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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26화 (26/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6화

(26)

잔혹한 침묵이 어린 응접실에서 발렌시아누스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쿵쾅, 쿵쾅, 그의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상대는 폭군 제이릴리스였다.

용과 같이 압도적인 시선이 그의 어깨와 얼굴, 등을 사정없이 짓눌렀다.

“고문의 업무와 그 권한에 관한 이야기부터 하겠사옵니다.”

그러나 그는 눈꺼풀 하나 떨지 않고 말했다.

“불허한다. 짐은 그대가 어떤 재주로 무영창 마법사를 데려왔는지가 더욱 궁금하구나.”

불허라는 단어에도 눈살 하나 찌푸리거나 침음성 하나 흘리지 않았다.

“그럼 먼저 말씀 올리겠습니다. 제가 무영창 마법사 세레라지에는 데려올 수 있던 이유는, 그녀가 그걸 바랬기 때문입니다.”

A가 B이니 B는 A라는 듯한 내용을 그 황제 앞에서 말하고 있음에도, 발렌시아누스는 당당했다.

제이릴리스가 대체 무슨 소리인지 호기심을 가질 정도였다.

“계속하라.”

“그럼 실례지만 하나 묻겠사옵니다. 폐하께서 어린 나이부터 상아탑의 수재로 살아오셨다면, 그곳에서 친구를 사귀고 스승을 만나고 자신의 젊은 시절을 뜨겁게 불태웠다면, 무엇이 가장 하고 싶으시겠사옵니까?”

“마법이겠지.”

“그러나 작금의 제국에서 황족이 허가 없이 검술과 마법을 갈고 닦는 건 금지되어 있습니다.”

금지령을 내린 사람이 눈앞이다.

말하는 게 민망한 수준인 내용이다.

그러나 한때의 망나니는 그 민망한 말을 뱉고 있음에도 개선장군처럼 당당했다.

어깨를 펴고 가슴을 열고 턱을 당기고서 만고의 진리를 선언하듯 말했다.

“그 금지령에서 예외가 될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면 믿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해하기 힘들구나. 거짓일 수도 있잖느냐? 하물며 네놈은 평판이 썩 좋지도 않을 텐데, 의심부터 하게 되는 게 순리 아니겠느냐?”

발렌시아누스는 씨익 웃었다.

비릿함을 흉내 내는 그 미소는 되려 쾌활해 보였고, 그래서 더욱 불량해 보였다.

“평판이 그렇게 좋지 않은데도 폐하께서 저를 살려주셨고, 상을 내려주셨으며, 제가 검을 익히는 걸 허락해주셨잖습니까? 폐하의 신임을 등에 업고 패악질을 부릴 만한 황족이 1년 만에 등장했는데, 그라면 폐하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는 게 자연스럽사옵니다.”

제이릴리스가 괜찮은 설명이라는 듯 피식 웃었다.

“상대의 절박한 마음을 이용했다는 말을 멋들어지게도 하는구나.”

“제 권력은 폐하와 달리 폐하의 입에서 나옵니다. 폐하께서는 그저 통치하시는 분이나, 폐하의 고문인 저는 정치를 해야 하옵니다.”

발렌시아누스는 전생의 경험에 빗대어 제이릴리스가 납득했음을 알아보았다.

살짝 말을 돌리며 첫 번째 물음이었던 ‘고문의 업무와 그 권한에 관한 이야기’도 함께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방심하지 않고 말을 정리했다.

“세레라지에는 저를 폐하와의 연결고리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제게 살의 없는 공격을 가했습니다. 살의가 전투에서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는 폐하께서 저보다 훨씬 더 잘 알고 계실 테지요. 하여 살아남았사옵니다. 궁금증이 모두 풀리지 않았다면 마저 하문해 주소서.”

막힘없는 말, 총기 어린 눈, 경박하리만큼 자신감 넘치는 태도.

“믿고 싶게 하는 법을 아는구나.”

제이릴리스의 서늘한 음성이 방 안에 울렸다.

발렌시아누스는 다시 눈을 가볍게 내리깔며 고개를 숙였다.

“부족한 제게 그리 높은 평가를 주셔서 제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감사할 것 없다. 칭찬이 아니니라.”

발렌시아누스는 문득 옅은 웃음소리를 들은 거 같다고 생각했다.

“결과가 모든 걸 말해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대는…… 분명 결과를 보였지. 언제까지 결과를 보여 줄 수 있을지 궁금하구나.”

그는 오랜 경험에 따라 황제의 말을 해석했다.

일단 이번에는 봐주겠지만, 한번 결과가 이상하게 나오면 그때는 목을 쳐버리겠다는 뜻이었다.

그만하면 칭찬이 맞았다.

“나흘 뒤 플라니티에스 후작이 후작부인과 함께 방문할 예정이다.”

“예. 폐하.”

“그대와 나의 이복남매 중 한 명을 데려가고 싶다는 뜻을 전해 오더구나.”

일순 발렌시아누스의 얼굴이 굳었다.

‘벌써 그때인가?’

황족을 수도 밖으로 데려가고 싶다는 건, 당연히 계승권을 포기하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국에서 황족의 가치는 계승권뿐이 아니었다.

혈통의 정점인 황가의 피가 함부로 밖으로 새어서는 안 되었다.

“어찌…… 답하실 생각이시옵니까?”

제이릴리스가 권태로이 중얼거렸다.

“후작은 부인을 아끼고, 후작 부인은 난산으로 죽은 제 누이와 그 자식들을 끔찍하게 아끼지. 플라니티에스 가문도, 후작 부인의 친정도 제국에서 손에 꼽는 대귀족이고.”

거절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자존심 탓에 빙 돌려 말하는 중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걸 알아보았지만, 당연히 드러내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제이릴리스가 곤란해질 상황을 몇 가지 떠올렸다.

‘그래, 이제 시작이구나. 세상 참 빠르네.’

제국의 혼란은 일찍이 시작되었다.

전생에서는…… 이때 후작 일가가 암살자의 습격을 당했다.

후작 부인의 조카 되는 황족은 현장에서 죽었다.

후작 부인은 가문으로 돌아갔지만, 암살자에게 입은 부상과 누이의 혈육을 잃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눈이 돌아간 후작은 그 배후로 황가를 지목했고, 후작 부인의 친정이 이에 동조했다.

제국 첫 번째 내전의 시작이었다.

그때 전생의 발렌시아누스는 홍등가와 카지노를 전전하며 주지육림에 빠져 있었다.

당연하지만 그는 그 모든 역사를 되풀이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 사촌이 조용히, 그리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지키겠습니다.”

제이릴리스가 흡족하게 웃었다.

“그래. 짐이 원하던 답이었도다. 한숨 잔 뒤 궁무대신에게 가 실무를 의논하도록. 그리고 나가는 길에 시종 아무나 붙잡고 텐티아 경을 부르라고 해라.”

“예. 폐하.”

발렌시아누스가 방을 나서고, 제이릴리스는 고급 목재로 만든 응접실 책상을 손가락으로 툭툭 내리쳤다.

“지키겠다, 라. 어지간히도 실력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구나. 짐의 혈육이여. 그런데 대체 그 실력을 어디서 쌓았을지 실로 궁금하구나. 짐이 즉위하기 이전에 그 경지에 올랐다면, 소문이 나지 않았을 리가 없을 텐데.”

* * *

나는 궁의 빈방에 들어가 시체처럼 잠들었다.

눈을 떠 보니 늑대 같은 인상의 기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공 전하. 일어나셨습니까?”

“아. 경인가? 오랜만이군.”

붉은 머리를 단정한 쇼트커트로 자른 텐티아는 흉갑 위로 제복을 입은 기사 식 정장 차림에 검을 차고 있었다.

“폐하를 뵈었나? 지난번 골치 아픈 ‘적극적 수색 임무’는 잘 해결되었고?”

“예. 그렇습니다. 임무는 완료했고, 성과급까지 두둑하게 받았습니다.”

“그런데 내게는 어쩐 일로 찾아왔는가?”

“실은, 오늘부로 전속 명령을 받았습니다.”

“전속? 어디로 말인가?”

“발렌시아누스 솔레타라온 솔레타라스 대공 전하의 호위 기사입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숨을 작게 들이켰다.

백금, 흑철, 청은, 황동.

네 기사단의 임무는 겹치는 게 많고, 기사단 간 알력 싸움도 심하다.

그래도 암묵적으로 맡아 온 영역이 있는데, 황실 구성원의 호위는 전통적으로 백금 기사단의 일이었다.

물론 황족이 예비 반역자 취급받는 시대에 호위 기사를 받는다는 건…….

“아무래도 1순위 감시 대상에 오른 듯하군. 이상한 수작 부리다가는 경의 손에 목이 잘리겠어.”

텐티아는 미래에 소드마스터가 되고, 지금의 나와는 비교하는 게 민망할 정도로 강하다.

솔직히 회귀 전의 내가 와서 지금의 텐티아와 싸워도 상처 하나 없이 이긴다고 장담하지는 못한다.

“대신 전하께 이상한 수작 부리는 놈들은 모두 제가 목을 쳐버릴 수 있습니다.”

늠름한 미소를 보며 나는 흡족하니 웃었다.

이렇게 대단한 기사를 곁에 둘 수 있게 되다니.

과분하군.

내 계획은 궁을 벗어나 산골에 틀어박혀 멸망을 피하려는 게 아니다.

곁에 둘 수 있는 실력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경이 있어 든든하군. 내가 무슨 임무를 맡았는지는 들었나?”

“예.”

“좋아. 그럼 이제 커피 한잔만 하고 궁무대신을 찾아뵈겠네.”

“……커피를 꼭 마셔야 합니까?”

“궁무대신 앞에서 졸거나, 한숨 더 자는 거보다는 낫겠지. 경도 한 모금 할 텐가?”

“기사는 그런 유약한 음료를 마시지 않습니다. 맥주나 포도주, 위스키라면 기쁘게 받겠습니다만, 커피는 거절하겠습니다.”

제국에서 커피는 부르주아들이 모여 거드름 피우며 마시는 음료라는 인식이 있었다.

돈에 목숨을 거는 부르주아와 충성에 목숨을 거는 기사들의 사이는 당연히 최악이었고, 서로의 문화는 죄악시되었다.

“이해하네.”

“감사합니다. 전하께서도 이번 기회에 맑은 정신을 검은 물에 의존하게 만드는 그 타락의 음료를 끊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니 경도 나를 이해해 주게.”

그러나 행정관처럼 일하고 기사처럼 훈련하고 마법사 같은 비밀을 가진 피곤한 황족인 나는, 어쩔 수 없이 오늘도 커피 세 잔을 마셔야 했다.

* * *

“딱 맞춰 오셨습니다. 마침 커피 한잔을 할 생각이었는데, 대공 전하와 경도 함께 해주시겠습니까?”

노령의 궁무대신이 커피를 권했다.

나는 이번에도 받아들였고, 텐티아 경은 거절했다.

“제안은 감사하오나…… 기사는 커피를 마시지 않습니다.”

미간을 찌푸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게 보여 웃음이 나왔다.

제국은 기사의 세상, 귀족의 세상이고, 혈통의 세상이며, 힘의 세상이다.

아무리 고위급 행정관료라고 해도 기사와는 상호존대를 하는 게 상식이다.

행정관료들도 귀족 작위를 받지만, 그들은 영지도 없고 영민도 없는, 이름뿐인 일대 귀족일 뿐이다.

하지만 기사가 되어 오랜 세월 황가를 섬겨 온 충신의 제안을 쉽게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새 찻잔을 꺼내 보고 싶은데, 궁무부의 일이 노예 사냥꾼의 일처럼 변한 뒤로 황족분들과 커피 한잔을 못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오랜만에 이곳을 찾아준 전하와 기사님에게 이 노구가 커피 한 잔을 대접하려 하는데…… 흑.”

방금 눈물을 보이신 거 같은데.

텐티아 경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게 물들였다.

“대신의 성의를 봐……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깔끔하게 내려 드리겠습니다!”

노귀족이 방긋 웃으며 간 콩을 거름종이에 부었다.

사람 표정이 저렇게 쉽게 변하기도 하는지 신기했다.

아니, 생각해보니 나도 제이릴리스 밑에서 그렇게 하고 있구나.

“여기 있습니다. 음미해 주십시오.”

나는 향긋하고 깔끔하며 고소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잔을 양손으로 쥐고 들어 올렸다.

깊이 숨을 들이쉬자 은은한 향이 콧속을 가득 채웠다.

“으음.”

그렇게 한 모금 마신 커피는…….

“욱!”

더럽게 쓰고 맛없었다!

대체 무슨 콩을 쓴 건지 모르겠다.

불안해하며 텐티아 경을 바라보니, 그녀는 의외로 담담한 표정이었다.

“경, 괜찮은가?”

“제가 지금까지 큰 오해를 한 거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정신을 맑게 해준다는 이유로 이런 걸 마신다니, 성직자들의 고행과도 맞먹는 수행이군요. 부르주아들도 제 생각만큼 나약한 자들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맙소사.

나는 목덜미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커피잔을 슬쩍 옆으로 밀었다.

“일 이야기나 하도록 하지.”

“더 마시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일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그럼 나흘 후 방문할 플라니티에스 후작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노귀족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잠시 상념에 빠졌다.

아마 플라니티에스 후작에 대해서는 내가 그녀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는 한 왕국의 왕이나 다름없는 사내다.

이건 지방까지 중앙의 눈이 닿지 않기에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다는 비유가 아니다.

영지를 가진 봉신이 군주에게 지켜야 할 의무는 연 40일의 무급 종군과 연 10%의 세금뿐이다.

금은 함량을 지킨다면 화폐 주조도 가능하고, 사법권을 가지기에 세속법과 관습법으로는 재판도 불가능하다.

하물며 플라니티에스 후작가는 150년 전까지도 왕가였다.

형식적으로 모든 땅을 황실에 바치겠다 선언하면, 황제가 그 땅을 다시 그대로 영지로 하사해주는 식으로 제국에 복속되었고, 당연히 지방색과 독립의식이 강하다.

귀족 공용어를 배우지 않는 평민들끼리는 말이 안 통할 정도다.

그러니 그 제이릴리스에게 처음으로 반기를 들 수 있었겠지.

“……여하간, 그분께서는 일이 조용히 진행되기를 바라셨습니다.”

회귀 전에도 그랬다.

“이해하네. 화려한 예식도 환영 절차도 친분 과시도 모두 생략하도록 하지. 서로에게 부담일 테니.”

본래 새 황제가 즉위했으니 모든 봉신은 수도로 올라와 충성맹세를 새로이 해야만 한다.

하지만 제이릴리스는 아직 대영주들에게 충성맹세를 받지도, 시키지도 않았다.

대영주들로서는 손 위 계승자들을 다 죽이고 황위에 오른 패륜 황제를 먼저 인정하는 게 정치적 부담이다.

이건 제이릴리스도 똑같다.

맹세가 거절당할 것, 최소한 흔쾌히 받아들여지기 힘든 상황인 걸 안다.

그런데 맹세 요구가 거절당하면, 권위를 지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해야만 한다.

즉위 1년도 간신히 넘었고, 아직 수도도 혼란스러운 판에 저 멀리 있는 대영주들을 치겠다고 군대를 일으키는 건 미친 짓이다.

그리고 현명한 통치자는 이럴 때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 제안 자체를 하지 않는다.

“상경을 허락했다는 자체로, 폐하의 뜻은 허락이시겠지?”

“예. 그럴 겁니다. 그래서 후작 역시 최소한의 인원만 데려오기로 했으니까요. 텐티아 경께도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이 일은 알려져 좋을 게 없습니다.”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훌륭하십니다.”

나는 흡족하게 웃으며 내 임무를 확인했다.

“그럼 나흘 동안 그 황족을 잘 지키고 있겠네. 돌발행동하지 못하게.”

“그분에게 혹시 모를 사생아 따위가 있다면 연락만 주십시오. 이쪽에서 처리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나는 한 가지 마지막으로 물어야 할 걸 깨닫고 몸을 돌렸다.

“최소한의 인원이라면…… 와이번핏인가?”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곳이지요.”

아름다운?

온 세상 아름다운 곳이 다 불타 죽었나 보다.

* * *

다음 날.

“죄, 죄송합니다.”

회귀 전의 제이릴리스가 사생아들을 어떻게 처리하려고 했더라?

눈앞의 어린아이를 보며,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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