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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27화 (27/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7화

(27)

아퀴니스, 플라니티에스 후작부인의 조카이자 내 수많은 사촌 형제 중 한 명.

대귀족 출신인 황비의 아들이기에, 첩 소생의 수많은 황족이 갈려 나가는 와중에도 최소한의 예우는 받아 온 행운아.

그 사내는 붉은 달무리 궁 자기 방에서 텐티아 경과 내 앞에 바짝 엎드렸다.

텐티아 경은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잡고 쓰러질 듯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끝도 없이 한숨을 내쉬다가 결국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아퀴니스 대공. 이 미친놈아. 네 몸에 무슨 피가 흐르는지 깡그리 잊어버렸냐? 감금된 충격으로 머리가 흔들리기라도 했어? 네가 무슨 오크도 아니고 책임도 못 질 애를 막……! 말을 말자.”

나는 내 신분과 상대의 신분을 모두 잊어버리고 과거 망나니 시절의 말투를 다시 꺼냈다.

“전하.”

쿡, 텐티아 경이 내 옆구리를 판금 갑옷 두른 팔꿈치로 찌르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더럽게 아팠는데, 조금 더 세게 찔렀으면 피멍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텐티아 경과 함께 방 밖으로 나가, 몇 가지를 당부하고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큰 결심을 내린 듯 말했다.

“텐티아 경.”

“예. 전하.”

“명예로운 기사에게 황족 사생아 따위를 처리하게 할 수는 없지. 내가 하겠네. 잠시만 뒤돌아 있겠나.”

“예?”

“발렌시아누스! 제발!”

아퀴나스가 애원하고, 나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검 손잡이로 손을 가져다 댔다.

지금 제국에서 황족이 멋대로 아이를 가진 건 어마어마한 문제였다.

피의 유출과 계승권 때문이다.

“아퀴니스 대공. 왜 그동안 대공이 플라니티에스 후작령으로 못 가고 이 붉은 달무리 궁에 남아 있었는지 알고 있나?”

“알고 있네. 피와 권리 때문이지.”

그가 침통한 목소리로 답했고, 나는 화산처럼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애가 그대를 따라 플라니티에스 후작령으로 가게 되면, 그 문제가 다시 한 번 똑같이 생겨.”

“…….”

“제국법상 16세 이하는 계승권을 포기할 수도 없지. 이 애가 14살 즈음에 사내 구실을 하게 되면? 플라니티에스 후작가에 황혈을 이은 계승권자가 몇이나 생길지 모르는 상황이야. 알겠나?”

“알고…… 있네.”

“계승권을 포기한다 해서 그대의 피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그러나 그대를 그대의 친척들에게 보내 주겠다고 폐하께서 결정하신 건, 그대가 현명하게 처신할 걸 알아서야.”

나는 이를 악물며 검을 뽑으려 했다.

아퀴나스가 기겁하며 아이를 몸으로 감쌌다.

“이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황가의 아이로 태어난 죄!”

“아비를 고르지 못하는 것도 죄란 말인가?”

“그 아비는 대귀족과 황가의 자식으로 태어난 덕에 지고의 재능과 막대한 권리를 노력 없이 얻었고, 흉년이 들어 온 농민들이 배를 주리는 중에도 호의호식했지!”

“!”

“이 아이의 어미는, 그대가 황족이자 플라니티에스 후작 부인의 조카인 줄 몰랐나?”

“발렌시아누스!”

아퀴나스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물들였다.

“이 아이가 어릴 적 아픈 적이 있었나? 밤새도록 울며 그대나 유모, 시녀를 보챈 적이 있었나? 없었겠지. 황족과 귀족의 아이들은 모두 보통 아이들보다 속이 잘 여물어 태어나니까. 이 아이가 앞으로 배를 주릴 일, 힘겹게 노동할 일이 있겠나? 없겠지. 황족과 대귀족의 피를 이었으니까.”

“그래서 책임을 져야 한다?”

나는 못을 박듯 내뱉었다.

“혈통에 따라온 권리를 누리는 게 당연하듯, 혈통에 따르는 책임을 이행하는 것도 당연하지.”

스르릉, 검이 한 뼘쯤 뽑혀 나왔을 때, 텐티아 경이 움직였다.

그녀는 내 검 손잡이 끝을 앞으로 쳐 다시 검을 검집 안으로 밀어 넣고, 나를 가볍게 어깨로 밀어낸 뒤, 내가 서 있던 자리에 서서 아퀴나스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불만스럽게 텐티아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지금 대공 전하께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으십니다.”

아퀴나스가 지푸라기를 잡는 듯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 그게 무엇인가?”

“첫 번째는 아이를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며, 두 번째는 아이의 출생일을 조작하는 것입니다.”

“출생일을?”

텐티아 경이 연극하는 말투로 말했다.

“대공 전하께서 대공 전하가 아니게 된 다음에 낳은 아이라면, 애초에…… 계승권이 없지요. 데리고 떠나지 못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이 경우에는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무슨 문제인가?”

“플라니티에스 후작가에서 대공 전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계승권을 포기한다 해도 황혈이 사라지는 건 아니며, 둘이나 되는 황혈을 품어 황제 폐하께 주목받기는 싫을 테니까요.”

“으음.”

아퀴나스가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대공 전하께서는 아이와 함께 이곳에 남게 되겠지요. 계승권 포기는 흐지부지되고, 황제 폐하께서는 결코 아이와 전하를 살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잠시 고민하던 아퀴나스가 말했다.

“아이의 출생일을 조작하겠네. 도와줄 수 있겠나?”

“같이 남겨질 위험을 감수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렇다고 두고 갈 수는 없잖은가? 내 아이고, 내가 사랑하던 사람의 아이인데. 만약 고모님께서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와 아이는 다음 날 햇살을 보지 못하겠지. 아이 혼자 저승길이 외롭지 않게 같이 가주겠네.”

나는 한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퀴나스. 짐을 싸서 앞으로 나오게. 후작이 올 때까지 황궁 밖에 머무는 게 낫겠어. 계승권 포기 서류는 최대한 빨리 통과시켜 보겠네.”

“고맙네. 발렌시아누스.”

나는 그가 고개를 숙이는 걸 다 보지도 않고 텐티아 경과 함께 방 밖으로 나섰다.

이게 맞는 일인지 모르겠다.

복도 끝까지 걸어가 절대 방에서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무렵, 텐티아 경이 내게 물었다.

“전하. 왜 그렇게까지 몰아붙이셨습니까? 꼭 저를 통해 그런 제안을 해야 했습니까? 전하께서 아이의 출생일을 조작하라고 말씀하셨으면 안 되는 겁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이 바라는 게 뭔지 몰라서.”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후작은 부인을 아꼈고, 부인은 동생을 아꼈다.

하지만 애정과는 별개로 돌아가는 게 귀족의 세상이다.

회귀 전의 나는 아퀴나스에게 사생아가 있었다는 걸 몰랐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정체 모를 세력의’ 암살자가 후작 일가를 습격했고, 부인을 잃은 후작이 복수심에 전쟁을 일으켰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후작이 이미 아퀴나스와 계승권을 가진 그 아이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어떨까?

후작이 원하는 건 처음부터 계승권을 가진 그 아이였다면?

그 아이를 통해 황가에 이런저런 압박과 공작을 부릴 생각이었다면?

아퀴나스도 그걸 알고, 자신을 빼 주는 몸값으로 아이를 데려가는 거였다면?

그렇게 생각하면 회귀 전에 있던 암살은 ‘정체 모를 세력에 의한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아이를 눈치챈 제이릴리스가 암살자를 보냈을 수도 있으니까.

거기서 잠시 생각이 멈췄다.

제이릴리스라면 사생아를 눈치챈 순간 검을 뽑아 들고 달려가지, 암살자 따위를 보내지는 않겠지.

정치가 아니라 통치를 바라던 동생이니까.

또,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제이릴리스가 보낸 암살자와 ‘정체 모를’ 암살자가 둘 다 있었을 수도 있다.

“후작이 사생아를 이용해서 무언가를 꾸밀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복잡하군.”

일단 텐티아 경에게는 이 정도로 얼버무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는군요. 앞으로는 머리싸움에서는 저를 빼 주십시오. 기사는 입이 아니라 검으로 말하고 표현하는 게 미덕입니다.”

그녀는 의심하지 않는 걸 넘어, 생각할 일을 시키지 말라는 요구를 해 왔다.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겠네.”

“그 말은 안 들어 주겠다는 뜻 아닙니까?”

“…….”

“전하?”

* * *

다양한 부대시설이 있고, 실시간 룸서비스를 받을 수 있으며, 정예 용병 출신의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는 고급 호텔은 황궁과 너무 가까웠다.

그곳에는 상경한 귀족들이나 큰 상단의 총수들도 여럿 머무는 만큼 대놓고 암살자 따위가 들어올 리는 없겠지만, 아기에 대해 제이릴리스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는 만큼 황궁과 물리적 거리가 멀수록 좋았다.

숙박업소들은 각 방위의 성문 근처와 황궁 앞에 모여 있었는데, 발렌시아누스는 와이번핏과 가장 가까운 서문 앞으로 향했다.

덜컹, 덜컹, 마차가 끝도 없이 흔들렸다.

깔끔하게 포장된 수도 도로답지 않았다.

아이가 울려 하자 아퀴나스는 솜으로 아이의 귀를 틀어막고 가슴팍까지 들어 올려 껴안았다.

“마차가 많이 흔들립니다.”

“이쪽 길에는 무거운 짐승들이 많이 다녀서 그렇네. 어쩔 수 없으니 아이를 잘 어르게.”

“짐승들?”

발렌시아누스는 와이번핏 방향을 턱짓했다.

“저곳에 하루에 얼마나 많은 고기가 들어갈지 모르겠나?”

“아.”

그때 주변에서 짙은 피 냄새가 풍겨왔다.

신선한 피가 아니라 죽은 지 오래된 고약한 냄새였다.

텐티아가 눈살을 찌푸리고, 아기가 다시 울고, 아퀴나스가 어쩔 줄 몰라 했다.

발렌시아누스는 커튼을 드리웠던 마차 창문 밖을 바라보며, 마부에게도 물었다.

“악어새 놈들이 나올 시간인가?”

“예. 그렇습니다. 도로가 거의 막혀버렸군요. 죄송합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골목 사이사이에서 피가 잔뜩 묻은 두꺼운 옷을 입은 사내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바구니에 끈을 매달아 가방처럼 등에 메거나, 손수레를 밀고 있었는데, 어디서든 피가 뚝뚝 떨어진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쵸퍼나 클리버 따위로 불리는 고기 손질용 대형 나이프를 허리에 차고 있었다.

여기저기 이가 나가 있었지만, 무척이나 날카로워 보였다.

저녁놀 드리워진 거리에 피칠갑을 한 사내들이 도로를 가로질렀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쉿.”

“이리 오렴.”

“손 절대 놓지 마.”

거리의 행인들은 기겁하며 삼삼오오 흩어져 아무 가게에나 들어가거나, 그대로 굳어 부들부들 떨었다.

“대체 수도에 왜 저런 미친놈들이 돌아다니는 겁니까?”

아퀴나스가 부들부들 떨며 묻자, 발렌시아누스는 호들갑 떨지 말라는 듯 태연하게 의자 쿠션에 몸을 묻으며 답했다.

“쟤들 와이번핏 청소하는 애들이야.”

“네?”

아퀴나스가 잘못 들었단 듯 되물었다.

“와이번들 밥 줄 때 양이나 돼지, 염소나 소를 통째로 넣어주거든. 그런데 걔들이 의외로 식성이 까다로워. 계절, 성별, 나이에 따라서 고기만 먹거나, 등뼈만 먹거나, 내장만 먹거나, 기름만 먹거나 한단 말이지. 그럼 남은 부위는 어떻게 될까?”

“썩겠군요.”

“누군가는 들어가서 치워야 하지. 그리고 많이 남은 부위 중에 안 썩은 부위 있으면 잘라내서 가져가기도 할 수도 있는 거고. 다들 자식 먹이려고 위험하고 힘든 일 하는 아버지들이야. 보기에 꺼려진다고 나쁜 사람 취급하지 않는…….”

와장창!

마차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발렌시아누스의 말이 끊어졌다.

클리버 하나가 유리창 안으로 쑥 들어왔다.

깨진 유리가 바닥으로 우수수 쏟아졌다.

아퀴나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을 더듬고, 발렌시아누스와 텐티아 경은 이를 악물고 마차 문을 걷어차며 열었다.

“아아아악!”

마부가 마부석에서 끌려 나와 우악스럽게 짓밟히는 게 보였다.

“대공 전하! 전하께서 방금 하신 말씀과 너무나도 다른 거 같습니다.”

텐티아는 발검하며 말했다.

번쩍번쩍 빛나는 판금 갑옷과 장검을 본 악어새들이 흠칫하며 물러섰지만, 그들은 이내 다시 모여들며 마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지금 너희가 누구 앞길을 막아섰는지 아느냐? 바로 답하지 않는다면 목을 베겠다.”

텐티아는 판금 두른 전투화로 마부를 짓밟던 사내의 배를 걷어찼다.

퍼억!

아무리 험하게 살았다 해도 마나를 다루는 기사와 일반인의 신체 능력 차이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 악어새는 몸이 붕 뜨며 날아가 길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발렌시아누스는 말을 걸기 전에, 오랜 경험에 따라 그들의 눈부터 확인했다.

하나같이 검은자위와 흰자위의 경계가 모호했다.

“이런 개 같은……!”

그는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검을 뽑아 그의 앞에 선 악어새 사내의 목 혈관을 베었다.

사내는 목에서 분수처럼 피를 뿜으면서도 아무런 고통도 안 느껴지는 듯 이쪽으로 걸어오다 결국 풀썩 주저앉았다.

“대공 전하?!”

“이 녀석들 정신이 오염당했네. 이미 늦었어.”

정신 오염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 했을 때 일어난다.

꼭 고대 악신의 괴문서 따위가 아니라, 정제된 지식을 학문적으로 편찬한 입문용 마도서에 접촉했을 때도 일어나는 것이라 원인이 무엇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최다 사유는 사악한 옛것들과의 유, 무형적인 접촉이었다.

“마부! 말을 몰아라!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텐티아는 한 손으로 마부를 들어 마부석에 던지고, 발렌시아누스가 마차에 타는 걸 확인한 뒤, 마차 앞을 가로막는 악어새들을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츠카아악!

그녀를 상대할 실력자들은 아니었기에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그녀는 길을 트며 생각했다.

정신 오염은 매우 마법적이고 신비한 현상이다.

그녀 역시 아직 그런 쪽의 임무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책에 쓰인 내용만 읽어봤을 10대의 황자가 바로 알아볼 만한 게 아니었다.

‘폐하께서는 대체 왜 나를 그분 곁에?’

모두 정직하게 기사의 결투로 승부를 보면 얼마나 좋을까?

상념을 흩으며 그녀는 검을 휘둘렀다.

츠카아악-!

텐티아는 하늘로 날아오르는 팔다리들을 보며 늑대처럼 웃었다.

역시 머리 쓰는 건 적성에 안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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