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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31화 (31/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31화

(31)

쾅!

군도를 쥔 놈이 내게 돌진했고, 나는 놈에게 치여 회의실 밖으로 나동그라졌다.

복도 바닥을 알밤처럼 데굴데굴 구르다 간신히 일어나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외쳤다.

“젠장…… 거기 아무도 없느냐!”

밤이 깊었고, 대부분의 숙직 인원은 와이번들 근처에 머물렀으며, 빗소리는 아직 요란했고, 이곳은 직원들이 거의 올 일이 없는 층에 만들어졌다.

다시 말해, 거기에 아무도 없었다.

“너를 도와줄 자는 없으니, 반항하지 말고 운명을 받아들이거라. 두 대공은 죽고, 제국은 불탈 것이다.”

벌레 기사가 관절에서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몸이 너무 검어서 하얀 얼굴만 둥둥 떠다니는 거 같았다.

나는 놈이 얼굴에 묻은 침을 닦아내는 걸 보며 말했다.

“운명? 우습구나. 너도 반항하지 말고 운명을 받아들였다면 좋았을 텐데.”

경계 너머에는 수많은 고대 악신과 듣도 보도 못한 괴이들이 이 세상에 손을 내밀 기회만 노리고 있다.

좌절과 절망에 빠져 세상을 원망하는 사람이 빛의 가호를 버리고 자신의 불경한 이름을 부르도록 유혹하면서.

“이것이 내 운명이니라.”

놈이 새까만 군도를 베어 내렸다.

카앙-!

나는 검을 들어 올려 막았으나, 그 덩치와 힘에 떠밀려 몇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혓바닥까지 물러서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광명의 주께서는 그런 운명을 쓰지 않으신다. 교회 묘지에 묻히지도 못하는 놈이 운명을 운운하느냐?”

나는 놈의 선택을 비웃고 비난했다.

이는 놈의 분노를 돋구는 한편 내 분노를 해소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빌어먹을 침식자 놈들.

반쯤 자연적으로 생겨나 빠르게 번지는 초파리 같은 놈들이지만, 설마 벌써 황가와 후작의 비밀 회담을 알아낼 정도의 세력을 갖췄을 줄은 몰랐다.

아니, 어쩌면 지난 1년의 혼란기를 타고 미친 듯 성장한 걸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나를 버렸는데, 어찌 교회 묘지에 묻히는 게 내 운명이겠느냐?”

“세상이 정녕 너를 버렸다면 너는 네가 이물을 받아들일 때까지 살아남지도 못했을 거다.”

놈이 울컥하는 표정을 지었다.

놈의 몸뚱이에서 튀어나온 지네 다리들도 분노로 바들바들 떨었다.

아마 놈은 수도 빈민가 출신일 거다.

잃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 놈들이 세상을 증오하니까.

“황자-”

놈이 뭐라 외치려는 순간 나는 놈의 말을 끊었다.

“닥쳐라, 죄인아! 너는 분명 그렇게 망가지지 않을 수 있었느니라.”

나는 저런 침식자들이 보통 범죄자들과는 본질부터 다르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배가 고파 돈을 훔치고, 분노에 치밀어 사람을 죽인다.

하지만 배고프고 분노에 치밀었다고 해서, 온 세상 사람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여버리거나, 악마의 숙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세상에는 이해할 수가 없는 놈들이 아니라, 이해할 필요가 없는 놈들이 존재한다.

그런 놈들은 다 잡아다가 불구덩이에 쓸어 넣고 태워야 한다.

그래야 수많은 보통 사람이 멀쩡하게 살 수 있다.

“네게 안식을 주마.”

타악, 나는 검을 쳐들며 달려들었다.

* * *

벌레 기사가 군도를 위협적으로 치켜들었지만, 발렌시아누스가 보기에는 미숙하기 그지없는 자세였다.

경계 너머의 존재들은 사내에게 힘은 주었지만, 기술은 주지 못했다.

그는 빠르게 돌진하며 제국 검술을 펼쳤다.

1단계. 일체개고.

까드드드득-!

또래에 비교해 몇 배는 많은 마나가 근섬유 한 올 한 올을 감싸며 보조하고,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는 묘리에 따라 근육이 강하게 비틀리며 수축했다.

수축이 정점에 달하는 순간, 발렌시아누스는 벌레 기사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검을 휘둘렀다.

츠카악-!

길게 벤 검이 벌레 기사의 옆구리를 깊게 찢었다.

“크악!”

놈이 일순 중심을 잃고 크게 휘청였다.

군도가 바닥을 치고 돌가루가 튀었다.

발렌시아누스는 뒤를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침식자들이 인간과 달리 옆구리 한 번 베였다고 죽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등을 공격하는 건 귀족이나 기사들의 전투에서 비겁한 짓이었지만, 상대는 귀족도 기사도 아니었다.

“네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다!”

사악, 사아악!

“너는 비겁함과 질투, 근거 없는 피해망상에서 기어 나왔지.”

츠카아악-!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이 세상의 모든 걸 파괴하려 하는 더럽고 추악한 괴물아!”

푹, 푸욱!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지옥으로 돌아가라!”

발렌시아누스의 검은 인체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약점을 찌르고 베었다.

발뒤꿈치 힘줄을 끊고, 무릎 뒤쪽을 관통하고, 척추를 세 단계에 거처 부수고, 어깨를 찌르고, 목덜미를 깊게 베어냈다.

그러나 상대는 악신에게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판 괴물이었다.

우드득, 퍽!

팔이 이상하게 회전하더니, 인간은 굽힐 수 없는 각도로 돌아가 발렌시아누스를 후려쳤다.

사악!

그러나 발렌시아누스는 예견했다는 듯 받아쳤다.

“내가 네놈 같은 괴물을 한두 번 죽여 보는 줄 아느냐!”

그는 벌레 기사의 손목을 베어내고 목에 검을 찍으려 했지만, 벌레 기사의 갈비뼈에서 지네가 머리를 쳐들고 돌진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왼팔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그의 손목은 단단한 건틀릿이 아니라 얇은 여름 제복 소매 안에 들어 있었다.

“이런 젠장!”

발렌시아누스는 분명 맹독이 있을 지네의 아가리가 가까워지는 걸 실시간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희고 붉은 바람이 불어왔다.

쿵!

유성처럼 달려온 텐티아가 어깨로 벌레 기사를 들이받았다.

강철 삼각뿔 돋은 견갑에 짓눌린 벌레 갑각이 깨지고 체액이 튀었다.

벌레 기사가 걷어차인 듯 휘청이며 중심을 잃었고, 텐티아는 은은한 붉은빛이 감도는 검을 내질렀다.

서걱!

벌레 기사의 팔이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대공 전하, 괜찮으십니까?”

“자네가 여기 오면 어떡하는가? 혹여 아퀴나스가 죽기라도 하면-.”

“후작 부인의 열선 마법 덕에 그쪽은 대충 정리되었습니다. 후작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열선이라. 그래. 저런 놈을 상대하려면 토막토막 끊어 버리는 게 제일 낫겠군.”

“제가 베겠습니다. ‘불망’으로 저를 지켜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당연히 할 수 있다, 고 대답하려 했던 발렌시아누스는 멈칫했다.

텐티아가 누구의 명령으로 자신 곁에 머무는지 떠올렸기 때문이다.

16년을 성실하게 살았다 해도, 지난 1년간을 검을 놓고 있다가 최근에는 카지노까지 드나드는 파락호가 제국 검술 2단계를 쓰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텐티아는 이미 대답을 들었다는 듯 움직였다.

그녀는 발렌시아누스가 지하수로 안을 걸으며 보여줬던 과감하고 당당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그게 그의 본모습이리라.

그가 제 실력을 낼 수 있게, 제 모습을 보일 수 있게, 제 이야기와 계획을 꺼낼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시작은 검술부터.’

언제나 몸을 쓰는 게 제일 정직했다.

그녀의 검에 붉은색 마나 블레이드가 덧씌워지며 은은하게 빛났다.

‘이런 젠장.’

발렌시아누스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제국 검술 2단계를 준비했다.

지금 텐티아는 전신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반드시 사지와 마나 회로가 멀쩡한 소드마스터가 되어 제국의 국경을 책임져줘야 했다.

얼마나 강한 독을 품고 있을지 모를 벌레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게 할 수는 없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그의 검이 아릿하게 울었다.

“다, 다, 다, 다, 다 죽여버리겠다. 불길하게 소용돌이치는 분이시여, 10만 개의 다리로 기어 오는 분이시여, 하나이자 여럿인 분이시여, 이 미천한 종의 기도를 들으사-.”

벌레 기사가 장중한 목소리로 기도했다.

팍, 팍, 파악!

그의 등과 목덜미 사이에서 수십 마리의 지네들이 긴 촉수처럼 튀어나왔다.

발렌시아누스는 손바닥 위에 피워올린 불길을 벌레 기사에게 던지며 말했다.

“네놈이 한 말 중에 맞는 건 네놈이 미천하다는 것뿐이다.”

“시이이이이익!”

벌레 기사가 불길을 쳐내며 거대해진 군도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목덜미를 노리는 늑대처럼 달려든 텐티아는 마나 블레이드 일렁이는 검으로 벌레 기사의 허리를 그었다.

사악-!

강철처럼 단단한 벌레 갑각이 너무나 손쉽게 잘려 나갔다.

녹색 체액이 팍! 하고 터졌다.

그리고 벌레 기사의 등과 목덜미에서 돋아난 수십 마리의 지네가 텐티아를 찢어버릴 기세로 달려들었다.

“시이이이익!”

송곳니에서 하얀 독액이 뚝뚝 흘러내렸다.

발렌시아누스는 그 순간 제국 검술 2단계를 펼쳤다.

불망(不忘).

잊지 않는 검이자 놓치지 않는 검.

사아악, 사악!

신경 반사 단위에서 휘둘러진 검격이 손바닥보다 커다란 지네 머리통을 우수수 떨어트렸다.

몇 마리는 아래쪽으로 돌고 몇 마리는 옆구리로 파고들었지만, 반쯤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펼쳐지는’ 반격기는 텐티아를 노리는 아가리들을 모두 반으로 베었다.

“잘하셨습니다!”

텐티아가 희열에 차 웃으며 검을 쳐들었다.

츠카아악-!

사아악!

서걱!

그녀의 검이 몇 번이고 휘둘러지고, 수백 마리의 지네는 오래지 않아 모두 반쪽이 되었다.

“경. 고맙네.”

감사 인사를 한 발렌시아누스는 지네 사체 사이를 발로 뒤적거리다 손바닥 절반 크기의 구리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싸구려 종이만큼 얇은 구리판이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는 구리판에 그려진 몇 명의 사람들을 텐티아에게 보여주었다.

“못으로 얇은 금속 조각에 그림을 그려놓은 거네. 제대로 된 종이보다 훨씬 싸고 질기니 빈민가 놈들이 애용하지.”

“으음.”

“어리석은 놈이었네. 이런 걸 나눌 만한 상대가 있었고, 이런 걸 나눌 만한 상대가 있던 세상인데.”

“전하께서는…… 침식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발렌시아누스는 칼같이 답했다.

“대화할 필요가 없는 것들.”

“말은 통하지 않습니까? 심리전을 거는 것도 가능하고요.”

텐티아가 순수한 의문이 어린 질문을 던졌다.

발렌시아누스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집구석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집안 기둥뿌리까지 뽑아 부수어 버리겠다는 놈들과 무슨 대화를 하겠는가?”

그는 구리 조각을 구깃구깃 구긴 뒤 지네 사체 더미에 다시 던져버렸다.

“심지어 내가 집주인인데 말이네.”

비정한 태도였다.

하지만 텐티아는 일순 그의 눈동자에 아주아주 잠시 동정의 빛을 보았다.

* * *

“이후 사제와 병사들을 불러 침식자의 잔해를 불태우고 전 아퀴나스 대공의 신원을 완전히 인도했습니다.”

“후작은 몇 시에 출발했나?”

응접실에 마주 앉은 제이릴리스의 목소리에서는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발렌시아누스는 바싹 긴장하며 물음에 답했다.

“오늘 오전 6시 30분에 와이번핏에서 출발했습니다.”

“보고할 내용은 그게 전부인가?”

그는 잠시 궁무대신이 제이릴리스에게 아퀴나스의 사생아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지 하지 않았을지 고민했다.

“실은, 아퀴나스 공자에게 사생아가 있었습니다.”

그는 제이릴리스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양심에 떳떳한 일을 했고, 그러면서도 그의 황제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이제 그의 손을 떠났으니, 남은 건 엄중한 판결을 기다릴 뿐이었다.

“사생아?”

그녀는 놀란 거 같기도 했고, 놀라는 척해 주는 거 같기도 했다.

“그렇군. 후작. 계승권으로 장난을 칠 생각이었나?”

제이릴리스가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그대는 그 사생아를 살려서 보내 주었다는 말인가? 계승권을 가진 아이를?”

적의 없는 살의가 그 목소리에 작은 가시처럼 으스스 돋았다.

발렌시아누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이릴리스가 다시 물었다.

“그럼 그 사생아를 죽였는가?”

“아닙니다.”

“그럼 어찌했다는 말이냐?”

“사생아는 오늘 아침, 아퀴나스 백작의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황제는 그 말을 듣고 나지막하게 웃었다.

“아퀴나스 백작의 아이라. 그래. 백작의 아이는 황위 계승권이 없지. 머리를 잘 썼구나. 그런데, 왜 죽이지 않았느냐? 그랬다면 네 몸이 훨씬 더 편했을 텐데.”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피로 물든 즉위식을 한 황제에게 생명의 가치를 논하는 건 기만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해타산의 논리를 꺼내들었다.

“플라니티에스 후작가에 황가의 혈통을 넣어 놓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유는?”

발렌시아누스는 지금 대답이 중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그 아기가 훗날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침식자가 된다면, 폐하의 대숙청이 옳았음을 증명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황족은 침식률이 높았다.

짧은 침묵 끝에 제이릴리스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백금발이 드리운 음영 아래서 노란 눈이 부드럽게 휘고, 낭랑한 웃음소리가 응접실 전체에 울렸다.

“역시 짐의 혈육이로다. 훌륭한 판단이었다. 그대를 그 자리에 앉히고 이 일을 맡긴 게 옳았구나. 잘했느니라.”

그때 발렌시아누스는 문득 한 가지를 알아차렸다.

회귀 전에서도 오늘과 같은 일이 있었다면, 후작이 사생아로 음모를 꾸미고, 정체 모를 제3의 세력이 아퀴나스를 노리고, 제이릴리스도 누군가를 보내 사생아를 처리하려 했다면.

이번에 제이릴리스가 보낸 누군가는 바로 발렌시아누스 그 자신이라는 것을.

“2주의 휴가와 일백 닢의 금화를 주겠다. 어디든 좋으니 푹 쉬고 오너라. 단, 카지노만큼은 불허한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마지막 문장에는 약간의 장난기까지 깃들어 있었다.

“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잘됐다. 안 그래도 루디랑 마탑을 한 번 다녀와야 했는데.’

그는 고개를 숙이며 물러섰다.

‘세상이 흉흉하니, 마총을 사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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