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0화
(20)
“‘또’ 카지노에 가시는 겁니까?”
황실에 고용된 마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본래라면 내 그림자를 밟아도 무례라 여겨질 신분이지만, 황제의 비호 없는 황족은 끈 떨어진 연이나 다름없었다.
“그래. ‘또’ 카지노에 간다.”
하지만 나는 얼굴을 붉히지도 화를 내지도 않고 점잖게 답했다.
누가 들으면 죽음을 각오하고 마수와 싸우러 가는 용사인 줄 알았을 어조였다.
마부가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무례하다며 일갈하는 대신 품속에 손을 집어넣어 은화 한 닢을 꺼냈다.
“새벽 공기가 가시기 전에 도착하면 이걸 주겠다.”
“!”
마부가 이랴, 하고 소리치며 말들을 재촉했다.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빠른 태세 전환은 고용인들의 덕목이지.
나는 웃으며 흘리듯이 덧붙였다.
“카지노에서 따 온 돈이다.”
“!?”
마부가 혀 씹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손 안에서 은화를 굴리고 던졌다 받기를 반복하며 서늘하게 말했다.
“내가 카지노에 가든 빈민가에 가든 상아탑에 가든 네가 알 바가 아니다. 감히 황족의 행동을 네 잣대로 평가하려 드는가?”
“아니옵니다. 전하.”
마부가 다급하게 말을 바꾸었다.
“입을 함부로 놀린다면 혀 위에 은화가 올라가게 될 거다.”
제국에는 저승길 노잣돈으로 입 안에 은화를 물려주는 풍습이 있었다.
마부가 입을 굳게 다물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들을 재촉했다.
저런 말을 면전에서 듣기는 싫었고, 그렇다고 다른 황족들처럼 때리고 싶지는 없었다.
말로 하는 경고 정도면 적당한 대처가 아니었을까 싶다.
“다 왔습니다. 언제쯤 다시 오면 될까요?”
“멀리 갈 거 없다. 오늘 점심쯤에 다시 와서 두어 시간 기다려라. 오지 않는다면 더 기다리지 마라. 알아서 돌아가겠다.”
죽었거나 싸우고 있겠지.
물론 순순히 죽어 줄 생각은 없다.
은화 한 닢과 함께 마부를 떠나보낸 나는 아직 새벽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홍등가 거리를 바라보았다.
“놔, 놔!”
“내 돈! 10년간 모은 내 돈이!”
“어머니 약값입니다! 제발!”
밤새 거지가 된 사내와 여인들이 카지노 밖으로 끌려 나오고, 진한 화장을 한 고급 남창과 춘희들이 졸린 눈을 하고 퇴근했다.
나는 그 모든 광경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희망 카지노 계단으로 내려갔다.
울고 웃는 자들과 교차하고, 덩치 큰 사내로부터 종이 가면을 받아 들었다.
“적가면.”
손님 없는 넓은 홀에서 그녀가 청소를 지휘하고 있었다.
싸움이 났었는지 룰렛 기계 세 대가 망가져 있었다.
“오랜만이십니다. 전하.”
잠시 멈칫한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이 안에서는 신분 밝히는 게 금지라고 하지 않았나?”
“규칙에는 언제나 예외가 있는 법이지요.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녀가 자연스럽게 나를 방으로 안내했다.
눈치가 빠른 사람과 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웠다.
“사람을 찾고 싶다.”
“저희도 정보 조직과 연이 있지만, 전문가는 아닙니다. 소개를 원하신다면 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아니. 조직보다 너희가 더 잘 알 사람이다.”
적가면이 어깨를 움찔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가면 위로도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진 게 느껴졌다.
“누구를 찾으시는지 알 것 같군요.”
“요즘은 뭐라고 불리나? 전격 악몽? 돈귀신? 악마? 금의 마귀?”
“요즘은 금의 악몽이나 금의 마귀라고 불립니다. 슬슬 목줄을 채워 가고 있지만요.”
나는 순수하게 경탄했다.
내가 지금 찾아가는 상대를 제어하는 건, 성패를 떠나 그 시도조차 보통 일이 아니었다.
눈앞의 여자가 가진 수완에 새삼 감탄할 뿐이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이 거대한 업장을 운영하는군.”
“돈에는 강력한 힘이 있죠. 돈보다 강해야 돈을 쥐고 있을 수 있답니다.”
“그럼 금의 악몽은?”
“돈의 친구이자 저희의 천적이지요.”
적가면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황실에서 나서 주시는 겁니까?”
반쯤은. 아니, 9할쯤은 내 독단이지만.
“운이 좋으면 다시는 금의 악몽을 볼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
적가면이 반색했다.
“정말로 가능하십니까?”
기대와 적잖은 불신이 공존하는 목소리였다.
“까 봐야 알기는 하지. 도박처럼. 하지만 가져온 패에는 자신이 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답했고, 적가면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의 악몽은 오늘 ‘미래’ 카지노에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전하의 소개를 해놓겠습니다. 그쪽도 충분히 협력해줄 겁니다.”
“다소의 기물 파손이 예상된다면?”
적가면이 또다시 멈칫했다.
카지노의 기계는 대부분 조작이 가능한 정밀한 기계였기 때문에 그 값이 매우 비쌌다.
그리고 내 소개를 해준다는 건 내가 일으킨 사고에 대한 책임도 져준다는 뜻이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정보를 주겠다. 원하는 만큼 팔아서 메꿔.”
“예?”
“혹시 근처 업자들에게 약 떼다 빈민가에 파는 거 있으면 다 정리하고 꼬리 잘라라. 곧 눈이 돌아간 흑철기사단이 들이닥칠 거다. 바르바토스 경이 직접 움직이는 거니까 뿌려놓은 뇌물도 소용없어.”
“!”
적가면이 입을 쩍 벌렸다.
돈으로 잘만 바꾸면 금화가 몇 가방은 나올 정보다.
그 정도면 내가 ‘미래’ 카지노에서 뭔 짓을 해도 감당해 주겠지.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로군요. 감사합니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
“가 보도록. 빨리 정리해야 하는 게 한두 개가 아닐 테니.”
말이 떨어지자마자 적가면이 직원 구역으로 달려갔다.
나는 낄낄 웃으며 ‘희망’을 나서 ‘미래’로 향했다.
‘희망’이 여러 개 방에서 부자들이 재미있게 놀고 가는 카지노라면, ‘미래’는 넓은 홀에 많은 손님을 받는 카지노였다.
지금 시간은 오전 여덟 시 경.
이미 진작 해가 떴고, 야행성의 홍등가는 잠에 빠져든 뒤였다.
‘미래’라도 다르지는 않아서, 북적거리던 홀에는 몇 사람 남아있지 않았다.
“‘금의 악몽’과 만나고 싶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저기 있습니다. 제발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내가 들어가자마자 ‘미래’의 직원은 울상으로 애원했다.
그는 내가 검을 차고 온 걸 빤히 보았음에도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홀의 넓은 테이블에서 ‘미래’의 딜러와 커다란 남색 고깔모자를 쓰고 망토를 걸친 ‘금의 악몽’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
아직 내가 있는 자리에서는 ‘금의 악몽’의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았다.
딜러의 옷차림은 말쑥했고 얼굴은 핼쑥했다.
그 딜러의 뒤쪽 테이블에 모여 있는 딜러들도 똑같이 핼쑥했다.
“네 합이 35. 내 합은 얼마일까? 선언해줘.”
‘금의 악몽’이 무심한 목소리가 서늘하게 선고했다.
딜러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패를 한 장 한 장 뒤집었다.
“합이 36……. 플레이어의 승리입니다.”
딜러가 자해하는 듯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거 같았다.
‘금의 악몽’이 테이블 위에 쌓인 칩을 우르르 쓸어 모았다.
별다른 기쁨이 느껴지지는 않는 무심한 손동작이었다.
나를 보자마자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은 사내가 달려왔다.
“‘희망’에서 온다고 하신 분입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미래’ 카지노의 지배인 되는 사람입니다.”
나는 ‘악몽’의 뒤통수를 흘깃 보고 말했다.
“지금 카지노에서 보유하고 있는 금화가 얼마나 되나?”
지배인은 눈치 빠르게도 내가 무엇을 묻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악몽’이 모아놓은 칩을 다 합치면 저희 카지노에서 보유한 현금의 7할이 넘습니다. 그 정도의 금액을 모두 금화로 내줘야 할 상황이 생긴다면…… 끝장입니다. 해결만 해주신다면 금을 제 몸무게만큼 달아 드리겠습니다.”
“괜찮겠나?”
나는 지배인을 훑어보았다.
그는 상당히 넉넉한 풍채를 가진 장년의 남자였다.
몸무게 역시 적잖게 나갈 터였다.
“지금 ‘악몽’이 쓸어 담고 있는 칩 하나가 은화 세 개짜리입니다.”
그런 칩이 지금 가방 단위로 담기고 있었다.
“알겠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종이 가면을 벗으며 ‘금의 악몽’ 옆자리에 앉았다.
털썩, 소리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금의 악몽’은 남색 생머리를 길게 기른 젊은 여인이었다.
한쪽 눈동자는 머리카락 색과 같은 남색이고, 반대쪽 눈동자는 내 눈동자와 같은 황금색이었다.
색이 다른 양쪽 눈에도 공통점은 있었는데, 양쪽 모두 조금의 생기도 없이 동공이 풀려 있다는 점이었다.
언 듯 보면 시체로 착각할 정도였다.
당장 꺼져들 듯이 무기력한 눈빛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옷을 잘 차려입었다.
검은색 원피스에는 금장 장식이 달려 있었고, 품이 넓은 망토는 바깥쪽이 군청색, 안쪽이 고급스러운 포도주색이었다.
지팡이가 없다는 걸 빼면 전형적인 마법사의 복식이었다.
실제로도 천재 마법사였고.
“발렌시아누스, 였나?”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맞아. 세레라지에 누나.”
그녀가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일순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오랜 시간 비천한 자들에게 악몽이니 마귀니 하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 불리다가, 오랜만에 진짜 이름으로 불렸기 때문일 터였다.
그리고 그 이름이 화려하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일 터였다.
“우리 잠깐 따로 이야기 좀 할까?”
세레라지에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다음 문장을 내뱉었다.
“지팡이 없는 마법사가 부리는 행복의 주문에 관한 이야기인데.”
* * *
미래 카지노에도 VIP들을 위한 방이 있었다.
지배인은 그 방을 기꺼이 내주었고, 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올라가서, 단둘이 이야기하겠다.”
미래 카지노는 1층과 지하 1층이 카지노, 2층부터는 고급 숙박업소였다.
방음은 썩 별로였지만, 벌레 없는 이불과 솜을 두껍게 채운 매트릭스가 있다면 충분히 고급이라 불러줄 수 있었다.
최상층 6층의 방은 한 사람이 쓰기에는 과할 정도로 넓었는데, 그녀는 그 방에서 벌써 한 달째 묵는 중이었다.
“앉아.”
세레라지에가 건조하게 말했다.
나는 나뒹구는 포도주병과 위스키병을 조심스럽게 밀어내고, 낮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하는 소파에 앉았다.
“마실 거니?”
그녀가 새 술을 들고 오며 말했다. 증류로 만들어낸 술의 이슬을 넣어 도주를 높인 독주였다.
“이 아침부터?”
“너도 ‘이쪽’으로 온 줄 알았는데. 아니었니? 됐어. 그럼 나 혼자 마신다.”
세레라지에가 자기 술잔에 맑은 적갈색 액체를 넘치도록 따랐다.
꿀과 참나무 향이 물씬 피어올랐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한 번만 더 권해 줄 것이지.”
“진작 그렇게 나오지 그랬니?”
그녀가 ‘내 그럴 줄 알았잖니?’ 하며 흐릿하게 웃었다.
“잘 생각했구나. 공부하던, 검술을 익히던, 마법을 배우던 아무 소용도 없는 세상이잖니.”
술을 술술 마시며 그녀가 말했다.
“우리만 그렇지. 우리만.”
나는 불만을 잔뜩 담은 척 맞장구쳤다.
“그래. 우리만 그렇지. 기껏 황족으로 태어나 피로 재능을 물려받았는데. 한껏 피워보지도 못하고 죽게 생겼구나.”
그녀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황제 폐하께서 언제까지 우리를 경계하실까?”
“나라고 알겠니?”
“누나 마법사잖아? 교양 7과는 다 배웠을 거 아니야?”
교양 7과는 문법, 논리학, 수사학, 산술, 기하학, 음악, 그리고 점성술을 말한다.
“나는 상아탑 전격학파에 특례입학한 제자였단다. 교양 7과고 뭐고 다 건너뛰고 바로 연금술이랑 마법부터 배웠지.”
“그래도 점성술은 배우지 않았어?”
“물론 배우기야 배웠지. 해와 달, 별들의 움직임은 마나에도 영향을 많이 끼치니까.”
나는 그 정도가 아니잖아? 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이어진 침묵 끝에 세레라지에가 혀를 찼다.
“집요한 새끼. 그래. 점성술도 복수 전공했단다. 중간에 때려치워지기는 했지만. 어떻게 알았니?”
“지난 열 달간 홍등가의 악몽으로 군림하고 있잖아. 어떻게 하면 그걸 모르리라고 생각했어?”
나는 여기저기 쌓인 칩 가방을 가리켰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폐하께서 나를 가만히 놔두고 있으니까?”
“폐하께서는 누나가 선을 넘지만 않으면 뭔 짓을 하든지 가만히 놔둘걸? 이를테면…… 반역 같은 거?”
“그래. 그러시겠지. 태양이 달을 신경 쓸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데 누나.”
“또 뭐? 술 썩겠다. 안 마셔?”
그녀가 내 앞에 놓인 잔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잔을 빤히 쳐다보다가 단숨에 비웠다.
꿀과 참나무 향, 독주의 열기가 목 안에서 진득하게 퍼지는 걸 느끼며 말했다.
“그래도 마약은 선을 넘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