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42화
(42)
지하수로는 어지간한 지하실들보다 깊은 곳에 있었다.
그곳에 빛이란 발광 이끼가 뿜어내는 창백한 녹색광뿐이었다.
광명교단의 신은 태양 또는 빛으로 비유되니, 빛이 닿지 않는 곳이란 신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을 말했다.
망나니 황족, 귀족들과 수도 암흑가의 칼잡이들이 날뛰고, 침식자들이 미로 같은 어둠 속에서 음모를 꾸미는 곳이 이 지하수로였다.
“어, 어?”
“세상에.”
“빛이시여.”
그 지하수로에 눈부신 태양광이 쏟아져 들어왔다.
와르르 무너진 천장에서 돌가루와 벽돌 조각, 크고 작은 바윗덩이가 쏟아져 내렸다.
“끄악!”
침식자 하나가 어마어마한 양의 토사에 짓눌려 그대로 사라졌다.
“꺄악!”
나는 루디 머리 위로 떨어지는 벽돌을 막아내며 비틀비틀 물러섰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텐티아 경. 물러서게. 더 무너질 수도 있어!”
텐티아 경이 떨어지는 벽돌을 몸으로 막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판금 갑옷에 달라붙었던 기이한 벌레와 침식자들은 모두 고깃덩이로 변한 뒤였다.
“전하. 방금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내 곁에 바싹 붙은 텐티아 경이 물었다.
“신실한 신자의 기도에 답하여 기적이 일어났네.”
그녀가 감격한 눈빛으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세레라지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 쉬었다.
“그분도 무심하시지. 내가 추구해야만 하는 진리를 저자에게 떠안겨주다니.”
마나 유저가 아닌 루디는 그 광채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황홀경에 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발렌 님. 어서 빛을 쐬세요.”
빛에 닿기만 해도 상처와 침식의 오염이 화한 느낌과 함께 사라져 갔다.
그 빛기둥 한가운데에 마테오스는 서 있었다.
“저를 당신의 불, 당신의 망치가 되게 하소서.”
곱슬기 있는 밝은 갈색 머리의 뿌리부터 흑단보다 짙고 윤기 나는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깊고 선한 인상의 갈색 눈동자는 단호한 총기가 어린 검은색으로 변했다.
나와 비슷할 정도로 컸던 키는 반 뼘 정도가 더 커서, 아까까지는 딱 맞았던 사제복 소매와 바지 아랫단에 손목과 발목이 튀어나왔다.
신실하고 선량한 산비둘기를 떠올리게 하던 인상 역시 변해갔다.
검은 눈동자에 어린 단호함은 이제 그에게서 비둘기가 아니라 매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경탄과 환호성을 내질렀다.
검은 성자, 라 마테오스 투모르.
수도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제이릴리스의 정통성에 힘을 더해 주던 성자의 탄생이었다.
나는 그의 등을 제때 떠밀었다.
설마 신이 미래의 성자를 이런 지하수로에서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테니.
“불경한 자여.”
마테오스가 내 속마음을 읽은 듯한 말을 내뱉었다.
그 음절만으로도 주변 하급 침식자들이 몸을 떨며 괴로워했다.
우리 반대편 수로에서 의식을 돕던 침식자 사제들은 이미 도망치거나, 아니면 도망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는 그중 하나의 가면 너머에서 노란 눈동자를 본 거 같았다.
분명 황족이었다.
“젠장!”
치이이이이이이이이익!
내가 욕을 퍼붓는 동시에 고기 타는 냄새가 났다.
우리의 상처가 정화되고 치유되는 동시에 하급 침식자들의 몸이 불타오른 것이다.
“끄아아아아아악!”
“어째서어어어!”
비명을 지르는 그들을 뒤로하고 마테오스는 옛 친구에게 다가갔다.
60개의 꼭짓점을 가진 다면체를 이룬 거대한 구토색 슬라임도 마테오스를 둘러싼 빛 앞에서 몸이 타올랐다.
그러나 디스마스는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우리가, 한 번 실패했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선한 의도로 시작했지. 선한 과정을 밟았고. 그 결과는 참담했지만.”
“너도 내 옆에 있었으면서. 모든 걸 봤으면서. 구호소를 불태우는 어린 귀족 놈들을 봤으면서! 그 또한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한 빛의 뜻이었다고 말할 텐가!”
디스마스가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그의 등에서 뾰족한 거미 다리가 튀어나왔다.
“그건 빛의 실수가 아니라 우리의 실수였네.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면 그 과정이 잘못되었다는 뜻일 텐데. 그들이 선한 본성을 가진 만큼이나 악에 타협하기 쉬운 삶을 살았다는 걸 알았어야 했어. 구호만으로는 부족했네. 계도와 자립이 동시에 이뤄졌어야 했어.”
“어째서 우리의 선의는 보답받지 못했는가! 빛은 어째서 그 거리에 비추지 않았는가! 빛의 부족함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도다!”
그의 이마에 여덟 개의 눈이 우수수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네. 디스마스. 그게 아니야. 부족한 건 빛이 아니라 우리였다네.”
마테오스는 그를 애절하고도 단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닿은 곳마다 하얀 불꽃이 타올랐다.
불꽃은 구토색 변이 슬라임의 몸을 태우고 제물로 잡힌 사람들을 해방했다.
도망치지 못하게 힘줄이 잘렸던 아이의 상처가 나아가고, 침식자들의 곁에서 오염된 정신이 한 차례 불살라지며 정화되었다.
“텐티아 경. 가서 저들을 끌어내세.”
나는 간신히 황족 침식자를 목격한 충격을 이겨내며 말했다.
제이릴리스의 염려가 현실이 되었으니, 얼마나 큰 후폭풍이 불지 알 수가 없었다.
“예?”
“기껏 구했는데 다 물에 빠져 죽게 할 수는 없잖는가?”
나와 루디, 텐티아는 허겁지겁 달려가 구토색 슬라임에게서 떨어진 사람들을 구해냈다.
나는 그 와중에도 마테오스와 디스마스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마테오스의 빛에 닿은 디스마스의 거미 눈알과 다리가 불타고 오그라들었다.
그가 한 손을 뻗어 디스마스의 손을 잡았다.
하얀 불길이 번지고 디스마스의 손이 불살라지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검은 연기가 그 손에서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몸을 떨던 디스마스가 아릿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마테오스, 내 형제여. 내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네.”
검은 연기가 빠져나간 그의 눈에는 약간의 총기가 돌아온 거 같기도 했다.
“들어주겠네.”
단호하기 이를 데 없던 마테오스의 눈빛도 한층 부드러워졌다.
그때 나는 막 끌어올린 아이를 텐티아 경에게 떠넘기고 수로 가장자리를 박차며 디스마스의 옆구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들어 주기는 뭘 들어 줘!”
콰득!
디스마스의 사제복 뒤에서 빠르게 튀어나오는 날카로운 거미 다리를 힘껏 붙들었다.
푹, 푸욱, 푹!
붙들고 나서야 단단한 갑각에 수많은 가시가 돋아 있던 걸 알았다.
그래도 기세를 늦추지 않고,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디스마스의 목을 쑤셨다.
본래라면 마나 블레이드 없이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겠지만, 검은 연기가 상당히 빠져나온 놈의 몸은 소드 엑스퍼드인 내 힘이라면 뚫을 수 있을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어.”
마테오스가 당황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 손에 잡힌 거미 다리를 본 그는 일순 자책과 분노가 공존하는 표정을 지었다.
‘기억은 그대로다. 관점이 달라질 뿐.’
내 말을 떠올린 거 같기도 했다.
그 순간 나는 디스마스가 소환하던 붉은 심장 호각을 잽싸게 걷어차 저 뒤에 서 있던 세레라지에에게 보냈다.
장담하는데, 마테오스가 절대 보지 못했을 빠른 발놀림이었다.
이제 떨어질 때였다.
풍덩!
디스마스의 등에서 튀어나온 거미 다리를 꼭 잡고 놈의 목에 단검을 박은 나는, 놈과 함께 지하수로 교차로로 떨어져 내렸다.
* * *
“발렌 님! 앞으로는 제발 그러지 마세요! 성자가 있는데 왜 직접 나서시는 거예요!”
담요를 뒤집어쓴 나를 향해 루디가 악을 썼다.
나는 양손을 머리 위로 들고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무너진 지하수로 교차로 위로 올라온 우리는 수많은 인파와 마주했다.
헐레벌떡 달려온 치안감과 병사들이 주변을 통제했고, 제이릴리스가 보낸 흑철기사단원들은 도망친 침식자들을 잡으려 지하수로 인도로 뛰어내렸으며, 교회의 사제와 성기사들은 마테오스 앞에 무릎 꿇었다.
“빛기둥을 보았나이다.”
“고귀하신 분이시여.”
“모두 예를 갖추거라! 주의 약속이자 목소리이시다.”
곱슬기 있는 검은 머리에 단호한 검은 눈동자, 이마에 새겨진 빛나는 성흔, 신의 불이자 신의 망치, 여전히 약간의 소년미가 있는 사내.
화형선고자, 검은 성자, 마테오스 투모르.
미래에 제이릴리스를 대신해서 신의 이름으로 지방 침식자들을 죄다 불태워줄, 고마운 분이셨다.
그동안 신학생으로서 먼발치에서 보기만 했을 노사제들이 몰려와 고개를 굽신거리며 자신을 둘러싸자, 그는 적잖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어울리지 않게 허둥거렸다.
그리고 잠시 내 쪽을 보더니, 무언가 다짐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자기 손으로 친구를 죽이지 않게 해줘서 고맙다는 뜻인지, 마지막 순간까지 배신을 노리는 침식자와는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줘서 고맙다는 뜻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어쩌면 둘 다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고위 사제들에 둘러싸여 중앙 교회 쪽으로 사라지는 마테오스의 등을 흘깃 확인하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성자가 있는데 왜 직접 나섰냐면, 그 성자에게 빚을 지워놔야 했거든. 몰래 빼돌려야 할 물건도 두 개나 있었고.”
텐티아 경이 디스마스의 변이한 시체를 질질 끌며 걸어갔다.
그녀는 흑철기사단과 백금기사단의 각 선임 기사 사이에서 뭐라 대화를 나누더니, 이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디스마스의 변이체를 흑철기사단 선임 기사에게 넘겼다.
“먼저 들어가 볼게. 사방에 사제가 우글거려서 눈이 피곤하구나. 너는 더 열심히 일하렴.”
“그래. 누나. ‘조심히’ 들어가.”
세레라지에가 싱긋 웃으며 로브 안주머니에 천으로 싼 주먹만 한 덩어리를 넣었다.
홍옥 같은 붉은 색이 반짝 빛나는 걸 본 거 같기도 했다.
루디가 입을 쩍 벌렸다.
“발렌 님. 저거…….”
“응. 그거 맞아.”
“그리고 텐티아 경은…….”
“고생은 우리가 다 해 놓고 성자가 각성해서 다 해결했습니다, 이럴 수는 없잖아. 뭐라도 챙겨 가야지.”
루디가 녹색 눈이 풀린 채로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챙길 건 다 챙겨서 가시네요.”
“당연히 그래야지.”
이게 다 나랑 제이릴리스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거였다.
“우리도 빨리 돌아가자.”
“급한 일 있으세요?”
“폐하께 보고도 해야 하고, 또 여기서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지하수로 복구 비용을 떠맡게 될지도 몰라.”
“네? 아니, 이건 빛께서.”
“행정관은 빛을 믿지만, 행정은 빛을 믿지 않지.”
루디가 혀를 내둘렀다.
“그런 걸 걱정하시는군요.”
“텐티아 경. 어서 오게!”
* * *
“듣자 하니 발렌 대공이 지하수로를 폭발시켰다는데.”
“그곳에서 뭘 하고 있던 건지 아는가?”
“모르겠네. 아마 분명히 무언가 추잡하고 지저분한 음모를 꾸미고 있지 않았겠는가? 약을 몰래 팔거나, 사람을 사거나, 팔거나, 시체를 숨기거나 하는 것들 말일세.”
“그 안에서 침식자들이 발견되고, 성자님께서 물리친 걸 보면 역시…….”
“아무리 망나니라도 침식에 손을 대지는 않았을 거 같네. 그럼 폐하께서 살려두었는가?”
“모르는 일이지? 성자님께 정화를 맡기면 된다 생각하고 잡아두었을 수도.”
“그보다 성자님이 탄생하셔서 정말 다행이네. 이게 몇십 년 만인가?”
“제이릴리스 폐하가 즉위한 지 1년이 되자마자 탄생하시다니…… 꼭 빛께서 폐하를 축복하시는 거 같군.”
“예끼! 이 사람아. 아무리 그래도 아비와 어미와 형제자매를 다 죽인 살인마를 축복하다니. 오히려 견제하라고 보내셨겠지! 자네 혹시 돈 받았나?”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내 휴가는 그런 소문을 수도에 퍼뜨리며 끝났다.
하얀 제복을 갖춰 입은 나는 복귀를 신고하려 알현실로 향했다.
높이 25m가 넘는 거대한 기둥이 좌우로 늘어서 있고, 바닥에는 대리석과 색색의 수정이 깔린 곳.
알현실 천장은 검푸른색이고, 유리 호롱 씌운 초 수천 개가 매달려 있는 곳.
흔들리는 촛불들을 보고 있자면 꼭 밤하늘을 보는 기분이 드는 곳이었다.
단상 높은 곳 옥좌에 앉은 제이릴리스는 나를 내려다보며 가학적으로 웃고 있었다.
금실 자수 놓인 검은 드레스가 알현실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큰일을 해 주었구나.”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지는 몰랐습니다.”
“본래 짐은 침식자들에 이목이 쏠리기를 바랬다. 그래야 그들을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빈민가와 홍등가를 정리하고 수도의 기강을 잡을 수 있느니. 그런데 지금 수도의 사람들은 모두 성자에 대해 이야기하기 바쁘구나.”
“폐하. 저는 신학생 하나에게 갑자기 성흔이 내려올 걸 예상할 수 없었사옵니다.”
제이릴리스가 그건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짐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대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
게다가, 하고 운을 떼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대가 침식자 소굴을 찾은 건 사실이니 공도 있다. 하물며 휴가 중이었으니, 포상금은 넉넉하게 챙겨줘야겠지.”
시종장이 내게 다가와 금실로 자수를 놓은 붉은 띠를 매어 주었다.
“폐하. 이건?”
붉은 띠는 군권이나 무기에 대한 권리를 상징했다.
“그대에게 금화 100닢과 마법 무구를 사용할 권리, 마법 무구의 사용을 허락할 권리를 내린다. 허벅지에 깊은 상처를 입었노라고 들었다. 좋은 갑옷을 갖춰 입고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나는 잠시 루디의 마총에 대해 생각했다.
아마도 텐티아 경에게 보고를 들었으리라.
침식자들에게 저항할 힘을 주기 위해 일단 마총을 쥐여 주기는 했지만, 마탑에서도 꽁꽁 싸매는 걸 어떻게 구해왔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었는데, 적당히 일단락되었네.
다행이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제이릴리스는 주제를 환기하듯 손짓했다.
찰카닥, 찰카닥, 찰카닥, 긴 손가락을 건틀릿처럼 감싼 관절 반지가 물결치듯 움직였다.
“그대가 침식자라는 소문이 퍼지고 있지. 아는가?”
“모두 소신이 부덕한 탓이옵니다.”
“잘 알고 있구나.”
음, 할 말이 없었다.
“황족과 침식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게 꼭 나쁜 일은 아니다. 언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이할지 모를 그들을 견제할 최고의 명분이니.”
시종장이 다시 한번 다가왔다.
그는 두툼한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짐은 이참에 이 길고 지루한 혈통의 업을 끊어 버리고자 한다.”
“소신이 무엇부터 하면 되겠나이까?”
“네 누이와 함께 사생아들부터 모두 거둬들이거라. 변수를 모두 잘라낸 다음에 움직일 생각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