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58화
(58)
앙겔로스는 일곱 첩탑이 솟은 대성당 본당 뒤편에서 성기사 동료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성기사는 오로지 교회의 적들에게 검을 겨누어야 하네. 우리는 우리의 영광이 아니라 주의 영광을 위해 검을 쥐지 않았나?”
그가 뗀 운에 거구의 성기사가 답했다.
“지금 아르고스 홍의주교님과 바오로안 홍의주교님이 마찰을 빚고, 많은 형제가 두 패로 나뉘어 두 분을 지지하고 있지만, 우리만은 경거망동하지 말도록 하지.”
긴 머리를 질끈 묶은 성기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교리를 분석하고 치열한 토론을 나누는 건 그분들의 몫이네. 무기는 주의 뜻에 따라 휘둘러질 뿐, 생각하려 들면 아니 되지.”
그때 그들은 대성당 뒷문으로 나오는 두 사내를 보았다.
검은 곱슬머리에 검은 눈동자, 사내답게 뚜렷한 코와 우묵한 눈을 가진 그들의 성자가 검은 예복 차림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주의 목소리를 뵙나이다.”
“성자님, 뒤에 있는 분은……?”
백발 금안의 소년 대공이 의상실의 모델처럼 유유히 걸어왔다.
하얀 제복과 금실 자수, 붉은 띠가 그의 신분을 증명하는 갑옷이었다.
“대공, 정말로…… 해야 하는가?”
“누구도 두 적과 동시에 싸울 수는 없습니다. 유능한 적보다 무능한 아군이 두려운 법이지요.”
어울리지 않게 망설이며, 힐끔힐끔 대공 ‘따위’의 눈치를 보고 있는 성자를 보며, 성기사들은 생각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성자님을 협박하고 있다고.
“발렌시아누스 대공?”
“여기가 어디라고!”
성기사들은 파벌을 가리지 않고 발렌시아누스를 적대했다.
대성당에 침식자를 끌고 온 건 귀족이라도 파문, 평민이었다면 목이 베였을 중죄였다.
성질이 급한 성기사는 이미 검 자루에 손을 얹었을 정도였다.
그때 대공의 뒤에 붉은 머리의 기사가 바싹 따라붙었다.
“이 텐티아가 있는 한 누구도 등 뒤에서 대공 전하의 목을 노리지 못할 것입니다.”
“앞에서는 노리게 해주겠다는 뜻인가?”
“정정당당한 승부는 받아주셔야지요.”
맥 빠지는 대화였지만, 앙겔로스와 성기사들은 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당황했다.
“백금기사!”
기사와 성기사 간의 우열은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논쟁거리였다.
하지만 상대가 주술 회로 새겨진 최상급 판금 갑옷을 입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저 갑옷은 어지간한 실력 차이를 의미 없게 만들어 버리는 기물이었다.
하물며 착용자 역시 백금기사단의 신성 텐티아였으니, 설령 갑옷이 없다 해도 만만찮은 적수였다.
앙겔로스가 대표로 한 손을 들었다.
“형제자매들이여. 일단 진정하게. 성자님 앞에서 이 무슨 추태인가.”
성기사들이 검 자루에서 손을 내려놓았다.
발렌시아누스가 흡족하니 웃으며 말했다.
“빛의 검, 앙겔로스.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나?”
“죄송하지만 전하와 나눌 이야기는 없습니다.”
“성자의 신변과 관련된 이야기다.”
앙겔로스는 발렌시아누스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은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발렌시아누스는 앙겔로스를 조금 떨어진 나무 그늘 아래로 데려갔고, 성자 마테오스는 성기사들과 발렌시아누스 사이 애매한 거리에 서 있었다.
앙겔로스는 대놓고 미간을 찌푸리며 지껄여보라 턱짓했다.
척 봐도 그리 협조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협상을 통해 원하는 행동을 끌어내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발렌시아누스는 최고의 협상가였다.
그는 하얀 장갑 낀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착 깔고 말했다.
“성기사 앙겔로스. 내 말 잘 듣게. 약 한 달 뒤에 이 대성당 위로 운석이 떨어질 거야. 그걸 막으려면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네.”
최고의 협상가는 협상하지 않았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뚱한 표정이던 앙겔로스의 눈빛이 감출 수 없을 정도로 요동쳤다.
그는 발렌시아누스를 진심으로 멸시했지만, 그가 한 말만큼은 멸시할 수 없었다.
“그대도 두 파벌의 대립은 알고 있는 모양이군.”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대공은 말을 이었다.
“세속 군주들을 믿지 못하니, 교회 주도적으로 침식자들과 성전을 벌여야 한다. 세속 군주들에게는 물자와 인력을 징발하는 방식의 협조를 요구해야 한다. 이게 지방 주교들과 바오로안 홍의주교의 말이지. 아닌가?”
“맞습니다.”
“그 말을 황제 폐하께서는 반역 음모로 정의하셨네.”
“그게 무슨……?!”
“영주의 땅에서 영주의 재산과 영민을 가져다 쓰겠다. 협조하지 않으면 교회의 영향력을 이용해 공격하겠다. 여기서 교회를 ‘다른 영주’나 ‘대상단’으로 바꿔 보게. 누가 봐도 반역이 아닌가?”
앙겔로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11월 회의에서 바오로안 파벌이 교회의 주류가 될 경우, 반역자들의 구심점이 될 대성당을 지도에서 지워버리겠다 선포하셨네.”
“?!”
앙겔로스의 상식상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파문은 당연하고, 수많은 국가와 제후들이 제이릴리스와 교역을 끊을 것이며, 당장 수도의 신실한 시민들부터 들고일어날 것이다.
“나도 아네. 파문은 당연하고 온 대륙의 왕공귀족들과 수도의 신실한 시민들까지 들고일어나겠지.”
한 박자 쉬고 발렌시아누스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폐하께서 즉위하실 때는 달랐나?”
“!”
“친족살해자 폭군 황제. 세간에서는 그분을 그리 부르지. 제 친족들을 그렇게 많이 죽인 황제는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그래서 누가 그분께 감히 검을 겨눌 수 있었는가?”
앙겔로스는 감히 답하지 못했다.
“그분의 권력이 사람들의 지지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가? 그분은 제후들의 선거로 선출되는 분이 아니야. 스스로 제관을 쓰셨고, 누구도 그분의 뜻에 반하여 그 관을 내려놓게 할 수 없지. 이제 대충 상황이 파악되는가?”
앙겔로스는 이성을 긁어모으며 답했다.
“그래서 대공은 대체 내게 뭘 요구하는 겁니까?”
발렌시아누스가 기다렸던 말이었다.
상대의 입에서 그 말이 먼저 나온 이상, 협상은 성공이었다.
그는 옛것의 사도처럼, 지옥의 악마처럼 웃으며 말했다.
“성자님과 아르고스 홍의주교님을 돕게.”
“제가 그분들을 어찌 도우라는 말입니까?”
“성자님에게 교회의 모든 정당성이 나온다. 그건 인정하겠지?”
앙겔로스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테오스는 신이 직접 선택한, 그분의 손길과 눈길이 지상에 닿고 있음을 증명하는 산 증거였다.
“성자님을 위해, 성자님을 돕는 홍의주교님을 위해 싸운다. 그 싸움도 당연히 정당한 싸움이겠지?”
앙겔로스는 말려드는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되었네. 가서 자네 친구들에게 말하게. 성자님을 도와 싸우자고. 교회를 위험에 빠트린 바오로안 일파를 대성당에서 몰아내자고. 회의 날 힘을 합쳐 빛의 정의가 이 땅에 존재함을…….”
“아무 데나 빛의 정의를 가져다 붙이지 마십시오! 바오로안 홍의주교님도 신실하고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을 납치 감금 추방하자는 게 어찌 빛의 정의입니까!”
“그분은 납치 감금 추방하지 않으면 아르고스 홍의주교님이 납치 감금 추방되겠지. 그다음에는 대성당에 운석이 떨어질 거고.”
“!”
발렌시아누스는 하얗게 웃으며 말했다.
회귀 전에서부터 지어 온 망나니의 웃음이었다.
그라 해서 순수한 성기사를 협박하는 게 즐겁지는 않았다.
모두 그의 황제를 따르는 신민인데, 다들 웃으며 끝나는 게 제일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울어야 한다면 그게 제이릴리스여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누군가 울려야 한다면, 그건 그 자신이어야 했다.
“황실과 함께하세. 그것만이 교회가 살아남을 방법이야. 같이 잘 살아야 하지 않겠나? 아, 이게 정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방법도 있네.”
“뭡니까?”
“바오로안 홍의주교의 뜻에 따라 성기사들을 모아 황실을 제압하고 협조를 요구하는 것.”
웃기지도 않은 소리였다.
발렌시아누스는 할 말 다 했다는 듯 몸을 돌리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자네 친구들과 잘 이야기해 보게. 내일 다시 보자고.”
앙겔로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친구들에게 다가갔다.
“자네.”
“앙겔로스.”
“……우리는 우리의 영광이 아니라 주의 영광을 위해 검을 쥐었지. 그리고 오늘 우리는 교회의 질서를 근본부터 무너뜨리는 적들에 대해 알게 되었네. 성자님의 뜻에 반하고 그분의 충신을 겁박하는 바오로안 일파를…….”
* * *
내가 하사받은 별궁 응접실 바닥에는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고, 긴 직사각형 테이블 주변으로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남향 통유리창 너머로는 수도의 풍경이, 일곱 첨탑의 대성당이 아득하게 보였다.
10대에 이런 집을 장만했으면 꽤 괜찮은 인생이겠지.
나는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흩어 버리고 루디가 따라 준 찻잔을 기울이며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텐티아 경은 목덜미를 잡고 비틀거렸고, 세레라지에는 이례적으로 깔깔 웃으며 기뻐했다.
“그래서 그놈들이 결국 네 편에 서기로 했니?”
새침한 얼굴에 가학적인 열기가 깃들었다.
“다른 방도가 있겠어? 어제도 가서 말 맞췄어. 슬슬 바오로안 쪽도 알아챈 거 같기는 한데, 그 정도는 예상했어. 결국 물밑에서 중도파 성기사들을 회유하는 싸움이 될 거야.”
“그렇지. 이런 문제에서는 중도파가 제일 많잖니.”
“상호 공작으로 서로 물고 물리면서 성기사들을 모으고, 회의 날에 극에 달한 긴장감이 터지면서 순식간에 승패가 결정 나겠지. 이제 변수를 얼마나 만들 수 있냐가 제일 중요해.”
루디가 물었다.
“변수요?”
“그래. 변수. 그날 미사 온 나를 따라온 시녀가 하필 마총 사수여서 나를 공격한 바오로안 파 성기사들을 쓰러트린다던가, 나랑 같이 미사 간 세레라지에 대공이 현장에서 신앙심에 눈을 떠 성자를 도와 싸운다던가, 뭐 그런 거.”
루디가 녹색 눈을 음산하게 빛내며 말했다.
“발렌 님의 뜻이라면 지옥까지도 따라가겠습니다.”
세레라지에 역시 지팡이를 꼭 쥐며 말했다.
“꼭 한 번쯤은 교회에서 난동을 부려보고 싶었단다. 그 홍의주교에게 마법의 힘을 보여주고 싶구나.”
그 모습을 보며 텐티아 경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발렌 대공 전하. 기사의 도리 중에는 교회를 수호하는 것도 있습니다.”
나는 얼굴에 철판 열 장을 깔고 답했다.
“말했잖나. 바오로안이 집권하면 황제 폐하께서 교회에 운석을 떨어트릴 거라고. 그걸 막고 성자님을 돕는 게 왜 교회를 수호하는 게 아닌 건가?”
“바오로안과 대화로 해결할 방도가 없겠습니까?”
나는 이례적으로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앞으로 제국에 일어날 혼란을 생각하면 성기사 하나가 아쉬운 판이었다.
바오로안 같은 고위급 성직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숙청과 폭력은 결국 자기 소모적인 행위다.
협상과 대화는 생각보다 훨씬 효율적이다.
황족들은 언제 침식되고 어떻게 이용당할지 몰라 다 죽였지만, 교회는 다르다.
진심으로, 나 역시 웃으며 끝내고 싶다.
“생각해둔 방도가 있기는 하네. 하지만 이것도 거사가 우선되어야 하기는 해. 그러니까…….”
이어지는 내 설명을 들은 텐티아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전하를 따르겠습니다. 반드시 바오로안 홍의주교를 납치 감금 추방하겠습니다.”
* * *
일곱 첨탑의 대성당 안 바오로안의 방.
인자한 인상의 노주교가 서류 업무를 보는 가운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시게.”
보라색 머리를 두피가 보일 정도로 짧게 자른 성기사, 굵은 묵주 목걸이를 찬 주교,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하얀 천으로 얼굴과 몸을 감싼 여인이 차례로 들어왔다.
“안젤리카가 예하께 인사 올립니다. 앙겔로스 주변의 중립 성기사들은 아르고스에게 완전히 넘어간 듯합니다.”
그녀는 몇 년 전 결사대를 꾸려 마경을 닫고 돌아온 뛰어난 검객이자 신실한 신도였다.
“망나니가 황제의 이름을 팔아 그들을 겁박한 모양입니다. 그날 나타난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안젤리카가 이를 갈았다.
그녀 뒤를 이어 굵은 묵주 목걸이를 찬 주교가 인사했다.
“예하. 라합입니다. 지방 주교들이 올려보낸 성기사 50명이 도착했습니다.”
바오로안은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벌써 보내줄 줄은 몰랐구나. 어서 그들이 왔다는 소문을 내도록 하게.”
안젤리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송구하오나 예하. 전력은 숨기는 게 전략의 기본 아닙니까? 망나니 발렌 대공을 생각하면 비장의 수는 많을수록 좋을 겁니다.”
그러나 바오로안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모두 같은 교단의 형제자매라는 걸 잊지 마시게나. 숫자로 위압해 승기를 잡고 세력을 더 불리는 게 상책일세. 50명이나 보냈으면 지방의 전력이 그만큼 빠졌다는 뜻 아닌가? 오랫동안 그들을 붙들고 있을 수는 없네.”
주교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깊으신 뜻 받들겠습니다.”
이어 온몸을 천으로 감고 치렁치렁한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입을 열었다.
“바오로안 홍의주교님.”
“듣고 있습니다. 불의 성인 헤리스.”
그녀는 성자와 성녀 다음가는 기적의 산증인, 성인이었다.
“이 모든 게 빛의 뜻이겠지요?”
“예. 그렇습니다.”
“어서 지방의 형제자매들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성인이시여.”
제국은 광활했고, 백작 이하의 지방 영주들은 거의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수도나 대영주들은 상상도 못 할 일들이 태연히 일어났다.
그런 곳의 영주들과 협력할 수는 없었다.
하루빨리 회의를 열고 결정을 지어야 했다.
제국과 대륙을 위해서 교회가 검을 뽑아야 했다.
* * *
11월 11일.
그날은 유난히 찬 바람이 불고 하늘이 맑은 날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텐티아, 세레라지에, 루디와 함께 대성당으로 향했다.
오늘 두 홍의주교 중 하나는 수도를 떠나게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