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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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레라지에를 부축하며 ‘희망’ 카지노로 향했다.
다행히도 적가면은 은신처를 준비해 두었고, 우리는 우리를 쫓아온 미래 외 카지노들의 잔당을 피할 수 있었다.
두어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하고 있으려니 적가면이 마차의 도착을 알렸다.
“이 은혜는 조만간 갚도록 하지.”
“흑철 기사단의 소식을 알려주신 것만 해도 충분합니다. 게다가…… 본의는 아니셨겠지만, 이 ‘희망’의 경쟁자들도 여럿 사라진 듯하니 더더욱 충분합니다.”
나는 새벽에 뜨는 별을 보며 황궁을 떠났고, 다시 같은 별이 뜨는 걸 보며 황궁으로 돌아왔다.
홍등가의 마부는 새벽 손님에 익숙했지만, 황궁 경비병은 아니었다.
“이 통행증이 보이지 않느냐는 말이다!”
“옆에 있는 여자는 누구입니까? 황궁 안에는 춘희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무엄하다! 세레라지에 솔레타라온 솔레타라스 대공 전하시거늘.”
잠시 실랑이를 거친 끝에야 나는 그리운 붉은 달무리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루면 해결될 일을 10년 동안 끌 때도 있었고, 10년이 걸려도 안 될 일이 하루 만에 해결될 때도 있었다.
오늘은 두 번째에 해당하는 날이었다.
“너무너무 긴 하루였어.”
루디의 마사지를 받고 자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흥등가에 출장을 갔는지 해명하지 못한다면 고문직에서 잘릴 수도 있었다. 겸사겸사 목도 같이.
나는 루디의 도움을 받아 세레라지에의 상처를 치료하고 몸을 닦았다.
그녀는 황족다운 회복력으로 동쪽 하늘이 맑아질 무렵 정신을 차렸다.
나 역시 피와 땀에 젖은 몸을 젖은 수건으로 닦고, 옷을 갈아입었다.
“전하. 많이 피곤하시면 잠시라도 눈을 붙이시는 게 어떠신가요?”
루디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은 움푹 들어갔고 뺨은 핼쑥했다.
전생에서 열흘 밤을 새우며 수성전을 치렀을 때가 떠오르는 피폐한 모습이었다.
“지금 자면 다시 일어날 자신이 없어.”
밤을 새운 나는 제이릴리스를 만나려 본궁으로 향했다.
아직 동쪽 하늘이 어스름했지만, 나는 폭군이 얼마나 부지런한지 잘 알고 있었다.
* * *
응접실은 알현실만큼은 아니지만 웅장하고 화려했다.
검푸른 바탕에 다이아몬드 샹들리에가 걸린 알현실 천장이 밤하늘 같다면, 어두운 붉은색 바탕에 에메랄드 샹들리에와 태피스트리가 걸린 응접실은 저녁놀 비친 바다 같았다.
제이릴리스는 알현실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붉은 무늬와 금장 장식이 들어간 하얀 제복이 잘 어울렸다.
백발과 금빛 눈동자는 새벽부터 예리하게 빛났고, 의자 옆에 기대진 긴 검의 보석 박힌 칼집도 빛났다.
나는 한눈에 그 검을 알아보았다.
40년간 그녀 옆에서 함께하는 무기, 세계 인구 감소에 크게 이바지한 검.
날이 반투명한 보검, ‘유리거울’이었다.
“왔느냐?”
한 마디 뱉은 제이릴리스는 내가 올린 보고서를 테이블 위에 던지고 지껄여 보라는 듯이 턱을 까딱했다.
“폐하의 고문이 첫 번째 소임을 다하고자, 폐하께 인재를 천거하려 합니다.”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잠시 응접실에 침묵이 흘렀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짐에게 농담을 청한 것이라면 받아 주겠다.”
제이릴리스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당장이라도 끌고 가 채찍질을 하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 선 궁무대신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폐하. 어찌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공사다망하신 폐하께 농담 따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궁무대신은 여든 노구에도 불구하고 자세는 어지간한 청년 못지않게 곧았으며, 두 눈에는 노인답지 않은 열정과 슬픔이 진득하게 서려 있었다.
그녀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오랫동안 황실과 함께한 충신이었으며, 역시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제이릴리스와 깊게 얽혀 있는 늙은이였다.
“이름이 세레라지에라 했느냐?”
한숨을 내쉰 제이릴리스가 들어는 보자,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세레라지에의 옆구리를 툭 치며 신호를 주었다.
그녀가 정중하게 삼각뿔 모자를 벗고 입을 열었다.
“예. 황제 폐하.”
“마도를 걷는 자라 들었다. 어느 정도의 성취를 거두었느냐?”
“서클 매직으로 환산해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전격 마법은 4서클, 대지 마법은 3서클까지 무영창 시전이 가능하옵니다.”
“환산? 자세히 고해 보아라.”
황제가 흥미를 보였다.
4서클 무영창은 궁정마법사들 기준으로도 괜찮은 실력이었다.
갓 스물을 넘은 나이를 고려해서 생각하면, 분명 더더욱 발전하리라.
“저 역시 황가의 피가 흐르는 몸. 폐하께서 그렇듯이, 엘프족으로부터 전승된 서클 마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마나를 운용할 수 있사옵니다.”
금은요동을 빛내며 세레라지에가 말했다.
제이릴리스의 얼굴에 만족과 경계가 교차했다.
“이제야 그대가 생각나는구나. 한때 함께 1황자 전하를 모셨지. 고작 1년 전이건만 까마득한 옛날 같구나.”
“저도 그렇게 생각하옵니다. 다시 뵐 수 있어 황공할 따름이옵니다.”
황제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내리치며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감정이 배제된 실무적인 이야기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마법은 신비롭고 유용하지만, 위험한 힘이지.”
“동의하옵니다.”
“짐이 그대들을 경계하는 건, 단지 그대들이 황위 계승권이 있어서가 아니야. 짐과 같은 피가 흐르고 있어서지. 그런데 그대는 그 피가 꽤 짙은 모양이군.”
세레라지에가 입을 다물었다. 특유의 금은요동이 불안의 빛으로 떨렸다.
황가의 혈통에는 계승권을 배제하고도 실질적인 가치가 있었다.
세레라지에도 그걸 알고 있을 거다.
혈통 덕에 호의호식했고, 혈통 덕에 천재 소리를 들었으면, 혈통 때문에 죽어도 할 말이 없다는 걸.
“발렌시아누스 고문은 어떤 생각으로 그녀를 천거했는가?”
그래서 나는 쪽잠도 자지 않고 준비해온 논리를 다급하게 꺼내 들었다.
“폐하께서 무엇을 심려하시는지 알고 있사옵니다.”
나는 황제의 염려와 경계를 이해한다.
나는 훗날 이계의 옛것들과 그 하수인들에게 이용당한 황족들이 어떤 괴물이 되는지, 어떤 말로를 맞이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나 역시 하루빨리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황족들이 여럿이었으니까.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곧 단서이옵니다. 문제가 될 자를 모두 죽여 없앤다면 단서가 될 자를 모두 죽여 없앤다는 뜻과 같다고 생각하옵니다.”
제이릴리스가 금빛 눈을 번뜩였다.
“단서 그 자체만으로도 위험이 될 수 있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황가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귀족이 누가 있겠나이까?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당장 폐하의 즉위 이후 수도 밖으로 도망친 황족들도 모두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 아닙니까? 이 자 하나를 더 죽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옵니다.”
전생에서도 그랬다.
하나를 찾아 죽이면 어디서 둘이 더 나타나 지방 대귀족들이나 타국과 연합하여 반기를 들었다.
당장 유스티아누스를 찾으려 하지 않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그는 단지 그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였을 뿐이니까.
황제가 골치 아프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심 안심하며 말을 이었다.
본래는 수십 년 뒤에야 꺼냈던 말이었다.
“황실의 혈통은 귀족 가문들의 정점. 용으로 시작한 뒤 누대에 거쳐 엘프와 인어, 리자드맨을 비롯한 무수한 선, 중립 성향 이종족의 장점만을 받아들이며 완성되었사옵니다.”
“그랬지.”
“따라서 황실의 피는 강력하며 또한 위험하옵니다. 황족 자신도 함부로 다룰 게 아니지요.”
“실로 그러하다.”
“따라서 재능 있고 전문적인 자들에게 관리를 맡겨야 한다 생각되옵니다. 얽히고설켜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매듭이 있다면, 일단 매듭을 잘 푸는 자들을 불러와야지요.”
“무르구나. 단칼에 자르는 게 낫지 않겠느냐?”
나는 이런 말을 꺼내는 것도 송구하다는 듯 머리를 한 차례 숙였다.
“단칼에 자르지 못하고 있기에 이 사달이 벌어졌다고 생각되옵니다.”
“…….”
그럴 거면 왜 1년 전에 다 죽이지 못했냐는 물음이었다.
궁무대신이 배짱도 좋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객관적으로는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이 없는 무례였다.
그러나 나는 지난 40년간 보아 온 그녀의 변화를 기억했다.
아직은 괜찮았다.
제이릴리스는 한숨과 함께 의자에 몸을 묻었다.
잠시 침묵이 어렸다.
노귀족이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폐하. 발렌시아누스 대공의 말대로 황실의 혈통에는 비밀스러운 힘이 많사옵니다. 무엇보다 그 비밀을 잘 알고 계실 황제 폐하께서 혈족들을 경계하시는 것도 이해하실 수 있사옵니다.”
하오나, 하며 노구의 귀족은 말을 이었다.
“두렵다고 모두 죽이는 것은 폐하답지 않습니다. 부디 그들에게 가치를 증명할 기회를 주소서. 경계만 하기에는 너무 빼어난 이들이 아닙니까?”
“…….”
“또한 경계 역시 일이옵니다. 폐하의 가장 가깝고 날카로운 검인 백금 기사 대다수가 무능한 자들의 감시에 쓰이고 있사옵니다.”
“안 그래도 문제라 생각 중이었다.”
“미약한 가능성을 모두 문제 삼으시면 문제 되지 않을 게 무엇이 있겠사옵니까? 부디 평소와 같이 과감한 모습을 보여 주소서.”
나 역시 따라 간언했다.
“장성하여 충견이 될지 주인을 무는 늑대가 될지 모른다고 새끼들을 모두 죽일 필요는 없지 않겠사옵니까? 꽃씨 사이에 독초 씨앗이 몇 개 섞였다고 화단 전체를 갈아엎을 필요는 없지 않겠사옵니까?”
“…….”
“문제가 생기면 그때그때 조치해도 늦지 않을 것이옵니다. 모든 감시를 거두자는 말이 아니옵니다. 저 역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옵니다. 단지 재능과 충심을 겸비한 이들에게 가치를 증명할 기회를 주자는 말이옵니다.”
나는 제이릴리스를 곧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 황금빛 눈동자 안에 깃든 깊은 고뇌가 느껴졌다.
제이릴리스가 세레라지에를 바라보았다.
“상아탑에서 혈마법도 배웠느냐?”
“황족들은 혈마법을 배우는 게 금지되어 있었사옵니다. 스승께서도 매우 아쉬워하셨습니다.”
스승‘께서도’, 아쉬워‘하셨다’. 황제 앞에서 나오면 안 되는 문법이었다.
문제 삼으려면 문제 삼을 수 있는 말이었으나, 황제가 서늘한 표정을 짓는 일은 없었다.
그녀 역시 마법사들에게 스승이 갖는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연금술은 배웠느냐?”
“배우지 않았사옵니다. 상아탑이 연금술사 길드를 멸시하는 만큼이나 연금술사 길드도 상아탑을 배척하옵니다. 서로의 영역에 끼어드는 일은 없습니다.”
“궁정 마법사들과 함께하게 된다면 시약을 사고 네 공방을 차려 연구를 이어갈 돈은 있느냐? 황족 연금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랄 텐데.”
그 말이 나온 순간 나와 세레라지에는 눈을 마주쳤다.
머릿속에서 톱니바퀴 하나가 철컥, 하고 맞물리는 소리가 울렸다.
큰 산을 하나 넘은 기분이었다.
세레라지에가 어울리지 않게 음흉하게 웃었다.
“실은 그 일로 폐하께 간언할 게 있사옵니다.”
나는 의자 밑에 내려놓았던 칩 가방을 꺼냈다.
세레라지에가 금은요동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지난 1년간 부끄러움 많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오욕을 감내한 건, 언젠가 폐하께서 저를 써주시리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주문을 외는 마법사의 혀는 아주 부드러웠다.
“길다.”
“제게 이것과 같은 가방이 198개가 더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라는 뜻이냐?”
세레라지에가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고 순간 천하의 제이릴리스가 작은 한숨을 토했다.
“수도의 현금이 모두 그런 곳에 흘러가 있었구나.”
“저는 지금 지팡이도 시약도 없어 그들에게 이 돈을 받아올 힘이 없습니다. 그러니 정의를 수호하시는 폐하께서 부디 대신 거두어 주소서. 그리해주시면…….”
“주시면?”
“받은 돈의 절반을 폐하께 바치겠습니다.”
얼음 수정을 깎아 만든 듯 굳어있던 제이릴리스의 뺨에 발그레 홍조가 돌았다.
나는 회귀 전의 경험에 비추어 그녀가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상상하고 있음을 알았다.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 그녀가 종을 울려 시종을 불렀다.
직접 펜을 잡고 연금술사들이 만든 최고급 종이에 칙령을 새기듯 써 내려갔다.
“짐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기를 바란다. 세레라지에. 그대에게 다시 마도를 걸을 자격을 내리겠다. 현명하게 정진하여 제국과 짐에게 보탬이 되도록 하라.”
금색 눈과 푸른 눈이 파르르 떨렸다.
세레라지에가 머리를 숙이고, 남색 머리카락이 우수수 쏟아졌다.
잠시 그 어깨가 흔들렸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세레라지에가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이릴리스는 지배자답게 위엄 어린 미소로 화답하며 왼손을 내밀었다.
젊은 마법사는 어린 황제의 인장 반지에 입을 맞춰 충성을 맹세했다.
“지난 1년간 짐이 그대들을 대한 방식에 너무 고통스러워하지는 마라. 짐은 인재를 사랑하고 그들의 충성에 보답하고자 한다. 그대가 짐의 친족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멀리멀리 돌아올 일도 없었을 거다. 남이었다면 진작 자매보다 더한 사이가 되었을 것을, 진짜 자매로 태어나 이리 오랫동안 경계하고 원망했구나.”
세레라지에가 눈시울을 붉혔다.
다시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안도감이겠지.
그녀가 원망의 눈물을 흘리며 죽었던 걸 알고 있던 나다.
안도감과 만족감이 가슴 안쪽을 채웠다.
동시에 다른 형태의 안도감도 들었다.
인재를 사랑하고 충성에 보답하며 친분을 쌓는다.
그녀는 아직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도록 지켜야 했다.
* * *
천재 마법사에게 충성을 맹세를 받은 황제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녀는 세레라지에가 당장 머물 곳을 정해주고, 따라 나가려는 나를 향해 말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은 잠시 남도록.”
“예?”
“고문의 업무와 그 권한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거 같구나. 또한…… 그대가 어떤 재주로 무영창 마법사 세레라지에를 데려왔는지도 듣고 싶군.”
“잘못 들었습니다?”
“답하지 못한다면 목을 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