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35화
(35)
“위스키 10병, 샀습니다. 포도주 3통, 샀습니다. 셔츠 5벌, 샀습니다. 이제 말린 과일하고 여섯 가지 소시지만 사면 되네요.”
루디는 수도 거리를 걸으며 목록을 확인했다.
대부분 추가금을 내고 가게에서 일하는 아이를 시켜 배송을 부탁했기에, 그녀의 손은 자유로웠다.
발렌시아누스는 자신의 휴가 기간이라도 같이 나가자고, 어차피 다 내가 먹을 술, 내가 먹을 과일이 아니냐고 말했지만, 루디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모시는 분을 편하게 하기 위해 시녀가 존재하는 건데, 수도 안 시장을 가는 것까지 황족과 함께한다면 그건 시녀 실격이었다.
‘제가 그분을 지켜드려야 하는데.’
누가 누굴 지키겠다는 건지.
루디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몰랐지만, 그건 백금기사단의 기사들도 제이릴리스를 대상으로 공유하는 고민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남부산 말린 과일을 좋아했고, 영지의 자급자족이 당연한 이 세상에서 그건 상당한 사치품이었다.
그가 카지노 등등의 장소에서 따 온 돈이 없었다면 황족 연금만으로는 꿈도 못 꿀 정도로.
루디는 말린 과일을 사려 남부 상단들이 모여 있는 구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몇 쌍의 시선이 그녀 뒤로 따라붙었다.
“맞지.”
“그래.”
“가자.”
빳빳한 검은 천으로 만든 정장형 드레스 위에 하얀 레이스와 리본을 덧댄 시녀복은 어디서나 여러 가지 의미로 눈길을 끌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에 늦봄 물오른 나무 같은 녹색 눈의 사근사근한 인상의 시녀가 입고 있다면 더더욱.
아무리 붉은 달무리 궁이 벽지라도 황궁 시녀는 좋은 신붓감이었다.
그녀 역시 원했다면 수도의 부르주아와 결혼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지금 따라오는 자들은 연애나 구애 같은 낭만적인 행위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자박, 자박, 자박, 자박!
루디가 겁먹은 듯 걸음을 재촉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그녀를 조소하듯 등 뒤의 발소리들도 점점 커졌다.
“!”
이내 루디는 천천히 멈춰 섰다.
눈앞의 길은 중간에 높은 담장으로 막혀 있었다.
* * *
막다른 골목, 그녀를 따라온 사내들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아가씨가 루디 맞지?”
“사실 아니어도 별 상관없기는 한데.”
그녀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다섯 명, 하나같이 덩치가 크고 몸이 날렵해 보였다.
팔뚝은 굵지만 배는 들어갔고, 수염 역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으며, 웃을 때마다 보이는 이 역시 가지런했다.
어디서 막 굴러먹다 온 길거리 하류 인생들이 아니었다.
“누구세요? 왜 저를 찾으시나요?”
그녀의 물음에 사내들이 답했다.
“우리는 원래 홍등가 쪽에서 일했는데, 아가씨가 모시는 분 때문에 잘렸어.”
“대단하시데. 검도 잘 쓰고, 주먹질도 잘하고, 귀하신 분이 언제 그런 걸 배우셨는지 몰라.”
“그분이 우리 가게를 다 때려 부쉈거든. 그런데 우리 같은 게 감히 그분에게 복수할 방법이 있나? 그냥 참아야지.”
“그런 줄 알았는데, 복수할 방법이 있더라고.”
착.
사내들이 곤봉과 단검을 뽑아 들었다.
“네 팔다리 힘줄을 잘라서 노예시장에 팔 거야. 많이는 못 받겠지만, 상관없어.”
루디는 비명을 질러 사람들을 모은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객관적으로 제국 수도는 치안이 괜찮은 곳이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도시에서 치안이 좋다는 건, 대낮에 대로에서 살인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정도를 의미했다.
하물며 상대가 홍등가 카지노 기도 출신이라면 어지간한 위병이나 자경단원은 가지고 놀 게 분명했다.
“소리도 안 지르네?”
“눈빛 봐봐. 장난 아니다.”
“표독스러운 걸 보니 주인이나 시녀나 똑같다.”
“야, 잡아. 네가 하자고 했잖아.”
“안 그래도 그럴 거였어.”
사내들이 하나둘 다가왔다.
루디는 겁먹은 표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물러섰다.
툭.
“이제 물러날 곳도 없네?”
등이 벽에 닿자, 그녀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맞아요. 다행이에요. 물러날 곳이 없어서.”
“뭐?”
“미쳤나?”
“무서워서 정신 나간 거 아니야? 그런 애들 가게에서도 많이 봤잖아. 다 잃고 웃는 애들.”
저도, 하고 운을 떼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에요. 무서워요. 그런데 팔다리 힘줄이 잘리면 더는 발렌 님을 섬길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녀의 양손이 치마 옆 단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망설이지 않고 쏠 수 있겠지요. 어쩔 수 없으니까. 그래요. 어쩔 수 없으니까.”
녹색 안광이 번뜩이고, 6연발식 마총 두 자루가 그녀의 손에 들려 나왔다.
어디서도 못 본 기이한 형태의 도구를 본 전 기도들은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웃었다.
“그건 뭐냐?”
“요즘 시녀들은 별걸 다 가지고 다니네.”
루디는 고개를 양쪽으로 가볍게 저었다.
“빨리 돌아가세요. 마지막 기회를 드릴게요. 저는 발렌 님과 달리 이런 게 익숙하지 않다고요.”
“흐.”
한 사내가 성큼성큼 다가오며 말했다.
“기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럼 이건 다 당신들이 자초한 거예요.”
루디는 공이치기를 내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마지막까지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타-앙!
오른손에 쥔 마총이 불을 뿜었다.
만들어진 이후 고요히 잠들어 있던 마도구는 처음으로 주인의 뜻에 따라 태어난 사명을 행했다.
어떤 화살보다 빠른 속도로 마탄을 토해낸 것이다.
강화 술식과 가속 술식이 새겨진 기본형 마탄 역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기를 가르며 질주했다.
소리보다 빠르게 5m 거리를 가로지른 값비싼 마탄은 인간의 두개골을 바삭한 감자튀김처럼 부수었다.
퍽-!
흐르는 붉은색과 끈적한 하얀색이 섞인 덩어리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뭐야?”
“저, 저.”
“이게, 무슨!”
남은 기도들이 이를 악물며 달려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서 낼 수 있는 용기였다.
루디는 녹색 눈을 빛내며 그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보았다.
“이게 발렌 님께서 살아오신 세상이군요.”
타앙-!
“저는 그동안 얼마나 안락하게 살았던 걸까요?”
타앙-!
“그동안 많이 외로우셨죠?”
타앙-!
“제가 죽을 때까지 따라가 드릴게요. 저는 도박광 개망나니 친족 살해자의 시녀니까요.”
타앙-!
격철이 내려가고, 실린더가 회전하며, 방아쇠가 회로와 회로를 연결할 때마다 마탄이 쏘아져 나갔다.
“하아, 하아, 하아.”
오른손에 쥔 마총으로 세 발, 왼손에 쥔 마총으로 두 발을 쏘아낸 루디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벽에 등을 기댔다.
반동으로 손목이 욱신욱신 떨렸다.
그러나 그녀는 눈을 감지 않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직시했다.
그녀가 만들어낸 광경이었다.
어쩌면 본보기로 한두 명만 쏘고 나머지는 도망치게 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모두 손등만 맞출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스무 살이었지만, 막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스무 살과는 속부터 달랐다.
그녀는 열 살 때 황궁에 들어와고, 일곱 살의 발렌 대공을 모시며, 복마전이라 불리는 황궁 시녀들의 파벌 싸움을 어린 나이부터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왔다.
살얼음판 같은 그 살벌한 세상에서 10년을 살며 배운 게 있었다.
상대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서는 안 되었다.
웃는 얼굴로 대할 거라면 끝까지 웃고, 싸워야 한다면 상대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되었다.
평소에는 느릿하다 사냥을 할 때는 단숨에 송곳니를 박아 넣는 뱀처럼.
“너, 너. 그건…… 대체 무슨 마도구냐?”
다리를 맞췄기에 즉사하지 않은 자도 있었다.
물론 그 역시 무릎 아래가 완전히 날아간 채였다.
“마법사 최고의 걸작이자 최악의 치부. 저도 그렇게만 들었네요.”
물론 자비를 배풀 생각은 없었다.
물어봐야만 할 게 있어서 잠시 살려 두었다.
“당신들 말고도 저와 발렌 전하를 노리는 자들이 있나요?”
“나, 나도 몰라. 애초에 너를 노리자고 한 것도 내가 아니야. 우리는 다 쟤가 시키는 대로 했어.”
그는 유난히 덩치가 큰 사내를 가리켰다.
그 사내는 배 한가운데에 머리만 한 구멍이 뚫린 채로 쓰러져 있었다.
“!”
그때 그 사내가 눈을 번쩍 떴다.
흰자위 하나 없이 새까만 눈을.
움직여서는 안 될 손이 움직이고, 옆에 쓰러진 다리 잃은 옛 동료의 반대쪽 다리를 붙들었다.
“야, 야!”
배에 구멍 뚫린 사내가 다리 잃은 사내의 발목을 쥐었다.
팔뚝에 핏줄이 솟는가 싶더니, 다리 잃은 사내가 몸을 부르르 떨며 비명을 질렀다.
“아악!”
문득 루디는 그가 손으로 사람을 먹고 있는 거 같다고 생각했다.
너무 비현실적인 광경이라서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다리 잃은 사내와 배에 구멍 뚫린 사내가 겹쳐지고, 불룩불룩 부풀어 오른 혈관을 따라 피와 살점이 하나로 녹아들었다.
그녀는 기절할 거 같은 기분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교회에서 저런 존재에 대한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다.
흉물.
“……어보미네이션.”
좀비 등 시체형 언데드의 일종이었으나, 개체에 따라 산만큼 커지기도 하는 괴물이었다.
“하, 하하.”
그녀는 두려움으로 손을 떨며 눈물 흘렸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신께 기도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잠든 대공을 깨우던 그녀는, 사람 다섯을 사살하고 이계의 힘으로 변질된 괴물을 마주하게 되었다.
“발렌 님은 언제나 저런 걸 봐 오신 거겠지요?”
다시 한번 총을 겨누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 * *
휴가를 받았지만 나는 본궁으로 향했다.
궁정 마법사들이 관리하는 본궁은 겨울에 따듯하고 여름에 시원하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혹시 제이릴리스가 즉흥적으로 전쟁을 결심할까 두려워 옆에서 지켜보려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도 있었다.
“발렌 대공. 휴가 중이지만 짐의 곁으로 굳이 돌아왔으니 묻겠다. 프로이하이트 후작이 마경을 핑계 삼아 군을 모으고 있다는 첩보가 꾸준히 들어오는데 어떻게 대처하는 게 맞겠는가? 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친정을 나서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제이릴리스에게 즉위 1년도 되지 않아 전쟁을 일으키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구걸하고 읍소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후작이 비록 의심받을 행동을 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와 황실령 사이에는 나라 몇 개만큼이나 거리가 있고, 황실령 주위에는 황가에 충성스러운 남작들이 여럿 있습니다. 즉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으신 폐하께서 대귀족들에게 선제공격을 가하신다면 다른 대귀족들에게 지나친 압박이 되어…….”
싸우면 이기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대국적으로 보면 안 싸워도 이길 수 있는데, 굳이 싸울 필요가 없다.
적어도 소드마스터이자 6서클 대마법사가 있는 수도에 먼저 쳐들어올 멍청한 귀족은 없고, 시간이 흐르면 결국 체제는 안정되기 마련이니까.
“말이 길다. 그럼 네가 후작의 목을 베어 올 수 있겠느냐?”
“명령이시라면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목숨을 바쳐도 후작을 벨 수 없다는 걸 이해해 주십사…….”
“짐이 분명 검술을 단련하라 명하지 않았느냐? 왜 이리 실력이 늘지 않는 것이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이제 왜 그리 빨리 실력이 늘었냐고 의심받을 일은 없을 거다.
“짐은 열다섯에 소드마스터가 되었는데, 왜 짐의 쌍둥이인 그대는 열일곱임에도 아직 소드 엑스퍼트 초입밖에 오르지 못한 게야?”
어?
나는 심장이 멎은 듯한 기분으로 물었다.
“폐하. 제가 왜 소드 엑스퍼트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아직 고작 소드 유저…….”
“그만.”
그녀가 단호하게 내 말을 끊었다.
망했다.
“짐은 상대를 보기만 해도 상대가 얼마나 많은 마나를 가지고 있고, 얼마나 대단한 경지에 올라 있는지 알 수 있도다.”
“대단하십니다.”
“가만, 대공. 설마 짐에게 경지를 숨기려 했느냐? 힘을 숨겨 무엇을 꿈꾸었느냐? 설마 그대 역시 이 자리를 탐하는 것이냐?”
제이릴리스의 눈꼬리가 휘었다.
그녀는 오늘 얇은 검은 비단으로 만든 민소매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갑자기 드레스 아랫단이 곳곳에서 한 점으로 뭉치더니, 새까만 가시가 되어 길게 늘어났다.
그 기이한 모습을 보며 나는 헛웃음만 흘렸다.
“폐하. 잠시만 제 말을 들어 주십사…….,”
“폐하!”
그때 시종장이 달려와 내 말을 끊었다.
“시장 뒷골목에서 어보미네이션의 잔해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걸 만든 게 어떤 존재든 간에 어보미네이션은 시장 뒷골목에서 나오면 안 되는 존재였다.
내용이 워낙 충격적이었던지라 제이릴리스가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상황의 목격자가 있느냐?”
“예. 그것이…… 붉은 달무리 궁의 시녀 루디라고 합니다.”
“?!”
이번에는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차례였다.
“폐하. 그녀는 제 시녀입니다. 제가 사정을 청취하겠습니다!”
그리고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