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35화 (35/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34화

(34)

게스타르테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마총이 든 가방을 건넸다.

도망치듯 방을 나서며 나는 말했다.

“울그림의 펜촉에는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

“원로들께서는 그걸로 고대 마도서를 해독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그건 그렇게 대단한 마법이 걸린 물건이 아닙니다. 아니, 애초에 자동서기 마법 자체가 꽤 어설픈 마법입니다.”

“뭐?”

“통제되지 않는 지식을 제멋대로 출력하며 지성을 타락시키다, 끝내 모두를 침식의 길로 이끌 파멸적인 계획이었습니다.”

“너. 그걸 어떻게?”

제스테르테가 고개를 들었다.

“황실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 정도로 이야기해 드리지요. 이건 제가 내는 마총 값입니다.”

“잠깐……!”

거기까지 말한 나는 곧바로 방을 나섰다.

승강기에 타자마자 세레라지에가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스승님 배에 검 찌를 줄 알고 긴장했어.”

“내가? 미쳤어? 그러다가 바삭하게 타 죽으라고?”

“그럼 안 찌를 거였니?”

“최후 최악의 시나리오는 내가 찔리는 거였지.”

“뭐?”

당황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절도미수로 협박한 다음에, 그게 안 먹히면 펜촉 이야기를 꺼낼 거였어. 성공했으면 상아탑 망할 뻔했다고. 그걸 알려준 값으로 마총 받아 갈려고 했지.”

사실 성공할 확률은 이쪽이 훨씬 더 높을 거다.

“그럼 왜 그렇게 안 했니?”

“누나 때문에.”

“뭐?”

“나는 누나가 상아탑에 부채감이 있다고 생각했어.”

그녀가 상아탑에 가지는 마음은 ‘내쫓겼다’가 아니라 ‘배울 건 다 배워 놓고 공헌도 하지 못하고 떠나 버렸다’에 가까웠을 거다.

“상아탑이랑 황궁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때 상아탑을 택할 거라고도.”

사람은 절대 어린 날의 행복한 기억을 배신할 수 없다.

세레라지에는 부정하지 않았다.

“황궁에는 지금도 이런저런 유물이나 마도구가 많아. 그걸 상아탑에서 누나를 통해서 가져가려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그게 무슨-.”

나는 서늘하게 말했다.

“말했잖아. 울그림의 자동서기. 그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파멸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고.”

“그래서 상아탑의 비정함에 대해 말한 거니?”

“아니.”

나는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상아탑은 많은 비밀과 위험을 독점하고 있고, 세속의 어떤 권력자도 그들을 틀어쥘 수 없지. 그들을 감시해줄 사람이 필요한데, 그 사람은 반쯤 내부인이어야 해.”

고해성사라도 하듯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너.”

“그 사람은 상아탑에 부채감이 있어서는 안 되지만, 기본적으로 호감을 품고 있어야 해.”

세레라지에가 쓰게 웃었다.

“마총은 핑계였니?”

“아니. 마총 사려고 온 거 맞아. 그런데 아래 로비에서 누나 표정 보니까 이참에 확실히 안 끌어들이면 다시 돌아가겠다고 해버릴 거 같더라고.”

“내가 네 편을 들어줄 줄은 어찌 알았니?”

“자기를 버렸다고 인정한 사람을 편들어주기는 쉽지 않지.”

“이걸 다 털어놓는 게 너와 내 관계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니? 내가 듣기에는 일부러 나와 상아탑 사이를 떨어트렸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그것도 거의 즉석에서 내 반응을 보고, 마총 협상과 동시에.”

1층 로비에 승강기가 가까워지는 걸 느끼며 나는 답했다.

“맞아.”

누나는 회귀 전에 평생 상아탑에게 쫓겼고, 그러면서도 상아탑에게 이용당했고, 끝내 상아탑을 미워하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상아탑이 누나를 지켜 주지 않은 걸 끝까지 인정 안 했으니까.

사람은 어린 나이의 행복한 기억을 부정할 수 없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이용당했다는 걸 인정하는 건 너무 힘들고 비참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궁정 마법사’ 세레라지에가 필요했고, 그녀가 상아탑에서 정서적으로 독립하기를 바랐다.

그게 세레라지에에게 아픔이 된다 해도, 제이릴리스에게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그랬어.”

세상에는 아무리 소리치고 싸워도 바뀌는 게 있는가 하면, 입 밖으로 꺼내기만 해도 바뀌는 게 있다.

오늘 바뀐 건 후자였다.

이제 그녀는 절대 나를 용서하지 않겠지.

“고맙다. 이 쓰레기 같은 동생아.”

세레라지에가 새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쳤다.

번쩍!

푸른 전격이 튀었다.

* * *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로비 앞, 루디는 수십 마리 종이 새에 둘러싸여 동물 귀 머리띠를 하고 거리 음식을 양손에 들고 있었다.

나는 핏줄이 터져 피멍이 줄줄이 든 손을 하얀 장갑으로 가리며 말했다.

“누나가 새 지팡이를 시험해보려다가 위력 조절을 잘못했지 뭐야.”

아무튼 거짓말은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인 세레라지에가 적잖이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루디. 나는 먼저 돌아갈게. 발렌이랑 더 놀다 들어가렴.”

“네?”

“나는 출장 나온 거란다. 지금도 늦었어.”

“아. 조심히 들어가세요.”

세레라지에가 사라지고, 루디는 나를 바라보았다.

“대공 전하. 세레라지에 님이랑 싸우셨죠?”

“아니? 왜?”

싸운 건 아니었다.

한 명은 수작으로, 한 명은 전격으로 주고받았을 뿐.

루디가 잠시 불경한 눈빛을 보내더니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저는 언제나 전하 편이지만, 그래도 이 말씀은 꼭 드릴게요. 누군가를 위해서 무언가를 할 때는, 꼭 물어보고 하세요. 무책임한 배려만큼 독선으로 느껴지기 쉬운 것도 없으니까요.”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전하를 위해 하는 말씀이에요. 상대는 바라지도 않는데, 혼자서 고생하고 욕까지 먹으면 너무 어리석은 짓이잖아요.”

“그렇지.”

“언젠가는 알아줄 거라고도 생각하지 마세요. 결과적으로 옳았다고 사람 마음이 쉽게 바뀌지는 않으니까요.”

루디 말이 맞다.

회귀 전 제이릴리스의 잔혹한 결정은 대부분 결과적으로 옳았지만, 나조차도 그걸 마냥 옹호하지는 못했다.

문제는 그게 옳았다는 거다.

“새겨들을게.”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늘 사야 할 마도구가 있었다.

상아탑에서 과제로 많이 만드는 물건이었으니 하나쯤은 있을 거다.

루디는 나를 따라오며 말했다.

“제 말 안 듣고 있으시죠?”

“아니. 왜?”

“그때하고 똑같은 표정이세요.”

“언제?”

“텐티아 경 초대해서 미혼향 피워놨을 때요.”

그 말을 들은 나는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아무에게도 말 못 하는 뭔가가 있으신 거죠?”

대답하지 못했다.

루디가 녹색 눈을 빛냈다.

영혼이 꿰뚫린 기분이었다.

“이상하세요. 내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내가 옳다고 오지랖을 떨면서 막 나서는 사람들과 다르세요. 그렇게 나서는 사람들은 언제나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움직여요. 몇 번 들어맞은 걸로 자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발렌 님은, 평소에는 너무 고요하세요. 그러다가 가끔, 이상하리만큼 열정을 불태우세요. 그래야 한다는 걸 아는 것처럼요.”

한참 말을 잇던 그녀가 아, 하며 머리를 숙였다.

“주제넘었습니다. 언제나 믿겠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죄송합니다.”

“아니야. 괜찮아.”

나는 그녀의 반응을 이해했다.

그녀의 말대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은 결과로 딱딱 매듭지어지는 게 아니니까.

“지금은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아, 저쪽 골목으로 가야 했는데.”

“아까 그 가게요?”

“응.”

골목은 아까보다도 훨씬 어두침침했다.

가게 주인은 돌아온 우리를 보고 깊이 허리를 숙였다.

“신사분께서는 뭘 찾으십니까?”

“내 시녀가 쓸 만한 안경 있나? 초점 안경? 사점 안경? 뭐라고 불렀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군.”

“아. 사점 안경을 찾으십니까? 예. 몇 개 있습니다. 그런데 활이나 석궁을 쏘시는 분 같지는 않은데…….”

“안 팔 텐가?”

주인이 가게 안쪽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루디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사점 안경이 뭔가요?”

“자동으로 표적을 조준해주는 마도구. 활시위 당길 힘만 있으면 누구나 명사수가 될 수 있지.”

“우와. 대단한 마도구네요. 처음 들어봐요. 아주 귀한 마도구인가요?”

“음…… 만들기 쉬운 건 아니야. 이런저런 마법을 다 각인할 줄 알아야 해서. 그래도 대단한 기술이 들어가지는 않아. 딱 상아탑의 고학년 시험 느낌?”

“그런데 왜 다들 안 써요?”

나는 회귀 전의 기억을 잠시 회상했다.

“그걸 쓰고 쏴도 활이나 쇠뇌의 위력이 강해지는 건 아닌데, 주술 회로 새겨진 기사 갑옷은 그냥 활이나 쇠뇌로 못 뚫거든. 또, 정확히 갑옷 틈새의 약점을 알려주고 이런 건 아니라서 기사끼리 싸울 때도 썩 유용한 건 아니고.”

캐스팅이 오래 걸리지만 위력이 강한 광역 마법이 마법사 사회의 주류가 되면서, 정확한 조준의 필요성이 낮아졌다.

“제가 알기로는 화살에도 주술 회로를 새겨서 위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아는데요. 그럼 갑옷도 뚫을 수 있지 않나요?”

“평범한 병사들은 이런 안경과 그런 화살을 살 돈이 없지. 그걸 살 돈이 있는 기사나 상급 용병이면 굳이 이런 안경이나 그런 화살이 없어도 잘 싸우고.”

“그럼 제게 왜…….”

그때 돌아온 주인이 납작한 상자를 열어 보여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시녀님께는 이게 잘 어울릴 거 같네요.”

크고 동그란 렌즈에 검은 철사로 만든 얇은 테와 다리를 단 안경이었다.

“너무 약하지 않나?”

“아닙니다. 구부려 보십쇼. 좋은 합금 재질에 강화 마법도 걸려 있어 어지간해서는 안 부러집니다.”

“강화 마법까지?”

“예예. A+ 맞은 과제물이라고 하더군요.”

상아탑에서 A+면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순순히 납득하며 작은 목소리로 가격을 물었다.

루디가 가격을 들으면 안경을 모시고 다니려 할 게 뻔했다.

“금화 40닢?”

“신사님. 80닢은 주셔야 합니다. 제가 사들인 가격이 50닢이었습니다.”

주인이 기겁하며 빠르게 속삭였다.

“요즘은 기껏해야 쇠뇌 사수들 조준하는 감 잡으라고 쓰는 걸 뭘 그리 비싸게 받으려 해. 55닢.”

“70닢. 더는 못 깎아 드립니다.”

“60닢. 어지간한 사람들 연봉보다 더 남겨 먹으면 충분하지 않나?”

“65닢. 여기 임대료가 장난 아닙니다.”

“그래. 60닢. 내 이해해 주겠네.”

나는 아직 돈이 궁했다.

“예. 예?”

“분명 알았다 했네!”

“……이런. 당했군요.”

나는 루디가 보지 못하도록 몸을 카운터 안쪽으로 기울이고 값을 치렀다.

“써 봐.”

“감사합니다.”

루디가 배시시 웃으며 안경을 받아 들었다.

눈이 작아 보일까 걱정했는데, 도수가 들어간 게 아니라서인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되려 얇은 검은 테가 그녀의 눈매를 장식해주는 거 같아서 더 보기 좋았다.

“어때?”

“움직이는 게 되게 잘 보여요. 뭐랄까? 제가 보려는 걸 붉은 점으로 표시해주는 느낌? 이쪽에 겨누면 된다. 이렇게요.”

“좋네.”

“저는 어떠신가요?”

“응?”

“잘 어울리나요?”

“응. 아주 잘 어울려.”

그녀가 다행이다, 하고 중얼거렸다.

“잘 때랑 씻을 때 빼고는 안 뺄게요.”

“그래. 꼭 하고 다녀.”

가게를 나서며 루디가 물었다.

“그런데 제게 활이나 쇠뇌라도 가르쳐 주시게요? 저 힘 약해서 제대로 못 당길 텐데요.”

나는 사각 가방을 가볍게 치며 답했다.

“돌아가서 대답해 줄게. 여기는 너무 귀가 많다.”

* * *

“마총이요?”

방에 돌아와 내 설명을 들은 루디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뭐예요?”

나는 사각 가방을 열며 말했다.

“마법사들 최고의 걸작이자 치부.”

“걸작이면 걸작이고 치부면 치부지 그 둘이 왜 같은 거예요?”

“어지간한 마법사가 필요 없어질 정도로 너무 잘 만들어서?”

“아.”

상자 안에는 총 여섯 발이 들어가는 리볼버식 마총 두 자루가 있었다.

두 자루 모두 잘 관리된 듯 윤기가 반짝반짝 돌았고, 손잡이부터 총구까지 모두 은빛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작은 쇠뇌에서 활 부분을 땐 거처럼 생겼어요. 손잡이 쪽이 심하게 아래로 꺾이네요.”

“이건 그렇게 쏴야 편해.”

“쏘다니요?”

“이걸 쏘는 무기야.”

나는 가방 안에 들어있던 탄환 상자와 탄띠를 같이 꺼내 보여주었다.

탄환은 새끼손가락만 한 크기의 유선형 합금에 주술 회로를 새겨놓은 물건이었다.

루디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개당 은화 한 닢이 넘었다.

“이 마탄을 이 안에 채워 넣고, 공이치기를 당기고, 방아쇠를 당겨. 그럼 마법으로 공기가 폭발하고 탄환이 가속되면서 마탄이 앞으로 쏘아져 나가. 따로 폭발 술식 같은 게 새겨진 탄이면 기사도 상대할 수 있을걸?”

“이게 몇m이나 나가는데요?”

“내가 알기로는 한 500m?”

“네? 마탑 아래서 쏘면 위에 닿는다고요?”

“응.”

루디가 벌벌 떨며 상자를 내게 밀어냈다.

“제, 제가 받으면 안 될 물건 같아요. 차라리 대공 전하가 가지고 있으세요.”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루디. 나는 바로 어제 침식자와 싸웠어.”

“네? 침식자요? 그것들이 수도에 있다고요?”

보통 사람들은 매주 광명교회에 나갔고, 사제들은 주일마다 침식자에 대해 가르쳐 준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힘을 얻은 괴물들이라고.

“내가 온종일 너를 지켜줄 수는 없어. 누구도 그럴 수 없어. 네가 너를 지킬 수 있어야 해.”

“아.”

“나는 꼭 침식자가 아니더라도 적이 많아. 앞으로는 더 많아질 거고. 자칫하면 누군가가 너를 인질로 잡아서 나를 협박하려고 할 수도 있어.”

“그건…… 싫어요.”

나는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이건 부탁이야. 나 때문에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를 지킬 힘을 키워줘.”

루디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네, 네! 알겠으니까 빨리 고개 드세요. 뭐든 배울게요.”

* * *

마총은 생각보다 소리가 작았다.

표적의 구멍을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루디. 너, 너무 잘 쏘는 거 아니야?”

“발렌 님. 저…… 안경 없이도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나는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표적에는 구멍이 하나뿐이었다.

루디가 방금 쏜 열 발을 모두 첫 번째 구멍에 통과시켜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