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30화
(30)
발렌시아누스는 전생에서 아퀴나스를 죽인 게 정체 모를 제3의 세력 또는 제이릴리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작이 사생아에 대해 알고 있었거나 이용하려 했다는 정황 증거가 나와서 그 생각은 일순 바뀌었다.
“방심했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은발의 황자는 문을 닫았고, 거대한 지네는 그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쿵!
그가 형편없이 떠밀리고, 나무 문이 경첩에서 뜯겨 나가고, 후작이 달려왔다.
발렌시아누스는 반사적으로 몸을 굳히며 후작의 공격에 대비했다.
퍽!
하지만 후작은 구둣발로 지네의 몸통을 걷어차며 방 밖으로 몰아낸 뒤, 거리를 벌리고 그의 목덜미를 잡아 방 안쪽으로 끌어들였다.
“기괴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여보. 경계하시오. 놈은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니.”
후작 부인이 굳은 얼굴로 세 뼘짜리 얇은 지팡이를 쥐었다.
은은한 마력이 호수의 물결처럼 번졌다.
“대공 전하! 뭐 아는 거 있으십니까?”
텐티아의 물음에 그는 산발적으로 떠오르는 단편적인 지식을 하나로 엮었다.
‘제이릴리스는 폭군이었지만…… 경계 너머의 옛것들을 혐오했다. 침식자들과도 절대 타협하지 않았어.’
그는 목소리를 착 내리깔고 빠르게 말했다.
“황제 폐하가 보내신 놈들은 아니네. 그리고 보아하니 후작 각하가 불러온 놈들도 아니군.”
“그런 거 말고, 어떤 놈들이고, 약점은 뭔지 같은 거 말입니다!”
“나라고 이런 걸 어디서 보았겠는가? 나는 살면서 수도 밖으로 나가본 적도 없다네.”
나동그라진 지네가 다시 몸을 일으키며 달려들었다.
후작이 미간을 찌푸리며 검 자루에 손을 얹었다.
사악-!
검이 새가 날 듯 휘둘러졌다.
텐티아는 일순 경탄의 표정을 지었고, 발렌시아누스는 저 검이 자신에게 향할까 우려했다.
쩌적, 그리고 털썩.
지네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손가락 한 마디 두께의 갑각이 푸딩처럼 잘려 나가고 녹색 체액이 복도에 흩뿌려졌다.
자각자각, 자각자각.
그 직후 끔찍한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붕 안, 바닥 아래, 복도 저편에서까지.
“시이익!”
끔찍한 소리를 내지르며 침대 아래서 지네가 튀어나왔다.
쿵!
발렌시아누스는 반사적으로 그 지네의 등판을 짓밟고 정수리를 꿰뚫듯 검을 내리찍었다.
하얀 독액이 가득한 송곳니가 후작 부인의 발목 코앞까지 닿아 있었다.
“……고맙구나.”
후작 부인이 얼굴을 찌푸러트리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입구에서 들어오는 두 번째 지네를 베어 넘기며 후작이 말했다.
“자네 말대로, 치안이 좋지 않군.”
“제가 말했잖습니까!”
“내 아내나 아들이 다친다면 책임을 물어야겠어.”
발렌시아누스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감각을 느꼈다.
이 도시의 황제의 소유물이었고, 모든 권한과 책임은 황제에게 있었다.
‘제이릴리스에게?’
그는 진심으로 후작의 등에 검을 꽂아야 할지 고민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 괜찮아. 할 수 있어. 그 애가 또 전쟁터에서 구르는 걸 보느니……!’
왼손이 품속 단검을 향해 미끄러져 들어갔다.
“전하.”
그때 텐티아가 그의 왼손 손목을 쥐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실 겁니다. 제가 있고, 후작 각하가 있으며, 전하도 여기 있으십니다.”
처연한 눈빛의 기사가 검을 뽑았다.
퍽!
텐티아가 판금 덧댄 군화로 발렌시아누스의 발뒤꿈치를 노리던 지네 하나를 짓밟아 죽이고, 검을 휘둘러 막 창문으로 얼굴을 내민 지네 하나를 일도양단했다.
발렌시아누스는 작은 한숨과 함께 일어났다.
회귀 전과 달리 지금 그는 홍등가가 아니라 여기에 있었다.
“아퀴나스. 침대 위로 올라가서 애 챙겨. 절대 놓치지 마라.”
“알겠네.”
아버지가 된 청년은 결연하게 말했다.
발렌시아누스는 나쁘지 않은 눈빛이라고 생각하며 검을 뽑아 들고 후작의 곁으로 달려갔다.
“조심하십시오!”
“응?”
치이이익!
사람 눈높이만큼 고개를 쳐든 지네가 아가리에서 하얀 액체를 분사했다.
후작은 반사적으로 왼팔을 들어 올려 막았고, 질긴 제복이 연기를 뿜으며 줄줄 녹아내렸다.
“여보!”
후작 부인이 비명을 내지르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잉!
하얀 불꽃이 튀고 광선이 쏘아져 나가며 지네의 안면에 구멍을 뚫었다.
후작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뭘 조심하라고 말해줬다면 훨씬 좋았을 텐데.”
“죄송합니다.”
“그런데 아까는 이런 놈들은 살면서 본 적도 없다고 하지 않았나? 어떻게 놈이 독액을 뿜을 걸 알았지?”
“네?”
그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해맑게 웃었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매일 술이나 마시며 살았는데 그런 걸 어찌 알겠습니까?”
그는 돌가루와 먼지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천장을 푹 찔렀다.
검이 파르르 떨리고 녹색 체액이 뚝뚝 흘러내렸다.
-계승권 박탈까지 2시간 30분.
* * *
싸움이 이어지고, 그는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텐티아는 침대 주변과 후작 부인을 지키고 있었고, 뚫린 문은 후작이 막고 있었으며, 창문이나 천장으로 오는 놈들은 후작 부인이 막고 있었다.
‘질과 별개로 이 정도 수를 사역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하지만 이 정도 수를 갈아 넣는다고 후작을 뚫을 수 있을 거 같지는 않다. 고가치의 사역마를 이렇게까지 소모할 이유가 있나?’
그는 죽은 지네의 사체를 흘깃 바라보았다.
길이는 약 4m, 마디 하나의 폭과 길이는 약 40cm였다.
그 가로세로 40cm의 마디 하나하나에 은가루가 묻어 어떠한 술식을 그리고 있었다.
“은가루?”
은은 마나와 가장 친한 물질이었기에, 마력 회로를 구축할 때 자주 쓰였다.
발렌시아누스는 그 술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회귀 전에도 꽤 많이 본 거 같았다.
그가 직접 그린 적도 있던 거 같았다.
그는 문득 세레라지에의 부제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그녀의 진가인 사슬 전격이나 연쇄 번개 한 방이면 이깟 지네 마물들은 일격에 일소될 터였으니까.
“석판에 은으로 새기고, 마력을 불어 넣어서, 적진 한가운데에 던지거나 떨어트리면…….”
불현듯 지난 기억이 떠올랐다.
“후작님! 당장 나가야 합니다. 텐티아 경. 애랑 아퀴나스 대공 챙기게.”
“예?”
“설명할 시간 없네, 빨리!”
“잠-깐!”
후작이 우렁차게 포효하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가 쥔 장검에서 지네의 체액이 뚝뚝 흘러내렸다.
“나는 이 괴물 새끼들이 몰려온 원인으로 발렌시아누스 대공 그대를 지목하고 싶군. 이 방으로 우리를 부른 것도 그대고 문을 열어준 것도 그대 아닌가?”
그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납득 가능한 의심이었다.
“어디로 갈지, 무슨 생각인지, 도대체 이 괴물 새끼들은 다 뭔지!”
후작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솔직히 답하지 않는다면 한패로 알겠네.”
발렌시아누스는 사방에 널린 지네 사체를 바라보았다.
제물의 생명을 이용해 주술을 발동하는 건 아주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쏴아아아, 번쩍, 우르릉.
창밖에서 비바람이 불고 천둥 번개가 쳤다.
그는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면, 하고 이를 악물고, 절제된 몸동작으로 방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텐티아 경. 잠시만 문을 맡아주겠나.”
텐티아가 문 앞으로 달려가고, 후작 부부가 그를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자각자각, 자각자각.
막 천장 위에서 또 지네가 기어가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다시 검을 들어 천장을 찌르고 비틀었다.
“키익!”
비명과 함께 녹색 액체가 줄줄 흘러내렸다.
뚝, 뚝.
그 액체가 바닥에 닿는 순간 발렌시아누스는 직감했다.
“제가 왜 나가야 한다고 했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주술이 완성되었다.
번-쩍!
저 구름에서 노란 번개가 나뭇가지처럼 뻗어 내려왔다.
쾅!
창문과 벽돌 벽이 박살 나고 달아오른 공기가 터지며 방 안의 모든 집기와 가구를 산산조각났다.
아기 역시 아퀴나스가 몸으로 감싸지 않았다면 그대로 압력에 눌려 죽을 뻔했다.
직격은 피했지만, 벽 근처에서 그 잔류를 얻어맞은 후작이 입을 쩍 벌리고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미리 검을 바닥에 꽃아 전류를 흘려낸 발렌시아누스와 신발 바닥까지 강철 징을 박은 텐티아만이 몸을 떠는 정도로 끝났다.
쏴아아아-.
무너진 벽과 천장에서 비가 들이쳤다.
일순 지네들까지 도망가 방 안이 고요해졌다.
“아…… 죽을 뻔했네.”
발렌시아누스는 어깨를 돌리며 말했다.
“대공 전하, 이게, 이게 무슨…….”
텐티아가 당황을 넘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벼락 유도 술식. 전장에서 적 지휘부에 좌표를 찍고 연쇄 번개 떨어트릴 때 쓰거나, 벼락이 많이 치는 건물 근처에다가 반영구적으로 설치해서 피뢰침 대용으로 쓰지. 발동에 필요한 마나는…… 희생 제물 주술을 응용해서 이 지네 괴물들의 죽음을 이용한 거야.”
“제가 그걸 물은 게…….”
“일단 아기랑 아퀴나스부터 챙겨주게. 아마 곧 또 떨어질 테니.”
텐티아가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표정으로 움직였다.
발렌시아누스는 굳어버린 후작 부인의 등을 떠밀어 방 밖으로 내보내고, 후작에게 손을 내밀며 생글생글 웃었다.
“이제 제 말대로 방을 나설 생각이 좀 드십니까?”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웃음이었다.
“이런 개망나니 새끼…….”
후작이 침음성을 흘리며 비틀비틀 일어섰다.
“그래. 여기를 나가면 어디로 갈 생각이냐? 미리 말해두지만, 황궁 운운하면 목을 쳐 버리겠다.”
발렌시아누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황궁을 왜 가겠습니까? 와이번핏으로 갈 겁니다.”
“아.”
“벼락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튼튼하고, 어지간한 마물은 와이번들의 기세에 눌려 근처에 오지도 못하지요.”
한 번 포효하면 잘 훈련된 전투마들도 주인을 버리고 도망치게 하는 괴물이 와이번이었다.
최소한 거대 지네 따위는 없을 거다.
“비가 그치면 바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새 아들과 새 손자를 데리고요.”
“이곳의 교회에서 출생일을 등록하겠다 말했었지. 빗줄기를 보아하니 오래갈 비는 아닌 거 같은데, 나를 묶어두고 교회까지 갈 수 있겠느냐?”
제국에는 영주들이 만든 세속법, 교회의 경전과 관련된 교회법, 농민들 사이에 통하는 세속법, 도시 등에서 자체적으로 제정한 조례법 등이 공존했다.
탄생과 죽음은 교회법에서 관장했는데, 교회는 해가 뜨는 걸 하루의 시작으로 보았다.
마르테 후작의 얼굴에 다시 승리의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해가 뜨면 곧바로 출발할 것이다. 네놈이 내 손자를 데리고 교회까지 다녀오는 걸 기다려 줄 마음은 없다. 출생신고는 내 영지로 돌아가 하겠다.”
“아.”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로구나. 하지만 어쩔 수 있느냐? 참아내거라.”
“그게 아닙니다.”
발렌시아누스가 다시 한번 생글생글 웃었다.
노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요요하게 빛났다.
“뭐?”
“와이번핏에는 기사들을 치료하고 마법사들을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해 주교급 수도사가 상주합니다.”
교회는 공간일 뿐, 중요한 건 사제다.
정확히는 사제가 선포하는 공간이 곧 교회다.
“출생도 결혼도 사망도 모두 그곳에서 처리할 수 있습니다.”
발렌시아누스가 친절한 행정관료처럼 말했다.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그는 잠시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가 뺐다.
그의 아내와 새 아들과 새 손자가 모두 텐티아와 함께 있었다.
* * *
마나를 다룰 수 없는 자가 일행 다섯 중 하나뿐이었기에 이동은 빨랐다.
비 내리는 밤에도 와이번핏에는 경비병들이 있었고, 그들은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된 고관대작들을 보며 당황했지만, 이내 규정대로 출입을 허용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어제 사용했던 회의실로 향했다.
병사들이 숙직실에서 가져다준 수건으로 몸을 닦고, 벽난로에 장작을 넣은 뒤 소파에 늘어졌다.
그곳에는 괘종시계가 있었고, 시곗바늘은 오전 0시 30분을 가리켰다.
“축하하네. 아퀴나스 백작.”
나는 아퀴나스에게 그가 받은 새로운 작위로 인사했다.
일반적으로 황제의 동생이나 자식은 대공, 공작이나 후작의 친족은 백작, 백작의 친족은 남작으로 대우받았다.
“이제 저는 법적으로 황족이 아닌 거군요.”
아퀴나스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
나는 묘한 기분으로 그 인사를 받았다.
“천만의 말씀. 오늘 아침까지는 어디 갈 생각 말고 딱 붙어있게.”
후작과 잠시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검을 쥐지는 않았다.
텐티아 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치이이익…….
그때 벽난로에서 타오르던 불이 꺼졌다.
“아, 잠깐만, 제발.”
나는 탄식하며 검을 들었다.
벽난로 굴뚝 위에서 거대한 지네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아까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그대로 2m이 넘는 놈들이었다.
까득, 까드드득, 범람하듯 기어나온 그것들이 한 점으로 뭉치며 인간의 형상을 이뤘다.
꼭 검게 칠한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 같았다.
그 모욕적인 모습에 후작과 텐티아 경이 성호를 그으며 이를 악물었다.
지네가 뭉쳐 만들어진 벌레 기사는 총 셋이었는데, 한 명은 전투 망치, 한 명은 검, 한 명은 군도를 쥐고 있었다.
군도를 쥔 놈이 투구 면갑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나는 그 안에서 끔찍한 벌레의 얼굴이 나오리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그 얼굴은 너무나 평범한 사내의 것이었다.
“어?”
“아이를 내놓거라!”
하지만 놈이 한 말은 내 예상대로였다.
그래서 나도 원래 하려던 대로 했다.
“퉤!”
그 벌레 새끼의 얼굴에 침을 뱉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