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38화
(38)
“예?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테오스가 당황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제야 마테오스의 이마에 성흔이 찍혀 있지 않음을 알아보았다.
정확히는 기억나지는 않지만, 새 성자가 나타났다는 말을 들은 게 내가 27살 즈음이었다.
앞으로 약 10년 후의 일이었으니, 아직 그는 성자가 아니라 일개 신학생에 불과했다.
인상 역시 내 기억 속 마테오스보다는 훨씬 부드러웠다.
“아니다. 신학 대학생을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지는 몰랐군. 어서 돌아가거라. 곧 해가 질 것이다. 이곳은 검도 없이 돌아다닐 만한 곳이 아니다.”
그가 혹시 여기서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마테오스는 나중에 제이릴리스를 대신해 침식된 영지들을 대거 정화해줘야 했다.
말이 좋아 정화지, 지역 공동체에 숨어든 침식자들을 선별하고 불태우는 일이다.
제이릴리스가 했다가는 안 그래도 나쁜 민심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다.
회귀 전에는 그 ‘정화’를 당한 영지들이 죄다 반란군 편에 붙어버렸다.
그걸 신의 이름으로 대신 맡아줄 소중한 방패이니, 그때까지 안전하게 지켜줘야 했다.
사적인 친분까지 쌓아둘 수 있으면 제일 좋고.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귀하신 분이시여.”
그는 내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을 확인하고는, 정체를 밝히지 않은 황족에게 알맞은 예를 취했다.
정중하지만 비굴하지 않았고, 당당하나 거만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는 제 친구를 두고 떠날 수는 없습니다.”
“친구?”
“제 친구 디스마스가 이 근처에서 실종되었습니다. 그를 찾아야 합니다.”
나는 대놓고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골목골목 드리워진 어둠 속에서 들개 같은 눈동자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떨어지는 순간 맹수로 돌변할 자들이었다.
“검을 차고 있는 거 같지는 않은데, 혹시 신성력을 자유자재로 다루거나, 맨손 격투에 소질이 있나?”
“아닙니다. 저는 일개 대학생일 뿐입니다.”
“그럼 이곳에 남아서는 안 된다. 흑철 기사단에게 신고하고 그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준 뒤 기숙사로 돌아가라. 같이 실종되고 싶지 않다면.”
“하지만……!”
“이곳은 네가 아는 수도가 아니다.”
제발 돌아가라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다.
차라리 검을 뽑고 위협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그를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마테오스가 고개를 떨궜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그가 이곳에서 전단을 돌렸는지는 모르겠다.
만약 그가 전단을 돌리다 좀 맞는 한이 있다 해도 무사히 기숙사로 돌아가고, 내가 아는 대로 10년 후 제국의 검은 성자가 된다면 아무 문제도 없다.
생긴 거 보니까 아직 완전 도련님 같은데, 좀 험한 일을 당해야 이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배울 거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본래 역사와 달리 대귀족들과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에 전생의 그와 저 전단지 속 디스마스라는 대학생은 이곳에 오지도 않았다면?
자칫하다가는 미래의 성자가 더러운 뒷골목에서 칼 맞고 죽거나 침식자들의 제물로 끌려가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억지로 잡아끌고 갈 생각을 했고, 그런 나보다 앞서 세레라지에가 움직였다.
“어리석은 아이야, 위험하니 돌아가렴. 잘 모르는 건 함부로 건들지 않는 게 좋단다.”
……좋은 말이 안 나올 줄은 알았지만 바로 저렇게 치고 들어갈 줄은 몰랐다.
그녀의 서늘한 목소리에 마테오스가 움찔했다.
이윽고 세레라지에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본 마테오스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녀는 윤기 나는 고깔모자와 로브, 지팡이로 완전 무장하고 있었다.
“……마법사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
“어머나. 신학생이면 많이 듣는 말 아니니? 순종해라, 순종해라, 순종해라.”
나는 세레라지에에게 속삭였다.
“누나. 왜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해? 마법사랑 교회랑 사이 안 좋은 건 알지만, 사제도 아니고 그냥 신학생일 뿐이잖아.”
나중에 화형당할 수도 있다고,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보렴. 눈빛이 아까부터 저 모양인데 어떻게 내가 그냥 넘어갈 수 있겠니.”
“누나, 제발……!”
“너 누구 편이니?”
그렇게 내 앞을 다물게 한 세레라지에가 말을 이었다.
“내가 지하수도 길과 방위를 보고 침식자 놈들이 사용할 만한 마법진을 역산 중이었는데, 딱 중앙에 네가 서 있잖니? 이상한 의심이 들려 하는구나. 마치…… 꼭 온종일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잖니?”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세레라지에는 그가 훗날 어떤 사람이 될지 모르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어떠한 마법진을 그리거나 발동시킬 때, 그 조건으로 술사가 어떤 위치에 머물러야 하는 경우는 흔했다.
하지만 상대는 신학생이었다.
“죄송하지만, 마법사에게 들을 만한 말은 아닌 거 같습니다. 도움을 주지 않으시려면 가던 길 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그 길의 끝에서 만난 게 네놈이란다.”
“오히려 그럼 저야말로 마법사님을 의심해야겠군요. 경전에 이르기를, 목소리 높여 의심하고 지목하는 자가 배신자고 침식자이니, 의심하라 말하셨습니다. 왜 굳이 저를 이 자리에서 밀어내려 하십니까?”
쭉 웃는 낯이었던 마테오스가 갈색 눈을 가늘게 뜨며 반박했다.
세레라지에가 당장 벼락을 토해낼 듯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걸 보며,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 * *
교회는 마법사들을 백안시했고, 마법사들은 교회를 멸시했다.
“순종하라 순종하라 하더니, 정작 반드시 순종해야 할 때는 개같이 개기는구나.”
“추구하라, 바라라 하더니, 정작 친구를 구하려는 제 소망은 세 치 혀로 짓이기려 하시는군요.”
순종과 만족을 미덕으로 아는 교회의 교리와, 추구와 열망을 미덕으로 아는 마법사의 진리는 정면으로 충돌했다.
“차라리 이 시간에 마법 거리에 가서 삼류 마법사들을 찾아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분명히 침식자가 두셋은 나올 겁니다.”
교회는 예로부터 떠돌이 마법사, 떠돌이 주술사, 이단을 싸잡아서 마경을 불러오고 옛것을 섬기는 악의 무리라 지정했다.
실제로 마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상태로 어설픈 재능만 개화시킨 마법사들은, 언젠가 반드시 옛 것들에게 침식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말은 신성력이나 보여주고 해야 하지 않겠니? 이 불신자에게 알려주려무나. 네 친구가 어디 있고, 신께서 너를 굽어보시는지 아닌지.”
반면 상아탑은 교회가 옛것들에 대한 지식을 통제하는 게 옛것에 대한 공포심을 키우고, 그 공포심을 먹은 옛것들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연구를 통해 약점과 상성을 밝히고 서로를 상잔시킬 수 있는데, 무조건 덮어놓으려는 걸 보니 뭔가 흑심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말이다.
“방금 하신 발언은 이단으로 치부되실 수도 있습니다.”
“신학생 따위가 공방주에게 건방지구나.”
이미 둘의 언쟁은 감정싸움으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어쩔 수 없었다.
이 싸움은 건국 이전부터 있었고, 당연히 회귀 전 삶에서도 끝나지 않았다.
너무 깊어진 골과 커진 세력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아마 수도의 대주교와 세레라지에의 스승 대마법사 게스타르테를 불러와도 대화 내용은 거의 똑같을 거다.
“누나. 가자. 더 찾아봐야지? 여기 말고 다른 곳들도 있었잖아?”
결국 나는 스스로 위험을 찾아 떠나며 둘을 떨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세레라지에가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에는 네 말이 맞구나. 저놈은 계속 여기 서 있다가 인신매매를 당하든 잡아 먹히든 마음대로 하라 하자꾸나.”
“아니.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발렌. 다시 물을게. 너 누구 편이니?”
그때 내 이름을 들은 마테오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발렌,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
“그래. 내가 발렌시아누스네.”
마테오스가 못 볼 걸 봤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온 수도를 어지럽히고 다니신다는 분이 아니십니까?”
……시비 거는 건가?
“혼자 살겠다며 이복 남매들을 밀고하고, 주일에 술에 취해 시녀를 희롱하고, 카지노에서 사기를 치고 불을 질렀으며, 명예로운 기사를 구타하고, 식당에서 위병과 식사 중이던 손님을 폭행한…….”
“아.”
다 틀린 말은 아니다.
“침식 의심자를 빼돌리고, 여관을 폭파하고, 카지노에서 기계를 부수고 가드들을 때려죽이고, 와이번핏에서 열심히 일하는 악어새들을 심심풀이로 베어 죽인…….”
“그러니까……!”
솔직히 의도했던 바다.
“폐하의 포도주를 빼돌려 귀족들에게 팔아넘긴 자. 딸 앞에서 아비를 범한 자. 붉은 기사와 함께 빈민가에서 인간 사냥을 즐기고, 푸른 마법사와 함께 마약을 제조해 홍등가와 빈민가에 판매한다는 황족.”
“이런 젠장.”
그런데 세상을 얕봤다.
어쩌다 딸 앞에서 아비를 ‘벤’ 게 어쩌다 ‘범한’ 게 된 건지 모르겠다.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시종을 산 채로 와이번의 먹이로 주며 그 광경을 보고 즐거워한다는 가학자. 그 시녀조차 주인의 위세를 앞세워 사방에서 뇌물을 받고 시장 상인을 구타하며 현물을 갈취한다는 그 발렌시아누스이십니까?”
마테오스가 내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뭔가 끔찍하고도 위험한 걸 바라보는 듯했다.
대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그런 소문만 외우고 다니는 거냐?
그 시간에 경전을 외웠으면 이미 졸업했겠다.
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광기 어린 웃음소리와 함께 고함쳤다.
“크하하하! 그래, 내가 그 발렌시아누스다! 당장 따라오지 않으면 이대로 신학 대학 기숙사에 쳐들어가 비역질 주문을 날려댈 테니, 그 빌어 처먹을 전단을 치우도록!”
비역질 주문이란 말을 들은 세레라지에가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으로 물었다.
“따라오라니? 짐을 지고 갈 생각이니?”
“여기 놔두면 무조건 죽을 텐데. 게다가 신학 대학생이라니까 숨겨둔 주문 한두 개는 쓸 줄 알겠지.”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자 나는 빠르게 덧붙였다.
“만약의 상황에는 미끼로 던져 줄 수도 있고.”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미래의 성자님.
“흐음. 그건 좋구나. 역시 너는 그런 쪽으로만 머리가 잘 돌아가네.”
“이 지점이라고 했지? 아래로 내려가 보자.”
* * *
“이렇게 불쑥 내려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말로만 들었지, 지하에 이렇게 웅장한 건축물이 있을 줄이야…….”
마테오스가 벽면의 발광 이끼가 신기하다는 듯 손끝으로 쓸며 말했다.
세레라지에가 킬킬 비웃으며 그에게 손가락질했다.
“그 이끼도 이 수로도 마법사가 만든 건 아니?”
마테오스가 못 들은 척 나를 바라보았다.
“아까 들어온 출입구는 정비공들이 쓰는 게 아닌 거 같았습니다.”
“내 말 안들리는 척……!”
“그래. 어떤 조직에서 옛날에 쓰다 버린 거다.”
“비밀 통로였군요.”
“대부분 외우고 있지.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신학 대학으로 통하는 출입구도 있어.”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가 놀란 눈을 부릅떴다.
“어찌……?”
“학교 안에서 원래는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나 사람이 드나든 적 없어?”
“아.”
마테오스가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술과 불온서적들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이제야 알겠군요. 감사합니다.”
수로 안은 서늘하고 고요했으며, 약간 비릿한 물 냄새가 났다.
그때 내 앞에서 걷던 세레라지에가 뭔가 이상하다는 듯 멈춰 섰다.
“누나. 무슨 문제 있어?”
“너는 안 느껴지니?”
“여기는 늘 이랬던 거 같은데.”
“아무리 슬라임이 있다고 해도 너무 조용하고 깨끗하잖니. 빈민가 근처라서 인기척이 느껴질 줄 알았는데.”
“걔들은 여기 안 내려와. 가끔 밀수용으로나 쓰지.”
“왜니? 이렇게 넓고 깨끗한데?”
그 말을 들은 나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생각해보니 세레라지에의 말이 맞았다.
슬라임은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
여름에 서늘하고 겨울에 따듯한 이곳에 왜 빈민들이 상주하지 않는 걸까?
마테오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반쯤 괴담이지만, 수업 시간에 들은 말이 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이건 마법사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한 박자 쉬고 그가 말을 이었다.
“슬라임 중에 가끔 변종이 나온다고 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도 공격하는 놈이요. 그놈은 녹색이 아니라 황록색이나 황갈색이라고 합니다.”
전생을 포함해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러고 보니 전생에서도 이 안에서 자거나 한 적은 없었다.
이 통로를 가르쳐준 홍등가의 귀족 자제들도 늘 이곳을 빠르게 통과하려 했고.
세레라지에는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들의 조작은 완벽했단다. 강 쪽에서 야생 개체가 흘러들어왔을 수는 있겠지만, 오래 못 버틸 거야.”
“아무리 조작해도 슬라임은 결국 마물입니다.”
둘이 다시 언쟁을 시작하려는 거 같아서 나는 빠르게 끼어들었다.
“어쨌든 빈민들이 이곳을 거주용으로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그런 소문 때문일 수도 있겠군. 진위를 떠나서.”
마테오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춥고 배고픈 자들은 소문에 쉬이 휘둘리지 않습니다.”
세레라지에가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다르게 생각한단다. 춥고 배고플수록 소문에 잘 휘둘리지 않겠니?”
나는 세레라지에가 옳다고 생각했지만, 그걸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걸었다.
지하 수로의 출입구가 마테오스를 만났던 곳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 마테오스가 다급하게 외쳤다.
“디스마스!”
“미쳤니?”
세레라지에가 기겁하며 지팡이를 쳐들고 나는 검자루에 손을 얹었다.
“여기 지하에 누가 있을 줄 알고……!”
“디스마스가…… 신던 신발입니다.”
마테오스가 교단의 문양과 이름이 새겨진 나막신 한 짝을 들어 보였다.
저 앞에 흐릿하게 수로 교차로가 보였다.
세레라지에가 내게 눈짓을 보냈다.
“여기가 마테오스를 만난 곳 아래야.”
“긴장되네.”
나는 검을 뽑으며 세레라지에의 앞으로 나섰다.
이내 교차로에 들어선 나는 옛것 특유의 진득한 기운을 느끼고 탄식했다.
“이렇게 숨겨 놨을 줄은 몰랐군. 아니, 숨어 있던 건가?”
천장에 붙어 있는 그 슬라임은 어지간히 넓은 방을 꽉 채울 수 있을 만큼 컸고, 황록색 몸 중간중간 연주황색 덩어리들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손과 발, 또는 사람의 얼굴로 보이는 부분도 여럿 있었다.
“소화, 아니. 정제하고 있군.”
나는 이걸 세레라지에와 마테오스에게 보여줘도 괜찮을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슬라임의 한복판에는 방금 찾은 신발의 반대쪽을 신고 있는 사람이 붙어 있었다.
수많은 손발의 주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부릅뜬 눈에서 기이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는 거다.
“침식자가 핵 역할을 하고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