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49화 (49/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48화

(48)

황제가 거두절미하고 돈 이야기를 꺼내자 나와 세레라지에는 잠시 눈을 멀뚱거렸다.

검은 드레스 위로 금실 자수 놓인 검은 제복 차림의 제이릴리스가 왜 그리 멍청한 표정을 짓냐는 듯 옅게 웃었다.

“세레라지에. 그대가 짐에게 올 때 나누기로 했던 그 돈 말이다.”

“아. 이제야 기억났사옵니다.”

세레라지에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언제나 벌 수 있는지라 돈에 대한 의욕이 없었고, 카지노는 카지노대로 내주지 않으려 별 수작을 다 부린 끝에 척살조까지 보냈는지라, 따 놓고도 환전하지 못하던 칩들.

그녀는 그 절반을 제이릴리스에게 바치며 충성의 뜻을 보였다.

“본래 듣자마자 찾아가려 했거늘, 사방에서 온갖 사건이 터지는 탓에 늦었도다. 사방에서 지원 요청이 쏟아지고, 후작 부부가 제 조카를 통해 수작을 부리니 제아무리 짐이라도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았구나.”

“아닙니다. 폐하. 소신, 언제나 폐하께서 기억해주시리라 믿고 있었습니다.”

세레라지에의 말에 제이릴리스는 그 또래의 소녀답게 웃었다.

“모름지기 군주란 세금과 현금과 황금 앞에서 행복해지는 법! 짐 역시 다르지 않도다.”

전혀 그 또래 소녀 같지 않은 말을 하면서.

“하여, 빠른 시일 안에 그대에게 기사들을 내어 줄 테니 가서 돈을 받아오도록 해라. 받아낸 다음에는 마약 밀매의 죄를 물어, 남은 자산도 싹 압류할 생각이니, 인정사정 봐줄 것 없도다. 절반은 그대 몫이라는 걸 잊지 말도록.”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모두 제 공방의 연구비로 쓰겠나이다.”

“그래. 세레라지에 그대의 충정이 보기 좋도다.”

흡족하게 웃은 제이릴리스가 틀어 올렸던 백금발을 풀며 물었다.

“아, 공방이라 하니까 갑자기 떠올랐구나. 그대가 개발한 전격 확신의 진은 언제쯤 시안이 올라오는가? 짐 역시 그 진을 보고 매우 놀랐음이야.”

세레라지에가 열심히 땅을 팠는데 그곳이 자기 무덤이었다는 말을 들은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폐하. 시안을 요구하실 때는 각기 다른 백 가지의 응용 방안까지 요구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시작도 안 했다는 말이로구나?”

“돈을 받으면 공방에 제자들 들여서 본격적으로 올리겠나이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옵소서.”

“그래. 그래. 돈이 있으면 뭘 못 하겠느냐?”

나는 눈앞에서 펼쳐진 대화에 내심 놀랐다.

황제의 주문을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니.

물론 세레라지에가 워낙 바쁘기는 했지만, 평소였으면 불호령이나 불벼락이 떨어졌을 말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제이릴리스는 그런 건 생각도 나지 않는다는 듯 기분이 좋아 보였다.

“폐하. 오늘따라 얼굴색이 환하시옵니다.”

“그래. 발렌 그대가 보기에도 그렇게 보이는구나.”

그녀가 육식동물처럼 웃었다.

응접실에 켜진 수백 개의 황금 촛대 불빛 아래, 얼굴에 드리워진 음영이 진득했다.

뽀드득, 하얗고 예리한 송곳니가 갈렸다.

“어찌 즐겁지 않겠느냐? 집안 정리가 모두 끝나 가는데. 그대가 사생아 놈들을 모두 정리해준 덕에 이제 남은 변수는 몇 없도다. 이제 붉은 달무리 궁에 남은 계승서열 높은 몇 녀석만 처리하면 정말로 끝이니라.”

나는 그래야만 할 거 같은 기분으로 물었다.

“그다음에는 무엇을 하실 생각이시옵니까?”

제이릴리스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국정을 안정시켜야지. 홍등가의 황금이면 방랑 기사들을 모아 고용하고, 주술 회로 새겨진 갑옷을 입혀 주기에 모자람 없을 것이다.”

기사는 이 시대 최고가의 인력이었다.

‘잘’ 먹여주고, ‘잘’ 입혀 주고, ‘잘’ 재워주고, 월급도 ‘많이’ 줘야 한다.

네 기사단 200여 명의 기사와 와이번핏을 유지하는 데 드는 황금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다음에는 새로이 탄생한 성자에게 기름 부음을 받아 정통성을 챙겨야지. 수도에 머무는 한 그도 감히 짐의 말을 거역할 수 없음이야.”

“그다음에는…….”

굳이 내가 물어볼 것도 없이, 제이릴리스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되려, 나와 세레라지에가 들어주기를 바라는 거 같기도 했다.

“정통성이 생겼으니 각지의 대영주에게 충성 맹세를 요구해야지. 그럼 짐은 진짜 황제가 된다. 거역하는 자는 군대를 휘몰아 토벌해야지. 그다음에는 각지의 마경을 폐쇄하고 교회와 함께 침식자 사냥에 나설 것이다. 짐은 옛것 따위가 짐의 신민들을 농락하려 드는 걸 두고 볼 생각이 없음이야. 그다음에는…….”

황제는 꿈꾸는 듯 중얼거렸다.

“제국에서 마경을 모두 부수었다면 그다음에는 대륙이다. 인류가 옛것 따위에게 휘둘리지 않도록.”

“세상을 정복하실 생각이시옵니까?”

제이릴리스가 노란 눈을 번갯불처럼 번뜩이며 고개를 저었다.

“다르다. 세상을 정복? 짐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걸 바랄 리가 없잖느냐?”

나는 잠시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가 그녀와 함께 전장에 서던 순간을 떠올렸다.

제이릴리스는 언제나 제이릴리스였다.

예나 지금이나, 저 가슴 벅찬 말이 그녀의 본질이었다.

“짐은 언제나 경계 너머를 보고 있도다. 이 세상의 왕들이, 짐의 신민들이 침식과 타락의 걱정 없이 살 수 있기를 바라노라.”

물론 그 과정에서 짐은 명성과 명예를 얻겠지, 하고 덧붙이며 제이릴리스는 말을 맺었다.

적잖이 흥분했는지, 하얀 뺨에 미약하게 홍조가 감돌았다.

“하여, 그 첫 단추가 되어 줄 그대 둘이 중요하도다. 세레라지에 그대는 인정사정 볼 거 없이 칩을 환전해 오고, 발렌 그대는 붉은 달무리 궁에 남은 황족들을 잘 감시하도록 해라. 모든 잘 풀리기 직전에 고꾸라지는 것만큼 한심한 일이 없으니까.”

나는 다소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회귀 전 이맘때에는 와이번을 타고 하늘을 날며 귀족 연합을 징벌하던 황제다.

‘짐은 옛것 따위가 짐의 신민들을 농락하려 드는 걸 두고 볼 생각이 없음이야.’

그 목소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이유 모르게 눈물이 나올 거 같은 기분으로 입 안에서 중얼거렸다.

역시, 전쟁을 막기 잘했다.

“폐하. 한 가지만 더 여쭙겠나이다.”

“무엇인가?”

“붉은 달무리 궁에 남을 자들에게도 시험받을 기회를 주실 수 있겠사옵니까?”

이왕 하는 일, 마지막까지 단추를 밀어 넣을 생각이었다.

한 명이라도 더 살리는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원하는 대로 해보거라. 그대는 언제나 시험받고 있으니.”

제이릴리스가 낭랑하게 답했다.

* * *

“쉿. 자네 그 말 들었나?”

“무슨 이야기 말인가?”

“폐하께서 이번에야말로 우리를 다 죽이실 생각이라네.”

“올 게 왔군.”

황족들은 이제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놀라지도 않았다.

죽음은 붉은 달무리 궁의 일상이었다.

“설마 정말로 다 죽이시기야 하겠나? 이제 반역이다, 암살 사주다, 침식자다 하며 끌려 나갈 녀석들은 다 끌려 나갔지.”

“우리는 외가가 대귀족이 아닌가? 그대의 어머니 역시 프로이하이트 후작가 출신이고.”

“그 프로이하이트 후작가가 지금 반란이니 뭐니 하면서 견제받고 있다네. 나도 이모님, 이모부님과 함께 사이좋게 목이 베이게 생겼어.”

“란체아 그 친구가 오늘 자정에 잠깐 모이자더군. 갈 텐가.”

“란체아? 그 홍등가 망나니 녀석을 말하는 건가?”

“발렌시아누스보다 더 떨어진 녀석의 말을 들어 뭐하다고.”

“나는 됐네. 모이면 모였다고 죽일 게 뻔한데 가서 무슨 꼴을 보려고.”

“그래도 나는 가겠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어. 반드시 살아남아 그 빌어 처먹을 폐하께 엿을 날리고 말겠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들은 뒷배경 좋은 ‘진짜’ 황족들이었다.

1년 전 기준으로 계승서열 10위 안에 들었던 황족도 있었다.

한 궁에 모아 놓은 상황 자체가 그 제이릴리스조차 정치적 후폭풍을 감수해야 할 만큼 대단한 일이었다.

붉은 달무리 궁을 지키는 기사들도 그들의 방이 있는 3층까지 발을 들일 수는 없었다.

덕분에 그들은 정말로 ‘아무도 모르게’ 모일 수 있었다.

자정, 촛불 몇 개가 켜진 방에 황족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어둠이 잔잔하게 방 전체를 휘감고 있는 탓에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클라렌스. 왔군.”

“아리에타 자네인가.”

“란체아 그 친구는 진작 와 있었네.”

“헬레나, 그대가 올 줄은 몰랐네.”

“내가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지.”

모친이 검술로 이름 있는 백작 가문 출신인 헬레나는, 모친 쪽을 더 닮아 금발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진 레이디였다.

한때 황녀였으나, 지금은 죄인만도 못한 신세가 된 그녀의 붉은 눈에는 지옥 같은 열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저 멀리서 란체아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형제자매 여러분. 환영합니다.”

이단 교단의 인사말 같은 시작에 몇몇이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실제로 그들은 형제자매였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저 란체아는 여러분께 홍등가를 통한 탈출 계획을 설명해드리려 합니다.”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며 헬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늘 가던 곳이라고 잘 알고 있군.”

“솔직히 믿음직하네.”

“달리 보게 되었어. 설마 망나니짓까지 다 계획이었나?”

주변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막힘없이 이어지는 설명, 확실한 인맥, 만약의 상황을 고려한 2번, 3번 대안까지 부족함 하나 없었다.

그때 그녀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가 하나가 들려왔다.

“저 새끼 또 약 팔고 있네. 다들 제물로 바쳐 놓고 혼자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려고.”

헬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입을 굳게 다물며 비명을 참았다.

“읍!”

하얀 제복에 뒤로 넘긴 백금발, 핼쑥한 뺨에 노란 눈을 가진 황족.

황제의 개, 와이번핏의 도살자, 친족살해자.

사생아 스무 명을 침식자 괴물의 밥으로 줬다는 발렌시아누스가 그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어떻게 들어왔는지, 어디부터 들었는지, 밀고할 생각인지 아닌지, 물어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는 그녀가 소리치는 것보다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내 말 잘 들어. 저기 가면 무조건 죽어. 나도 나갈 거야.”

“!?”

“황제 밑에서 일하다 보니 알겠어. 나도 곧 버려질 게 분명해. 못 버티겠어. 이번에 나가는 애들을 미끼로 삼아서 도망칠 거야. 희망 카지노 쪽이랑 이야기 끝났어. 능력 있는 애들만 데리고 갈 거니까, 생각 있으면 이 모임 끝나고 다들 흩어진 다음에 옆 방으로 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거짓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너무 절박해 보였다.

발렌시아누스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옆 사람 얼굴도 제대로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 헬레나는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 *

회귀 전, 나를 제하고도 제이릴리스를 따른 황족들이 있었다.

힘의 논리에 따라 굴복하거나, 거짓으로 복종하고 기회를 노리거나, 분노보다 권력욕이 앞서거나, 가족을 살리기 위해.

이유는 각양각색이었지만, 하나같이 괜찮은 인재들이었다.

내가 막 흥등가에서 나왔을 때 약과 술로 폐인이 되어 있던 몸을 재활하는 걸 도와준 고마운 이복남매들이었고.

헬레나는 내가 다시 검을 쥐게 도와줬었다.

그들이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회귀 전에도 제이릴리스를 따랐던 이들뿐만이 아니라, 반감이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던 이들까지 포함해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시험을 치를 기회를 주었다.

망나니로 유명한 내가 약한 말을 하며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유도했고, 미끼라는 자극적인 표현을 쓰며 란체아 쪽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일단 들어는 보자는 마음으로 올 수밖에 없게.

“루디. 차 좀 준비해줘. 허브 많이 넣어서 빨리 안정되도록. 초도 향초로 피워 주고.”

“예. 발렌 님.”

치맛자락 안쪽에 두 자루 마총을 찬 루디가 내 한 걸음 뒤에서 따랐다.

오래지 않아 문이 조용히 열렸다.

“……발렌시아누스.”

금발 적안에 우수한 검객이자 빼어난 장교, 헬레나.

“무슨 생각으로 우리를 불렀지?”

잿빛 단발머리에 금안을 가진, 재화에 밝은 하드리탄.

“솔직히 너 못 믿어.”

갈색 머리를 길게 땋은, 미래의 정령술사 데니아.

그 외 다섯 명 정도가 더 모여들었다.

후드를 뒤집어쓴 자도 몇몇 있어 얼굴이 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회귀 전의 충성파는 모두 모여 있었다.

나는 안도하며 말했다.

“텐티아 경. 문을 닫아 주게.”

‘경’ 이라는 말을 들은 황족들이 기겁했다.

“발렌시아누스!”

“함정이다!”

“죽여!”

단검을 뽑아 드는 자, 주문을 외는 자, 창문을 찾는 자로 방이 분주해졌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한 손을 들어 그 혼란을 다독였다.

“너.”

내가 움직이지 않는 걸 본 헬레나가 내 목을 겨누었던 단검을 먼저 거두자, 루디도 마총을 집어넣었다.

……언제 뽑았대?

텐티아 경을 본 헬레나가 이를 갈며 말했다.

“함정이냐?”

“아니.”

“그럼 이게 무슨 장난인지 설명해야 할 거다.”

“그래.”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 모인 황족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연극적으로 양손을 벌리며 그들에게 불벼락 같을 한마디를 던졌다.

“나 궁무부 고문 발렌시아누스는 황제 폐하께 충성을 맹세하기로 한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내가 언제?”

헬레나가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