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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53화 (53/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5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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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거리를 야경꾼들의 등불이 수놓는 가운데, 우리는 운하 한가운데에서 헤엄을 치며 공방을 주고받았다.

“오늘 물속에 가라앉는 건 너다.”

란체아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뚝,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단검을 쥔 손에 힘을 넣어 놈의 척추를 완전히 끊었다.

놈이 주사기를 사용했을 때부터 내심 1대 1 상황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상대를 억지로 침식시키는 법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첫 번째는 정신을 무너뜨리고 침식시키는 것, 두 번째는 침식자의 척수액이나 피 같은 걸 몸에 투여하는 것이다.

두 번째 방식은 성공률이 기본적으로 낮았지만, 다들 같은 형제자매인 황족들에게는 잘 통했다.

……상대의 정신을 무너뜨릴 수 없는 약한 침식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너. 힘을 그렇게 많이 받아 오지는 않았지?”

내가 귓가에 속삭이자 일순 놈의 몸이 굳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놈을 왼손으로 단단히 움켜쥐고 팔다리를 천천히 휘저어 격자 수문으로부터 멀어졌다.

놈을 물속에 가라앉혀도 즐겁겠지만, 오늘의 마무리를 짓고 싶은 곳은 운하가 아니었다.

“아무리 힘을 잘 숨길 수 있는 옛것을 섬긴다 해도 황궁 안에서 침식자임을 감추는 건 어려웠겠지. 네 장기가 힘이 아니라 비열함이기도 했을 거고.”

“발렌시아누스!”

분노가 찬 목소리가 수면에 물결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미 모든 걸 잃었다고 하지 않았나? 거짓말이었구나. 복수는 하고 싶고, 진짜로 모든 걸 잃어버리는 건 무서웠나?”

아까부터 놈은 양팔 정도만 변이시키고 있었다.

몸속은 똑같은 괴물인 채로 양팔만 변이시키는 게 아니라, 몸통 쪽은 완전히 인간의 몸을 유지하고 있는 거였다.

그래서 끊을 수 있는 척추가 있는 거였고.

빨리 더 변해주면 좋겠는데.

“복수한 다음을 생각하면 복수 같은 건 못하지.”

놈이 이를 악물었다.

나는 놈의 척추에 꽂았던 단검을 뽑아 놈의 갈비뼈 사이를 노리고 다시 꽂으려 했다.

놈은 왼팔로는 헤엄을 치고 있었고, 오른팔로는 나를 견제하고 있었다.

“황제가 주는 녹이 그리 달았냐!”

놈이 발버둥 쳤다.

마나를 아끼지 않고 퍼붓고 있었음에도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놈에게는 침식자인 자신이 안간힘을 써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거다.

“그래. 인륜도, 천륜도, 시간도 거스를 만큼 달았지.”

나는 놈의 옆구리에 단검을 꽂아 넣었다.

찰나, 놈의 눈이 보랏빛 광채로 타올랐다.

물컹, 예리한 단검이 질긴 살가죽을 뚫지 못하고 미끄러져 나갔다.

“아.”

촤아아아아아악!

다음 순간 나는 놈의 변이한 촉수에 다리를 잡혀 하늘로 떠올랐다.

수면과의 거리를 보니 높이가 5m은 되는 거 같았다.

“이 빌어먹을……!”

첨벙! 첨벙! 첨벙!

놈의 나를 수면에 이리저리 처박았다.

나는 물을 마시지 않으려 노력하며 내 몸이 강의 남쪽으로 향하는 순간을 포착했다.

반드시 그쪽으로 건너가야 했다.

가야 할 곳이 있었다.

그곳에 대귀족을 외가로 둔 황족들을 죄다 숙청한다는 무리수를 둔 다음 나올 반발을 단숨에 이겨낼 방법이 있었다.

사악!

나는 일순 단검에 마나 블레이드를 두르며 촉수를 잘랐다.

붕, 하고 떠오른 내 몸이 강의 남쪽 운하 변두리 난간 위로 떨어졌다.

난간이 부서지며 우당탕, 소리가 났는데, 다행히도 뼈는 부러지지 않은 거 같았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서 충격으로 뻐근한 다리를 주물렀다.

“그래. 다음을 생각하면 복수 같은 건 못 하는 법이지.”

란체아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얼굴은 인간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덩치는 오거만큼이나 커졌다.

목덜미와 등에 얇고 긴 촉수가 여럿 나 있었는데, 나를 집어던진 촉수도 그것 중 하나같았다.

“이제 만족하나 발렌시아누스? 내가 도망치게 내버려 뒀으면, 여기서 죽을 일은 없었을 텐데.”

“너같이 약삭빠른 새끼가 도망치게 놔두느니 여기서 죽고 말지.”

나는 그렇게 답하며 몸을 돌려 중앙 선착장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도, 도망이라고! 나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고 도망을 쳐!”

나는 고개를 획 돌려 이성의 빛이 사라진 놈의 눈을 바라보았다.

“추악해진 걸 축하한다. 이제야 네 영혼에 어울리는 외관을 가지게 되었구나. 결국 너도 실패작이었어. 그 힘은 너 따위가 다룰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도발은 망나니의 필수 교양이었다.

물론 회귀 전에 경지에 못 올랐던 나로서는, 누군가를 실패작이라 부르는 게 썩 즐겁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란체아의 영혼이 저따위로 생겼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못 하는 말이 없구나! 그 혀를 뽑아 주마!”

놈이 분노에 찬 기괴한 함성을 내지르며 나를 따라왔다.

* * *

“발렌 님이 다시 이쪽으로 오는데요? 남쪽 운하 옆 도로를 달리고, 어? 침식자?”

“루디. 보지 마렴. 저걸 똑바로 봤다가는 같은 꼴이 될지도 모른단다.”

미간을 찌푸린 세레라지에는 손거울을 꺼내 루디에게 건네주고, 반항하던 황족에게 주문을 날린 뒤, 침식자에게 도망치는 발렌시아누스를 바라보았다.

“또 그 사악한 혀를 놀려 침식을 유도했겠지. 대단한 망나니 놈이구나. 괴물로 만든 다음에 마음 편하게 죽이려 하다니.”

텐티아가 아, 하고 침음성을 흘렸다.

“텐티아. 건너가야 하지 않겠니? 저 정도 괴물을 상대하려면 기사가 넷은 필요하겠구나.”

텐티아는 눈을 부릅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가기는 가야 할 거 같습니다만, 발렌 전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과드리기 위해 가야 할 거 같습니다.”

“무슨, 아.”

고개를 든 세레라지에 역시 침음성을 흘렸다.

중앙 선착장 바로 앞에는 대성당이 있었다.

그곳에는 사제들과 성기사, 추기경과 교황, 그리고 아직 세상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새 성자가 있었다.

“발렌시아누스. 안 된단다. 대체 뒷감당 어떻게 하려는 거니?”

세레라지에가 이를 악물고 주문을 외웠다.

마법사와 성직자의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그녀 역시 빛에 대한 무의식적인 믿음은 있었다.

“세상에. 발렌 님이 미치신 게 분명해요.”

루디는 넋 놓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손거울을 이용해 변이한 란체아를 조준했다.

신실한 신자인 그녀에게 발렌시아누스가 하려는 일은 결코 용납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배를 몰고 저쪽 강변으로 가라! 고작 60m을 못 간다는 게 말이 되느냐!”

텐티아가 노잡이 하나를 윽박지르며 쪽배를 띄웠다.

파지지지직!

세레라지에가 쏘아낸 전격이 변이한 란체아의 발목을 굳혔다.

타아앙!

루디가 쏘아낸 마탄이 란체아의 옆구리를 관통했다.

“전하!”

텐티아가 거의 운하 남쪽 선착장에 다다랐다.

“끼이이이이이이!”

란체아가 촉수를 흔들며 울부짖었다.

정신 파동이 퍼져나가고, 발렌시아누스가 망치로 얻어맞은 듯 비틀거리며 끝내 무릎을 꿇었다.

텐티아가 탄 쪽배의 두 노잡이가 그대로 정신을 놓고 옛것들을 찬양하는 기도를 올리고, 루디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물을 흘렸으며, 일대의 시민들이 잠에서 깨어나 몸을 떨거나 지독한 악몽으로 빠져들었다.

그중 몇몇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것이고, 몇몇은 일어난 뒤 다른 신앙을 가질 것이었다.

그리고 성당 정문이 왈칵 열렸다.

“안 됩니다!”

“성자님!”

“놓으십시오. 저기 구렁텅이에서 올라온 거악이 있는데 어찌 내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발렌시아누스는 숨을 몰아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성자님.”

이목구비는 사내답게 짙고 그윽하며, 새까만 머리카락은 약간의 곱슬곱슬한 머릿결이 한 덩어리로 보일 정도로 검고, 눈동자 역시 빛을 먹는 듯 검다.

축복을 받고 하루아침에 뒤바뀐 체형은 장인이 수십 년을 들여 완성한 역작을 보는 듯하고, 옷자락 사이에는 포도알처럼 갈라진 근육이 선명하다.

검은 성자 마테오스, 미래의 화형선고자.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

“이제 저를 전하라 부르시면 아니 되십니다.”

발렌시아누스는 제이릴리스 다음가는 존대로 마테오스를 대했다.

교황을 뜻하는 성하와 황제를 뜻하는 폐하가 같은 급의 존칭인데, 교단에서 성자는 그런 교황보다도 높은 존재였다.

“알겠습니다. 아니, 알겠네.”

“갑작스럽고 무리한 요청이나, 빛 앞에 미천한 이 종을 도와 저 침식자를 물리치는 걸 도와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침식자를 물리치라 주께 받은 힘이네. 어찌 내가 물러설 수 있겠는가.”

“너…….”

란체아는 성자의 등장만으로도 이를 악물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방금 일대를 뒤흔들었 포효가 거짓말 같았다.

그를 본 마테오스의 눈빛에 불꽃 같은 적의가 어렸다.

화형선고자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걸 보며, 발렌시아누스는 웃었다.

“나는 질투하는 신이니, 너희가 다른 신을 섬길 때 좌시하지 않겠노라.”

“너! 광명의 아이야!”

란체아의 것 아닌 목소리가 란체아의 입을 빌려 튀어나왔다.

수천 사람이 동시에 말하는 거 같았다.

발렌시아누스와 텐티아조차 귀를 틀어막으며 인상을 잔뜩 찌푸릴 정도였다.

그러나 마테오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네게 채찍을 내리쳐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다른 신을 섬기는 자에게 채찍을 내리쳐 내 아이들을 물들이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검은 성자의 등 뒤에서 검게 빛나는 광배가 떠올랐다.

꼭 일식이 일어난 태양을 바라보는 거 같았다.

후우우우, 주변 소리가 일순 왜곡되며 사라졌다.

엄청난 강풍이 부는 듯했다.

“네게 채찍을 내리쳐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다른 신을 섬기는 자에게 채찍을 내리쳐 내 아이들을 물들이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오로지 성자의 말만이 되풀이되어 울리고, 그 말이 채찍이 된 듯 란체아가 크게 비틀거렸다.

어느새인가 푸른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검은 광배가 웅웅 울리며 은은한 빛을 내뿜을 때마다 하얀 불길이 침식자의 몸을 불태우고 쪼그라트렸다.

란체아가 바닥을 뒹굴며 울부짖었다.

“발렌시아누스! 저주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다시 만날 것이다. 그때는 너희 남매를 내가 무릎 꿇리고 그 영혼을 내 촉수로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이다.”

발렌시아누스가 비틀비틀 일어나며 답했다.

“우리 남매는 헌금을 많이 했으니 반드시 천국에 갈 것이다.”

그 말을 들은 검은 성자 마테오스와 란체아가 동시에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인간의 크기로 돌아온 란체아가 맥없이 쓰러지고, 검은 성자의 광배가 사라지고, 다시 주변에 소리가 돌아왔다.

“전하!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대성당으로 침식자를 끌고 가시다니요!”

변이한 노잡이 둘을 처리하고 배를 댄 텐티아가 황급하게 달려왔다.

성당 담 안쪽에서 하얀 갑옷을 입고 붉은 망토를 두른 성기사들이 몰려와 발렌시아누스를 포위하고 있었다.

“돌려보내거라.”

마테오스의 말에도 성기사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내 직접 황제 폐하, 아니. 황제를 찾아가 오늘의 일을 물을 것이다. 그러니 대공은 돌려보내거라.”

그제야 성기사들이 발렌시아누스를 집어 던지듯 텐티아에게 건네주었다.

텐티아는 그를 부축하고 다시 운하를 건너 강북 선착장으로 돌아갔다.

“미쳤니?”

죽은 황족들이 시신과 살아남은 황족들이 짐마차에 실려 황궁으로 출발하는 가운데, 세레라지에는 발렌시아누스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그러다 파문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니? 아직도 마테오스가 네가 구해줬던 그 신학생 같니? 지금 황실과 교단이 얼마나 어색한지 모르니? 교단이 네 무례를 빌미 삼아 지방 영주들 편에 붙으면 어쩌려고 그러니? 나는 모르겠구나. 죽든 말든 네가 알아서 하렴.”

루디가 세레라지에를 말리고 발렌시아누스를 부축했다.

“그러지 마세요. 발렌 님도 도망치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가셨을 거예요.”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생글생글 웃고 있지 않았니? 루디 너도 봤잖니? 충실한 건 좋지만 거짓말은 하지 말려무나.”

그 말들을 들으며 발렌시아누스는 옅게 웃었다.

“전하.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제가 정정당당하라 말씀드린 건 전부 귓등으로 들으신 겁니까? 군주와 기사는 교회를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절대로 전하를 혼자 보내지 않았을 겁니다. 앞으로는 절대 저를 두고 싸움에 나설 생각 하지 마십시오!”

텐티아가 윽박지르는 와중에도 웃었다.

그걸 본 루디가 녹색 눈을 가늘게 떴다.

“전하. 혹시 일부러 교회로 가신 건가요?”

“!”

일순 텐티아와 세레라지에가 입을 쩍 벌리고, 발렌시아누스가 웃음을 거두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특별히 도울 만한 곳이 없음을 확인했고, 셋과 함께 선착장에서 대로로 나가며 입을 열었다.

“알려줘야 했으니까.”

“뭘 알려드리고 싶었는데요?”

“침식자 문제가 이제 더 이상 남 일이 아니라고. 교회와 황실의 협력이 절실하다고. 지난 1년간 담을 쌓고 있던 교회가 먼저 황실로 찾아올 명분이 생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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