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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58화 (58/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5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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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오전 예배는 검은 성자 마테오스와 홍의주교 바오로안이 각각 1부, 2부를 맡았다.

신의 철퇴이자 불꽃으로 선택받은 마테오스는 슬슬 회귀 전의 내가 알고 있던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를 뒤로 넘기고 이마의 성흔을 드러냈으며, 역시 새까만 눈동자에는 의로운 분노가 이글거렸다.

성흔을 얻으면 성력에 의해 육체가 변화하여, 검객이 소드마스터에 올랐을 때처럼 완전한 몸을 가지게 된다.

선이 짙고 그윽한 미남인 그가 이곳저곳을 바라보며 신도들과 눈을 맞출 때마다 귀부인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림자가 몰려올 때 그들과 어깨를 맞대지도 손을 잡지도 마라. 타협하고 타협한 끝에서 너는 빌게 될 것이다.”

그는 침식자와는 결코 함께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설교를 했고.

“이에 네가 내 손을 잡으니 우리 두려워할 게 무엇이겠느냐? 너의 검을 내가 축복할 테니 용감하게 나아가…….”

종군 사제였던 성인의 고사를 인용하여 기사와 교회, 황실과 교회의 협력을 찬미했다.

반면, 바오로안 홍의주교의 예배는 정 반대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맑은 마음으로 홀로 경건히 기도하라. 세속의 권력과 손잡지 마라. 그들은 너에게 그들의 검을 축복하라 요구할 것이다. 너희의 믿음의 그들의 부로 바꾸기 위해…….”

그는 여러모로 인자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웃음이 부드러웠고, 눈빛에는 맑은 총기가 감돌아 마치 품위 있게 늙은 양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침식자와 관련된 이야기는 아예 하지도 않았고, 황실과 교회가 손을 잡으면 안 될 이유만 정갈하게 이야기했다.

뒤쪽 좌석에 앉은 궁정 귀족들은 묘한 눈빛으로 성자와 홍의주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쨌든 제이릴리스의 첫 예배는 큰 문제 없이 마무리되었다.

“오늘 성자님과 함께 황제 폐하께 좋은 말씀을 전해드릴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주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니 황제 폐하를 비롯한 모든 분께서는 자주 기도를 올리기를 바랍니다. 또한 황제 폐하께서 궁정에 마법사들뿐만이 아니라 주교를 들이시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홍의주교의 인삿말을 해석해 보자면, ‘황제 이 패륜아 새끼야. 기도하고 참회해라.’ 정도가 될 거다.

“저 역시 홍의주교님과 함께 연단에 설 수 있어 기뻤습니다.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저 역시 그리 기도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수상한 마법이 아니라 빛의 뜻만이 진정한 기적을 불러올 수 있으니까요.”

성자의 인사말을 해석해 보자면, ‘지금은 평화로운 시대가 아니니 나를 따라 싸우러 가야 한다.’ 정도가 될 거고.

마테오스와 바오로안이 연단에서 내려오고, 궁정 귀족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억지로 따라왔다가 홍의주교와 성자 모두의 표적이 된 세레라지에는 치를 떨며 언젠가 죽여버리겠다 되뇌었다.

그리고 마테오스가 내 곁을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발렌 대공. 황제 폐하와 함께 나를 따라와 주겠나?”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자를 따라 복도로 들어갔다.

텐티아 경이 눈치 빠르게 우리 뒤를 따라오려는 궁정 귀족들을 가로막아 주었다.

“이 이상은 못 들어가십니다.”

그러나 나는 한발 늦었음을 깨닫고 쓰게 웃었다.

척 봐도 내게 불만이 많아 보이는 성기사 여럿이 복도 중간을 가로막고 있었다.

마테오스가 성기사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왜 발렌시아누스 대공을 막아서는가?”

“그가 죄인이기 때문이옵니다.”

“그는 사람을 마물에게 먹이며 즐거워하고, 여러 처녀를 농락했으며, 매일같이 폭음과 도박을 즐기고, 빈민가의 사람들을 멋대로 베어 죽이는 등 중죄인이옵니다.”

“결코 성자님과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정녕 길을 트기 원하신다면 저희를 다 밟고 들어가소서!”

“저희를 다 밟고 들어가소서!”

나는 내심 침음성을 흘렸다.

무력이 필요한 강경파인 마테오스에게 성기사들의 협력은 필수 불가결했다.

내가 돌아가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제이릴리스가 먼저 움직였다.

“짐 앞에서 짐의 친족에게 죄를 논하느냐?”

두터운 배일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비켜라.”

그건 분위기 같은 게 아니라, 언령, 말 그대로 마법의 일종이었다.

“으윽!”

“큭.”

성기사들이 잡아끌린 듯 비틀비틀 물러섰다.

나는 흘깃 뒤를 돌아보며 제이릴리스와 성자를 따랐다.

복도 끝에 궁정 귀족들을 막고 있는 텐티아가 있었고, 그보다 더 뒤로 홍의주교 바오로안이 보였다.

그는 우리 쪽을 그 인자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 *

성기사 둘이 지키는 방 안은 호화로웠다.

천장은 색유리 모자이크가 채광창으로 들어간 돔 방식이었고, 군데군데 화려한 천장화가 그려져 있었다.

벽에는 종교적 문양이 새겨진 화려한 테피스트리가 걸려 있었고, 촛대는 모두 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황궁에 살던 내가 보기에도 세련미가 넘쳤으니, 가난한 신학생이었던 마테오스로서는 꽤 충격이었을 거다.

그러나 이제 그도 적응이 되었는지, 성자의 권위를 지키면서도 정중하게 나와 제이릴리스를 방 가운데의 원탁으로 안내했다.

“오셨습니까? 초대해 놓고 나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폐하.”

그곳에는 이미 방의 주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좋게 말하자면 철두철미한, 나쁘게 말하자면 깐깐한 인상의 깡마른 중년인이 테가 얇은 안경을 쓰고 서류를 넘겨 보고 있었다.

검은 성자 마테오스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또 다른 홍의주교 아르고스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보이더군. 오는 길에 사방에 성기사들이 깔려서 으르렁대고 있었으니 말이야. 내분이라도 일어난 건가?”

제이릴리스가 베일을 벗으며 물었다.

백금발이 흘러내리고, 모자이크를 통과한 빛줄기가 그녀의 머리 위로 찬란하게 쏟아졌다.

일순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내 쌍둥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소드마스터에 올라 완벽한 육체를 얻은 제이릴리스의 미모는 그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었다.

인간인 이상 두 성직자조차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내 아르고스가 서류를 치우며 입을 열었다.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황제 폐하를 이리 가까이서 뵈는 건 처음이라.”

“알면 되었다. 어서 바쁜 짐을 물러낸 이유나 말해 보아라.”

성자 마테오스가 입을 열었다.

“신의 종으로서 말씀드립니다. 황실과 교회가 하나 되어 침식자들과 맞서기 위해서는 황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성자를 따르지 않는 성기사들이라. 우스운 일이지만, 그래 보이는군. 자세히 말해 줄 수 있겠나?”

마테오스가 진중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교회 전체가 크게 세 조각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교회 내부의 사정은 잘 모르지만, 전생에서도 합이 잘 맞지는 않았었다.

“첫 번째 조각은 교회가 군주들과 힘을 합쳐 침식에 맞서야 한다는 파벌입니다. 제국 대귀족들의 영지에서 활동하는 주교들이 주 구성원이며, 수도에서는 저와 아르고스 추기경님이 대표적입니다.”

“두 번째 조각은 그럼 침식에 맞서지 말자는 자들인가?”

제이릴리스가 신랄하게 비꼬았다.

아르고스가 쓰게 웃으며 답했다.

“세속 군주들을 믿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영지전을 일삼으며 수상한 마법사들을 후원하고, 죽은 자의 부활을 바라며 옛것의 힘에 손을 대는 군주들이 아니라, 교회가 직접 나서야 한다는 뜻이지요. 주 구성원은 제국 백작이나 그 이하의 작위를 가진 귀족들의 영지에서 활동하는 주교들입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끼어들었다가 멈칫하며 물러섰다.

“바오로안 홍의주교가 그 파벌이겠군. 대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 일단 황실과 거리를 두려 하는 거고…… 실례했습니다. 폐하.”

제이릴리스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영지도 없는 대공은 홍의주교, 성자, 황제가 모인 방 안에서 입 다물고 차나 따라야 했건만.

“세 번째 파벌은 무엇인가?”

황제가 묻고 홍의주교가 답했다.

“주로 제국 외 지방 왕국에서 활동하는 주교들입니다. 현지 실정에 맞는 자율권을 주장하며, 가장 강경하지만 동시에 이단 발생 비율도 제일 높습니다.”

“알 만하다. 극과 극은 통하는 법이지.”

성자가 말을 이었다.

“본래는 제가 관리했어야 하는 일입니다. 아시겠지만 광명교는 별개의 대주교좌를 두지 않습니다. 성자가 홍의주교들을 임명해 중앙집권적으로 교회를 움직이죠.”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겠군. 신에게 선택받은 성자에게 누가 맞설 수 있었겠나? 30년의 세월이 너무나 길었구나.”

교회도 봉건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성자가 황제면 교황은 섭정, 홍의주교들은 직속 행정관이나 기사고, 타지의 주교들은 지방 영주다.

문제는 황제가 없으니 행정관과 기사들이 제국을 통치해야 하게 돼버린 거다.

특유의 조직력 덕에 지금까지 잘 버텨 왔지만, 어린 황제가 즉위해 노회한 가신들에게 권력을 돌려받으려 하니, 시원치 않은 상황이다.

아르고스 홍의주교가 마른 손으로 깍지를 끼며 말했다.

“11월에 홍의주교 회의가 열립니다.”

“얼마 남지 않았군.”

“성자님이 없어 새로 홍의주교가 임명되지 않은 지 벌써 30년입니다. 저도 바오로안도 백발노인이 되었지요.”

그가 아릿하게 중얼거렸다.

“회의에서는 교회의 권위를 떨치고 지방 교회들을 돕기 위해 같은 홍의주교를 순례자로 지목할 수 있습니다. 최소 제국, 최대 대륙을 돌고 돌아오는 일이지요. 몇 년이 걸릴지,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릅니다.”

“!”

“그 회의의 최대 파벌은 어느 파벌입니까?”

이번에는 제이릴리스도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성자 마테오스가 깊은 한숨과 함께 답했다.

“세속 군주들과의 연합을 거부하는 두 번째 파벌입니다.”

제이릴리스가 관절 반지 낀 손을 원탁 위에 올리며 말했다.

“잘 들었다. 짐의 동맹이 타지로 추방될 위기로군.”

그녀가 금안을 서늘하게 빛내며 말했다.

“이제는 원하는 바를 말하라. 짐에게 바오로안을 베어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건 아닐 텐데? 짐이 직접 압박을 가해 봐야 그리 좋은 결과가 나오지도 않을 테고.”

성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내부적으로 끝내 보려 합니다. 매일같이 벌어지는 신경전 때문에 신도들을 보기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주께서는 이 싸움이 소모적으로 끝나지 않을 걸 아시기에 바오로안에게도 빛을 내리셨겠지요.”

나는 화들짝 놀라며 끼어들었다.

“아까 그건 황제 폐하를 기다리게 하려던 거짓말이 아니었습니까?”

“말씀을 전해 주신 건 아니나, 일종의 축복입니다. 바오로안과 아르고스 홍의주교 모두가 받았습니다.”

제이릴리스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아무리 들어 봐도 짐이 칙서를 보내는 게 제일 좋을 듯하구나. 침식자들을 조사하기 위해 인력을 차출하겠다. 거부하면 운석을 떨어트릴 테니 그리 알라. 이리 말하면 해결되는 문제 아니냐?”

“폐하. 고정하십시오!”

나는 구걸하듯 애원했다.

“그럼 대공은…….”

“예.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최대한 내부적으로, 조용히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좋은 생각이 맞는가?”

아르고스와 마테오스와 제이릴리스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회의 당일 홍의주교님들이 모이겠지요. 그날 두 번째 파벌의 홍의주교들이 회의실에 들어오면 머리에 자루를 씌워 안전하게 모시는 겁니다. 그분들이 안전한 곳에서 주무시고 있는 동안 성자께서는 첫 번째 파벌의 홍의주교님들과 함께 시급한 사안을 처리하시면 됩니다.”

성자 마테오스가 적잖이 당황했는지, 눈을 세모로 뜨고 물었다.

“시급한 사안이라면…….”

“새 홍의주교 임명, 성기사단장 교체, 바오로안 홍의주교의 순례 지명 같은 것들 말입니다.”

마테오스가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대공께서는 제게 반란이라도 일으키라고 하시는 겁니까? 함께한 추억이 있어 선입견을 거두려 했건만, 대공에 관한 소문이 모두 소문만은 아니었나 봅니다.”

“성자께 정당한 권위를 돌려드리는 게 왜 반란입니까? 황제 폐하가 반란을 일으킬 수 없듯이, 성자님도 반란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

아르고스 홍의주교가 안경을 너머로 주름진 눈을 빛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홍의주교님!”

“교회의 모든 정당성은 성자님에게서 나옵니다!”

그는 이마에 성흔을 받은 자였다.

“이대로라면 성자님께서는 평생 빈민 구호소에서 죽을 푸게 되실 겁니다. 그러다 어느 날 옛것이 저 성벽을 넘어오는 날…… 오 광명이시여, 실언했습니다.”

평생 수도했을 성직자가 저런 말을 하다니, 내 생각보다도 상황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쪽으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마테오스가 중얼거렸다.

나는 제이릴리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녀는 곧바로 아릿한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회와 성자에게 빚을 듬뿍 지워 놓으라고 말하는 거 같았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제가 이래봬도 누군가에게 황당한 경험을 시켜 주는 건 자신이 있습니다.”

“무엇부터 하면 됩니까?”

성자가 물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답했다.

“적은 모호하게, 아군은 명백하게 해야지요. 성기사 중 믿을 수 있는 자들을 모아 주시고, 아직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자 중 인망 높은 자를 말씀해 주십시오.”

아르고스가 다급하게 말했다.

“앙겔로스. 그가 중도파의 대표나 다름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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