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4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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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타틴은 반투명한 노란 독과 진득한 녹색 독기를 끌어올리며 변이한 반에게 달려들었다.
“반.”
약간 짓궂기는 했지만 착하던 아이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아니, 사실 특별하게 살고 싶었다.
남다른 재능을 남김없이 불태우며 한 번뿐인 삶을 멋들어지게 살아 보고 싶었다.
학회에 나가고, 논문을 쓰고, 마법 약학 박사들과 교류를 나누고 싶었다.
그게 그가 원하던 평범함이었다.
오만이었을까, 소망이었을까?
‘모르겠네.’
꾸르르르륵!
머리 없는 거대한 문어처럼 변한 반은 이제 가로로 거리를 꽉 채우기 직전이었다.
“반!”
몰라줘서 미안하다.
네가 그런 괴물을 기르고 있는 동안.
꾸르륵!
길게 뻗어온 반의 촉수가 바스타틴을 휘감아 날름 집어삼켰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주저앉아 있던 진은 무의식적으로 발렌시아누스에게 존댓말을 하며 물었다.
발렌시아누스는 한 걸음 더 물러서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원래 당황하고 황당한 상황일수록 침착하게 굴어야 했고, 그러지 못한다면 침착한 척이라도 해야 했다.
우왕좌왕하다가 바스타틴의 희생을 헛되게 할 수는 없었다.
“몰라. 독이 돌 때까지는 기다려 봐야지. 운이 좋으면 사는 거고, 운이 나쁘면 다 같이 죽는 거고.”
진은 기겁하며 세레라지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발렌시아누스의 무책임한 말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한 번 흘겨보고 답했다.
“비슷한 확률로 성공하거나 실패하지 않겠니?”
“돌려 말하면 내용이 달라지는 줄 아는 겁니까!”
발렌시아누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진을 질질 끌어냈다.
변이한 반으로부터 서른 걸음 이상 물러섰을 무렵, 그의 노란 눈이 가학적으로 번쩍였다.
“누나.”
“그래. 성공이구나.”
꿈틀거리던 촉수의 움직임이 상당히 느려져 있었다.
작은 촉수는 축 늘어지거나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 버리기도 했다.
세레라지에가 다시 한번 전격 마법을 인첸트하고, 발렌시아누스는 날 듯 달려 나갔다.
“흐.”
제국 검술 1단계 일체개고.
마나로 강화된 육체에 부하, 또 부하가 들어갔다.
팽팽해진 근육이 폭발하는 화산처럼 단숨에 힘을 분출했다.
츠카아악-!
마나 블레이드가 은은하게 일렁이는 장검이 괴물의 몸뚱이를 비스듬히 잘라 냈다.
푸른 전격이 그 사이로 흘러 들어가며 상처를 더더욱 벌렸다.
“발렌, 검을 꽂아 넣으렴! 잘난 내가 네 부족함을 메워줄 테니.”
회귀 전에도 거대 괴수를 잡을 때 자주 쓰던 전법이었다.
푸욱!
발렌시아누스는 세레라지에의 외침을 듣자마자 벌어진 상처 틈으로 검을 쑤셔 넣었다.
세레라지에는 왼손으로는 지팡이를 꼭 쥐고, 오른손에는 블루 드레이크의 뿔 조각을 펜처럼 쥐고 수인을 그리며, 입으로는 주문을 외웠다.
“따르고 또 따르는 나의 번개여, 지금 이 자리에서 한 줄기 선이……!”
옆에서 그걸 들은 진은 입을 쩍 벌리며 경탄했다.
마법학과 수석인 그조차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고도의 술식이었다.
저런 게 재능이구나, 하고 중얼거릴 정도였다.
지금껏 자신이 특별하다고 내심 믿었던 게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 순간을 밝게 비추소서. 전광창!”
번쩍!
긴 주문을 마친 그녀의 지팡이에서 창 같은 전격이 쏘아져 나갔다.
한때 미래 카지노 1층을 쑥대밭으로 만든 그 주문보다도 몇 배는 강한 전격이 단 한 점에 담겨 있었다.
통짜 강철로 만들어진 발렌시아누스의 검을 탄 전격은 그대로 질긴 가죽을 뚫고 변이한 반의 몸속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갔다.
“끼이이이이이이이익!”
거대한 괴물이 몸을 떨며 괴로워했다.
벌어진 상처 사이로 붉은 핵이 엿보였다.
그때 발렌시아누스는 진을 향해 손짓했다.
“네가 끝내라. 너는 그럴 권리가 있고, 그럴 의무가 있어.”
거부할 수 없는 단호한 목소리였다.
진은 이를 악물며 옛 친구에게 달려나갔다.
“이건 다 너희가 시작한 일이잖냐.”
검술학과에서도 학년 차석 밖으로 밀려나 본 적이 없는 진이었다.
그의 찌르기는 발렌시아누스의 것 못지않았다.
발렌시아누스는 느릿한 촉수를 팔뚝으로 쳐내고 또 막아내며 진이 나아갈 길을 지켜 주었다.
백발의 대공과 잿빛의 사생아가 교차하고, 사생아는 괴물의 핵에 검을 꽂아 넣었다.
쨍그랑,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 * *
“너희 그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말이야?”
시험이 끝난 아카데미 캠퍼스는 한산하고 평화로웠다.
시험이 끝난 뒤로 술집을 떠나지 않는 자, 밀린 잠을 몰아 자는 자, 야외수업을 빙자한 소풍을 떠나는 교수를 배움의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저쪽에서 침식자 또 나타난 거 있잖아. 황궁 마도 공방 마법사님이 해결한 거. 그것도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사고 친 거라는데?”
한 학생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배움의 거리에 황족 사생아들 숨어 다닌다는 소문은 알지?”
“그걸 모르는 애가 어디 있어? 망할 놈들. 다 타고난 것들이 노력하는 척하면서……!”
“걔들 죽일 명분이 필요해서 침식을 유도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조절을 잘못해서 그런 괴물이 나왔다나 뭐라나.”
듣던 학생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너무 억지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침식자하고 관련되었으면 폐하께서 살려두실 리가 없잖아.”
“들어 봐. 폐하 뜻이 사생아들을 다 죽이는 거였잖아. 어차피 죽일 애들인데, 막 나가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 이거지.”
짝, 다른 학생이 손뼉을 쳤다.
“그건 또 듣고 보니 그렇다. 진짜 폭군이고, 뼛속까지 망나니네. 친척들 다 죽이려는 것도 그렇고, 잘 죽였다는 여론을 만들려고 침식시키는 것도 그렇고.”
“그런데 침식이 그렇게 쉽게 되는 거였나?”
“몰라. 이쯤 되면 황실 혈통에 뭐 있는 거 아니야?”
“아, 오늘 저녁에 학장님한테 진 표창 받는 거 알지? 보러 갈래?”
“그래. 가자. 대신 그다음에는 나랑 같이 바스타틴의 마법 약 가게 가는 거다.”
“거기 한동안 문 닫는데. 주인이 다쳤다는데?”
“어? 정말?”
저녁 먹고 산책 삼아 나오기 딱 좋은 시간, 공식 행사도 아니었지만 많은 학생이 야외 연단 아래 모였다.
노을이 멋들어지는 캠퍼스에서 진의 가슴에 훈장이 달렸다.
잿빛 머리에 파란 눈, 군청색 제복을 입은 날카로운 인상의 소년과 금빛 훈장은 원래 함께하던 듯 잘 어울렸다.
박수 소리 요란한 가운데 백금빛으로 빛나는 갑옷을 입은 적발의 기사가 진에게 멋들어진 검집을 하사했다.
“축하해!”
“축하한다.”
“역시 자네네! 우리 궁정 귀족의 귀감!”
쏟아지는 축하의 말에 하나하나 답하고, 술자리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한 그는 기숙사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자마자 어두침침하고 퀴퀴한 공기가 그를 반겨주었다.
“여기 있다.”
그곳에는 어울리지 않는 손님이 있었다.
백발 금안에 화려한 제복을 입고 오만한 눈웃음을 짓는 대공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진은 발렌시아누스가 내민 마법 약을 망설임 없이 들이켰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다시 푸르게 변했다.
“다행히 의심은 사지 않은 모양이군. 황족 사생아가 배움의 거리에 여럿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한데도.”
“그동안 워낙 잘 숨겨 왔으니까요. 누구도 저희의 모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학생들은 전혀 다른 학생들이 갑자기 죽은 줄 알고 있지요.”
“그래. 일을 잘하고 있구나.”
발렌시아누스는 옅게 웃으며 가죽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예상보다 무거운 무게에 진은 흠칫 놀랐다.
“지난번보다 더 많이 주십니다?”
“너 혼자 쓰라고 주는 돈 아니니까. 예산이다, 예산. 남은 애들 몇 되지도 않으니까 잘 챙겨. 생활고 때문에 흑마법 쪽으로 안 빠지게. 졸업한 다음에도 친한 척 돌봐 주고. 흑마법사에서 침식자까지는 정말 한 걸음이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날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발렌시아누스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진의 앞에 나타나 제안했다.
진을 궁무부 소속 비밀 행정관으로 고용해, 배움의 거리 일대의 황족 사생아들을 관리하게 하겠다고.
다음이 없다는 걸 아는 진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황족 사생아 중에 침식자가 더 나오면 그거 죽이는 것도 네 일이야. 알지?”
발렌시아누스의 목소리는 장난스러웠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진은 위압되지 않으려 애쓰며 돈주머니를 집어넣었다.
“예.”
“그래. 앞으로도 잘해 보자.”
그가 창문 쪽으로 몸을 돌리자, 진은 망설이던 물음을 던졌다.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저희가 타고난 재능으로 편하게 살려 하는 걸 고까워하시는 게 아니셨습니까? 왜 제게 이런 기회를 주신 겁니까?”
발렌시아누스는 막 나가려던 창틀에 기대앉아 피식 웃었다.
“재능?”
그날의 마지막 역광이 비쳐 밝은 머리가 붉게 달아올랐다.
햇살 그 자체에 녹아든 거 같기도 했다.
그에 대비되는 음영이 드리워진 입술이 빠르게 움직였다.
“너희 정도는 재능도 아니야. 이 나라 귀족 가문 애들은 다 이종족 혼혈이지. 아카데미를 다닐 정도로 부유한 집안 애들이면 평민이라도 이종족 피가 몇 방울은 섞였을 거고.”
“아.”
“이런 말 하기는 뭣하지만, 너희는 사생아니까 어머니 쪽은 보통 인간에 한없이 가까울 거야. 너희가 궁정 귀족 가문 애들하고 비교해서 딱히 어마어마하게 대단한 혈통을 가진 것도 아니라고.”
침식은 황혈의 문제였지 혼혈의 문제는 아니었다.
“너한테 성적으로 밀리는 궁정 귀족 아들딸들은 다 게을러터진 거야. 아니면 네가 성실했거나.”
“그럼 정말로 침식자만 죽이러 오신 겁니까?”
발렌시아누스는 고개를 저었다.
“원래는 다들 황궁으로 데려와서 관리하려는 계획이었지. 그런데 우리 싸운 그다음 날 백금 기사단 쪽에서 지적이 나왔어. 암살 시도가 하루에 세 번씩 터지는 황궁에 외부인이 더 들어오는 건 호위에 좋지 않다고. 그래서 살던 대로 살게 놔두고 현지 협력자를 금화 몇 푼으로 부린다는 방안이 제시된 거고.”
금화 몇 푼으로 부려질 협력자는 고개를 깊숙하게 숙였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폐하께서도 네 태도를 마음에 들어 하셨다. 좋은 윗사람은 책임을 지려는 부하를 감싸 주고 싶어 하기 마련이지.”
“발렌시아누스 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갈라진 틈, 붉은 핵, 양보받은 최후의 일격.
그날을 떠올리며 진은 더욱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돌아온 건 상상하지도 못한 답변이었다.
“그렇게 감사할 거 없다. 침식자 중에는 핵을 공격받았을 때, 마지막으로 미친 듯 발광하는 놈들이 많아. 그래서 내가 안 찌른 거다.”
“예?!”
진이 파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그럼 내가 정말로 너를 위해 침식자를 쓰러트릴 기회를 양보해 준 줄 알았나? 다 나 살려고 한 거야.”
발렌시아누스는 비릿하게 웃으며 창틀 아래로 뛰어내렸다.
너무 큰 빚을 지워 놓아도 마음에 부담을 줄 뿐이었다.
적당한 두려움과 놀라움, 애증이 교차하는 정도의 관계가 제일 부려 먹기 좋았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보여져야 했다.
진은 육두문자를 퍼부으며 창문으로 달려갔지만, 발렌시아누스는 온데간데없었다.
* * *
세레라지에는 발렌시아누스와 함께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며 제이릴리스의 저녁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네가 한 일치고, 잘 해결되어서 다행이구나. 일단 거리가 무너지지는 않았으니.”
그녀는 툭 던지듯 말했다.
세레라지에는 야심을 갖춰야 했고, 사생아들은 야심을 감추려 했다.
평범을 가장해야 한다는 점에서 사생아들과 공통점이 있었던 세레라지에로서는, 그들이 살아남은 이 결말이 꽤 마음에 들었다.
금은 요동의 눈매가 잔잔하게 풀어지는 걸 보며, 발렌시아누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잘 해결된 게 맞을까?”
세레라지에는 가증스러움을 느끼며 답했다.
“한 명이라도 더 살아서, 더 이상 옛것 같은 거에 손대지 않고, 혈통이 어쩌고 평범함이 어쩌고 하는 자의식 과잉스러운 잡생각 그만두고 열심히 살 수 있으면, 그게 잘 해결된 게 아니겠니?”
그가 악의적인 농담을 던졌다.
“다 죽이는 게 맞지 않았을까 걱정되네.”
세레라지에는 눈을 흘겼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뛰어다녔는지 알고 하는 말이니? 텐티아 경을 통해서 백금 기사단 입을 빌려 호위의 어려움이 어쩌고 말하게 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한번 만난 사람에게 할 부탁이 아니었어! 게다가…… 너도 동의했잖니? 설마 벌써 까먹은 건 아니겠지?”
분명 동의했지만, 발렌시아누스는 뻔뻔하게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그는 내심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만약의 순간에, 세레라지에가 망설임 없이 그를 버릴 수 있기를 바랐다.
만에 그가 침식자와 싸우다 죽거나, 제이릴리스에게 밉보여 도망치게 된다고 해도, 세레라지에와 텐티아는 황궁에 남아서 제이릴리스를 섬겨 주기를 바랐다.
“그날 안 온 모인 애들이나 숨은 애들도 있다는데, 다 찾아서 죽이려면 너무 오래 걸릴 거 같더라고. 나중에 사고 한 번 더 치면 그때 진 걔를 통해서 단숨에 쓸어버릴 생각으로 동의했지.”
세레라지에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그때 그렇게 하렴. 이 개망나니 동생아. 이미 끝난 일 다시 헤집지 말고.”
“아이고. 알겠습니다.”
장난기 꾸며낸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아릿하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고맙구나.”
“뭐가?”
“기회를 줘서.”
그날의 나 같은 녀석들에게, 의무와 책임을 다하며 명예를 얻을 기회를 줘서.
이번에는 발렌시아누스도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지 않았다.
말없이 아릿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며 세레라지에는 내심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핵을 찔렀다가 공격받을 수도 있어서 양보했다고 했지?’
개망나니 같다가도 저런 표정을 지으니,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이복동생이었다.
왈칵, 그때 응접실 문이 열렸다.
“돈 받으러 가자꾸나!”
이례적으로 활기찬 황제의 목소리가 응접실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