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9화
(19)
곤란한 질문이었으나, 나는 곤란한 질문에 익숙했다.
전생에서 제이릴리스가 집행한 파격적인 인사와 무력을 동반한 외교 조치에 대한 뒷수습을 담당했던 덕이다.
“황제 폐하의 유물을 탐한 죄다. 그러나 네 아버지는 주제넘은 탐욕의 대가가 아닌, 그가 바라는 죽음을 맞이했다. 은혜로 여기거라.”
그래서 나는 열다섯 살이나 먹었을 소녀의 얼굴에 대고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죽음을 바라셨다고요?”
“그래.”
그러지 않으면 네가 죽으니까. 그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망자에 대한 죄책감은 쉬이 떨쳐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그랬듯,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안고 사는 건 너무나 잔혹한 일이다.
물론 그녀는 죄인의 자식이고, 제국은 연좌죄가 있다.
하지만 법과 군주의 뜻에 따라 목을 자르면 잘랐지,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가라. 곧 흑철 기사단에서 올 테니. 저 약에는 손대지 마라. 속이 다 문드러지기 싫다면.”
“알겠습니다. 전하. 오늘 보여 주신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외다리 소녀가 예를 표했다.
제 아비보다 깔끔한 동작이었다.
뜨거운 분노와 냉철한 이성으로 빛나는 그 눈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확률이겠지만, 언젠가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거 같다고.
건물을 나섰다.
불탄 현관 밖에서 텐티아 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말끔한 모습이었다.
“경. 다친 곳은 없는가? 숫자가 꽤 되었을 텐데.”
“제게 덤벼든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녀가 부끄럽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잠시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고,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제가 백금기사단원이라는 걸 알아보자마자 모두 눈썹이 휘날리도록 도망치더군요. 팔찌를 던져 버린 자도 여럿이었습니다.”
바닥에 군데군데 매듭 팔찌가 굴러다니는 게 보였다.
“좋군. 쓸데없는 피를 흘리는 거보다야 낫지. 잘 알아보고 도망치라고 그 번쩍이는 갑옷을 입는 게 아니겠나.”
텐티아 경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2층 두목의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안 금고에 마약이 쌓여 있다네.”
“그럼 어서 가서 확보하겠습니다.”
“아니. 이번 일은 흑철 기사단에게 맡기는 게 좋겠네.”
그녀가 잠시 눈살을 찌푸리다가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백금 기사인 제가 황궁 밖 일을 해결하면 그들은 도발이라고 생각하겠군요.”
“안 그래도 그대를 오인 연금한 탓에 바르바토스 경의 체면이 말이 아닌 상황이야. 이런 시국에 그대가 흑철 기사단의 관할 구역에서 공을 세우면, 그들은 얼굴에 새까만 먹칠을 하는 꼴이지.”
“소문과 달리 현명하십니다. 그럼 이번에는 빚을 지워두도록 하지요.”
거기까지 들은 나는 품속에서 유물을 꺼내 내밀었다.
고급 종이에 겹겹이 싸인 손바닥 두 개 크기의 펜촉.
“전하. 정말 찾으셨군요!”
“그럼 내가 못 찾을 줄 알았나?”
“대체 어떻게 여기 있던 줄 안 겁니까?”
텐티아 경이 인지부조화가 온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본넬 경의 가랑이를 걷어차고 매일 훈련 시간마다 죽는소리를 늘어놓던 사내를 보는 눈이 아니었다.
나는 그 눈을 피하며 과장된 어조로 일갈했다.
“그럼 경은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는 줄 알았나?”
“윽!”
“가져가서 보고하게. 이건 그대가 세운 공이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께서 빈민 패거리들의 짓이라는 걸 알아챘고, 지하 수로를 저를 안내하셨으며, 직접 그들의 소굴에 들어가 유물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제 제 공입니까?”
그녀가 늠름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기사다운 태도로 일갈했다.
나에게 거짓말을 시키려는 거냐고 꾸짖는 듯했다.
나는 짧은 고민 끝에 권위를 이용하기로 했다.
“어허. 대공이 자네 공이라면 자네 공인 줄 알게.”
나는 떠넘기듯 그녀의 손에 유물을 쥐여주었다.
훗날 소드 마스터가 될 기사다.
제이릴리스의 곁에 남겨두기만 해도 제국의 기둥이 되겠지.
미래를 아는 나는 앞으로도 공을 세울 기회가 많다.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환경에서 조금씩 조금씩 공을 세워 가며, 나의 충심을 간증해야 했다.
이런 상정 외의 사태가 일어났을 때는 덤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공을 돌리자.
앞으로 1, 2년 만에 평정될 제국이 아니니까.
* * *
텐티아 경에게 단단히 언질을 주고 사흘이 지난 날이었다.
시종이 찾아와 나를 본궁으로 불렀다.
“루디. 다녀올게.”
“예. 전하.”
나는 인사를 나누고 시종과 함께 본궁으로 향했다.
그는 웅장한 알현실이 아니라 햇살 잘 드는 남향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남쪽 벽 전체와 서쪽 벽 절반을 통유리로 만든 그 방은 마치 온실 같았다.
잎이 넓고 키가 큰 식물이 방에 가득했다.
꽃이 없는데도 향긋하고 싱그러웠다.
사흘 전 갔던 그 빈민가의 악취가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워지는 기분이었다.
방구석에는 악사 하나가 앉아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왈츠 곡이었는데, 처연하면서도 아릿한 게 짙은 감정에 푹 젖고 싶어 하는 귀족들의 취향에 딱 맞을 거 같았다.
“왔는가?”
제이릴리스는 방 가운데 긴 의자에 누워 있었다.
긴장이 완전히 풀린 하얀 손이 팔걸이 위로 축 늘어져 있었다.
볕을 가리기 위해 눈 위에는 따듯한 물수건을 얹어놓았다.
친족 살해자라 불리는 황제치고는 너무나 무방비한 태도였다.
하지만 나는 전생의 경험이 있었다.
이런 터무니없는 여유야말로 그녀가 자신의 힘과 권력을 재확인하는 방법임을 알고 있었다.
“예. 페하. 제가 왔습니다.”
“텐티아 경에게 보고를 들었다. 그대가 해준 몇 가지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는군.”
졸린 듯한 목소리.
“경이 겸손의 미덕까지 갖추었다는 이야기로 들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빙 돌려 텐티아 경을 치켜세우고 나를 깎아내렸다.
하지만 제이릴리스는 작지만 단호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저었다.
“짐도 그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넘기려 했네. 이참에 서궁에서 짐의 돈을 파먹는 쥐새끼들을 잡아낸 일에 의미를 두기로 했지. 그 더러운 빈민가로 흘러간 걸 어찌 찾겠는가? 텐티아 경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녀의 임무 아닌 임무는 바르바토스 단장의 체면을 살려주려 압박을 넣었을 뿐이야.”
“…….”
“그녀는 가능성 있는 기사지. 짐이 가지지 못한다면 부숴버리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대도 알다시피, 무언가를 베고 찌르는 능력과 상황을 분석하고 방향성 있는 결론을 끌어내는 능력은 다르다네.”
“저는 두 능력을 둘 다 가지지 못해-.”
“그만.”
그녀가 단호한 어조로 내 말을 끊었다.
“백금기사단의 서궁 수색 보고를 받았네. 지나가던 발렌 대공에게 다소의 도움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더군.”
이 은혜를 아는 놈들이.
그냥 모른 척하고 공을 독차지할 것이지.
“그런데 이번에 텐티아 경도 그대에게 몇 가지 조언을 들었다고 하네. 우연이 많은 세상이지만, 짐은 이게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제이릴리스의 목소리에 남아있던 졸음기가 싹 사라졌다.
아이고 망했다.
구슬프게 흘러나오던 바이올린 선율이 끊어졌다.
그녀가 물수건을 눈 위에 치우고 긴 의자에서 일어섰다.
용과 같은 금빛 눈이 특유의 열기와 함께 번뜩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짝 엎드렸다.
“살려만 주신다면-.”
“그대는 붉은 달무리 궁에 넣어놓기에는 아까운 인재로군.”
어?
“짐은 깨달았다. 친족을 살해하고 제위에 올랐으나 결국 짐 역시 친족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음을.”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진저리쳤다.
이때 무슨 일이 있었지?
전생에서는 고문 후유증으로 앓고 있었을 때라서 잘 기억이 안 난다.
곤란한데.
“그대에게 직책을 맡기고자 한다. 고문 자리에 임명하니, 다음 주부터 종종 불러 의견을 듣겠다.”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아직 전생과 달라진 건 많이 없었다.
모든 행정이 수기와 인마로 돌아가는 세상이다.
변화는 막을 수 없지만 느릿하다.
대영주들과의 내전이나 반역, 이계의 준동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엇이 그녀가 숙청 후 한 해도 지나기 전에 나를 등용하도록 했는가?
“폐하. 어째서 그리 결정하셨는지 이유를 물어도 되겠사옵니까?”
나를 더 가까이 두고 감시하려는 건가?
“짐이 짐의 이복 남매 다섯에게 자결을 허락했을 때를 기억할 거다. 짐의 술에 독을 탄 시녀를 그대가 잡았지.”
“예. 페하.”
“이후 처리 과정에서 여러 명단을 보았다. 대놓고 가담한 자, 깨끗한 척하며 뒤로 줄을 대던 자. 물증이 없고 모친 쪽이 대귀족이라서 당장은 살려 두어야만 하는 자도 있다.”
하지만 하고 운을 떼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대만은 깨끗하더구나.”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저는 그저-.”
“술에 젖어 있었노라 말하겠지. 상관없다. 이제야 말하는구나. 짐은, 짐의 혈육만은 짐을 죽이려 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분명 기뻐했느니라.”
“!”
나는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회귀 전과 얼굴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아 잠시 잊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고작 17살이었다.
믿던 봉신의 배신도, 수많은 전란도, 마경의 침식도 아직 겪지 않은 나이였다.
나는 한 대 맞은 기분으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예. 폐하. 이 발렌시아누스. 고문직을 주신 폐하의 은혜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출세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이왕 얻은 자리 최선을 다하겠다.
제이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을 게을리하면 목을 칠 것이다.”
저건 들숨 날숨 같은 말이었다.
귓등으로 흘려넘기다 문득 의아함을 느낀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감히 한 가지만 더 여쭙겠나이다.”
“허하노라.”
“고문이라 하면 저는 어떤 일을 맡게 되는 것입니까? 내무부에 배치될지 외무부에 배치될지 궁무부에 배치될지 정도는 알고 싶사옵니다.”
“그야 당연히 겸직이 아니겠느냐? 그대의 작위를 떠올려 보아라. 중임을 맡아 일하기에 모자람이 없도다.”
“예?”
이번에는 조금 다른 의미로 놀랄 차례였다.
고문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둘 중 하나다.
늙은이들을 예우 차원에서 앉혀놓고 비루먹은 닭처럼 꾸벅꾸벅 졸게 놔두거나, 외부 전문가를 부려 먹고 최종 결정권은 주지 않거나.
아마도 내가 하게 될 일은 후자에 가까워 보였다.
* * *
“그래도 안 다치시고 잘 끝나서 다행이에요. 저는 이번에야말로 대공 전하와 제가 함께 목이 잘릴 줄 알았습니다.”
루디가 잔뜩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죄송해요. 전하가 그런 곳에 가게 만들다니. 저는 전하의 시녀에 어울리지 않는 거 같아요.”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신경 쓰지 마. 그게 유물이었는지 누가 알았겠어? 네 말대로 잘 끝났잖아.”
그녀를 탓할 수는 없었다.
회귀한 나도 유물 회수는 반쯤 포기하고 있던 판이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야.”
나는 그녀의 죄책감을 끊어내려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도 훈련하고 왔더니 근육통으로 죽을 거 같다. 마사지 좀 해줄래?”
“네. 전하.”
눈물을 훔친 그녀가 방긋 웃으며 향유를 가지러 몸을 돌렸다.
그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나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아까 생각한 대로다.
아직 전생과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반란이니 내전이니 전쟁이니 마물의 침공이니 하는 건 아직 시작도 안 했다.
루디는 내게 있어 목숨 한 번은 걸 수 있을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지만, 객관적으로는 황궁에 널린 한미한 가문의 시녀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그녀가 죽지 않았다는 나비효과는 생각보다 컸다.
텐티아 경이 내 계획보다도 빨리 누명을 벗을 수 있게 되었고, 나 역시 전생에서보다 몇 년은 빨리 등용되었다.
시녀 하나의 생사 같은 작은 변화가 앞으로 일어날 거대한 사건들을 전생과 어떻게 달라지게 할지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신중하게 행동해도 변수가 터지고, 과감하게 행동해도 변수가 터진다면 차라리 과감한 게 나았다.
아직 제국은 건실하고, 표면상으로는 균열도 없다.
적은 위험을 무릅쓰고도 전생에서 반역 황자의 편에 섰던 많은 인재를 우리가 등용할 기회였다.
만약 그들이 그녀를 섬기기를 거부한다면 미리 싹을 뽑아버릴 수도 있었다.
고문의 직위까지 얻었으니 일이 더 쉬워지겠지.
일단 미래의 대마법사부터 만나러 갈까?
내 평판은 바닥이지만, 그렇기에 더 과감한 수를 둘 수 있을 거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루디 앞에서 웃옷을 벗으며 침대에 엎드렸다.
“몸이 더 좋아지신 거 같아요. 지난주까지만 해도 어깨 근육이 지금보다 얇으셨던 거 같은데.”
“제국 검술 훈련 최고다. 나중에 루디 너도 가르쳐 줄게.”
“네, 네?”
“농담 아니야.”
* * *
“폐하.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출장서를 냈습니다.”
“출장?”
시종장의 보고를 들은 제이릴리스는 눈썹을 움찔했다.
“어디로 출장을 간다는 건가?”
“홍등가 카지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출장이 아닌 듯한데, 압송하라 명을 내릴까요?”
이례적으로 3초 이상 고민한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지난번에 대공이 카지노에 갔다가 횡령범을 잡아 왔지?”
“예. 폐하.”
“그럼 이번에는 누구를 잡아 올지 기대해 보겠다.”
“혹시 예산을 탕진한다면 어찌하온단 말입니까?”
“그럼 자결을 명해야겠지. 아니, 그건 너무 명예롭군. 화형을 시켜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