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36화
(36)
마차를 잡아타고 마부를 닦달해 수도 시내 제한 속도를 가볍게 무시하며 한달음에 시장으로 달려갔다.
황족은 특권으로 제한 속도에 걸리지 않았으니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곳은 치안총감 휘하의 도시 위병들과 시장 자경단과 교회 사제들이 섞여 엉망진창이었다.
“대체 이 흉물이 어떻게 이 대낮부터 시장에 나타난 겁니까?”
교회 사제가 한탄하고.
“외부 영지에서 따라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성문을 관리하는 위병이 고개를 숙이고.
“고위급 침식자가 수도에 암약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당장 시장을 봉쇄하고 전수조사를 해야 합니다.”
자경단이 목소리를 높이고.
“목격자는 저 시녀 한 명뿐입니까?”
치안총감 휘하의 엘리트들이 펜대를 돌렸다.
“솔직히 말해 저는 저 시녀를 조금 더 조사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경의 지식은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퍼지지 않습니까?”
교회의 부제와 사제는 치안총감 휘하의 엘리트들과 말을 주고받으며 동조자를 늘려나갔다.
“맞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흉물과 마주치고 살아남았을 수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애초부터 녹아내린 사체를 목격했다고…….”
“어허, 그걸 어떻게 곧이곧대로 믿습니까?”
아마도 목격자와 어떤 식으로든 말을 맞추기 위함일 거다.
……최대한 좋게 생각해도.
그리고 나는 그들 사이에서 창백하게 질려있는 루디를 보았다.
혹여 주변 사람들과 어깨라도 스칠까 두려운지 양손을 교차해 자신의 몸을 붙들고 있었다.
절차고 나발이고, 저 실적에 눈이 먼 놈들이 그녀를 겁박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루디!”
나는 곧바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인파 안으로 뛰어들었다.
“비켜라.”
“어억!”
“누구십니까?”
“현장에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누가 어둠의 흔적이 남은 땅에 함부로 발을 들이는가?”
“목격자의 보호자다!”
내가 외치자 치안총감 휘하 엘리트들과 사제를 따라온 부제들이 곧바로 제복의 벽을 만들었다.
“목격자는 사정 청취 일정이 남아 있다!”
“어둠에 정신이 오염되지 않았는지 치밀한 검증이 필요한 법.”
나는 그들에게 하얀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를 내보이며 무사안일주의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말을 내뱉었다.
“나는 황형 발렌시아누스다. 대주교와 바르바토스 단장을 황궁으로 불러 꾸짖어야 길을 트겠느냐?”
“어?”
“예?”
“아!”
“뭣들 하느냐!”
착착, 발소리와 함께 부조리 풍자극의 한 장면처럼 길이 터졌다.
나는 그사이를 달려 나가 루디의 손을 잡고 도망치듯 시장을 떠났다.
“사건 청취가 필요하다면 붉은 달무리 궁으로 찾아오도록!”
올 생각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올 때 탔던 마차에 다시 타고 문을 닫자, 루디가 무너지듯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발렌 님.”
“그래. 나 여기 있어. 다친 곳은 없어? 조금이라도 찔렸으면 말해. 바로 성수 받아올게. 어보미네이션 그거 꽤 고위급 언데드라서 잘못하면 큰일나.”
“저 사람을 죽였어요.”
“아…….”
나는 그녀를 쉽게 위로하지 못했다.
명예, 침식, 계급, 소속 등 살인은 많은 이유로 정당화되었다.
평민이 귀족을 위협하거나 모욕했다면 베어 죽여도 아무 문제가 없었고, 귀족 가문 간 복수는 명예로운 행동으로 찬미 받았으며, 기사가 전장에서 천 명을 베어 죽인 이야기는 전설로 추앙 받았다.
교회는 정신 오염이 번지는 걸 막기 위해 침식자들이 발생한 영지 전체를 불태웠고, 지방 대귀족들은 언제나 자기들 또는 타국과 크고 작은 전쟁을 벌였다.
나의 황제 제이릴리스는 육친을 세 자릿수쯤 벤 끝에 옥좌에 앉았고, 나는 그녀의 충신이었다.
피임이 어려운지라 출산율이 높고, 교회의 세례와 가호, 구휼 덕에 영아사망률이 극히 낮아 사람이 흔한 것도 목숨의 가벼운 인식에 한몫할 거다.
그러나.
그러니까.
그렇기에 더욱.
처음으로 손을 더럽혔다는 사실은 끔찍하다.
나 역시 그랬다.
한동안 눈을 떠도 감아도 그 붉은 색이 잊히지 않았다.
나는 루디의 떨리는 손등 위에 내 손을 가볍게 얹었다.
늦여름 날씨에도 얼음장처럼 차가워 깜짝 놀랐다.
“그 덕분에 네가 지금 내 옆에 있네.”
“그런 건 처음 봤어요.”
“그래. 보통 사람은 어지간해서는 볼 일 없지.”
“저는 알아요. 저 그 사람들을 안 죽일 수 있는데도 죽였어요. 안 그러면 보복당할 수도 있으니까.”
“잘했어. 그게 맞아.”
“그래서 돌아온 걸까요? 제게 복수하려고? 제가 잘못했다고. 제압만 하고 풀어줬어야 했던 걸까요?”
망자가 복수심에 돌아오는 이야기는 흔했다.
“아니. 아무리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곧바로 흉물로 변하지는 않아. 그랬으면 이니 황궁은 황족 출신 흉물로 가득했겠지. 이미 침식자와 연이 있던 거야.”
어쩌면 놈들이 진짜 배후일 수도 있고.
그 생각을 한 나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이제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루디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내가 아는 좋은 사람은 오래 같이 지낼 사람들에게 잘하는 사람을 뜻해. 칼 들고 온 미친놈들을 살려줘 봐야 어디서든 똑같이 굴 거야.”
“저는 재판관이 아니에요. 사람을 죽이고 살릴 권리는……!”
“나는 있어.”
“네?”
나는 단호하게 말을 자르며 말했다.
“직책을 받은 황족은 모두 궁극적으로 제국과 그 영토를 수호할 권리와 의무를 지며, 이에 필요한 모든 행동은 제국법상 올바른 일이라. 나는 그런 놈들을 없애는 게 올바른 일이라고 해석할 거야.”
제국이 외적의 침입 등으로 붕괴한 상황에서 계승권자들이 각 지방 영주들에게 도움을 받을 법적 근거를 만들어주기 위해 있는 조항이었다.
나 역시 제이릴리스에게 고문의 직위를 받았기에 이 조항을 적용받았다.
“다섯이서 한 명 찌르려고 오는 놈들은 비겁하니 명예와 복수의 조항도 적용되지 않아. 네가 직책을 받은 황족의 시녀인 걸 알면서도 공격했으면 반역과 불경죄가 더해져. 침식된 놈들이었으니 다섯 명 다 교회 가서 죽느니만 못한 꼴이 될 정도로 심문받을 거였어.”
이건 내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녀가 결국 손을 더럽힌 거 나 때문이었다.
나는 내 가족 같은 그녀가 손에 피를 묻히게 했다.
숨이 썼다.
그때 루디가 놀란 얼굴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발렌 전하는 기묘하시네요.”
나는 그 미소 덕에 참으로 이기적인 말을 이을 수 있었다.
“……네가 착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나는 괜찮아.”
마지막 말은 거의 흘리듯 중얼거렸다.
“나도 착한 사람이 아니거든.”
말하자마자 후회되었다.
그래서 같이 망나니짓을 하자는 건지, 아니면 나도 나쁜 놈이니 너도 나쁜 사람이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이상한 말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싶은 건지, 적당히 달래서 붙들어두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망나니가 분명했다.
루디가 힘없이 웃음을 흘렸다.
심장이 멎는 거 같았다.
“저는 도박광 망나니 친족살해자 황족의 시녀로 역사에 남겠네요.”
“아.”
내가 했던 말이었다.
“이제 그게 얼마나 무섭고 무거운 말이었는지 알 거 같아요.”
“……그래.”
이때 나는 루디가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 나를 섬기던 시녀라는 사실을 지워줄 거였다.
“전하를 섬기겠습니다. 죽어도, 죽은 후에도.”
그러나 루디는 녹색 눈을 빛내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마차 유리창 밖에서 쏟아지는 늦여름 볕을 역광으로 맞으며 내게 머리 숙였다.
나는 그 순간 그녀를 얕보았음에 한번 더 미안해졌다.
단단한 뼈 같은 결심이 깃든 그 박력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앞으로도 잘 부탁해.”
* * *
“수고하셨습니다.”
“쿨럭!”
텐티아 경과의 훈련을 마친 나는 연무장에 그대로 엎어졌다.
오늘은 지난번에 와이번핏에서 사용했던 제국 검술 2단계, 불망(不忘)을 집중적으로 연마했다.
불망은 오토 카운터, 즉 반사적이고 연속적인 방어기술이었는데, 극성으로 익히면 반쯤 정신을 잃어도 몸이 알아서 반격해 준다.
그런데 텐티아 경의 훈련용 목검은 분명히 불망을 펼치고 있는 내 방어를 깨고 들어와 나를 모루 위의 쇳덩이처럼 두드렸다.
“죽겠군.”
“무척 잘하셨습니다. 저도 한 단계 성장한 기분이군요.”
“그럼 나는 앞으로도 두들겨 맞겠군.”
텐티아 경이 하하, 하고 웃었다.
“그게 또 그렇게 되는군요.”
“경들도 시장에서 일어난 일을 들었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흑철기사단 놈들이 황궁으로 불려와 깨지는 걸 보고 얼마나 고소하던지요. 이야기를 들어 보니 요새 장난 아니라고 합니다. 추수 물량을 미리 계약하겠답시고 상단들끼리 서로 암살자 보내고, 그 의뢰를 수주하려고 빈민가 조직들이 싸우고, 그것 때문에 불안해진 부유층들이 자기네 동네에 순찰을 늘려달라고 요구하니…….”
“결국 치안 공백은 못사는 사람들 많은 곳에 더 커지고, 안 그래도 높은 범죄율은 더 높아진다?”
“예. 맞습니다. 그 말을 하려 했습니다.”
나는 잠시 상념에 빠졌다.
전생에서도 올해 작황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물량 계약을 둘러싸고 사방에서 칼잡이들이 날뛰고, 그것 때문에 치안이 망가질 정도는 아니었다.
가장 치안이 안 좋을 동네 두 곳에 있었기에 이건 확실히 기억한다.
크게 달라진 게 있다면 두 가지.
울그림의 펜촉을 되찾았고, 아퀴나스가 안 죽었다.
아직 침식자들 중 제국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 세력은 없다.
그때도 전신 판금 갑옷만 있었다면 벌레 기사가 서른 명이 와도 텐티아 경 혼자서 다 때려잡았을 거다.
그때 벌레 기사 셋이 죽었다.
놈들이 궁극적인 목적은 멸망, 그를 위한 수단은 혼란이다.
전생에서는 아퀴나스가 죽고 전쟁이 났다.
전쟁은 궁극의 혼란 중 하나니, 그 과정에서 침식자 몇 명이 죽어도 그들 기준으로는 대박이다.
하지만 이번에 그들은 실패했다.
후작과 황족 모두 그들에 대한 적대심과 경계심만 키웠다.
나는 텐티아 경에게 물었다.
“혹시 시체는 찾았다고 하던가?”
“아닙니다. 놈들은 시체를 지하수로에 던져서 처리하니까요. 전하도 그렇게 두 구 처리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그랬지.”
……이 세상에는 언데드가 흔하다.
교회 묘지에 묻히지 못하면 거의 무조건 다시 일어나 생전의 행동을 따라 하려 들고, 그 상태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생자에 대한 적대감이 강해진다.
그래서 살인사건의 제일 큰 증거가 죄다 슬라임 밥이 되는 걸 감수하며 지하수로에 거대 슬라임들을 풀어놓은 거다.
좀비와 스켈레톤 떼가 도시를 뒤덮으면 안 되니까.
그러니까 죽거나 없어진 사람들이 안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죄다 슬라임 밥이 된 게 아니라면?
……제물은 힘을 받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경. 근무도 끝났는데 미안하군. 혹시 마법사 한 명을 소개해줘도 괜찮겠는가?”
“얼마나 기이한 마법사일까 실로 우려되는군요.”
“경 생각보다는 훨씬 정상일세.”
* * *
상아탑에서 돌아온 지 며칠이 흘렀다.
세레라지에는 탐구하던 새로운 전격 유도 술식을 몇 가지 방식으로 재현해보았다.
제일 먼저 주문으로, 그다음에는 수인으로, 그다음에는 주문과 수인을 섞어서.
“마지막이야.”
황궁 마도 공방은 말 그대로 공방이었다.
마법을 끝없이 탐구하는 건 마법사의 본능이었기에 그걸 말리지는 않았지만, 연구비를 대주는 황제는 활용 가능한 도구를 원했다.
특히 제이릴리스는 어떤 마법이든 주술 회로를 이용해 마도구로 생산할 수 있어야 제대로 완성했다고 보았다.
세레라지에는 은으로 된 철사에 조금씩 마나를 불어 넣으며 밀랍 판에 새겨 넣었다.
이내 복잡한 마법진의 회로가 완성되고 마법진이 은은한 빛을 냈다.
그녀는 침을 삼키며 가느다란 전격 한 줄기를 쏘아냈다.
치지지지직!
마법진 위로 떨어진 전격은 바닥으로 파고드는 대신 호수의 물결처럼 동심을 그리며 퍼졌다.
“애오오옹!”
꼬리 끝이 전격에 닿은 고양이가 비명을 지르며 책상 위로 뛰어올랐다.
“성공했잖니! 성공했잖니! 될 줄 알았다고!”
세레라지에는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금은 요동을 빛내며 환호했다.
“정말? 뭐가 성공했는데.”
공방 입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문을 왈칵 열고 외쳤다.
“들어 보렴. 이게 전격 확산 술식이거든.”
“응.”
“지금까지 벼락을 떨구면 마나 낭비가 너무 심했잖아. 위력에 비교해서 범위가 너무 좁으니까.”
“그렇지.”
그녀는 빠르게 열변을 토했다.
“그래서 광역 공격은 마법은 대부분 불꽃을 이용했지. 그런데 불꽃은 사정거리가 짧아. 바람 마법에 실어서 보내야 하니까 주문 외는 시간도 길어지고, 그럼 둘이 호흡을 맞춰야 하니까 더 복잡해지겠지?”
“응응.”
자신의 발견을 남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건 마법사의 본능이었다.
“그런데 이 술식을 응용하면 멀리서 벼락을 빠르게 떨어트리고, 그 벼락을 주변으로 넓게 확산시킬 수 있단다. 훨씬 많은 적군을 훨씬 멀리서 쓸어버릴 수 있다는 말이잖니! 이건 전장을 바꿀 발견이야!”
그리고 그녀는 천성이 마법사였다.
“아…… 발렌시아누스 무슨 낯짝, 아니 용건으로 나를 만나러 왔니?”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나서야 그와 마지막 만남이 썩 좋지 않았다는 걸 떠올릴 정도로.
발렌시아누스가 그를 따라온 기사를 소개했다.
그 역시 얼굴에 열 겹 철판을 깔고 있었다.
“인사해. 누나. 여기는 텐티아 경. 백금기사단의 기사셔.”
“텐티아라고 합니다. 세레라지에 대공 전하.”
“물어볼 게 있어서 찾아왔어. 들어가도 될까?”
세레라지에는 그제야 자신이 그동안 그날 일을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챘다.
“잠깐만 서 있으렴. 계속 세워 둘 수는 없지만, 바로 들여보내주기는 싫구나.”
그녀는 천성이 마법사, 꿈꾸고 추구하며 갈망하는 자.
하늘만 보다 우물에 빠지지 않겠노라 선언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늘을 안 보겠다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잠시 공방과 고양이, 막 완성된 술식을 바라보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를 꺼내준 건 이 속 새까만 동생이었다.
“다시는 멋대로 나를 움직이려 하지 말아 주겠니? 구워버리고 싶어지니까.”
“응.”
“거짓말하지도 말아 주겠니.”
“……아니.”
* * *
“나도 침식자 연구를 한 건 아니지만, 확실히 제물 쪽으로 쓸 가능성이 있겠구나. 애초에 이미 옛것들과 연결된 침식자들이라면 대접하고자 하는 마음과 제물만으로도 경계가 열릴 수도 있고.”
“대충이라도 한 번 돌아보는 게 낫겠군요.”
“누나는 위험하니까 따라오지 마. 근접 전투 못 하잖아.”
세레라지에는 고개를 저었다.
“닥치렴. 너는 내게 이래라저래라할 자격이 없어.”
“윽.”
그리고 새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게다가 폐하에게 허락받지 않고 침식자를 연구할 기회가 쉽게 생기는 건 아니잖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