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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47화 (47/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4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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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거리와 맞닿은 배움의 거리 뒷골목은 위병들조차 오지 않으려 하는 마굴이었다.

자칫하면 분노한 학생 백수십 명에게 조리돌림을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방을 하나라도 늘리기 위해 5층 이상으로 솟은 건물들은 빽빽하게 붙어 있었고, 불법으로 증축한 건물과 지하실, 비밀 통로들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막 어둠이 내린 저녁, 그곳 중 한 건물의 현관문이 열리고 서른 정도의 학생들이 줄지어 나왔다.

“확인?”

“확인.”

“문제없음.”

소속 아카데미도, 학년도, 성별도, 이름도, 살아온 삶도 달랐지만, 그들은 모두 황실의 사생아들이었다.

때로는 후원받은 고아로, 때로는 어느 시골 귀족의 양자, 양녀로 위장하고 타고난 혈통에 힘입어 아카데미에서 마법을 배워 온 자들.

그들 중에는 다른 학생들이 본다면 상상도 못 할 얼굴도 몇 있었다.

모두 몸속에 황가의 피가 흐름을 숨기고, 철저한 노력파인 척 위장하고, 마법학과의 엘리트로 살아온 자들이었다.

“젠장. 인생 잘 풀려 가고 있었는데.”

“교수님이 이번에 플라니티에스 후작가에 추천서 넣어 주신다고 했단 말이야.”

“나도 상아탑 교환학생이 일보 직전이었다고.”

“참아. 그래도 목숨이 제일 중요하잖아.”

그들은 가방에 값비싼 시약, 위조 신분증, 마도서, 현금 등 꼭 필요한 것만 챙겼다.

“이건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가져가기에는 너무 크지 않나?”

“아니. 꼭 챙겨간다. 천금으로도 못 구하는 거야.”

진과 함께 그들의 리더 격인 반이 말했다.

오렌지색 머리를 거칠게 흐트러트리고 귓불에 검은 피어싱을 한 반은, 손가락에 두 개의 촉수가 얽힌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물건은 한 권의 마도서로 두께가 한 뼘에 아무리 봐도 사람 얼굴처럼 보이는 얼룩이 있는 가죽으로 제본한 제품이었는데, 혼자서는 쉽게 들지도 못할 만큼 무거웠다.

하지만 반은 그걸 기름종이에 싼 뒤 가볍게 짊어졌다.

꾸륵, 그의 손목과 팔뚝에서 푸른색과 보라색이 일순 발광했다.

그걸 좋지 않은 눈으로 바라본 진이 성큼성큼 다가갔다.

“반. 그건 폐기하지?”

잿빛 머리카락 아래 파란 눈이 서늘했다.

“왜?”

“황실에서 우리를 쫓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야. 옛것들과의 조우. 우리를 조질 명분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줄 필요는 없잖아?”

“이건 우리를 조질 명분이 아니라, 우리가 살게 해줄 힘이야. 다들 이 힘으로 지금까지 편하게 살아온 거 아니었어?”

진은 다른 학생들의 반응을 보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누리며 살았지. 남들이 다섯 시간 공부할 걸 한 시간 만에 다 외우면서. 그 정도만 누리고 살아도 되잖아?”

반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렌지색 머리칼 아래 녹색 눈빛이 서늘했다.

“더 특별해질 수 있는데, 왜 멈춰야 하지?”

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바라는 건 평범한 삶과, 그걸 이룰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아니었나?”

반이 과장된 손짓을 해 보였다.

“왜 그래? 새삼스럽게. 너도 지난 학기에 전공 3개에서 전부 다 과탑을 찍지 않았어? 그게 무슨 평범이야? 오늘 발렌시아누스랑 싸운 거 때문에 겁먹었어? 친구, 그러지 마. 오늘 우리는 수도를 떠날 거고, 다른 왕국에 가서 잘 먹고 잘살게 될 거야. 궁정 마도사 직함을 받고서.”

진은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묘한 악의가 깃든 눈동자 수십 쌍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얽힌 촉수 반지를 낀 자도 여럿이었다.

‘언제부터?’

불안감을 느낀 진은 검을 뽑아야 할지 고민했다.

반이 든 저 마도서는 금서 중의 금서였다.

어디서 구해 오는 것보다, 옛것에게 제물을 바치고 새 책을 직접 받는 게 빠르다고 할 정도로.

“일단 가자.”

“그래. 가야지.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아.”

“응?”

반이 비릿하게 웃었다.

“내가 도시 밖으로 나가겠다고 홍등가 쪽에 말해놓은 건 열다섯 명이거든.”

꾸르륵!

다음 순간 반의 오른손이 기다란 촉수로 변해 쏘아져 나갔다.

한 학생의 몸을 뱀처럼 칭칭 감고 끌어당기며 마구 쥐어짰다.

“아아아아악!”

그 몸에서 흘러나온 피는 한 방울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촉수에 달린 빨판 안쪽의 부리 같은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동시에 반지를 낀 학생들이 모두 양손이나 머리를 푸른색과 보라색이 섞인 촉수로 변이시켜 옆 학생을 노렸다.

“미친!”

“이 개새끼들이!”

“아아아악!”

사생아들은 모두 검을 들거나 주문을 외우며 맞섰지만, 이미 기세가 꺾인 상황이었다.

진은 검을 뽑아 날아드는 촉수 하나를 잘라 내고 식은땀을 흘렸다.

“젠장.”

‘처음부터 함정이었나.’

반이 입을 쩍 벌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진. 이리 와. 같이 가자.”

그의 혓바닥이 한없이 길어지더니 그 끝에서 두 개의 촉수가 얽히며 반지 형태가 되었다.

“받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단호한 목소리가 성대 안에서 흘러나왔다.

진은 이를 악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럼, 어쩔 수 없네.”

반이 비릿하게 웃었다.

다시 한번 그의 팔이 거대한 촉수로 변이했다.

그리고.

“굳히고 밀어내는 전격!”

파지직!

골목 사이에서 푸른 전격이 뿜어져 나와 반을 후려쳐 날려 보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낮에 들은 목소리에 진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뒤로 넘긴 화사한 백금발, 핼쑥한 뺨과 대비되는 탐욕스러운 눈빛.

금실 자수가 놓인 하얀 제복을 입고 긴 검을 늘어트리며 오만하게 웃는 사내.

발렌시아누스.

“깃들어, 적을 불태워라. ……죽기는 말고 조금 험하게 구르다 오렴.”

마법사의 목소리가 한 번 더 울리는가 싶더니 발렌시아누스의 검에 푸른 전격이 튀었다.

그가 검을 치켜들며 외쳤다.

“모두 두 손 들고 엎드려라.”

변이한 황족 사생아 학생들도, 맞서 싸우던 황족 사생아 학생들도 낭패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의 정보력을 통해 발렌시아누스가 성자와 함께 아바도니온의 추종자들과 싸워 이겼음을 알고 있었다.

“젠장.”

“저 망나니 새끼가, 홍등가에서부터 계속!”

“죽여! 우리가 수적으로 유리하다!”

“뭔 개소리야! 도망쳐, 위병들이 몰려올 거야! 살아야지.”

타악, 우왕좌왕하는 사생아들 틈으로 발렌시아누스가 몸을 날렸다.

* * *

바스타틴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난투를 바라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아아아악!”

“이걸로 네놈들의 목을 줄줄이 묶어 황궁으로 끌고 가겠다! 크하하하!”

막 발렌시아누스가 변이한 사생아 하나의 혓바닥을 길게 뽑아내고 있었다.

그 역시 사생아들이 서로를 돕기 위한 저 모임의 구성원 중 하나였지만, 저런 변이가 일어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건물 사이에 몸을 감추고 있던 세레라지에가 그의 등을 지팡이로 가볍게 밀었다.

“간격을 유지해 주려무나. 저들이 이쪽으로 오면 네가 내 방패가 되어 줘야 하잖니?”

“처음부터…… 이렇게 되실 줄 알았던 겁니까?”

세레라지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입에서는 이렇다 할 부정의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세상에는 할 수 있으면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녀석들이 많은 법이잖니.”

“할 말 없군요. 저도 제가 평범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말을 시작할 수 있으면 해도 되는 거라고 해석한단다. 사실 할 수 있다는 건, 끝을 낼 수 있다는 뜻인데 말이야.”

“그게 그렇게 해석되는 겁니까?”

세레라지에는 전격 한 방을 더 발사해 발렌시아누스의 등을 노리던 사생아를 눕히고, 지면에서 못 같은 가시를 만들어 사생아들의 발등을 꿰어 넘어트렸다.

“할 수 있으면 해도 된다. 이건 우리 마법사들의 논리란다.”

마법사들의 논리, 많은 뜻을 내포한 말이었다.

“평범하게, 황실의 혈통 같은 것에 얽매이고 싶지 않은 사생아들이 쓸 말은 아니군요.”

“그렇지. 평범이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야.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특별했단다.”

그녀가 꿈꾸듯 중얼거렸다.

“그걸 마냥 즐길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파지지직!

세레라지에가 넓게 번지는 전격을 쏘아내 그들 쪽으로 달려오던 사생아 여럿을 쓰러트렸다.

바스타틴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기 힘든 시대입니다.”

“왜인지를 지금 네 눈으로 보고 있잖니?”

바스타틴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막 발렌시아누스가 전격 두른 검으로 변이가 유독 심한 사생아 하나의 목을 치고, 두 번째 목이 돋아나기 전에 단면을 불꽃으로 지지고 있었다.

“이 똥물에 튀겨 죽일 버러지들이 감히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 황제 폐하의 영토에서 당장 퇴거하거라! 네놈들의 창자를 산채로 죄다 뽑아낸 뒤 바위에 걸어 놓고 독수리와 까마귀가 파먹게 할 것이다!”

바스타틴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 저희의 업보군요. 어떻게 살아야 했던 걸까요?”

세레라지에는 이례적으로 진중한 표정으로 답했다.

“마법사는 꿈꿔야 하지. 하늘을 보고 살아야 한단다. 하지만…… 가끔이라도 현실로 돌아와 발밑을 살펴야 했잖니.”

그게 경험담이라는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결국 몰입과 책임이군요.”

“그래. 쓸모를 인정받으려면 몰입해서 실력을 쌓아야 하고, 무해함을 인정받으려면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니.”

꾸르르르르르룩!

둘의 짧은 대화는 그 거대한 소리와 함께 끝났다.

막 사생아 하나의 목을 더 찌른 발렌시아누스가 비명처럼 외쳤다.

“누나! 우리 다 죽을 거 같아!”

* * *

발렌시아누스는 반에게 달려들려는 진을 질질 끌어냈다.

“당장 도망쳐라! 이 대가리에 파스타만 가득 찬 새끼야! 저걸 네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스칼라가 잡아먹혔습니다! 구해야 한다고요!”

“같이 잡아먹히고 싶은가 보구나! 저놈은 황혈을 먹고 강해지고 있다. 네놈까지 잡아먹히면 저놈을 더 강하게 만들어줄 뿐이야.”

반이 변이하고 있었다.

다리에서, 팔에서, 정수리에서 크고 작은 보라색 촉수가 돋아났다.

“아악!”

“살려줘!”

그는 같은 침식자 사생아와 평범한 사생아를 가리지 않고 촉수로 휘감아 몸뚱이에 쓸어 담았다.

정수리에서 돋아난 제일 굵은 촉수는 이제 높이가 3층까지 닿았다.

하나를 베면 둘이 더 자라나는 탓에 제국 검술 ‘불망’으로 막아내던 발렌시아누스도 황급히 물러서야 했다.

“방금 당신이 반을 반으로 찢으려 하지만 않았어도 반이 저렇게 커지지는 않았어!”

“저놈이 폭주한 게 내 탓이냐는 거냐?”

“그래!”

우뚝, 발렌시아누스는 진을 끌어내던 손을 멈췄다.

“?”

그리고 진을 반에게 던지려는 듯 거꾸로 떠밀었다.

“어, 어?”

“내게 불리한 증언을 할 놈을 살려둘 필요는 없지!”

“아아아악!”

진이 기겁하며 팔꿈치와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발렌시아누스는 낄낄 웃으며 진을 풀어주었다.

툭, 마지막에 발을 한 번 걸며 바닥에 구르도록 하자, 진은 바닥을 기면서도 필사적으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보며 발렌시아누스는 가학적으로 웃었다.

본인은 부정하겠지만, 여동생을 꼭 빼닮은 웃음이었다.

“물러서자고 하면 돌격하려 하고, 돌격하자고 하면 물러서려 하니. 역시 사람이란 재미있구나.”

발렌시아누스는 무대를 만들어 주면 아무도 안 노는 게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완전히 희롱당한 진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었다.

“발렌!”

세레라지에가 바스타틴을 앞세워 달려왔다.

“누나. 생각 있어?”

“나라고 저런 걸 상대해본 적이 있는 줄 아니?”

“누나. 생각 없어?”

그녀가 눈을 흘겼다.

“말 진짜 듣기 좋게 하는구나! 촉수형이고 회복력 좋은 옛것들은 대부분 핵이 있다고 하잖니. 그 핵을 공략해야 할 거 같구나.”

“내 불로는 턱없이 부족해. 전격으로 놈을 태워서 핵을 드러낼 수 있겠어?”

세레라지에가 구름 하나 없이 별이 총총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쓴 웃음이 흘렀다.

“오늘 같은 하늘에서 벼락을 떨구려면…… 캐스팅 시간이 30분쯤 걸리겠구나. 버틸 수 있겠니? 없겠지?”

발렌시아누스가 고개를 저었다.

“커지는 속도로 봐서는 30분 후면 거리가 남아나지를 않을 거야. 사생아 몇 놈 잡아 오랬더니 거리를 개 박살 내놨으면 내가 폐하라도 목을 쳐버리겠지. 변이하기 전에 죽였어야 했어.”

세레라지에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아니면 안쪽부터 무너뜨리는 방법도 있지. 독 같은 걸로.”

“독?”

발렌시아누스, 진, 세레라지에의 시선이 일제히 바스타틴에게 향했다.

바스타틴은 경쾌한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못 합니다.”

“왜냐?”

“저는 평범한 약국 주인에 불과하다고요.”

발렌시아누스가 목을 잘라버릴 듯 검을 쳐들었지만, 세레라지에는 그를 저지하고는 낭랑하게 읊조렸다.

“지금이 평범한 약국 주인으로 살 기회잖니?”

“!”

바스타틴이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피와 책임,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쉰 그가 눈을 노랗게 빛내며 팔뚝을 비늘로 덮었다.

그리고 황록색 독무를 일으키며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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