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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21화 (21/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1화

(21)

세레라지에의 파랗고 노란 금은요동이 흔들렸다.

평민들은 평생 일해도 못 모을 돈을 카드 게임 한 판에 따냈을 때도 무심하던 눈이었다.

나는 비웠던 잔을 다시 채우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마약은 선을 넘었다고.”

“마약이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죽은 듯이 단조롭던 그녀의 목소리에 파문이 일었다.

“요즘 홍등가에서 빈민가 쪽으로 마약이 많이 흐르고 있던데. 그거 누나가 만든 거 아니었어?”

나는 식사는 했어? 같은 어조로 물었다.

“아니다. 공방이 없으니 ‘직접’ 만들었다고 할 수 없으려나?”

“발렌시아누스.”

“여기서 남쪽으로 10분쯤 내려가다 보면 정원에 해마 조각상 있는 건물이 있지. 이 땅값 비싼 홍등가에 있기에는 너무 흔해 빠진 수준의 유흥업소잖아? 그런데 그 건물에는 지하실이 있고, 그 건물 주인은 젊었을 때 스승에게 파문당한 연금술사지.”

세레라지에가 술잔을 꼭 쥐었다.

찰랑이던 술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나올 듯 흔들렸다.

“네가 광학학파나 대지학파, 심상학파에서 마법을 배웠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본 거 같은데.”

“손재주 좋은 주인장이 고급 마약을 만들어서 이 거리의 다양한 사람들에게 파는 중이지. 카지노, 고급 식당, 고급 창관에도.”

“거기까지.”

“그런데 최근에 약이 너무 많이 나돌았어. 홍등가 전체가 벌금 철퇴를 맞았거든. 어떻게든 메꾸려고 상품과 고객을 더 찾았겠지? 서비스였던 마약을 상품으로 만들고, 눈길도 주지 않던 빈민가 쪽에도 손을 대기 시작한 거야.”

“…….”

“하지만 이미 벌 만큼 버는 주인장은 더 큰 위험을 무릅 쓰고 싶지 않았지. 되려 더는 약을 만들지 않겠다고 했을 거야.”

세레라지에가 입술을 깨물었다.

“용납하지 못했겠지? 이해해.”

촉망받던 천재 마법사가 하루아침에 지팡이를 빼앗기고 마법도 못 연습하게 되었으니 미치고 팔짝 뛰겠지.

“도박이랑 술은 금방 질리거든.”

“독심술인지 경험담인지 모르겠구나.”

당연히 경험담이다.

전부 해봐서 아는 거다.

나는 그나마 도박에서 잃으면서 쓴맛이라도 봤다.

그래서 딸 때의 단맛에 중독될 수 있었고.

소중한 사람의 죽음과 내 무력감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천재 전격술사이자 점성술사는 져 줄 수도 없었다.

“누나는 점성술까지 익혔으니 일반 마법사들과는 영혼의 격이 달라. 지고 싶어도 못 지겠지. 억지로 지려 하면 갑자기 테이블 다리가 부러져서 판이 엎어질걸?”

“내 기억이라도 읽었니? 마나의 흐름은 느껴지지 않았는데?”

세레라지에가 어깨를 떨었다.

“그래서 약에 빠져들었지? 솜씨 좋은 주인장이 만든, 부작용까지 없는 약. 하지만 그놈이 일을 그만두겠다고 해버렸지. 어떻게 했어?”

가만히 듣던 그녀가 피식, 하고 웃었다.

다시금 여유를 되찾은 입가에 가학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좋은 추억을 상기하는 듯했다.

“나 정도 되는 마법사라면 지팡이 없이도 사람 하나쯤은 족칠 수 있다는 걸 친히 알려줬지. 대량생산하는 요령도 같이.”

“대량생산을 하다 보니 질은 떨어지고.”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단다. 질을 유지하려면 가격이 올라가. 홍등가 조직들은 빈민가 쪽에 팔 건 품질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라고 알고 있어.”

“누나는 다시 약을 받을 수 있게 됐지?”

“다 아는구나. 따라다니기라도 했니?”

세레라지에가 아릿하게 웃으며 찬장을 가리켰다.

큼지막한 유리병 안에 새끼손톱만 한 얼음 조각 같은 게 가득 들어 있었다.

“시간을 보내려 도박을 하고. 무료함을 달래려 약을 하고. 그렇게 지난 1년을 살았겠지.”

남의 말이 아니었다.

나도 똑같은 삶을 회귀 전에 보냈다.

1년보다는 훨씬 길게.

“너. 말이 길어.”

여유를 되찾은 세레라지에가 내 말을 끊었다.

“그쯤 하자꾸나. 본넬 경의 가랑이를 걷어찬 망나니 동생아.”

“소문이 여기까지 퍼졌나?”

“궁금하잖니. 기사를 이기고도 어떻게 목이 안 떨어졌는지 말이야. 누구는 마법을 익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끌려가 갇히는 판인데.”

“누나는 살았잖아?”

그녀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게 사는 거니?”

“…….”

“너도 알잖니. 빵을 먹고 숨을 쉰다고 사는 게 아니란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치세에 위협이 될 만한 친족을 살려 두실 생각이 없으신 거 같은데, 내가 약 말고 뭘 할 수 있겠니? 어디서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있겠니?”

나는 숨을 가볍게 들이쉬고 말했다.

“충성.”

세레라지에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충성은 무슨 얼어 죽을 충성.”

“결국 어딘가 고용될 거라면, 제이릴리스가 그 고용주로 제일 낫지 않아?”

“헛소리.”

“마약을 유통하다 결려서 도망친 마법사, 황실이랑 교회에 수배 걸린 도망자 신세라 정체를 밝힐 수도 없지. 신분 없는 마법사라 고용도 불안정해.”

“아.”

“월급으로는 시약이랑 소모품값도 못 감당해, 그런 주제에 일은 대마법사 급으로 시키고. 늙고 음탕한 고용주는 자꾸 침대로 끌어들이려 하고, 질투 많은 고용주의 부인에게는 의심당하지.”

“그렇지.”

“그런 삶보다는 폐하 밑이 낫잖아? 누나는 계승 전쟁 때도 굳이 따지자면 제이릴리스 폐하 편이었고.”

“마법사 절망편이네. 묘하게 자세한데 어떻게 아는 거니?”

세레라지에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나가 그렇게 20년을 살거든.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어울리지 않는 대접을 받으면서.

그 뒤로 반역 황자 유스티아누스를 만나 그의 벼락이 되고, 끝내 황실 궁정 마법사와 싸우다 죽어.

그리고 그 마법사는 누나가 상아탑 시절에 사람 취급도 안 하던 애야.

그동안 벌어진 실력도 실력이지만, 지팡이와 시약의 차이도 너무 컸지.

일련의 말들이 혓바닥에까지 얹혔다가 사라졌다.

“약 끊고 손 떼고 돌아와.”

“가면 뭐가 기다리고 있니.”

“술과 재활.”

“그게 어떻게 재활이니?”

“그게 재활이지.”

“안 오겠다면 어쩔 거니? 나는 이미 여기서 왕처럼 살고 있는데.”

세레라지에가 도발하듯 말했다.

곳곳에 쌓인 칩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 거 같은데?”

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받아쳤다.

“끌고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구나.”

“비장의 한 수를 미리 밝힐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전격 마법사를 상대로 검이라니. 아무리 이 거리라도 상성이 너무 안 좋아.”

나는 허리춤에 찬 검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책상 위로 올렸다.

“알기는 아는구나.”

그녀 역시 두 손을 책상 위로 올렸다.

두 손의 손가락들 사이에서 파란 불꽃이 튀었다.

“어?”

나는 당혹감에 목소리가 새 나왔다.

그녀 역시 천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나이에 전격 마법을 무영창으로 쓸 수 있었다는 건 몰랐다.

이제 고작 스물일 텐테?

“발렌시아누스.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충성만은 못 하겠다.”

파란 불꽃이 번뜩였다.

나는 한 손을 들며 말했다.

“한마디만 더 들어봐.”

회귀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어린 목소리로.

“그래. 하지만 비명이 먼저란다.”

그러나 세레라지에는 색이 다른 두 눈동자를 빛내며 섬뜩하게 웃었다.

* * *

“늦으시는군.”

카지노 ‘미래’의 지배인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이미 쓰러졌을 수도 있겠지. 그 ‘악몽’이잖은가?”

카지노 ‘하늘’의 지배인이 중얼거렸다.

“뭐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나? 홍등가에서 안타까운 사고가 나는 게 하루 이틀 일인가?”

카지노 ‘뱀’의 지배인이 능글맞게 말했다. ‘미래’의 지배인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본래였다면 쳐다보지도 못하셨을 분이네.”

“자네가 불러 놓고 뭘 그리 딱딱하게 구나?”

“…….”

‘뱀’의 지배인이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친족들을 이렇게 방치하고 억압하는 황제 폐하는 처음이네. 그분들이 처음 이 거리에 나타날 때만 해도 얼마나 놀랐는지.”

“그런데 이제는 어느 가게에 가든지 한두 분쯤 보는 게 그리 힘들지도 않지.”

“결국 다 똑같은 사람이라는 거지.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 하고, 그러지 못하면 파멸하는, 그런 보통 사람.”

“필요하다면 묻어버릴 수도 있는?”

‘미래’의 지배인이 고개를 들었다.

‘뱀’의 지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결심이 섰나?”

“약 제조법은 진작에 알아 냈지.”

“대량생산하는 요령도.”

“그년에게 묶인 칩이 현금의 7할이야.”

‘미래’의 지배인을 따라 이 자리에 모인 카지노의 중역들이 덧붙였다.

“자네도 심란하겠군. 나는 5할일세.”

“나는 6할.”

“나는 이미 파산 신청을 해야 할 판이야.”

그들이 눈을 마주쳤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도 넘게 이 홍등가에서 군림하며, 주먹들 끼고 장사하는 데에 능숙해진 이들이었다.

“목줄을 잡혀 채로 말라 죽기를 기다릴 수는 없지.”

‘미래’의 지배인이 단조롭게 읊조렸다.

그는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사내에게 말했다.

“애들 다 모아.”

다른 지배인들과 사장들이 한 마디씩 덧붙였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한번 부딪혀 보자고.”

“잘 생각했네. 우리 애들도 이미 불렀어.”

“지금 부르겠네. 대기 중이야.”

“‘희망’은 안 온다고 했나?”

“마담 라베시아 뒤로 황실에 찍혔다는 이야기가 있어. 한동안 자중하겠다더군.”

“흥. ‘금의 악몽’이 자기네 업장에 들이닥쳐 봐야 정신을 차리지. 나 혼자 살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닌데.”

“나중에 술이라도 한잔 사달라고 해야겠군.”

단검 날을 확인한 ‘미래’의 지배인이 결연하게 내뱉었다.

“일이 잘 마무리되면 내가 사지.”

뺨에 흉터 하나씩은 단 덩치 큰 사내 서른 명이 강철 곤봉과 단검을 쥐고 모여들었다.

“저희 오늘 임시 휴업합니다! 나가주십쇼!”

“잠깐! 내가 이기는 중이었는데 이러는 게 어디 있나?”

“…….”

“지금! 지금 나갈 생각이었습니다!”

아침부터 모여든, 혹은 아침까지 남아있던 폐인 손님들은 분위기를 읽고 도망치듯 ‘미래’를 떠났다.

그들은 ‘미래’ 앞문을 연 순간 새까맣게 몰려온 기도들을 보아야 했다.

홍등가의 거물들이 한계까지 동원한 기도들은 총 3백 명도 넘었다.

넓은 ‘미래’ 카지노의 홀이 미어터질 지경이라 몇몇은 밖에서 대기해야 할 정도였다.

대부분 이름 있는 용병단 출신인 그들은 실력도 충성도도 빈민 패거리들과 격이 달랐다.

마나를 느끼고 사용할 수 있는 소드 유저도 여럿이었다.

“믿는다. 잘해.”

‘미래’의 지배인은 덩치 큰 행동대장에게 말했다.

그는 네 개의 삼각뿔이 달린 철퇴를 어깨에 얹으며 거만하게 답했다.

“날고 기어 봐야 이제 스물도 안 된 어린것들이지요.”

또 다른 지배인이 데려온 행동대장은 날렵한 인상에 회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두 자루 소검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귀하게 자라신 분들이 죽고 죽이는 이 세상을 아시겠습니까.”

단창을 든 행동대장이 휘파람을 불었다.

“마법이니 오러니 다 필요 없습니다. 여럿이서 덤벼서 배 쑤시면 당황해서 어어어? 하다가 훅 가는 거지요.”

객실로 올라가는 계단은 가운데와 좌우, 비상계단까지 총 네 개였다.

기도들은 우선 손님들을 방에 몰아넣었다.

“어어?”

“무슨 일 있습니까?”

“위험하니까 들어가서 나오지 마십쇼!”

이후 그들은 네 통로를 장악하고 떴다 하면 업장을 빈털터리로 만드는 ‘금의 악몽’을 향해 6층으로 향했다.

오른쪽 계단을 맡게 된 회색 제복의 행동대장은 이마부터 뺨까지 내려온 흉터를 만지작거렸다.

고민 끝에 그는 입을 열었다.

“너.”

“네. 형님.”

“세 번째 골목 막고 있는 애들도 우리 애들이거든. 그쪽으로 나가서 ‘희망’에 가라. 가서 지하수로로 도망치는 비밀 통로 열어두라고 해. 내가 말했다고 하면 적가면 누님도 듣는 척은 해줄 거야.”

“네?”

기도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행동대장을 바라보았다.

“도망칠 구멍 하나는 남겨둬야 하지 않겠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악몽’인데.”

“형님. 혹시 긴장되십니까?”

한 기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행동대장은 기사 후보생 출신이었고, 지금껏 그 날렵한 인상에 어울리는 과감한 행보만을 보여 주었다.

“지금 악몽이랑 같이 있는 게 누구인지 모르지?”

“네.”

“한 달쯤 전에 ‘희망’이 탈탈 털렸잖아. 그때 혼자서 거기 기도들을 다 때려눕혔지. 우리에게 말은 안 해 주셨지만, 분명히 황족일 거고.”

기도들의 눈에 망설임이 어리기 시작했다.

“우리 지금까지 꽤 안전하게 싸웠다. 서로 숫자도 비슷했고, 무기도 기껏해야 단검이었지. 오크 같은 이종족도 아니고 말 잘 통하는 사람끼리만 싸웠어.”

행동대장은 잠시 계단에 멈춰 서 부하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서늘해진 분위기를 더더욱 끌어내리며 말했다.

“다른 애들은 그분들이 어리다고 무시하는데, 너희는 그러지 마라. 그분들은 우리를 사람이 아니라 벌레 때려잡듯이 공격할 거야.”

저 위에서 불꽃 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처절한 비명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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