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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46화 (46/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45화

(45)

퍽!

기숙사 바닥에서 갑작스럽게 돌로 된 가시가 튀어나왔다.

조금만 방심했다면 척추가 부러져 즉사했을 일격이었다.

타악, 발렌시아누스는 가벼운 스텝으로 물러서며 진을 바라보았다.

“감이 좋구나.”

약 기운이 돌고 있는지, 어느새 그의 눈동자는 다시 파란색으로 변한 채로 고요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진이 물었다.

“언제부터 이 방에 있었지?”

발렌시아누스는 여유만만하게 답했다.

“잘못 온 줄 알았을 정도로 오래. 혹시 그놈의 발톱까지 뽑아야 하나 고민할 정도였다.”

손발톱을 뽑았다는 건 발렌시아누스의 거짓말이었지만, 진은 그걸 몰랐다.

그가 손을 뻗자, 벽에 기대져 있던 검이 바람에 휩싸여 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발렌시아누스는 헛된 반항 하지 말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진이 자세를 낮추고 달려들 준비를 하며 말했다.

“와이번핏의 망나니.”

“요즘은 그렇게 불리나?”

“가벼운 죄를 지었어도 와이번들에게 먹이로 주며 그 광경을 즐긴다지.”

“잘 알고 있구나.”

이마를 가린 잿빛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서늘하게 빛내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진과, 백금발을 뒤로 넘기고 노란 눈을 이글이글 번뜩이며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발렌시아누스가 대비를 이루었다.

타앗, 군청색 제복 차림의 진이 먼저 검을 찔러 들었다.

그는 자신의 눈동자 색이 이미 들켰음을, 얼마 전 일어났던 침식자 사태에 그의 지인들이 관련되어 있음을, 그리고 지금 발렌시아누스가 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다 틀렸다. 수도를 떠나야 할 거야.’

따라서 검격은 우정과 추억을 잘라내듯 단호했고, 손속 역시 매서웠다.

사악!

허벅지 혈관을 노리며 파고든 칼날.

발렌시아누스는 검을 아래로 내려 베며 쳐냈다.

카앙!

“대화해볼 생각은 조금도 없는 모양이구나.”

“대화를 원했다면 노크부터 했어야지.”

진은 검을 빙그르르 돌리며 반대쪽 허벅지를 베려 했고, 발렌시아누스는 황소 비룡처럼 돌진해 진의 어깨를 노렸다.

삭, 그리고 툭.

둘이 교차하는 순간 진이 비틀거렸다.

“비겁하게!”

“텐티아 경이 없으니까.”

발을 건 발렌시아누스가 오른발을 축으며 빙그르르 돌며 검을 베어 내렸다.

꼼짝없이 등을 베일 위기에 처한 진이 짧은 주문을 외웠다.

“터져, 라!”

주문도, 수인도 모두 생략된 만큼 막대한 마나가 소모되었다.

휘이이잉!

그러나 솟구쳐 오른 바람 장벽은 발렌시아누스를 집어던지듯 벽으로 날려 보냈다.

“큭!”

침대가 흔들리고 벽장이 덜컹거리고 책상 위에 있는 모든 물건이 떨어졌다.

그 틈을 타 진은 돈과 마도서 등이 들어 있는 가방을 챙겨 복도로 내달렸다.

“판단력 하나는 괜찮은 놈이네.”

비틀거리며 일어선 발렌시아누스는 그를 쫓아 복도를 달렸다.

진의 기숙사는 3층이었고, 그는 이미 복도 오른쪽 끝 계단 앞까지 내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는 소드 엑스퍼트의 마나 제어력을 갖춘 사내였다.

펑!

순간 전투마만큼 빠르게 가속한 그의 발아래서 복도에 깔린 나무판자가 부러져 나갔다.

“잠깐……!”

“늦었어.”

몸을 내던져 진의 허리를 잡아챈 발렌시아누스는 그 기세 그대로 창문으로 몸을 던졌다.

와장창!

유리가 깨지고 둘은 3층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바람이여! 내 몸을 감싸, 커억!”

발렌시아누스는 공중 부양 마법을 쓰려는 진의 목을 사정없이 손날로 후려치고, 그 입 안에 가죽 장갑 낀 손가락을 구겨 넣었다.

“익!”

진이 사정없이 그 손가락을 깨물었고, 발렌시아누스는 진의 혓바닥을 뽑을 듯 잡아당겼다.

싸움은 더 나쁜 쪽이 이기는 법이었다.

“크악!”

우당탕!

둘은 동시에 기숙사 앞 잔디 바닥을 굴렀다.

발렌시아누스는 먼저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일어나 떨어진 검을 집어 들었다.

“순순히 따라오면 덜 아프게 찔러 주겠다.”

그러나 진은 바닥을 구르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황립 마도 학당 검술학과 놈들이 쳐들어왔다! 다들 모여!”

“뭣?!”

“그놈들이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저놈이냐!”

“잡아! 잡아서 호수에 던져!”

교정을 돌아다니는 모든 학생의 눈길이 이쪽으로 쏠렸다.

덩치가 황소만 한 검술학과생, 쌍지팡이를 든 마법학과생, 막 해부학 실습을 마친 의예과생, 전투 망치 비슷한 걸 크기별로 몇 개나 든 조소과생.

두께가 한 뼘도 넘는 책을 가방에 한가득 넣고 매일같이 언덕을 오르내리는 행정학과생, 길이 2m짜리 강철 고리 십자가를 든 신학과생이 마침 잘 만났다며 이를 악물고 달려왔다.

발렌시아누스는 당황을 넘어 황당한 기분으로 외쳤다.

“이런 젠장!”

배움의 거리에는 몇 개의 거대한 아카데미들이 모여 있고, 그곳의 학생들은 잔혹한 경쟁에 시달렸다.

대학 단위로는 성과를 내 지원금을 받기 위해서였고, 개인 단위로는 자취방과 술집, 카페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근본적으로 마법과 검술에 능한 혈기 왕성한 청년들을 한곳에 모아두면 싸움이 날 수밖에 없었다.

수백 대 수백의 패싸움은 일상이요, 때로는 검술학과 교수가 시가전을 가르치겠다고 학생들을 이끌고 옆 아카데미에 쳐들어가기도 했다.

진의 입가에 떠오른 승리의 미소를 본 발렌시아누스는 이를 악물었다.

“이 비겁한 새끼가!”

그는 막 톱을 들고 달려드는 의예과생을 받아넘기고, 검술학과생 하나를 걷어차고, 마법학과생 하나의 머리를 검 손잡이 끝에 달린 쇳덩이로 후려쳤다.

황족의 혈통과 회귀 전 40년의 경험이 더해진 그는, 아무리 시험 기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아카데미 학생들이 상대라도 물러서지 않고 맞설 수 있었다.

그가 덩치가 황소만 한 사내의 발목을 움켜쥐고 들어 올려 집어 던지고, 철퇴처럼 떨어지는 강철 고리 십자가를 피했다.

부웅!

고리 십자가가 백금발 머리카락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세레라지에 누나! 쳐!”

“응?”

“엇!”

기숙사 현관 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레라지에가 노란 보석 달린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치며 주문을 외웠다.

그 옆에 잡혀 있던 바스타틴이 정말? 하고 눈빛으로 물었지만, 세레라지에는 망설이지 않고 주문을 외웠다.

그녀가 보기에도 저 성난 학생들의 무리는 꽤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구해준 걸 기억하고 있어 주겠니? 원으로 퍼뜨리는 전격!”

번쩍!

지팡이 끝에서 쏘아진 푸른 전류가 바닥에 닿으며 그 주변의 학생 대여섯 명을 기절시켰다.

보통의 전격은 거기서 끝났겠지만, 그녀가 새로이 개발한 마법의 전격은 그대로 파문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파지지지지지지직!

“아아아악!”

“으아악!”

“끄윽!”

학생들이 일제히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했다.

당연히 그 파도에 휘말린 발렌시아누스 역시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그는 검을 바닥에 박아 넣으며 버텼다.

“끄윽!”

“아악!”

끝까지 비명을 억누르는 그와 막 일어섰다가 다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비명을 내지르는 진이 기묘한 대비를 이뤘다.

발렌시아누스는 다시 검을 쥐고 일어서며 진을 챙기는 손들을 확인했다.

‘회귀 전에도 몇 명은 본 적이 있다. 그래. 생각해보면 저들은 대부분 교양으로라도 마법을 배울 놈들이야. 검을 다루려면 몸을 써야 하고, 행정은 외워야 하지만, 마법은 타고난 재능이 있으니 제일 편했겠지. 졸업 후에는 마법 거리 쪽에 취직할 테고.’

그렇게 조용히 살 수 있으면 좋았겠지.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진을 챙기는 손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거 같았다.

발렌시아누스는 그 손 중 이상한 반지를 끼고 있는 자들이 몇 있는 걸 보았다.

뼈나 말린 촉수 같은 재질이었다.

그가 알기로 그런 반지를 끼는 건 옛것숭배자나 침식자, 흑마법사들 뿐이었다.

“누나! 일단 후퇴한다! 수적으로 불리해!”

“나도 그렇게 생각했단다. 더 빨리 결정하지 그랬니?”

“잠깐, 나는 너희 선배…… 으아아악!”

“학생들에게 독 쓰지 마! 미친놈아!”

* * *

배움의 거리 한 왁자지껄한 카페에서 우리는 숨을 돌렸다.

원래 도망치거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할 때는 이렇게 시끄럽고 사람 많은 곳이 더 좋은 법이었다.

“옛것 숭배자에 흑마법사라. 정말이니? 네 눈을 못 믿겠구나.”

“누나도 그 반지 알잖아. 하얀 뼈로 만든 반지랑 파란색이랑 보라색 촉수가 얽힌 반지.”

“그래도 꼴에 황족이라고 완전히 침식당하지는 않았구나.”

옛것, 옛신이라 싸잡아 말하지만 모두 같은 존재는 아니다.

통칭 ‘흑마법사’라 불리는 이들이 섬기는 유명한 옛것은 많은 문화권에서 ‘죽음의 신’으로 숭배받았다.

그들은 인간의 죽음에서 힘을 얻기에, 되려 모든 인간을 죽이려 하지는 않는다.

인간이 너무 많이 사라지면 그 역시 소멸하거나 한없이 약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교회 역시 그들과는 적대적 공존을 묵인했고, 숭배 자체가 아니라 숭배자들의 범죄 행위만을 처벌한다.

그래서 황궁에도 흑마법사가 들어가 포도주 저장고를 지키는 언데드 사냥개를 만들 수 있었고, 황립 마도 공방에도 흑마법사들이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또, 정말 모든 인간을 죽이거나 고문하고 싶어 하는 옛것들도 모든 숭배자를 침식시키고 폭주시키는 건 아니다.

아바도니온도 철가면을 쓴 ‘사제’들에게는 이성을 남겨두고 포교 등의 활동을 시켰다.

교활하고 사악한 옛것들은 이제 대부분 인간 사회를 어느 정도라도 이용하는 법을 깨달았다.

두 촉수가 꼬인 그 반지는 아주 교활하며, 백 사람의 평범한 죽음보다 한 사람의 타락을 즐거워하는 옛것의 반지인데, 마법에 능통하여 추종자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는 옛것이었다.

“그걸 좋아해야 할지 말지는 다른 문제지.”

나는 옅게 웃으며 세레라지에의 헝클어진 머리를 천천히 빗어 내렸다.

마법사의 로브와 고깔모자는 빨리 달리기에 썩 적합한 의복이 아니었다.

“다들 잡아가야 하는 거 아니니? 말하는 내용에 비해 표정이 밝구나? 우리 결국 놓쳤잖니.”

“아, 응. 대충 누구인지 이제 알 거 같아.”

“어떻게?”

회귀 전에 홍등가에 불법 마도구 등을 공급하던 녀석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대충 홍등가 카지노에서 봤어.”

“그래? 신기하구나? 나도 그쪽에 꽤 오래 있었는데 그런 애들은 못 봤거든.”

“누나 이야기도 걔들에게 들은 거나 마찬가지야. 걔들은 누나를 피해 다녔지. 천하의 세레라지에 앞에 불법 마법사로 나타났다가 타 죽을까 봐 무서워하더라.”

“흐음. 그래.”

세레라지에가 대충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금색 쪽 눈동자를 몇 번 깜빡거린 그녀가 이내 이례적으로 불안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되는 게 있구나.”

“걱정?”

“진짜로 황족 대부분이 옛것 쪽에 빠질 수밖에 없다면, 그리고 그게 증명된다면, 폐하가 우리를 살려두려 하실까? 너야 어찌어찌 살아남을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말꼬리를 흐렸다.

“충신을 먼저 쳐낼 분은 아니라고 생각해. 하지만 누나 걱정은 이해된다. 좋은 생각 있어?”

세레라지에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대충 알겠지?”

“응.”

“거기서 다 즉결 처분해 버리면 어떠니? 옛것의 힘을 꺼내기도 전에.”

“반항이 너무 심해서 죽였다?”

“교전 중 어쩔 수 없는 부수적인 희생이지. 나는 이제 간신히 공방과 지팡이를 얻었잖니. 잃을 게 생기니 죽고 싶지 않구나.”

나는 세레라지에가 무엇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역시 회귀 전 삶에서 황족 관련 침식자가 나올 때마다 언제 제이릴리스가 마음을 바꿔 나까지 베어버리는 게 아닐까 경계했다.

하지만 아직 죄도 없는 사생아들을 죽인다는 건 마음에 걸렸다.

타락할 가능성이 있는 건 나도 세레라지에도 마찬가지였다.

혈통에는 의무와 책임이 따르지만, 그 책임이 타락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죽어야 할 만큼 무겁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상황 봐서. 심하게 침식되거나 타락한 애들은 죽이자. 나도 그게 나을 거 같아. 애초에 그런 애들은 생포할 수도 없을 거고. 하지만 아직 그쪽에 거리 둔 애들은 일단 건들지 말자.”

“의외로구나.”

세레라지에가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망나니의 명성을 지키려 비릿하게 웃었다.

마테오스를 위해 지하도에 남은 모습을 보인 만큼, 세레라지에에게는 더 철저해야 했다.

“혹시 폐하께서 쓸 데가 있으실지도 모르니까?”

“아.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녀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그럴 수도 있겠구나, 냐?”

옆에 앉혀놓은 바스타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존댓말. 우리는 촌수로 따지면 네 고모나 삼촌뻘이란다.”

“그럼 뭐가 그럴 수도 있겠구나, 입니까?”

경망스러워 보일 정도로 경쾌한 눈매와 흐트러진 초록색 머리카락과 달리, 의외로 상식적인 반응이었다.

“이렇게 뒤에서 은밀히 사람 목숨을 좌지우지해온 겁니까? 자기 이득을 위해서?”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 어깨를 으쓱하며 비릿하게 웃었다.

“딱히 뒤도 아니고, 은밀하지도 않고, 좌지우지하지도 않았다만.”

카페는 시험공부를 위해 모인 학생들로 왁자지껄했다.

“그리고 이건 이득을 위한다고 하기에는 뭣하지. 손해 보지 않으려는 건데. 게다가 그 손해는 돈도 아니고 목숨이라고.”

“부끄럽지는 않습니까?”

“뭐가? 언제 목숨을 날아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열심히 일하는 게?”

“하나뿐인 삶을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결정할 수 없던 부분에 대한 책임을 물리는 게.”

바스타틴이 주먹을 꽉 주었다.

“우리는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혈통 덕에 검도 마법도 순식간에 익혀 놓고 평범? 그건 평범한 게 아니라 기만이지. 옆에 안 보여? 다들 시험공부 하느라 죽으려고 하는 거. 저게 평범한 거야. 마법이 재미있고 검술이 재미있는 건, 아주 특별하고 대단한 거라고.”

바스타틴이 입을 쩍 벌렸다.

나는 송곳니를 숨기게 하려 손날로 놈의 목을 한번 가볍게 쳤다.

“너도 그랬을 텐데. 독으로 약 쉽게 만들어서 꿀 빠니까 좋았잖아. 그건 특별한 거야. 네가 즐기던 일상은 특별한 삶이라고. 그걸 탓하는 게 아니야. 이왕 이렇게 태어났는데, 누리고 싶은 만큼 누려야지.”

“우리도 노력했다.”

나는 다리를 꼬며 말했다.

“저들만큼 힘들었을까?”

“…….”

그의 반항심을 꺾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비웃음을 띄우면서.

“사실 그건 안 중요해.”

“!”

“더 노력한 사람, 더 힘들었던 사람이 성공하는 세상이 아니잖아. 제일 중요한 건 신분, 그다음이 재능이지. 그런데 둘 다 가지고 태어났으면, 거기에 어떤 식으로든 책임이나 의무가 따른다는 건 이해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차마 정리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못을 박듯 말했다.

“말했잖아. 다 죽일 것도 아니라고. 옛것에게 너무 심하게 심취한 애들만 벨 거라니까?”

“어느 정도면…… ‘너무 심하게 심취한’ 겁니까?”

바스타틴이 세로로 찢어지려는 눈을 다독이며 물었다.

나는 남은 커피를 단숨에 비우고 답했다.

“네 눈으로 확인해봐.”

* * *

어둠 속 창고 앞에서 마도서가 한 권 한 권 나왔다.

그중에는 사람 가죽으로 표지를 만든 것도 여럿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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