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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29화 (29/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9화

(29)

와이번핏은 거대한 건축물이었고, 그곳에는 비밀스러운 담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들이 여럿 있었다.

지방 대귀족들이 빠르게 수도를 왕복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아예 도착지에서 업무를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본래는 이런 공간을 따로 조성할 계획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먼 수도에서 감금되거나 살해당하는 걸 두려워한 대귀족들이 상경 자체를 거부하는 일이 잦아지자, 결국 황실이 한 걸음 물러선 것이다.

황궁까지 들어오지 않아도 좋으니 수도로 와서 대화하자고.

우리는 천장이 높아 상쾌한 방에서 다과를 앞에 두고 앉았다.

나와 궁무대신, 아퀴나스, 후작부인은 커피를, 텐티아 경과 후작, 두 호위기사는 차를 택했다.

텐티아 경이 차를 마시는 걸 본 후작이 뭔지 모를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수도 기사라고 해서 세련미 운운하며 거들먹거리는 놈들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이라고 하는 거 같았다.

어색한 침묵을 깬 건 마르테 후작이었다.

“먼저 이런 자리를 만들어주신 궁무대신께 감사를 표하는 바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힘이 있었으며, 갈색 눈동자에는 총기가 넘쳤다.

“작년부터 요구했듯, 내 아내의 조카를 내 양자로 들이고 싶어 왔소이다.”

“양자 말씀이십니까?”

궁무대신이 생각도 못 했다는 듯한 어조로 답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수도 정계에서 말 그대로 평생을 바친 거물임을 잘 알고 있었다.

정말로 놀란 건지 놀란 척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입적 서류는 이쪽에서 준비했고, 내 영지의 교회에 머무는 대주교에게 승인받을 생각이니 이 부분에 대해서 황실의 도움은 필요치 않소이다. 그저 무책임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황실의 피를 빼돌릴 생각이 아님을 알리는 바요.”

“누구도 그리 생각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희 궁무부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살아 계신 황족들을 모두 모친의 친정 쪽으로 돌려보내는 게 낫지 않느냐?”

후작이 눈썹을 치켜떴다.

“놀랍군. 궁무부는 황족들을 손에 쥐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궁무대신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있어 봐야 계속 견제만 당하실 테지요. 계승서열이 수십 번째라 어차피 황제는 못 되실 분들이고요. 황족이라는 이유로 황궁에 감금되어 험한 꼴을 보고 있으신데, 저희도 그걸 보는 게 즐겁지는 않습니다.”

“그럼 그걸 폐하게 간언해주는 게 어떤가?”

후작이 비꼬듯 답했지만, 궁무대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예. 하오나 폐하께서 제 말을 여름 모기 대하듯 하시니 저 역시 안타까움이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후작 부인이 그만하라는 듯 후작의 팔뚝을 가볍게 건드렸다.

그녀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계승권 포기 서류를 보고 싶네요. 어느 분이 보관하시고 있나요?”

나는 궁무대신에게 눈짓을 보냈다.

노령의 대신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네 사람의 서명이 들어간 서류를 건넸다.

“오늘 자정부터 효력이 발휘됩니다. 황제 폐하와 궁무대신, 아퀴나스 대공 본인이 서명했고, 제가 공증인입니다.”

“발렌시아누스.”

후작이 내 이름을 소리 내어 읽었다.

“내가 아는 어떤 분과 닮았군. 그 머리카락 하며, 눈동자 하며.”

“저도 그분을 아는 거 같습니다. 생각하시는 게 맞으실 겁니다.”

후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눈을 피한 줄 알았는데, 본인이 온 거나 다름없군. 폐하의 뜻은 무엇인가?”

“예?”

나는 진심으로 의문을 표했다.

아무래도 후작이 나를 너무 거물로 보고 있는 거 같다.

“연기하지 않아도 좋네. 황제 폐하께서 직접 이 아이를 놔 주겠다고 하시니 기쁠 뿐이야. 그분께 바로 충성 맹세를 하지 못하는 상황을 이해해달라고 전해 주게. 플라니티에스 후작가가 황실에 빚을 졌다고.”

궁무대신이 이건 또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안에서 모든 걸 끝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 밀실이라면 암살범 같은 건 들어오지도 못하리라.

“아퀴나스.”

나는 내 사촌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 말씀드리게.”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청년의 얼굴에 사내다운 눈빛이 깃들었다.

지켜야 할 게 있는 자의 눈빛이었다.

스윽, 그는 들고 있던 커다란 가죽 가방을 조심스럽게 책상 위로 올려놓았다.

궁무대신과 후작 부부의 의문 어린 눈빛을 받으며 그는 입을 열었다.

“……후작님.”

* * *

체감상 10년 같은 10분이 흘렀다.

아퀴나스가 쓰러질 듯 창백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궁무대신이 이걸 몰랐다니, 저도 사임할 때가 왔군요, 그래도 들키지 않아 다행입니다, 같은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후작 부인은 눈시울을 붉혔으며, 후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는 어째서인지 후작이 웃음을 참고 있는 거 같다고 생각했다.

이내 그가 말했다.

“내가 또 할아버지가 되는구나.”

“아!”

텐티아 경과 아퀴나스가 동시에 안도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 자리에서 마음 편히 안도하지 못하는 자는 발렌시아누스뿐이었다.

“마음고생이 심했겠지. 이제 괜찮다. 그 아이는 내 영지에서 내 손자로 자라게 될 거다. 내 첫째 딸도 작년에 아이를 낳았는데, 둘이 친하게 지내면 좋겠구나.”

“감사합니다.”

발렌시아누스는 동시에 닥쳐오는 안도감과 긴장감에 눈앞이 핑 도는 걸 느꼈다.

아이는 아무 죄도 없지만, 아이의 피에는 지독한 책임이 흘렀다.

모든 게 잘 풀렸다.

겉으로 보기에 궁무대신은 대귀족의 무한한 자비 앞에서 말을 잃었고, 대귀족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아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니 이제 못을 박아 결론을 내야 했다.

그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전쟁 또는 전쟁을 일으킬 공작을 막으려면 반드시 지금 답을 내야 했다.

그라고 해서 화합과 자비의 자리에 찬물을 끼얹는 게 즐겁지는 않았다.

단지 지금 찬물을 끼얹지 않으면 나중에는 핏물을 끼얹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 뿐이었다.

‘계승권 전쟁은 막아야지.’

그러니 누군가 찬물을 끼얹어야 한다면 그건 그의 몫이었다.

텐티아는 그가 뭘 물으려는지 알아차리고 순간 움찔하며, 그의 등 뒤로 바싹 붙었다.

“각하.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무엇인가?”

“그 아이는 내일 아침에 태어났습니다.”

이 이상한 문장의 뜻을 후작 부부가 알아차리기까지는 5초 정도가 걸렸다.

발렌시아누스는 속으로 외쳤다.

제발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라고.

그는 저 아기가 대공의 아들이 아니라 후작의 손자로 살기를 진심으로 바라 마지않았다.

그는 회귀 전에 마르테 후작이 제이릴리스의 검에 목이 잘린 채 효수되었던 걸 기억했다.

만일 그 모든 게 후작이 판 자기 무덤이었다면, 계승권 가진 사생아를 가지고 장난치려 한 거라면, 그것 때문에 자기 부인까지 위험에 처하게 한 거라면.

이 자리에서 끝을 봐야 했으니.

“알겠네. 발렌시아누스 대공. 무슨 말인지 알겠어. 명심하지. 내 영지로 돌아가자마자 교회에 가서 내일 날짜로 아이를 출생 신고하겠네.”

후작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발렌시아누스에게는 그 품위 넘치던 웃음이 옛 악신의 비웃음처럼 들렸다.

‘젠장.’

“안 됩니다! 그 아이는 반드시 수도의 교회에서, 내일 아침에, 플라니티에스 가문의 새 아들이 된 아퀴나스의 아들로 등록되어야 합니다.”

그는 발작하듯 내뱉었다.

이미 눈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는 발밑이 와르르 꺼져 드는 듯한 환상을 보며, 손발과 눈꺼풀을 떨며, 식은땀을 흘리고 환청과 이명을 들으며 이를 악물었다.

회귀 전 삶에서처럼 평민과 빈민들에게 망나니짓을 하는 것과 귀족 사회에서 망나니짓을 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아직 이렇다 할 뒷배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회귀 전에 굴러갔던 멸망의 수레바퀴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내전으로 약해진 제국에 이종족과 타국이 반기를 들고, 그 와중에 고대 악신들이 인간 사회에 깊숙이 파고들어 결국 수도를 검은 안개로 삼켜버렸다.

그는 영웅이 아니었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게 자연스러운 사내였다.

그는 아기는 물론이고 청소년조차 죽여 본 적이 없었지만, 회귀 전 삶에서 첫 번째 내전으로 죽은 장병은 집계된 숫자만 70만에 달했다.

그리고 그걸 집계한 자들도 그 통계를 믿지 않았다.

시산혈해.

‘그걸 막으려면 뭘 못 할까?’

살아서 제이릴리스를 돕기 위해 망나니 연기를 했다.

망나니 연기를 위해 가족 같은 루디에게 술 안 가져오면 뛰어내리겠다고 협박하고, 기사 수십 명 앞에서 본넬 경의 가랑이를 걷어찼다.

멸망을 본 그에게 멸망을 막으려는 모든 시도는 정당했다.

콱, 그래서 그는 품속에서 단검을 뽑아 들려 했다.

‘후작. 당신이 시작한 거다.’

그러나 그의 오른팔은 무언가에 짓눌린 듯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

그의 오른쪽에 선 텐티아가 교묘하게 왼손을 뻗어 그의 위쪽 팔뚝을 압박하고 있었다.

뿌리칠 수 없는 힘이었다.

‘무엇을 우려하시는지 아오나,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텐티아는 변경의 왕이나 다름없는 후작에게 차분하게 말을 걸었다.

“각하. 무례한 말씀이오나, 아기는 반드시 내일 아침 이곳에서 출생신고가 되어야 하옵니다. 그렇지 않다면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백금기사단의 기사가 이름이 높은 건 알고 있으나, 언제부터 후작의 앞에서 입을 열 수 있게 되었나?”

그러나 후작은 방금과는 상반된 서늘한 눈길로 그녀의 말을 끊어냈다.

그 몇 초면 발렌시아누스가 숨을 다독이고, 지금 이곳에서 아기 또는 후작을 죽일 기회가 물 건너갔음을 받아들이기 충분했다.

발렌시아누스는 침착하게 말을 고르고 행동을 준비했다.

“그럼 내일 아침 다시 이야기하지요.”

“잠깐.”

타악, 그가 냉큼 손을 뻗어 가죽 가방을 낚아챘다.

당황하며 반사적으로 말리는 아퀴나스의 손을 쳐내고, 텐티아에게 가방을 건넸다.

“자네 지금 뭐 하는 건가?”

“닥쳐!”

한 마디로 아퀴나스를 윽박지른 발렌시아누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놈-!”

후작이 눈을 부릅뜨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포효하려 했지만, 발렌시아누스는 태연하다 싶을 정도로 담담한 어조로 후작의 말을 끊었다.

“지금 밖에 비 옵니다. 어차피 오늘 밤에 못 출발하십니다. 아퀴나스 대공은 자정까지는 황실 소속이니 저희 궁무부에서 맡고 있겠습니다. 문제 있습니까?”

제일 먼저 답한 건 궁무대신이었다.

“대공 전하의 말이 온당합니다.”

“대신!”

후작 부인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녀의 머리카락 주변에서 하얀 불꽃이 튀었다.

텐티아와 발렌시아누스는 동시에 몸을 굳히며 긴장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설 정도의 긴장감이었다.

텐티아는 반사적으로 검을 쥐려 했고, 발렌시아누스는 고의로 아기가 든 가죽 가방을 들어서 몸을 가렸다.

‘설마 자기가 이용할 계승권자를 자기 손으로 죽이지는 않겠지. 미안하다. 내가 뭐든지 할 수 있는 놈이라고 생각하게 해야 해서 말이야. 나중에 커서 너 때문에 전쟁 났다는 걸 듣기보다는 이게 나을 거야.’

사람 같지 않은 짓이었다.

후작이 경멸에 찬 눈길로 발렌시아누스를 바라보았다.

행정관인지 마법사인지 모를 여인이 다급하게 다가와 후작 부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고정하십시오. 마님.”

후작부인이 입술을 깨물며 발렌시아누스를 노려보았다.

“좋다. 대신 우리도 너희 곁에 머물겠다. 내일 아침에 넘겨받을 아이의 신원을 확인할 권리 정도는 있겠지?”

* * *

후작은 와이번핏에서 멀어지고 싶지 않아 했고, 우리 역시 황궁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며칠간 묶었던 그 여관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틀 정도 여유 있게 빌리기 잘했다.

“그렇게 되었네. 빵과 소고기 스튜 5인분 부탁하네. 빵은 아주 부드럽지 않아도 좋지만, 스튜에는 잡내가 나지 않게 유의해주게.”

룸서비스를 맡은 직원은 기사 하나와 대공 둘과 후작 부부가 자기 여관 5층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절하려 했다.

다행히도 소고기 스튜에는 월계수 잎과 후추가 듬뿍 들어가 잡내 따위를 찾아볼 수 없었다.

후두둑, 후두둑.

식사를 마친 우리 다섯은 빗소리를 들으며 여관방 안에서 둥그렇게 서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호위들은 왜 떼어놓고 오신 겁니까?”

“내일 아침 바로 출발하려면 몸 상태를 점검해야 하지.”

황실이 와이번들에게 무슨 수작을 부릴까 경계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수도의 치안은 생각하시는 것보다 좋지 않습니다.”

“그깟 놈들 천 명이 덤벼도 내가 눈 하나 깜짝할 거 같으냐?”

후작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생각해보니 그도 소드 엑스퍼드 최상급이었다.

전생의 나와 동급인 실력자니, 어지간한 놈들은 말 그대로 갈아버릴 게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텐티아 경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고, 가능하면 그녀가 창문 쪽에 향하도록 했다.

이는 후작이 단칼에 우리를 둘 다 베어버리고 애를 챙겨 와이번핏으로 향하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또, 그래야 내가 죽어도 그녀가 창 밖으로 뛰어 내린 뒤 황궁으로 달려가 제이릴리스에게 사실을 알릴 수 있었다.

“치밀한 놈이로구나.”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후작이 계승권과 관련되어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확실해졌다.

어쩌면 공작원을 아퀴나스의 시녀와 접촉해서 아퀴나스도 모르는 동안에 사생아에 관한 지식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아퀴나스의 사생아를 낳은 그 여자까지 후작이 보냈다고 생각하면 무리한 억측일까?

나는 편치 않은 시선으로 아퀴나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이를 소중하게 안고 우리 모두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똑똑, 똑똑똑똑,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둘, 넷, 둘.

직원에게 알려준 신호였다.

우리를 찾아야 한다면 그렇게 문을 두드리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후작과 눈을 마주치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사, 살려주세요.”

종업원이 목에서 피를 흘리며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시이이이이익-.”

검은 갑각의 지네가 코브라처럼 몸을 치켜들고 있었다.

그 괴물은 문이 꽉 차 보일 정도의 덩치에 내 팔 만큼 긴 낫 같은 다리와 흉악한 크기의 송곳니를 달고 있었다.

기이한 기운이 느껴지는 수십 개의 눈이 붉게 빛났다.

나는 지독한 피로감을 느끼며 한탄했다.

“아, 이건 후작이 부른 게 아닐 텐데.”

큰일 났다.

-계승권 박탈까지 앞으로 4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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