았다.

“둘.”

그는 세 번째 사내의 목에 검을 겨누며 말했다.

“셋, 이 될래? 아니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할래?”

매듭 끈 팔찌를 찬 사내 역시 거칠게 살아온 자라 하나, 눈앞에서 지인들이 휙휙 죽어 나가는 광경은 충격이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좋다. 텐티아 경. 올라오게.”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가 줄사다리를 올랐다.

갑옷이 철커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발렌시아누스의 뒤에 선 그녀는 고개를 돌려 두 빈민 패거리의 시체를 가볍게 훑어보았다.

‘한 놈은 단숨에, 한 놈은 걷어차 쓰러트리고 옆구리를 찔렀다. 능숙한 솜씨야. 언제 배우신 거지? 본넬 경과 대련했을 때는 허세투성이였는데.’

“전하. 시체는 어떻게 할까요?”

전하, 라는 말을 들은 사내가 눈을 접시처럼 부릅뜨고 입을 쩍 벌렸다.

발렌시아누스는 옆구리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경련하는 이름 문신 사내의 손목을 잡았다.

“이 동네 방식대로 처리하도록 하지.”

“그게 뭡니까?”

“수로에 던지기.”

“슬라임들이 사람은 먹지 않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살아 있는 사람은.”

“둘 다 아직 살아 있는 거 같습니다.”

“곧 죽을 거야. 물에 담그면 더 빨리 죽을 거고.”

“‘담그면’?”

텐티아는 그게 맞은 표현인지 아닌지 잠시 고민했다.

‘‘던지면’이 아닌가? 됐다.’

“주시죠. 제가 하겠습니다. 장갑도 안 끼시지 않으셨습니까. 손이 더러워지십니다.”

“이런. 고맙네. 경.”

경, 이라는 말을 들은 매듭 끈 팔찌의 사내는 검에 찔린 듯이 경련했다.

히끅, 히끅, 딸꾹질이 나왔다.

지체 높은 도련님이나 아가씨 중 가학적인 취미를 가진 이들이, 기사의 호위를 받으며 빈민가에서 인간 사냥을 즐긴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사내는 그 소문의 진위를 그 몸뚱이로 확인한 자였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면서.

‘망할. 몰이꾼 역할이라도 맡으려 패거리에 들어온 건데.’

패에 가입한 빈민들이 은화 몇 닢을 받고 도련님 아가씨들께서 노니실 거리를 봉쇄해주는 일이 잦았다.

사냥감에서 몰이꾼이 되었던 사내는 다시 한번 자신이 사냥감으로 떨어졌노라 생각했다.

사내의 얼굴이 노랗게 질리는 걸 본 발렌시아누스는 검을 검집에 넣으며 말했다.

저런 얼굴을 한 사람은 절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사흘 전쯤. 이곳에 소포 하나가 오지 않았나? 연갈색 종이에 손바닥 두 개 크기 정도 됐을 텐데.”

“예, 예?”

“모르나?”

사내는 그 ‘모르나?’ 의 뜻을 알고 있었다.

‘그럼 죽어야지’가 생략된 말이었다.

그는 사흘간 이 통로로 드나들었던 모든 약과 여자와 남자의 명단을 떠올렸다.

필사적이었다.

“들어왔었습니다! 어제 들어왔었습죠! 번화가 사거리 석조 상가 건물로 부쳐진 소포가 아닙니까?”

“그래. 내가 제대로 찾아왔군.”

발렌시아누스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루디가 보낸 소포가 그 건물까지 가기까지 이틀 정도 걸린 모양이었다.

“그 소포가 어디 있는지 아나?”

“저희 두목이 직접 와서 가져갔습니다. 두목 방에 금고가 있는데, 거기에 돈이랑 약이랑 같이 넣어놓았을 겁니다.”

빈민가에서 살아온 사내는 눈치가 빨랐다.

아직 어려 보이는 눈앞의 ‘전하’께서 원하는 게 그 소포라는 사실 정도는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사내의 눈이 쥐같이 빛나는 걸 보며 발렌시아누스는 물었다.

“그 금고를 열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구조가 복잡한 금고라 시간은 꽤 걸릴 겁니다.”

“그럼 바로 간다. 일어서.”

“예?”

“싫다면 저 아래서 기다려라. 슬라임에게 뜯어 먹히면서 말이야.”

첨벙. 부그르르. 스윽스윽.

텐티아 경이 던진 부상자들이 물속에 떨어지고, 슬라임들이 모여드는 소리가 났다.

‘생각할 시간을 줘 봐야 배신할 계획이나 짜겠지. 속전속결로 마무리한다.’

발렌시아누스는 왼손 손가락 끝으로 검집을 툭툭 건들었다.

사내가 벌떡 일어났다가 휘청거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고, 다시 벌벌 기며 일어났다.

“경. 앞장서게.”

“예. 전하.”

텐티아는 검을 뽑았다.

스르릉, 하는 섬뜩한 쇳소리에 사내가 몸을 떨었다.

정신이 나간 듯 그 눈동자가 쪼그라들었다.

“가장 빠른 길로, 빠르게 안내해라. 소포를 찾지 못한다면 네놈을 고통스럽게 죽이겠다.”

늠름한 기사가 차갑게 일갈했다.

사내는 헐레벌떡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향했다.

* * *

건물 밖으로 나온 나는 눈부신 볕에 눈을 가늘게 떴다.

빈민가는 빈민가답게 더럽고 추했다.

길거리에 깔려 있어야 할 판석은 누군가 벗겨 팔아먹었는지 다 벗겨져 흙과 자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얼기설기 나무판을 덧대 지은 건물들이 여기저기 3층 4층으로 솟아 있었는데, 마감이 지저분해 꼭 촉수를 하늘로 뻗은 마물 같았다.

본래 있었을 석조 건물들을 지지대 삼아 무리한 중축을 거듭한 결과물이었다.

길거리에는 누추한 옷을 입은 추레한 사람들이 돌아다녔는데, 얼굴과 옷이 모두 꼬질꼬질한 탓에 빛나는 건 눈동자뿐이었다.

골목골목 사이에서는 비명 또는 사내와 여인이 붙어먹는 소리가 났다.

훅, 하고 밀려오는 고약한 냄새에 나는 숨을 참았다.

이건 아무리 맡아도 적응되지 않는다.

차라리 지하수로가 몇 배는 더 깨끗하겠지.

질퍽. 텐티아 경의 강철 군화에 이끼가 섞인 질퍽한 진흙이 달라붙었다.

그녀는 어울리지 않는 침음성을 흘렸다.

“돌아간다면 건축가를 불러 도시계획을 새로이 하자고 건의드려야겠습니다. 철거 과정에서 시가전 훈련도 겸할 수 있겠군요.”

“좋은 생각이군.”

“아니면 불을 놓아도 되겠습니다. 궁정 마법사들이 새로운 주문을 시험해보고 싶어 안달이라는군요.”

이맘때쯤에 어떤 주문이 개발되었었지?

기억났다.

불꽃 소용돌이 스크롤이었다.

“아주 좋은 생각이군. 그다음에는 무엇을 지으면 좋겠나?”

텐티아 경이 잠시 고심하는 표정을 짓더니 답했다.

“뭘 짓든 지금보다는 나을 거 같습니다. 폐하의 기사들이 수호하는 솔레타라온 성벽 안에 이런 거지 떼가 살게 놔둘 수는 없습니다.”

그녀는 목소리를 줄이지 않고 말했다.

그러나 행인들의 눈빛에 반발이나 울컥하는 감정은 없었다.

되려 텐티아 경과 눈이 마주칠까 벌벌 떨며 구석으로 물러나거나 몸을 돌렸다.

그들에게 기사는 구름 위 신들의 사도나 다름없었다.

마나도 못 다루는 놈들이다.

하마 했다고는 해도 갑옷 입은 기사를 죽이려면 천 명은 필요하겠지.

그게 텐티아 경이라면 더더욱.

“나리. 조금만 천천히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다리가 아픕니다.”

매듭 팔찌의 사내가 뒤를 흘깃 돌아보며 말했다.

이해할 수 있었다.

패거리에 속해 있다고 해도, 그 신체 능력은 나나 그녀와 비교할 수 없이 떨어지겠지.

하지만 내게는 그걸 고려해 줄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어떻게 합니까, 라고 눈빛으로 물어 오는 텐티아 경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서릿발같이 냉랭하게 일갈했다.

“내가 다른 안내자를 구하고 싶어지는구나. 이 거리에 네놈과 같은 패거리가 한 놈도 더 없겠느냐? 네놈 패거리가 네 두목에게 갈 시간을 줄 마음은 없다. 목이 베이기 싫다면 걸음을 재촉하거라.”

“알겠습니다. 나리.”

놈이 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죽치고 있던 빈민들이 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며 건물 사이로 숨거나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나는 그들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주변을 관찰했다.

눈에 보이는 건 신경 쓰지 않고 주변에서 들리는 말소리에만 집중했다.

전생에서 떨어질 대로 떨어졌을 때도 자주 오지 않았던 곳이다.

이곳에는 신의도 정의도 없다.

“저 앞입니다. 나리.”

골목 끝에 3층 석조 건물이 보였다.

다른 빈민가 집들처럼 옆과 위로 얼기설기 나무판자를 붙여 건물을 증축해놓았다.

그래도 두목이 있는 아지트라고 그 앞길에는 판석도 남아있었고,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쓰는 내 또래의 소년도 보였다.

다다다다다다.

골목과 골목 사이에서 달리는 발소리가 점점 커져 왔다.

“그래. 고맙다.”

나는 서늘하게 내뱉었다.

“나리?”

내 목소리를 들은 놈이 눈살을 찌푸렸다.

“경.”

나는 텐티아 경에게 눈빛을 보냈다.

“예. 전하.”

정중하게 답한 그녀가 그대로 놈의 등에 검을 내질렀다.

“커헉!”

배를 뚫고 튀어나온 검을 본 놈이 울분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가 이를 악물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한때 그랬듯이 그 등을 걷어차 엎어트리며 읊조렸다.

“어느새 패거리를 불렀을 줄이야. 천천히 가자고 멈춰 섰을 때 수신호를 보냈나?”

발소리가 근처까지 다가왔다.

어둠 내린 골목 사이사이에서 쥐 같은 눈동자들이 번뜩였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말이 사실이군요.”

텐티아 경이 검을 휘저어 핏물을 털며 같잖다는 듯이 말했다.

“들어가 보겠네. 그들에게 고양이를 물어봐야 쥐는 쥐라는 걸 가르쳐주도록.”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래 봐도 황족일세. 혈통의 정점. 가랑이 걷어차기 말고도 비기가 많으니 걱정하지 말게나.”

나는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패거리들과 텐티아 경을 뒤로하고 두목의 아지트로 향했다.

건물 앞을 청소하던 소년이 골목 사이로 도망치는 게 보였다.

나는 굳게 닫힌 나무 문을 잠시 노려보았다.

“흐.”

그리고 검을 뽑아 판자와 판자 사이로 힘껏 찔러넣었다.

나무 조각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검을 타고 명백한 이질감이 전해져 왔다.

나무가 아니라 살덩이를 찌른 감각, 화들짝 놀란 비명은 그보다 한 박자 늦게 들려왔다.

문 아래로 흐르는 피를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돌입은 언제나 신중해야 하는 법이지.”

나는 놈들이 태세를 정비하기 전에 문을 왈칵 열었다.

안쪽에는 열댓 명 정도의 무리가 몰려 있었다.

공격이 들어올 줄은 몰랐는지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나를 본 놈들이 이를 갈며 태세를 정비했다.

좁은 골목에서 휘두르기 좋은 손도끼와 단검으로 무장한 놈들.

눈빛과 기세가 어지간히도 흉흉했다.

내일이 보장되지 않는 이 거리에서 포식자의 위치를 지켜 온 패거리다웠다.

이 백금발을 보았음에도 고개를 숙여 존경을 표하는 자들은 없었다.

아무리 황족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진 세상이라 해도, 설마 황제의 혈육이 이 빈민가에 직접 들어오는 건 상정 외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상정 외의 일이 자주 일어났다.

“흔들리며 피어나는 불꽃.”

나는 그들을 조소하며 주문을 외웠다.

끝없이 숨을 내쉬는 듯한 감각이 들고, 심장에 고여있던 마나가 단숨에 흘러나갔다.

양은 여전히 형편없지만, 영혼에 새겨진 제어력은 여전했다.

주먹만 한 크기의 불덩이 열 개가 아스라이 타올랐다.

“마법……?”

선두에 선 놈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늦었다.”

나는 불덩이 열 개를 전부 현관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리고 문을 닫고 세 걸음 물러섰다.

둘 정도를 셀 시간이 흘렀다.

화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폭발하듯이 열렸다.

온몸에 불이 붙은 놈들이 악을 쓰며 현관 바닥을 굴렀다.

정신머리가 남은 놈들은 서로의 몸을 털며 불을 끄려고 했다.

하지만 마나를 머금은 불꽃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놈들의 아지트 안까지 번졌다.

“피어올라 따르는 불꽃.”

나는 그 불길 일부를 내 뒤에 두르며 연기 자욱한 아지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연기를 해치고 달려드는 사내의 심장을 찌르며, 나는 생각했다.

언제든 도망칠 수 있게 하려면 금고를 몇 층에 두었을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