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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22화 (22/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2화

(22)

전령의 급박한 외침이 천장 높은 알현실에 울렸다.

“베른하르트 총독이 전서를 보냈습니다. 자이벤슬론 백작령과의 경계에서 오크와 고블린으로 구성된 중규모 그린스킨 군세가 목격되었답니다. 자체적으로 진압 중이나, 고위 마법사를 지원받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합니다.”

보고서를 읽어 내린 제이릴리스는 신속하게 지원을 결정했다.

“총독에게 5서클 궁정마도사를 보내고, 버민스르스 백작에게도 짐의 뜻을 전하라. 둘의 협력을 기대하겠노라고.”

다음으로 들어온 노학자가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말했다.

“폐하께서 황립 아카데미에 의뢰하신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낮에 태양 빛을 모았다가 야간에 방사하는 마법 등잔의 효율이 약 82% 개선되었습니다.”

제이릴리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수고했다. 대량 생산에 필요한 계획안과 예산안을 편성해 보고하라. 하루빨리 수도 전역에 집광식 가로등을 설치할 수 있게 하도록 하자꾸나.”

다음 전령이 날 듯이 달려 들어왔다.

“프로이하이트 후작의 봉토 외곽에서 마경이 생성되었다는 보고가…….”

“짐의 기사들을 지원해주겠다고 답하라. 단, 대규모 징병은 불허한다. 얕은 수작을 부리는군. 마경을 핑계 삼아 군을 모으려 하는가?”

“도망친 황족 스물넷 중 스물셋을 척살했다 하옵니다.”

“짐이 그 공을 크게 치하하노라!”

전령과 행정관들이 앞다투어 집무실로 쏟아졌고, 제이릴리스는 그 모든 서류와 보고를 성실하게 처리했다.

황제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보다 바쁜 직업이었고, 제이릴리스는 폭군이지만 암군은 아니었다.

초인적인 감각은 검을 쥐고 마나를 부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서류에 쓰인 무미건조한 문자열과 숫자열 뒤에 감춰진 진상과 진의를 파악하는 데에도 발휘되었다.

그녀는 때로는 전례 없는 과감함으로 문제를 깨부수고, 때로는 행정 관료들의 고루함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며 국정을 운영해 나갔다.

막 또 서류 한 장에 서명한 제이릴리스의 앞에 인영이 드리워졌다.

“궁무대신 왔는가?”

발걸음만 듣고도 상대를 알아차린 황제는 고개를 들었다.

색색의 색유리 모자이크를 뒤로 하고 미소 짓는 그녀는, 장인이 만든 조각같이 아름다웠다.

씨익, 눈처럼 하얀 이빨들이 보기 좋게 드러났다.

그녀나 그런 황제의 미소도 이제 중년을 넘어 노년에 가까워진 노귀족의 잔소리를 막지는 못했다.

궁무대신. ‘대신’이라는 직책이 말하듯 궁무부라는 한 부처의 장관이다.

궁무부는 귀족 간의 연공 서열이나 상속 관련 분쟁, 황실의 의식이나 예식, 그리고 황실 구성원들에 대한 일을 총괄한다.

“폐하. 이번 달만 해도 폐하의 혈족이 서른네 명이나 사라졌습니다. 붉은 달무리 궁이 텅텅 비게 생겼습니다.”

제이릴리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늙은이의 장점이자 단점은 젊은이들보다 죽음을 덜 두려워한다는 것이었다.

“잘됐구나. 미래의 반역자가 서른넷이나 줄었으니 말이야.”

“폐하!”

“모른다는 말은 하지 마라. 그들은 죽어야 하는 이들이다.”

그녀는 케이크를 베어 문 듯 해맑게 미소 지으며 형제자매들의 목숨을 논했다.

“아무리 밉다고 하셔도 폐하의 이복남매들입니다. 그리 함부로 죽이시면 황실의 권위 역시 같이 실추됨을 어찌 모르는 듯 행동하십니까?”

“그래서 대외적으로는 모두 명예로운 자결로 처리했잖느냐?”

“1년에 걸쳐 매달 열 명에서 서른 명씩 자결하는 자들이 천하에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

“이제 홍등가에서 진 빚에 쫓겨 황실 물건을 빼돌리는 황족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도둑놈들이구나.”

“그게 아니옵니다! 폐하께서는 제국의 황제인 동시에 솔레타라스 가문의 가주로서 가문 구성원들의 품위를……!”

“그래서다.”

어린 황제는 오랫동안 선황을 모셔 온 늙은 대신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궁무대신은 한여름 날씨에도 방 안 공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그대도 알고 있을 텐데. 그대도 관여했으니 말이야. 선황께서 왜 그리도 많은 씨를 뿌려 우리를 낳았는지.”

“!”

“짐이 황제다. 선황의 목적은 이미 이뤄졌어. 그리고 짐은 그걸 누구도 되풀이하게 놔둘 생각이 없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다 죽이는 거야.”

“그럼 발렌시아누스 대공도 언젠가 죽이실 겁니까?”

“…….”

잠시 침묵이 어렸다.

제이릴리스는 새어 나오려 꿈틀거리는 살기를 조심스레 갈무리했다.

그녀는 인종으로서의 황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괜히 함부로 죽여댄다면 1년 만에 끝날 일을 10년 동안 하게 될 수도 있었다.

서늘해졌던 방 안 공기가 여름에 알맞은 날씨로 돌아갔다.

“역심을 품는다면 당연히 베어야겠지. 하지만 그는…… 다르다.”

“어째서이십니까?”

“적어도 겉보기에는, 짐에게 충성을 바치려 하는 자가 아니더냐? 그런 자에게 능력과 충심을 입증할 기회를 주는 것도 군주의 소양이다. 이는 신뢰가 아닌 시험일지언저.”

“그럼 그가 황족을 천거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가 믿는 자는 믿으시겠습니까?”

“…….”

“폐하. 대답해 주십시오.”

제이릴리스는 제 유일한 동복 남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를 믿을 수 있는가?

그가 믿는 자를 믿을 수 있는가?

답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짐은 그가 다른 황족을 천거하지 않을 걸 안다. 그는 짐의 혈육이니, 짐이 다른 혈육들에게 냉혹해질 수밖에 없는 걸 이해할 것이다.”

* * *

‘미래의 대마법사다. 꼭 데려가서 천거하고 싶어.’

발렌시아누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앉은 자세 그대로 책상을 밀어 찼다.

책상이 밀려나는 동시에 몸이 뒤로 기울었다.

“윽!”

세레라지에의 허벅지에 책상 가장자리가 거세게 부딪혔다.

순간 그녀의 몸이 흔들리며 겨눈 손끝이 위로 올라갔다.

파지지직!

섬뜩한 소리를 내며 뻗어 나온 전류가 발렌시아누스의 머리 위를 후려쳤다.

나무가 그을리고 돌이 갈라지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좀! 들어보라니까!”

바닥에 쓰러진 그는 몸을 돌리며 일어나는 동시에 뒷발로 다시 책상을 밀어 찼다.

“또 당할 거 같아?”

세레라지에가 양손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펑!

소리와 함께 요란한 불꽃이 튀고 책상이 반으로 갈라져 날아갔다.

그 순간 발렌시아누스는 자세를 바로잡고 검을 뽑아 들었다.

“꼭 이래야겠어? 내가 죽이겠다는 것도 아니고 살려 준다고 했잖아?”

“나는 언제든 나를 버릴 수 있는 군주에게 충성할 마음은 없어.”

“안 버려. 누나가 먼저 폐하를 버리지 않는 한.”

“어떻게 장담할 수 있니?”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야 직접 봤으니까.’

폭군은 사사로운 정에 휘둘릴 때가 많다.

제이릴리스 역시 배신자에게는 가혹하지만, 그만큼 상대가 먼저 배신하지 않는 한 손해를 보더라도 지켜주는 경향이 있었다.

‘고치라고 하고 싶을 정도였지.’

“대답. 못 하는구나?”

세레라지에는 발렌시아누스의 침묵을 부정으로 받아들였다.

‘혈육의 정이 깊기도 하지. 어찌어찌 눈에 들었구나. 나를 꾀어내거나 죽일 생각이겠지. 순순히 넘어가 줄 거 같아?’

그녀의 양 손아귀에서 전류의 푸른 빛이 번뜩이고 망토가 부풀어 올랐다.

발렌시아누스는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어떻게 제압해야 하지? 아니. 버틸 수는 있을까? 무영창 전격 마법사라니. 적으로 만나면 최악인데.’

전류는 전투마법사에게 가장 선호되는 속성이었다.

어떤 무기나 방어구도 뚫고 들어가 상대의 몸에 직접 피해를 줄 수 있었다.

막거나 흘러내려면 같은 속성으로 상쇄하거나 마나 블레이드를 써야 했다.

‘젠장!’

발렌시아누스는 심장에서 마나를 있는 대로 끌어내 검으로 인도했다.

팔 근육을 한 올 한 올 감싼 마나가 손가락 끝까지 나아갔다.

손톱 앞에서 잠시 걸리는 감각이 있었지만, 그는 추가적인 망설임 없이 마나를 방출했다.

파악! 손톱이 들리고 핏방울이 튀는 동시에 막혀 있던 마나가 뿜어져 나갔다.

근육을 감싼 마나가 자연스럽게 검까지 뻗어나가자, 그는 마치 손과 검이 하나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소드 유저였던 몸이 소드 엑스퍼트 초입에 드는 순간이었다.

그 증거로 검에 미약한 백색광이 맴돌았다.

본래라면 큰 축하를 받아야 할 일이나, 발렌시아누스로서는 울고 싶은 일이었다.

‘아직 성숙하지 않은 몸이다. 괜히 무리했다가는 또 내상을 입을 텐데!’

그는 오늘을 넘겨야 내일도 있다는 오래된 격언으로 속을 달래고, 눈앞의 세레라지에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세레라지에가 잔혹하게 웃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즐거웠다. 동생아.”

푸른 전류가 뿜어져 나오는 순간 발렌시아누스는 검을 정면으로 들어 올렸다.

희미하다고는 해도 마나 블레이드를 두른 검.

쇄도하던 전격은 검에 막혔다.

그러나 막대한 충격에 그는 세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아직 이 공격을 정면에서 받아내기에는 약하는 걸 겸허하게 인정했다.

그러나 영혼에 깊게 배인 기술은 열일곱 소년의 몸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는 마나 블레이드를 두른 검을 한 바퀴 크게 돌리며 아래쪽으로 털었다.

파지직! 검에 흐르던 전격이 융단 깔린 바닥에 떨어졌다.

연기가 나고 불꽃이 요란하게 튀었다.

“하아, 하아.”

“너……!”

세레라지에는 전격을 흘려낸 발렌시아누스를 보고 입을 쩍 벌렸다.

그 검에 둘러진 건 분명히 마나 블레이드였다.

열일곱에 소드 엑스퍼트 초입이라.

황족이 예비 반역자 취급당하는 이 시대가 아니었다면 엄청난 찬사와 대접을 받았을 경지였다.

그건 그녀 역시 같았다.

나이 스물에 무영창으로 전기 마법을 쓸 수 있던 마법사들은 대부분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녀 역시 본래 그렇게 될 운명이었다.

“내 운명을 빼앗아간 황제에게는 충성 못 해!”

그녀의 손에서 다시 푸른 불꽃이 튀었다.

발렌시아누스는 바닥을 박차며 돌진했다.

파지지직! 검을 때린 전격이 옆으로 흘러나갔다.

“그 운명을 되찾아줄 수 있는 것도 황제 폐하뿐인데.”

그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며 눕힌 검을 내질렀다.

한 대 깔끔하게 쳐서 쓰러트릴 생각이었다.

세레라지에는 분명 천재였지만, 환경은 발렌시아누스의 편이었다.

엄폐물이나 전위가 없는 마법사는 기사를 이길 수 없었다.

카드득, 검에 무언가 긁히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도 그렇게 생각했다.

“윽!”

세레라지에가 이를 악물며 손을 휘둘렀다.

석조 기둥에서 돌로 된 사슬이 내려와 발렌시아누스의 팔과 몸통을 휘감았다.

늘씬한 소년의 몸이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멈춰 섰다.

다음 순간 세레라지에는 무리하게 마나를 끌어모은 대가를 치렀다.

남색 눈과 금색 눈 모두에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핏발이 솟았고, 그녀는 몸 안쪽이 찢어지는 격통에 기침을 토했다.

그녀는 거친 숨을 달래며 손끝을 파르르 떨었다.

발렌시아누스는 팔다리에 휘감긴 돌사슬을 절그럭거리며 상황을 분석했다.

‘대지 마법이다. 숙련되면 바위와 금속도 진흙처럼 주물러 형태를 바꿀 수 있지. 심지어 무영창. 저 나이에 두 가지 속성을 자유롭게 다룬다고?’

그는 헛웃음을 흘렸다.

반드시 데려가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었다.

그리고 방금 이 공격에 당한 덕에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세레라지에도 이제 한계다. 무영창 이전에 지팡이랑 시약 없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놀라운 거야.’

지팡이 없는 마법사는 검 없는 검사와 같았다.

검 없이 검술을 펼칠 수 없듯이, 지팡이 없이는 마법을 부릴 수 없었다.

손날로 나무를 벤 거나 다름없었다.

기적 같은 일이지만 비효율적이고 리스크가 컸다.

“예리하게 찌르는 불꽃.”

그는 특유의 제어력을 통해 검에 두른 마나를 그대로 마법의 연료로 밀어 넣었다.

본래 심장에서 흘러나가야 할 마나가 검에서 흘러나갔다.

그걸 또 알아본 세레라지에는 경악과 탄성이 공존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친.”

“이런 건 처음 봐?”

“마나 제어만 한 10년 수련했니?”

“40년 수련했지.”

“뭐? 너 이제 17살이잖아?”

“그 정도 밀도라는 거지.”

화르륵, 쏘아져 나간 불꽃은 세레라지에가 아닌 발렌시아누스의 몸을 묶은 돌사슬의 끝을 쳤다.

검을 휘둘러 헐거워진 사슬을 자르고 부순 발렌시아누스는 세레라지에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그러나 천재 마법사는 되려 한 걸음 걸어 나왔고, 그는 다급히 검을 늘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나를 죽일 생각은 없나 보구나?”

탁, 땅을 박차며 안겨 오듯 팔을 벌린 그녀의 손에 푸른 전류가 번뜩였다.

발렌시아누스는 검을 던져버리고 양손을 뻗어 그녀의 양 손목을 단단히 쥐었다.

쿵!

고목이 쓰러지듯 둘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발렌시아누스는 세레라지에의 손을 밀어내려 힘을 썼고, 세레라지에는 발렌시아누스의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닿게 하려 손목을 비틀었다.

푸르게 달아오른 손가락이 이마에 닿기 직전, 발렌시아누스는 절박한 목소리로 외쳤다.

“제발 내 말 좀 들어! 이제 곧 카지노 새끼들이 와서 누나 죽이려고 할 거라고!”

방금까지 그리도 능글맞았던 사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목소리였다.

“뭐?”

“나는 누나를 살려 주려고 온 거라고!”

세레라지에의 손목에 힘이 빠졌다.

쿵. 쿵. 쿵.

노크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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