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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23화 (23/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3화

(23)

“들어줄게. 말해줘.”

세레라지에는 양손에 모은 전격을 누그러트리며 말했다.

묘하게 부드러워진 어조가 어색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녀를 몸 위에서 떼어내며 입을 열었다.

“누나 돈 많이 땄지? 환전은 거의 안 했고?”

“그래. 이 동네에서는 현금보다도 칩이 편할 때가 많으니까.”

“그것 때문에 카지노에 투자한 거물들이 불안해해.”

“걔들이 왜?”

“누나가 하루아침에 다 환전해달라고 하면 걔들도 같이 망하는 거거든.”

세레라지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무시무시한 거액을 손에 넣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문득 그녀는 머릿속을 감돌던 달콤하고 뿌연 기운이 흩어지는 걸 느꼈다.

안 그래도 슬슬 약 기운이 다할 때가 됐다.

거기에 더해 마나까지 끌어올리자 더더욱 빠르게 이성이 깨어났다.

“그래, 그렇구나.”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자신이 긁어모은 칩들을 바라보았다.

열어보지도 않고 먼지가 쌓인 가방이 거실에만 수십 개였다.

안쪽 방에 쌓아 둔 건 셀 수도 없었다.

온 홍등가의 칩을 다 모아놨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걔들이 누나를 죽이려고 온 거야.”

그녀의 머릿속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탁월한 이성이 차분하게 현상을 분석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쿵. 쿵. 쿵.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여는 순간 곤봉과 단창이 찔러 오리라.

그걸 알고 있는 발렌시아누스와 세레라지에는 미간을 찌푸렸다.

세레라지에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크게 말했다.

“무슨 일인가?”

“호텔 안에서 패싸움이 났습니다. 안전을 위해 손님들은 한곳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카지노에서 패싸움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으니, 썩 훌륭한 핑계였다.

그러나 이미 의심을 시작한 마법사를 속일 수는 없었다.

“나는 내 몸을 지킬 수 있고, 이 방에는 내 돈이 있으니 어디도 갈 수 없다. 너희들이 정말 나를 지켜주고 싶다면 어서 패싸움을 진압해.”

새침하게 쏘아붙인 세레라지에는 발렌시아누스를 바라보았다.

다시 전류를 모으며, 천재 마법사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죽이려고 왔다고? 오라고 해. 한두 번 보내온 줄 알아? 그게 할 말이었으면 들을 필요도 없었네.”

세레라지에는 진심으로 코웃음 쳤다.

그녀는 황족이었고, 일곱 살에 상아탑에 들어간 천재 마법사였다.

아무리 홍등가 기도들이 어지간한 용병을 가볍게 제압하는 실력자들이라고 해도, 마법 앞에서는 불길 앞의 벌레에 불과했다.

“적어도 일곱 개 이상의 카지노 지배인들이 연합했어. 동원한 기도들이 백 명도 넘을 거야.”

“고작 백 명? 그래 봐야 내 마법 앞에서는…….”

“지팡이도 없고 시약도 없잖아. 정신 차려. 지금 눈에 핏발 솟았어.”

“……!”

“약에도 오랫동안 취해 있었고. 곧 후유증이 올 거야.”

세레라지에는 다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럴 줄 알았던 발렌시아누스는 단정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수도에서 황족이 함부로 마법을 쓰거나 검 뽑으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야. 누나도 알잖아. 폐하께서는 우리를 자결시킬 핑계를 못 찾아서 안달이라고. 지면 죽고, 이겨 봐야 쫓기는 신세야.”

발렌시아누스는 마법사의 얼굴에 음영이 걷히는 걸 보았다.

양손에 맺힌 푸른 전류가 사그라든 덕이었다.

그럼 어쩌라고, 라고 말할 듯한 그녀에게, 그는 못을 박듯이 단호하게 내뱉었다.

“지팡이 없이는 위력도 위력이지만 제어도 힘들잖아. 누나가 잘못하면 거리 전체를 불태울 수도 있어. 그럼 뭐, 아카데미 중퇴의 삼류 마법사를 자청하며 제국을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겠지. 삼류 마법사들을 백안시하는 교회의 눈을 피해 가면서.”

“너.”

“박봉과 격무, 늙고 음탕한 고용주와 의심 많은 부인…….”

“했던 이야기를 또 할 필요는 없어.”

색이 다른 두 눈에 완전히 빛이 돌아왔다.

발렌시아누스는 내심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감정을 끌어 올리는 건 선택을 강요하는 첫 번째 요령이었다.

“그래서 이제 어쩌라는 거니? 적당히 도망이나 치라는 거니?”

“아니. 확실히 도망쳐야지. 폐하가 드리워주실 그늘로.”

“다른 곳은 없는 거니?”

“그런 곳이 있으면 내가 먼저 알고 싶다.”

쾅! 쾅! 쾅!

이제 노크도 아니었다. 단단한 나무문이 부서질 듯 흔들리고 경첩과 걸쇠가 삐걱이며 비명을 질렀다.

열어, 부셔, 같은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때 세레라지에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들었다.

“알았어. 뭘 어떻게 하면 되니?”

“일단 누나가 딴 칩이 총 얼마인지 확실히 계산해놔. 비싼 칩은 한 가방 정도 챙겨놔도 좋겠네. 그걸 토대로 칙령을 받아낼 생각이야.”

“칙령?”

“누나가 받아야 할 돈을 폐하께서 대신 받아주시고, 누나는 그 돈을 절반 정도 바치는 걸로 충성을 간증한다.”

“그리고 너는 인재를 천거한 상을 받고?”

“당연하지.”

세레라지에가 허탈하게 웃더니 노래하듯이 말했다.

“나 새장에 갇힌 새 신세가 되었네.”

발렌시아누스는 돌림노래처럼 따라 읊조렸다.

“허나 그 안에서도 노래할 수는 있을 테니.”

그는 세레라지에를 새장에서 빼 줄 수는 없었지만, 그 새장을 넓혀 주고 꾸며 줄 수는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세레라지에의 눈동자가 등잔처럼 커졌다.

그녀가 어릴 적에 어머니가 불러준 노래의 한 구절.

그가 알 리가 없는 말이었다.

‘그래. 황제 아래서도 마법을 부릴 수는 있겠지.’

세레라지에는 마음을 다잡으며 칩 가방을 챙겼다.

발렌시아누스는 속으로 웃었다.

방금 노래는 회귀 전의 그녀와 잠시 어울렸을 때, 만취한 그녀에게 한두 번 들어보았다.

더는 흔들리지 않는 푸른 눈과 금빛 눈을 보며, 그는 눈앞의 문제로 신경을 돌렸다.

“열어!”

“셋 하면 친다!”

슬슬 꺾인 경첩.

‘원래라면 마담 라베시아 사건 이후 홍등가 세력이 확 작아졌어야 해. 흥등가의 지배자가 외국으로 튄 건 문제였지만, 이런 곳은 세력이 작으면 작을수록 좋지.’

계산을 마친 발렌시아누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디 하나가 죽고 산 걸로도 역사가 바뀌었어. 아무리 대우가 개차반이라도, 대낮에 황족을 때려죽이려 하는 놈들이 수도에서 돌아다니게 놔둘 수는 없지. 이참에 흥등가 세력을 전생하고 비슷한 수준으로 깎아 놓자. 그렇게 해야 변수도 줄어들 거야.’

한 손에 검, 한 손에 불꽃을 피워 올리면서.

* * *

“형님. 문이 안 부서집니다.”

“그래도 저희가 호텔이라고 철판까지 써서 꽤 튼튼하게 만들었습니다.”

“알았다. 비켜.”

‘미래’의 행동대장은 몸속에서 마나를 움직였다.

혈관을 타고 내달린 마나가 그의 근섬유 하나하나를 둘러쌌다.

“정 나올 생각이 없으시다면야.”

그는 비릿하게 웃었다.

숫자 앞에 장사 없었고, 황제에게 적대시되는 황족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금의 악몽’의 망토 안쪽 굴곡진 몸매를 떠올렸다.

그 무심한 이색의 눈동자가 일그러지는 상상만 해도 아랫도리에서 저릿한 기운이 올라왔다.

쾅!

행동대장이 문짝을 걷어차자 문고리가 부서졌다.

형편없이 찌그러진 문이 경첩에서 떨어져 나갔다.

“우리가 들어가 드리지.”

행동대장은 그렇게 말하며 철퇴를 들어 올렸다.

자신만만하게 걸음을 옮기려 한 그의 몸이 일순 굳었다.

“이제 막 나갈 생각이었는데. 천것이라 예의가 없구나. 귀부인이 몸을 치장하는 시간도 기다려주지 못하다니.”

종이 가면을 쓴 백발의 사내가 현관에 서 있었다.

왼손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덩이를 들고서.

“마법?”

행동대장은 ‘희망’에서 전해진 이야기를 어렴풋이 기억했다.

-높은 확률로 황족일 사내가 불을 질러 희망을 죄다 불태웠다.

-사내는 마법을 익히는 것을 허락받았다고 추정된다.

“감사하거라. 네놈의 천박한 본성을 이 열기로 정화해 주마.”

성난 불길이 쏘아져 나왔다.

행동대장은 개구리처럼 뛰어오르며 몸을 뒤로 날렸다.

“피해라!”

“네! 네?”

“뭘 피하라는? 으아아악!”

방문 앞에 바싹 붙어있던 기도 대여섯 명이 불길에 휩싸였다.

폭발처럼 퍼져나간 열풍에 맞고 뒤로 나자빠지는 기도도 열 명이 넘었다.

“뜨거워!”

“끄아아악!”

정통으로 얻어맞은 여섯 명이 불타는 몸으로 바닥을 굴렀다.

“안 꺼져! 안 꺼진다고!”

“누가 나 좀 도와줘!”

친분이 깊고 의리가 있는 몇몇이 조심스럽게 제 겉옷을 벗어 불붙은 몸을 두드리거나 털었다.

그러나 마나를 머금은 불길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이게 뭐야!”

“왜 안 꺼지는데?”

“비켜! 그건 못 끈다. 포기해.”

“형님!”

행동대장은 당황한 부하들을 밀어냈다.

그는 오랜 시간 용병으로 활동하며 마법사가 마법을 쓰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한 번 당하면 무조건 죽음이었다.

“몇 걸음 물러나라. 불길이 사그라지면 돌입한다. 아무리 마법사라도 계속 불을 뿜을 수는 없겠지.”

그러나 방 앞에서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은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불이 장막처럼 치솟아 방 안이 보이지도 않았다.

복도에 와글와글하게 모인 기도들은 무기를 들고 뻘쭘하게 서 있었다.

“뛰어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용감하게 그 말을 꺼냈다.

그러나 방금 한 번 붙은 불이 꺼지지 않는 걸 다들 보았다.

누구도 타 죽을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었다.

3분이나 지났을까?

행동대장은 콜록, 하는 기침 소리를 들었다.

나무로 마감한 바닥이 불타며 검은 연기를 뿜어냈다.

안 그래도 창문이 적어 어두침침한 복도가 더더욱 빠르게 어두워졌다.

‘검은 연기? 아까는 하얀색이었는데?’

행동대장은 철퇴를 쥐고 생각했다.

어쩐지 숨이 찼다.

‘그러고 보니 복도에 환풍구가 있었나?’

부하 한둘이 벽에 손을 짚었다.

허억허억, 색색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미친.”

행동대장은 짧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놈은 자신들을 질식시켜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들어가! 들어가라고!”

“네?”

“형님. 불이 안 꺼집니다.”

“왜 명령질이야! 나는 네 부하 아니라고.”

다른 카지노에서 온 기도들은 ‘미래’ 행동대장의 말을 듣지 않았다.

행동대장은 철퇴를 휘둘러 그의 머리통을 깬 뒤, 그의 목을 붙잡고 불길 속에 던졌다.

“망설이는 놈들은 내가 직접 대가리를 깨 주겠다! 들어가!”

기도들이 침음성을 흘리며 불길 앞에 섰다.

꼴딱꼴딱 목울대가 올라갔다 내려오고, 손발은 덜덜 떨렸다.

그들은 용감하거나 잔혹한 기도들이었지만, 진상을 두들겨 패 내쫓는 것과 불길 속에 뛰어들어 마법사와 싸우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마침내 한 명이 눈을 질끈 감고 걸음을 옮겼다.

‘타 죽으나 철퇴에 맞아 죽으나 그게 그거지.’

하지만 그의 목숨을 앗아간 건 불길이 아니라 검이었다.

불길을 해치고 튀어나온 칼날이 그의 목을 얕게 흩었다.

본래라면 치명상을 입을 만한 깊이가 아니었지만, 칼날은 정확하게 목의 동맥을 베었다.

심장이 뛸 때마다 사내의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사내는 도와달라는 듯 애처로운 눈길로 손을 뻗었지만, 누군가 그 손을 잡기도 전에 무릎이 꺾이고 시야가 기울었다.

“으악!”

“히이익!”

“난 못해.”

안 그래도 바닥 직전까지 떨어졌던 사기다.

그 흐름을 뒤바꾸려 했던 첫 물살은 싸늘한 시체로 변했다. 기도들은 몸서리치며 불길 앞에서 물러섰다.

“뭐 하는 거냐! 들어가! 들어가라고!”

행동대장의 고함에도 나서는 이 하나 없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 순간 불길을 흩어내며 걸어 나왔다.

마침표를 찍는 듯한 기세였다.

사방으로 불씨가 휘날리는 가운데 어깨와 가슴을 장식한 금장 무늬가 번쩍번쩍 빛났다.

열풍을 타고 흔들리는 백발, 늘어트린 검, 종이 가면까지 비범했다.

“뭐야. 저게 뭐냐고!”

“왜 저놈은 불에 안 타는 건데!”

화르륵, 그가 쓴 종이 가면이 불길에 타올랐다.

안개가 걷히듯이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한 쌍의 황금빛 눈동자가 또렷하게 빛났다.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여든 기도들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그의 고개가 돌아갈 때마다 기도들은 침음성을 흘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도 그의 숨이 가쁘다는 사실을, 아무도 그의 얼굴이 창백하다는 사실을, 아무도 그의 무릎이 마나 고갈로 후들후들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희대의 망나니였고, 사람을 무너뜨리는 건 힘이 아니라 분위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말한다. 순순히 물러서는 자들은 용서해 주겠다.”

그걸로 끝이었다.

옛 마법사의 손짓을 따라 갈라진 바다처럼.

기도들이 복도 좌우로 갈라져 길을 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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