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56화
(56)
와이번, 몸길이 15m에 익폭 20m.
밭 가는 소와 농부를 같이 낚아채 가버리는 이 하늘의 괴수는 사회적 동물이다.
“가족이나 친구, 연인끼리 음식을 나눠 먹기도 하지.”
“제발.”
“한 마리가 팔을 물면 다른 한 마리가 반대쪽 팔을 물고, 저 굵은 목이 한 번 움직이면 사지가 뚝뚝 부러져 나갈걸?”
나는 와이번핏 아래쪽, 그러니까 와이번들이 사는 콜로세움과 맞닿은 그 복도에서 죄인들과 함께 있었다.
굵은 격자 창살 너머에,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거대한 짐승들이 뜨거운 숨을 뿜고 있었다.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죄인들은 황제 모욕죄로 기소된 자, 귀족 암살 모의자, 마약상, 살인자, 방화범, 밀무역, 부패 관료 등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1열. 들여보네.”
병사들이 창을 앞세워 죄인 한 무리를 들여보냈다.
격자 철창이 열리자마자 비늘 덮인 거대한 아가리들이 입을 쩍 벌렸다.
피가 튀고 뼈가 부러지고 비명조차 잦아들 무렵, 2열의 한 죄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살려만 주신다면 전 재산을 황제 폐하께 바치겠습니다.”
나는 그 죄수에게 턱짓했다.
“무슨 일을 하고 있었지?”
“무역업에 종사했습니다.”
“어쩌다 끌려왔나?”
“향신료를 밀수했습니다.”
“남은 재산은 있나?”
“비자금으로 남겨 둔 금화 5백 닢이 있습니다.”
나는 흡족하니 웃으며 열쇠를 든 병사에게 말했다.
“죽기에는 가벼운 죄다. 풀어 줘라.”
“감사합니다!”
곧바로 여기저기에서 손이 올라왔다.
“저, 저도!”
“저도 재산을 바치겠습니다!”
나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저들을 모두 내 앞으로 모으거라. 얼마나 바칠 수 있는지 들어 보자꾸나.”
애초에 그들은 사형당할 만한 중죄인들이 아니었으며, 처음부터 숨겨둔 재산을 헌납받기 위해 중죄인들과 섞어 일부러 이 광경을 보여 주었다는 건, 와이번핏에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는 거다.
정정당당한 일은 아니었지만, 미래에 벌어질지도 모를 거대한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금화가 많이 필요했다.
나는 그걸 수금할 방법을 하나라도 더 알고 있고, 아니까 해야 했다.
오래지 않아 내 앞에는 금화가 수북하게 쌓였다.
“자네 부하들이랑 같이 회식이라도 하게.”
“감사합니다.”
나는 우선 와이번핏의 백인대장에게 금화 한 줌을 건넸다.
“오늘도 수고가 많군. 근무 끝나고 고기라도 사 들고 가게나.”
“충성!”
길에서 마주치는 병사들에게도 은화 한 닢을 건넸다.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높으신 분들의 뜻을 잘 받드는 게 저희 치안감들의 임무 아니겠습니다.”
나에게 죄수들의 처리에 대한 재량권을 빼앗긴 치안감들에게도 금화 한 줌을 건넸다.
“폐하. 오늘의 수금액이옵니다.”
그리고 제이릴리스에게 금화 열다섯 자루를 바쳤다.
“그대의 악명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감사하옵니다.”
“웃으라 한 말이 아닌데 어찌 웃느냐?”
“금으로 쌓은 탑이 하늘을 찌르니, 제 위명이 하늘에 닿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아니니라.”
마지막으로 내 별궁 앞으로 금화 한 자루를 보내면 끝이었다.
“오늘 저녁에는 금주하거라.”
“예? 아!”
“내일 그대는 짐과 함께 교회에 가야 하느니라.”
* * *
별궁, 루디가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폐하께서 드디어 광명교회에 가시는군요. 저도 따라가고 싶네요. 폐하와 발렌 님과 함께 기도할 수 있다면 정말 영광일 거 같아요.”
텐티아 경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내일은 요인 호위로 인해 시민들의 대성당 출입이 제한된다고 한다. 아쉽지만 다음을 노리도록 해라.”
나는 절로 포도주 병으로 향하는 오른손 손을 왼손으로 붙들며 말했다.
이래서 교회가 오른손이 하는 일은 왼손도 모르게 하라고 했군.
“나랑 누나가 데리고 들어가도 안 될까?”
마탄을 건네주려 찾아왔던 세레라지에가 눈을 흘겼다.
“내가 교회를 왜 가니? 마법사만 보면 신앙 검증하고 불태우려고 하는 미친놈들이잖니?”
텐티아 경과 루디가 동시에 말했다.
“말씀이 심하신 거 같으세요.”
“세레라지에 대공 전하! 오해가 깊으십니다.”
“내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거니?”
텐티아 경이 헛기침을 하며 늠름하게 입을 열었다.
“광명교는 이미 대륙 전체에 널리 퍼진 종교며, 정의의 여신과 대지의 여신 등 선이나 중립 세력의 신이라면 인정해주는 등 포용력도 높습니다.”
반대로 악이나 혼돈 성향의 옛것들은 강하게 배척하기에, 침식자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전생에서도 든든한 동반자였다.
그러나 세레라지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조소했다.
“그런데 왜 마법사는 불태우려고 하니?”
“빛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교리로 영주들의 가혹한 수탈을 막는 동시에, 신의 이름으로 폐하나 기사들을 축복해 주지요.”
“그런데 왜 마법사는 그 평등에서 자꾸 빠지니?”
“병과 오염을 정화하고, 땅을 축복하고, 수도원을 통해 지식을 전승하고 연구하며, 지방 행정을 도맡고, 공공사업을 벌입니다. 전 대륙에서요.”
“지방 행정? 어디에 숨어서 연구하려고 하든지 횃불 들고 찾아오는 거 말하니?”
나는 둘 사이에 끼어들며 둘을 다독였다.
“텐티아 경. 거기까지만 하게. 광명교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만큼은 누나도 인정할 테니까. 누나도 너무 뭐라고 하지는 마. 누나도 누나가 세례를 받고 태어나 교회 묘지에 묻힐 건 알지?”
교회는 강하다.
텐티아 경의 말처럼, 교회는 사실상 범국가적 행정조직이다.
그 영향력을 전 대륙에 투사하니, 대륙 최강의 집단은 제국이 아니라 교회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오늘은 제이릴리스가 즉위 이후 그 교회에 처음 가는 날이었다.
“교통을 통제하고 시민들을 물려라! 와이번을 띄우고 궁정 마법사들을 대기시켜! 수상한 놈이 있으면 모두 잡아들여 운하에 던져버려라!”
“대공 전하! 물러서십시오! 폐하께서 기껏 패륜아, 찬탈자의 오명을 벗으려 하는데, 여기서 전하께서 민심을 깎아 먹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원래 나는 말을 타고 마차 앞을 달려야 했다.
하지만 행정 관료들은 나를 앞세우고 갔다가는 황실의 위신이 나락으로 떨어질 걸 우려했다.
“황제 폐하께서 교회를 침공하는 거 같아 보이실 수도 있습니다.”
“그럼 마차 뒤로 보낼까요?”
“그분이 눈에 띄는 거 자체가 문제입니다.”
“다른 마차를 동원하지요.”
“그랬다가는 두 분 사이에 지독한 불화설이 돌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대숙청을 끝내신 분이 또 쌍둥이를 죽여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시면 아니 됩니다.”
“같은 마차에 타시도록 하는 건 어떠십니까?”
“!”
제이릴리스가 휘장 드리워진 마차 안에서 나른하게 웃었다.
그녀는 외출용 배일을 관절 반지 낀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금안이 보기 좋게 휘어 있었고, 입가에는 옅은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래서 대공이 짐의 옆에 타게 된 것인가?”
“그렇사옵니다. 폐하.”
나는 장군 앞의 신입 병사처럼 허리를 펴고, 양 주먹을 무릎에 얹고, 정확하게 마부의 등만 바라보았다.
“이리 단둘이 있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오랜만?
이 시점에서 오랜만이라고 하면 즉위 전을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건 내 기준으로는 무려 40년도 더 지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기억은 여전히 머릿속에 선명했다.
“뭘 그리 아릿한 표정을 짓느냐? 재미있구나.”
“아닙니다. 폐하.”
“그대도 교회에 가니 긴장이 되는 것이냐? 하기야 실로 오랜만이구나. 빛께서 그따위로 살지 말라고 마른하늘에 벼락을 내리실지도 모르겠구나.”
이 세상에서 신은 믿는 게 아니라 아는 거였다.
“정말 그리된다면 어찌하실 것입니까?”
“짐이 벼락 따위에 눈 하나 깜짝할 거 같은가? 기껏 만들어낸 성자를 살려두고 싶다면 당장 짐과 제국을 축복하라 윽박질러야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농담이 아닌 거 같았기에, 나는 하하, 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건 제게 맡겨 주십시오. 너무나 불경한 말이오나, 한 번은 신을 윽박질러보고 싶었사옵니다.”
“그래. 윽박지르기의 전문가가 짐 옆에 있었구나. 짐이 성자를 붙들고 제단에 올릴 테니 그대가 기도를 올리거라.”
“번제를 준비할 테니 제국을 축복하라 말하겠습니다.”
“번제? 성자 번제? 역시 짐의 오라버니구나.”
제이릴리스가 낭랑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즐거워 보여서, 일순 나도 모르게 돌아보고 말했다.
그때쯤 투레질 소리가 들리고 마차가 멈췄다.
“대성당 앞에 도달했다 봅니다. 잠시만 기다리소서.”
그러나 체감상 차 한잔할 시간이 끝났는데도 마차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밖에서 행정 관료들이 뭐라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릴리스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짐의 출입과 관련해 문제가 생긴 모양이구나. 운석을 떨어트릴지 벼락을 떨어트릴지 그대가 정해 보아라.”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마차 문을 열고 나섰다.
“페하. 소신이 상황을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천만다행히도 제이릴리스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 *
가을 하늘은 무척이나 맑았고, 대성당의 일곱 첨탑은 그 하늘에 닿고 싶다는 듯 뻗어 있었다.
대성당은 일곱 첨탑의 본당 뒤로 몇 개의 거대한 부속 건물들이 띄엄띄엄 놓여 있고, 그 일대를 황궁처럼 담으로 둘러싼 형태였다.
황실의 행렬은 본당 앞 도로에 멈춰 있었다.
발렌시아누스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정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성기사들과 흑철기사단 기사들이, 행정관들과 사제들이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듯한 눈빛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홍의주교님의 기도가 끝나기 전에는 누구도 대성당에 말을 들일 수 없소이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아침 예배가 끝날 시간에 맞춰 일정을 잡지 않았습니까?”
“우리라도 하필 지금 홍의주교님께 계시가 내려올 줄 알았겠습니까?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황제 폐하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
“저희가 다 죽어도 신의 뜻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점점 언성이 높아지고, 황제와 함께 예배하려 모인 궁정 귀족과 그 후열의 시민들 사이에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이 번졌다.
“왜 폐하께서 안 내리시는 건가?”
“홍의주교께서 신의 말씀을 들으셨다는군. 저 창문 너머로 신성력이 일렁이고 있지 않나?”
“그럼 폐하께서는 계속 기다리시는 건가?”
“아무리 황제 폐하라 해도 어찌 신의 뜻보다 앞서겠는가? 제 아비와 형제자매를 다 죽이고 신께 용서를 빌려고 왔는데, 당연히 기다려야겠지.”
“그렇군. 아무리 폭군이라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거야.”
발렌시아누스는 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바람잡이라도 섞인 듯 분위기가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흑철 기사와 대치 중인 성기사에게 물었다.
“지금 말씀을 듣고 계신 홍의주교님의 이름이 무엇인가?”
이름이 아니라 성함이라 말하라고 답해야 했지만, 성기사는 입을 쉽게 열지 못했다.
발렌시아누스, 얼마 전 대성당으로 침식자를 몰고 온 망나니의 노란 눈이 비인간적인 열기로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족의 말에 답하지 않는다면 불경죄를 물어 네 목을 치겠다!”
상대는 아직 열일곱, 치기 어린 협박으로 웃어넘길 말이었다.
그러나 사내가 되어가는 소년 대공의 손은 언제든 발검할 수 있는 자리에 가 있었다.
그는 희대의 망나니, 귀족과 시민들의 눈빛이 쏟아지는 이 자리에서 정말 발검할 수 있을 자였다.
싸우면 질까?
대공이라면 어찌어찌 상대해 볼 만도 하겠지만, 그 뒤에 선 붉은 머리의 백금 기사는 도저히 무리였다.
성기사는 압도되는 기분을 떨쳐내며 답했다.
“주의 첫 번째 종. 바오로안 홍의주교님이십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 대답을 듣자마자 인상을 왈칵 찌푸렸다.
바오로안, 전생에서 사사건건 황실을 휘어잡으려 했던 홍의주교였다.
다 이긴 전쟁에 갑자기 교회의 이름으로 화해를 주선하고, 대영주들을 부추겨 전쟁을 일으켰으며, 황실과 협조하려는 성자를 갑자기 옛것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곳에 봉사를 보내기도 했다.
이내 그는 웅변하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차 안에서 이 자리에 운석을 떨어트릴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황제와, 황제의 예배를 보러 온 궁정 귀족들과, 시민들이 모두 다 들을 수 있도록 외쳤다.
“바오로안 홍의주교가 빛의 말씀을 듣고 있어 황제 폐하를 기다리게 한다고?”
발렌시아누스는 이목이 충분히 모이는 걸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거짓말하지 말아라, 간악한 자야! 빛께서 성자를 뽑아 놓고 주교에게 말을 전할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이게 진실일지 아닐지는 몰랐으나, 그는 제이릴리스를 안에 들여보내야 했다.
그러려면 거짓도 진실로 만들어야 했고, 이제 숨쉬는 거 같은 일이었다.
“!”
텐티아가 입을 쩍 벌리고, 성기사가 이를 악물었다.
여기저기서 술렁거림이 번져 나갔다.
“그건 맞는 말 같은데?”
“성자님이 계시잖아.”
성기사는 그를 잡아먹고 싶다는 기분으로 항변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그럼 지금 홍의주교께서 거짓말이라도 하신다는 거요?”
“!”
모두의 이목이 다시 그에게 쏠렸다.
발렌시아누스는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텐티아에게 말했다.
“나 지켜줄 수 있지?”
텐티아는 저릿한 긴장감을 이겨내며 답했다.
“명령이시라면.”
이내 그는 성기사를 향해 외쳤다.
“닥쳐라! 간악한 놈아! 네가 감히 홍의주교님의 이름을 팔아 황제 폐하의 행차를 가로막아?”
누가 뭐라 할 틈도 없이 발렌시아누스는 주먹을 날렸다.
마나가 근섬유 하나하나를 감싸며 그 일격을 보조했다.
퍽!
깔끔한 곡선을 그린 일격이 성기사의 턱에 꽂혔다.
“이런, 개망나니를-.”
쿵!
아무리 발렌시아누스라도 이 인파 앞에서 주먹을 날리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성기사가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흑철 기사단과 치안감들은 나를 따라라. 황제 폐하가 들어가실 길을 열어라!”
암묵적으로 누구 하나 검은 뽑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기세에 눌린 성기사들은 대성당 정문을 열어주고 말했다.
제이릴리스는 마차 밖 발렌시아누스를 향해 흡족하니 웃어 보였다.
“폐하. 제가 폐하의 분노로부터 대성당을 지켰사옵니다.”
“닥치거라.”
그는 망나니였지만, 그녀의 망나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