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43화
(43)
“알겠사옵니다. 더 하문하실 것은 없으시옵니까?”
나는 내심 제이릴리스가 성자 마테오스와의 회담이나 그 비슷한 걸 추진하기를 바랐다.
광명교는 제국을 넘어 대륙 전체에 퍼진 선 세력을 대표하는 종교다.
그런 종교의 성자와 만나 즉위를 인정받는 퍼포먼스를 벌이면 누구도 제이릴리스의 정통성을 무시할 수가 없다.
전생에서도 마테오스 덕에 귀족 연합군이 한층 분열되기도 했고.
그걸 보다 부드럽게 추진하고자 굳이 손바닥 찔려 가며 디스마스를 해치우고 마테오스에게 빚을 지운 거였다.
“이제 되었다. 어서 네 누이나 만나러 가거라. 그 붉은 심장은 조심히 다루라 하문하고. 혹여 공방에서 그 심장 탓에 침식이 일어난다면 그대도 세레라지에도 참수형이니라.”
그러나 제이릴리스는 성자와 만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마치 순식간에 나와의 만남에 흥미를 잃어버린 거 같았다.
나는 살얼음판 위에 말을 내딛는 기분으로 간언했다.
“폐하. 소신이 이번 주일 오전까지 모든 임무를 마친다면, 소신과 함께 미사를 가지 않으시겠사옵니까? 홀로 갔다가 돌을 맞을까 두렵사옵니다.”
제이릴리스가 그림 같은 미간을 찌푸렸다.
시종장과 기사들이 동시에 작게 숨을 들이켰다.
“발렌 대공이 오늘 왜 저러는지 아는가?”
“모르겠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인데, 말하기 껄끄러운 듯하군.”
그러나 황제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의외로 부드러웠다.
“미사라. 그래. 한 번은 가야겠지. 그러나 이번 미사는 힘들 거 같구나. 교회도 새 성자의 탄생으로 혼란스러울 테니.”
마치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미사를 가자고 했는지 알겠다는 거 같았다.
또한 동시에 그걸 왜 네가 말하냐고 의문을 표하는 거 같기도 했다.
괜한 설레발을 친 거 같다.
감각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그녀라면 성자의 탄생을 들은 순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을 텐데.
“그런데 대공, 대공이 언제부터 그리 국정에 관심이 많았나?”
황제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나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한껏 품위 없이 손을 내저으며 물러섰다.
“아닙니다. 폐하. 실은 주말 전에 업무가 끝난다면 추가 업무가 곧바로 내려질까 두려워……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래도 이제 귀족들에게 침략당할 가능성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혹시 마테오스가 성자가 인정받자마자 순례를 하겠다며 수도에서 도망치거나, 급사하지만 않는다면.
* * *
“변수를 자르라 명받았니? 그래. 그나마 나는 잘려 나갈 변수가 아니라 자를 칼 쪽에 들었구나. 나는 또 네가 이번에야말로 나를 쳐내려 온 줄 알고 긴장했잖니.”
우리를 도와줄 궁무부 행정관을 대동하고 세레라지에의 공방으로 향했다.
나무뿌리 속 공방은 누굴 죽이니 살리니 하는 이야기를 하는 데에 좋은 곳이었다.
세레라지에는 헤어진 뒤로 한숨도 안 잔 듯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옷은 그날 입던 로브였는데 흙먼지와 돌가루가 남아있었고, 뒤로 질끈 묶은 남색 머리카락에는 미약한 탄내와 피 냄새가 났다.
그녀가 남색과 노란색의 금은 요동을 번갈아 뜨고 감으며 꾸벅꾸벅 졸았다.
책상 위에는 기이한 마도서와 커피를 마신 잔이 잔뜩 놓여 있었는데, 가시 돋은 슬라임과 고양이와 고양이를 닮은, 고양이와 비슷한 크기의 벌레가 정신 사납게 뛰어다니며 싸워 댔다.
……가시 돋은 슬라임과 고양이를 닮은 벌레?
책상 위를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붉은 호각이 눈에 띄었다.
“옛것의 손길이 낳은 괴물들이다!”
사형당하고 싶어서 환장했나?
“아니란다. 내가 시험 삼아 만든 거야. 옛것 연구는 처음 해 보는데 설레서 잠이 와야지. 설마 이 열정을 몰라주겠다는 거니?”
“실례지만 누나. 지금 눈 뜨고 자고 있어. 한숨 자고 몸 좀 빨아. 그리고 다시 이야기하자.”
세 시간을 자고 일어난 세레라지에는 언제 헛소리를 했냐는 듯 금은 요동을 빛내며 돌아왔다.
개운하게 감은 머리카락이 다시 남색 비단처럼 흘러 내렸다.
“이런 말 하기 싫지만, 미안하구나. 변명하자면 아까 말했듯, 옛것의 파편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니 잠이 안 와서.”
“이해해. 뭐 좀 알아낸 거 있어?”
“디스마스가 모시던 옛것은 아바도니온, 메뚜기를 닮았다고 전해지고 온갖 해충을 거느린다는 옛것이란다. 옛 문헌에도 몇 번 나왔고, 강림 직전에 토벌된 기록도 있어.”
“하등 쓸모없는 괴물을 섬겼군. 그래서 침식자들이 지네나 전갈이나 그런 걸로 변했구나.”
“옛것답게 망자를 되살리는 힘도 있단다. 그래 봐야 속은 벌레지만.”
“그 호각에는 어떤 힘이 있어?”
“아바도니온의 힘을 끌어오는 열쇠이자 문이란다. 생물을 마물로 변화시키는 힘도 있지.”
나는 고양이를 괴롭히는 슬라임을 걷아차며 말했다.
“저 슬라임하고 벌레도 그렇게 만든 거야?”
흘깃 바라본 세레라지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주 약간의 힘만으로도 저 정도로 변이했단다.”
“마나에 비유하자면?”
“이제 막 소드 엑스퍼드에 오른 검객이 1초 정도 마나 블레이드를 유지할 정도?”
“대단하지만 위험한 물건이네.”
“황족이 이걸 들고 침식된다면, 놈을 막기 위해서는 소드 마스터나 대마법사 정도는 와야 할 거란다.”
“그럼 역시 봉인하는 게 나으려나?”
나는 떠보듯 말했고, 다행히 세레라지에는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부수지는 않는 게 좋겠구나. 문헌을 보니 대규모 황충 무리를 없애거나 돌려보낼 수도 있다고 하니.”
“통제된 환경에서만 쓰는 게 좋겠네.”
세레라지에는 홍옥 호각에 천을 칭칭 감아 놓고, 전격을 뿜어내 고양이만 한 벌레와 가시 슬라임을 쓰러트렸다.
“그럼 이제 또 누굴 쓰러트려야 하는지 알려 주겠니? 나는 내가 잘려 나갈 변수가 아니라는 게 꽤 만족스러우니까.”
나는 행정관을 대동하고 명단을 펼친 채로 설명을 시작했다.
“얘들은 대부분 황족의 사생아들이야. 우리 이복형이나 누나들이 제이릴리스 폐하 즉위 전에 만든 애들.”
“그럼 계승권 문제는 아니겠구나. 어차피 그 애들보다 순위가 높은 황족들은 많을 테니.”
“맞아. 문제는 침식이지. 들어 보니까 이번에 흑철기사단이 죽인 사제급 침식자 중에서 마법 거리에서 삼류 마법사로 활동하던 황족 사생아가 넷이나 나왔다네.”
행정관이 여섯이라고 정정했다.
세레라지에가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히 우리는 마법사나 사제, 주술사나 정령술사로 각성하기 쉽지. 마나 수용성이 엄청나게 높으니.”
“그런 애들을 다 거둬드리라는 황명이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염구를 수도에 두고 살 수는 없으니까.”
내 말을 들은 세레라지에는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본인도 같은 신세가 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앞장서겠단다. 마법 거리에도 익숙하니까.”
* * *
수도에 마법 거리라고 불릴 만한 곳은 크게 두 곳이 있었다.
서쪽 방벽에 반원형으로 튀어나온 상아탑 특별 자치구와, 황립 마도 학당을 비롯한 몇몇 대형 아카데미들이 모인 배움의 거리 옆 거리가 그곳이다.
대형 아카데미들은 하나같이 마법 학과가 있었는데, 그곳의 학생들은 대개 궁정 귀족 가문 출신의 셋째, 넷째들이었다.
아무리 제국이라 한들 결국 농업 사회, 전문직 일자리는 언제나 수요보다 공급이 많았고, 수도라 한들 그곳에서 쏟아지는 졸업생을 모두 감당할 수는 없었다.
가문의 지원을 받으며 호화롭게 살던 그들은 중소 귀족의 영지나 제국에 비하면 미개하기 그지없는 타국에 취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평생 가문에 붙어 있을 수도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독립한 그들은 배운 지식을 살려 수도에 머물 돈을 벌었다.
출판 길드의 허가를 받지 않은 필사, 불법 마법 약 제조 및 판매, 불법 마법 도구 생산 및 판매 등 온갖 수상쩍은 일들을 도맡은 것이다.
의외로 그들의 장사는 성행했는데, 그들의 마도구는 상아탑에서 만든 마도구에 비해 압도적으로 저렴했고, 귀족의 지위로 각 길드의 견제와 위병의 조사를 찍어누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모인 거리는 어느새 홍등가에 버금가는 기이함을 자랑하게 되었다.
야광 버섯이 5층 집을 뒤덮고, 사람 먹는 덩굴을 화분에서 기르고, 머리 셋 달린 뱀이 주인을 산책시키는 곳.
그곳이 마법 거리였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곳곳에서 세레라지에를 향해 질투와 선망의 시선이 쏟아졌다는 거다.
“이런 차림을 한 마법사는 여기에도 많지만, 이런 지팡이를 들 수 있는 마법사는 많지 않단다. 너도 내 옆에 서 있을 수 있는 걸 영광으로 알렴.”
40분 정도 걸은 나는 세레라지에와 함께 한 집 앞에 섰다.
그곳은 2층 굴뚝 위로는 초록색 연기가, 방 창문으로는 노란 연기가, 거실 창문으로는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곳이었다.
“약을 파는 녀석인가 보네.”
“그래. 하지만 섣불리 판단하지는 말렴. 이 안에 있는 마법사는 마법 약 시험에서 낙제했을지도 모른단다.”
“응?”
“이 연기는 제약할 때 나오는 연기가 아니야. 잘 보렴. 염색한 밀가루를 바람으로 조금씩 날리는 거잖니.”
“사기꾼 새끼구나. 어쩌면 졸업생조차 아닐지도 몰라.”
“그래도 황혈이 섞여 있으니 재능은 있었을 텐데.”
세레라지에가 문을 두드렸다.
“어서 오십쇼! 바스타틴의 마법약 상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원하시는 게 있다면 뭐든지 말해 보십시오. 상처 치유의 물약? 정신을 맑게 해주는 약? 암기를 잘하게 되는 약? 행운을 가져다주는 약? 정력제? 찾으시는 모든 약이 여기 있습니다.”
보기 좋게 엉클어진 녹색 머리카락에 병아리 같은 노란 눈을 가진 장난기 넘치는 인상의 사내가 유쾌한 목소리로 외쳤다.
셔츠 앞에 깔끔한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는데, 마법사보다는 잘생긴 꽃집 주인이 떠오르는 차림이었다.
나는 문을 닫지 못하도록 발을 먼저 집어넣었다.
가게 안에 잔뜩 몰린 손님들이 보였다.
인테리어도 화려한 게 장사는 꽤 잘 되는 거 같았다.
“오늘 영업은 여기서 끝이다!”
미안하지만, 깽판을 칠 시간이었다.
“발렌시아누스?”
내 얼굴과 눈동자 색을 보자마자 바스타틴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그가 손을 휘두르려 했지만, 내 등 뒤에 바싹 붙어있던 세레라지에가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치며 전격을 쏘아내는 게 빨랐다.
“아악!”
그가 오른손으로 막 뽑아 들던 시험관을 떨어트렸다.
바닥에 떨어져 깨진 시험관에서 새어 나온 노란 액체는 바닥을 지글지글 태우며 검은 증기를 뿜어 올렸다.
손님들이 비명을 지르며 옆문으로 도망쳤다.
대체 뭘 뿌리려고 했는지 짐작도 하지 않았다.
“우리 차나 한잔하면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안심하게. 그대에게 아무런 죄도 없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
상식적으로 죄가 없으면 내가 여기 왔을 리가 없다.
나는 그의 어깨에 양손을 얹었다.
바스타틴이 이를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놈을 따라서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저기 앉으시면 됩니다.”
그의 생활 공간은 썩 깨끗하지는 않았지만, 정겨운 느낌이 드는 방이었다.
세레라지에는 그의 맞은편에, 나는 그의 옆에 앉았다.
작은 테이블 위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주전자가 놓이고, 그는 떨리는 손으로 차를 따랐다.
“어쩐 일로 제 누추한 상점에 귀하신 나리들께서 찾아오셨습니까?”
그가 먼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세레라지에가 내게 가볍게 눈짓했다.
나는 싱긋 웃으며 내 찻잔을 들어 바스타틴의 허벅지에 부었다.
“아악! 어, 어떻게?”
바스타틴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뭉글뭉글, 뭉글뭉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청록색 증기와 함께 허벅지에서 기이한 형태로 구부러진 버섯들이 수북하게 피어났다.
허벅지 살점이 버섯의 양분이 되어 흉측한 몰골이었다.
“대체 우리에게 뭘 먹이려 한 거냐?”
나는 분노가 아니라 황당함을 느끼며 물었다.
독 정도는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전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할 말이 있습니다.”
“할 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나는 놈의 왼쪽 손목을 잡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단검을 뽑아 힘껏 박았다.
“아악!”
손등이 곤충 표본처럼 관통된 놈이 몸을 비틀었다.
약간 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저 버섯이 내 목구멍에서 날 뻔했다고 생각하니 이 정도면 관대한 거 같았다.
나는 단검 하나를 더 치켜들고 놈의 오른쪽 손목도 붙들었다.
“바스타틴. 지금부터 바른대로 답해라. 너는 네가 황족의 자식인 줄 알고 있었나?”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얼마 전에 알았다.”
이미 틀렸다고 생각하는지, 적잖이 표독스러운 목소리였다.
나는 한껏 근엄하게 내뱉었다.
“수도의 황족을 모두 잡아들이라는 황제 폐하의 명이시다. 순순히 따라오면 죽이지 않겠다.”
바스타틴이 고통을 참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답했다.
“아버지에게 받은 것 하나 없어 장사나 하는 내가 왜 황족이란 말입니까!”
“내게 욕과 반말을 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으니 황족이요, 피로 재능을 물려받았으니 황족이다.”
“그놈의 황족! 언제쯤 나를 놓아줄 생각인지!”
치이이이익!
그의 손등을 관통한 단검이 녹아내리는 소리라는 걸 눈치채는 게 한 박자 늦었다.
세레라지에가 다급하게 전격을 쏘아내고, 팔뚝으로 막아낸 그가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바스타틴의 목과 팔뚝, 손등에 초록색 비늘이 겹겹이 돋아났다.
황가에 녹아든 피 중 리자드맨이나 나가, 메두사의 특성이 강하게 발현된 거 같았다.
나는 검을 뽑아 들며 답했다.
“독을 다루는군. 피로 물려받은 재능을 누리는 건 즐겁고, 피에 따르는 의무는 다하기 싫은가?”
바스타틴이 허공에 녹색 액체를 만들며 답했다.
“이게 재능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