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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55화 (55/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54화

(54)

“마총. 역사 속에 몇 번 등장했던 무기지. 나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군. 그 무기는 네가 가지기에는 분에 넘친다.”

텐티아가 루디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루디는 녹색 눈을 파르르 떨며 몸을 돌렸다.

“안 돼요.”

텐티아는 그녀를 가볍게 들어 올려 질질 끌어냈다.

“너는 그 무기의 반동을 제어할 힘도 없고, 침식자의 정신 파동을 견뎌 낼 정신력도 없다. 대공 전하께서는 나보다 너를 더 믿으시는 듯하지만, 나는 그분의 호위 기사다. 네가 침식자들의 정신 공격에 당한 채로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의 뒤통수에 마총을 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어. 그러니…….”

“그러니?”

나는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도끼눈을 뜬 텐티아가 반대편이 까마득하게 넓은 연무장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쳤다.

“지금 당장 정신력과 근력을 키우기 위한 훈련을 시작한다! 훈련은 언제나 당당하고 배신하지 않지. 시작은 가볍게 구보로. 5kg 모래주머니를 매달고 연무장 세 바퀴로 시작!”

루디가 한쪽에 쌓인 모래주머니와 연무장 반대편을 바라보더니 식은땀을 흘렸다.

“발렌 님. 살려 주세요. 텐티아 경이 저를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미안. 루디.”

“발렌 님! 저를 버리시는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고.”

텐티아가 내 손목을 붙들었다.

“발렌 전하께서는 이제 25kg 훈련용 중갑을 입고, 모래주머니 10kg를 매달고, 연무장 다섯 바퀴를 뛰실 겁니다.”

루디가 입을 쩍 벌렸다.

“그렇게 몸을 풀고 제국 검술 본을 훈련한 뒤, 갑옷을 벗고 저를 포함한 기사들관 자유 대련, 그다음에는 명상 수련을 통해 마나를 모으고, 그다음에는 황제 폐하의 단련법대로 훈련하실 겁니다.”

나는 개미굴로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의 단련법이라면? 훈련용 중갑옷 입고?”

“예. 중갑옷은 꼭 입으셔야 합니다.”

붉은 머리의 텐티아가 그 머리 색만큼 열정에 찬 표정으로 단언했다.

나는 루디를 향해 아련하게 웃어 보였다.

“루디. 우리 같이 살아서 돌아가자꾸나.”

동쪽 하늘에서 떠오른 태양이 머리 위에 올라섰다.

* * *

자유 대련이 막바지에 달하고, 나는 텐티아 경의 방어를 뚫기 위해 검을 찔러 넣었다.

“발렌 전하! 집중하십시오!”

“집중하고 있네!”

캉!

내가 한껏 찔러 넣은 훈련용 검을 텐티아 경이 옆으로 쳐냈다.

나는 손목을 틀며 반동을 흘려내고 검을 다시 끌어와 베어 올렸다.

다리에서 골반, 어깨에서 팔꿈치로 이어지는 힘의 방향이 모두 딱딱 맞아야만 할 수 있는 기예였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기사도 쳐낸 줄 알았던 검에 베여 죽음을 맞으리라.

그러나 텐티아 경은 여유만만하게 웃으며 내 검을 노리고 그녀의 검을 내리쳤다.

카가강!

검과 검이 맞닿은 순간, 나는 곧바로 내 검날이 텐티아 경의 검면을 타도록 누르며 그녀의 팔을 제압하려 했다.

“엇!”

하지만 텐티아 경은 왼손을 뻗어 내 오른손 손목을 붙들더니, 그대로 내 다리를 걸어 바닥에 눕혀버렸다.

쿵!

“방금은 썩 훌륭하셨습니다.”

“빈말 말게. 겸손이 과하면 기만일세.”

나는 뒤통수를 문지르며 일어나 다시 검을 들었다.

텐티아 경이 쇼트커트 붉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이제 전하는 마나 훈련으로 넘어가도록 하지요. 실력에 비교해서 마나가 너무 부족하십니다.”

“오호, 내 실력이 아주 빨리 늘고 있다는 건가?”

“아니요. 딱히 그런 거 같지는 않습니다.”

나는 쿨럭, 하고 헛기침을 했고, 텐티아 경은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알맞은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짜증 나는 표정이었다.

이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실력에 비해 많은 마나를 가졌던 소드 엑스퍼드의 방랑 기사가 어린 소년으로 돌아간 느낌입니다.”

나는 무서울 정도로 정확한 그 평가에 내심 침음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빨리 마나를 늘려야겠군.”

“예. 그렇습니다.”

“루디 쪽은 어떤가?”

나와 텐티아는 동시에 루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움직이기 편한 옷을 입고 텐티아 경의 후임인 본넬 경과 대련하고 있었다.

캉, 카앙!

“더 빨리! 더!”

루디는 두 자루 마총 대신 두 자루 단검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단검은 투척과 참격과 찌르기에 모두 유용하게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그녀는 아직 모자란 신체 능력을 특유의 시력으로 극복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던진 단검들은 정확히 본넬 경이 입은 전신 판금 갑옷 관절 부위에 끼었다.

지금도 어지간한 정예병도 단숨에 무력화시킬 수준이었다.

“그 대공에 그 시녀로구나!”

“사용인을 주인에 비하는 건 주인과 사용인 모두에게 실례입니다!”

그녀가 스텝을 밟을 때마다 흙먼지 사이에서 녹색 안광이 섬뜩하게 번뜩이고, 긴 갈색 말총머리가 나부꼈다.

나는 묘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앞으로 절대 술 먹고 사고 치지 말아야겠군. 아니, 칠 생각도 없기는 했지만.”

텐티아 경이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셔야 할 거 같습니다.”

머리 위에 떴던 태양이 서쪽 성곽 아래로 가라앉을 무렵, 훈련용 갑옷이 바위산만큼 무겁게 느껴질 무렵, 실 같은 마나로 근육을 보조하다 그것도 한계라고 생각될 무렵, 훈련이 끝났다.

나와 루디는 사이좋게 연무장 옆 긴 의자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내쉬었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신입 기사들 역시 비슷한 모양새였다.

텐티아 경이 나른하게 웃으며 우리에게 물을 가져다주었다.

“드십시오. 전하. 너도 마시거라. 오늘 정말 잘해 주었구나.”

“고맙네. 경.”

“고맙습니다. 기사님.”

루디가 갓 태어난 아기 사슴처럼 팔다리를 떨었다.

“발렌 님. 이래서는 일을 하나도 못 할 거 같아요. 그래도 힘내 보겠어요.”

그제야 나는 루디에게 해주지 않은 말이 있다는 게 떠올랐다.

“아 맞다. 루디. 너 내일 면접 있어.”

그녀가 녹색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저는 아무 데도 갈 생각이 없는데요?”

“아니. 네가 면접관이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텐티아 경도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이사 가.”

* * *

한때 수백 명이 있던 붉은 달무리 궁에 남은 대공은 넷뿐이다.

나, 헬레나, 하드리탄, 데니아.

붉은 달무리 궁은 본래 황제의 별궁인 만큼, 넷이서 지내기에는 지나치게 호화롭고 격도 맞지 않았다.

황실에서 일하기로 한 셋은 숙소를 궁무부 관사로 옮기기로 했고, 나는 본궁 옆 별궁을 하사받았다.

“황제 폐하께서 발렌시아누스 대공의 일탈을 염려하시니, 눈과 귀가 닿는 곳에 기거하도록 하시지요.”

테 얇은 안경을 쓴 깐깐한 인상의 궁무부 행정관이 깐깐한 목소리로 깐깐한 말을 했다.

“이 별궁의 예산은 제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폐하께서 황족 연금을 증액하셨지만, 동시에 황족들의 지나친 사치를 우려하여…….”

대놓고 나를 사사건건 감시하겠다는 뜻이었다.

이에 나는 붉은 달무리 궁 내 방에서 술과 말린 안주를 짐마차 한 대 분량만큼 실어와 별궁 식량 창고에 차곡차곡 채워 넣는 것으로 답했다.

“전하…… 설마 저게 다 술입니까?”

“그럼 물로 보이나?”

“고문으로서의 일을 매일 술에 절어서 하실 생각…….”

“루디. 요즘 심심한데, 비싸고 시간 많이 드는 그런 놀이 없을까?”

“두 배의 말로 하는 체스가 있는데, 말은 흑단과 상아예요. 사 올까요?”

“좋지. 이왕이면 소설도 한가득 사 와. 발렌 대공이 읽을 거라고 하고.”

“발렌 전하!”

궁무부 행정관이 비명을 질렀다.

상류 사회에서 소설은 잡기나 잡설이라고 불리며 무시당했다.

사교계에서 은퇴한 다음에 소소한 일거리로 읽을 것이지, 왕성한 10대 대공이 읽을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제 보석도 좀 사도 되나요?”

루디가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사려 깊은 배려에 내심 감사하며, 그걸 드러내지 않고 호쾌하게 답했다.

“마음껏 질러! 돈이 부족하다면 때리고 빼앗아 와도 좋아. 누구 시녀가 가지고 싶다는데 기꺼이 바쳐야지.”

“발렌 님! 사랑해요!”

“발렌 전하! 정신 차리십시오!”

행정관이 비명을 질렀다.

루디는 시장을 돌며 술과 안주, 간신히 마약의 범주에 들지 않는 묘한 향, 수위 높은 연애 소설과 기사 소설, 화려한 유리 공예품과 기이한 장난감들과 수상한 마법약 같은 걸 발렌시아누스 대공의 이름으로 왕창 사 왔다.

모두 내가 권력에 뜻이 없음을 과시하는 거지, 절대 좋아서가 아니다.

“끄르르르륵…….

궁무부 행정관은 입을 쩍 벌리고 거품을 물었고, 나는 그를 바라보며 포도주 한 병을 깠다.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감돌았다.

“루디. 면접 준비됐어?”

“입 무거운 아이들, 소심한 아이들, 집안 한미한 아이들로 뽑을게요.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절대로 발설하지 못하게!”

그녀가 단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행정관이 10년은 더 늙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나는 금화 열 닢이 든 주머니를 그의 손에 쥐여주며 은은하게 웃었다.

“나는 저 아이를 이 별궁의 시녀장으로 만들어 주고 싶네. 그러려면 예산을 쥐고 다룰 수 있어야 하지. 폐하께서 연금을 늘려 주셨을 때 설마 나를 믿으셨겠는가? 다 내 주변 사람들을 믿는 거지.”

“그 주변 사람이 저입니다.”

“돈 자루를 루디에게 넘기게. 그렇지 않으면 내가 매일같이 홍등가에 드나드는 꼬라지를 보게 될 테니.”

“예?”

“오늘 저녁에는 희망 카지노나 가야겠군. 여봐라! 마차를…….”

툭, 행정관이 품속에서 관리비 장부를 꺼내 책상에 내려놓았다.

“제게 최종 결산은…… 꼭 받으셔야 합니다.”

“물론이네. 내가 황제 폐하의 돈을 허투루 쓸 사람 같은가?”

“아니십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행정관이 어깨가 축 처진 채로 퇴근하고, 루디는 마부와 요리사, 시종 둘과 하녀 둘을 뽑았다.

“발렌 님은 간이 진한 걸 좋아하시고, 매콤한 걸 좋아하시니까 신경 잘 써 줘. 물 온도는 이 정도를 좋아하시고…….”

그녀가 꽤 능숙하게 일을 나눠 주는 걸 보며 나는 내심 감탄했다.

“여러 번 해본 거 같네.”

그녀가 녹색 눈을 반짝이며 황홀한 듯 웃었다.

“모든 시녀의 꿈이거든요. 좋은 고용인을 만나는 것과 한 궁의 시녀장이 되는 것. 하나만 이뤄도 시녀 인생 성공인데, 저는 20대에 둘 다 이뤘네요.”

“장부 쓰는 법 알아? 가르쳐 줄게.”

“예전에 회계 배운 거 기억하고 있으시던 거예요?”

루디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회계?

나는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짓다 고개를 끄덕였다.

성실하게 살았던 시절의 기억은 없다.

“회계는 잘 기억 안 나고……. 잘 봐. 이게 분식회계라는 거야. 내가 매달 관리비를 이만큼씩 빼돌려서 비자금을 조성할 생각이거든. 중요한 건 방법인데…….”

이 수법을 이용해 공식 기록으로 남으면 안 되는 일들을 해야 해서 말이야.

물론 그걸 당장 말하지는 않았다.

“발렌 님!”

또다시 루디의 비명이 붉은 달무리 궁을 뒤흔들었다.

* * *

“이사했다고 했니? 축하한다. 이제 너도 황제 폐하의 노예가 되었니? 꼭 그렇게 되면 좋겠구나.”

세레라지에가 남색과 노란색 금은 요동을 새침하게 빛내며 말했다.

“천벌 받을 소리는 그만둬 줘.”

황립 마도 공방, 살아있는 거대한 나무의 뿌리 안에 만들어진 건물.

그곳 중간층에 위치한 세레라지에의 공방에서는 못 보던 얼굴 넷이 금속판에 열심히 마법진을 새기고 있었다.

“저 친구들이 누나 제자들이야?”

“그래. 내가 쓴 확산 마법진 논문을 보고 졸업 전 연구용역을 자처한 친구들이지.”

나는 그들의 눈빛과 눈 아래 다크서클을 흘깃 바라보았다.

“저렇게 굴려도 돼? 졸업하고 안 올 거 같은데?”

“아주 저주를 거는구나. 그러기를 바라는 거 같다? 일단 제국에 나만 한 재능의 전기마법사는 몇 없지. 게다가 전격 확산 마법진을 배울 수 있는 곳도 이 공방뿐이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서 기어들어 올 수밖에 없다는 거군. 그럼 뭐, 어떻게 굴리는 누나 마음이지.”

그들이 이쪽을 향해 죽일 듯한 눈빛을 보내는 거 같지만, 무시했다.

“용건이 없으면 빨리 꺼지려무나. 새 술식을 연구 중이니까.”

“여기서 뭘 또 한다고?”

“그 촉수계 옛것들 몸속으로 깊이 파고들 수 있는 전격 술식을 개발 중이란다.”

세레라지에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때는 내 실력에 비해 별 도움이 안 된 거 같아서…….”

그녀가 흔치 않게 말꼬리를 흐렸다.

부탁할 게 있었는데 마침 잘 됐군.

“그럼 나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뭔데 그러니?”

“마탄 좀 만들어줘.”

그녀가 나를 바싹하게 튀겨버릴 듯 흘겨보았다.

“그게 마법사들에게 무슨 의미인지 아니?”

나는 진중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알지. 엘프 마법사들이 드워프 장인들하고 같이 만든 무기. 원래는 제국에 대항하려고 만든 무기지.”

“!”

“효율이 너무 좋은 나머지, 모든 마법사가 공격 마법이 아니라 마총 개량에만 몰두했지. 그걸 시작으로 마도구 붐이 일고, 결국 마법사를 탐구자가 아니라 마법진 새기는 기계로 만들어버렸지. 제 무덤을 판 거야.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상아탑 원로들이 자체적으로 폐기했고.”

“그걸 알면서도 내게…….”

“그게 필요한 시대가 올 거야. 루디가 안 쓸 때는 누나가 붙들고 연구해. 고대 유산을 누나 손으로 재현해 보고 싶지 않아? 얼마나 대단하길래 당시 원로들이 폐기하려 했는지.”

세레라지에의 금은 요동에 경련이 일었다.

“아니면 누나 같은 천재도 재현 못 하는 건가?”

“그렇게 도발하면 내가 넘어갈 거 같니?”

그녀가 눈을 흘기자, 나는 만고의 진리를 말하듯 답했다.

“응.”

“말이라도 좀 듣기 좋게 해라. 이 망할 동생아.”

파지직!

그녀가 지팡이를 들고 내게 전격을 튀겼다.

나는 몸을 바르르 떨면서도 웃었다.

“가져와. 적당히 시간 날 때마다 뜯어보게. 애들을 더 뽑아야겠네.”

세레라지에의 말에 마법진을 그리던 네 학생이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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