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59화
(59)
진한 노란 머리의 성기사 앙겔루스와 보라색 반삭 머리의 성기사 안젤리카는 대성당 정문을 지나는 길을 사이에 두고 얼굴을 마주 보았다.
“정말 끝까지 가 보겠다는 건가? 안젤리카?”
“닥쳐라. 대귀족들과 영합하여 제 잇속만 채우기 바쁜 타락한 영혼아.”
앙겔루스는 길 왼쪽에 섰고, 그 뒤로는 그를 따르는 성기사 1백 수십 명이 늘어섰다.
안젤리카는 길 오른쪽에 섰고, 그 뒤로 그녀를 따르는 3백여 명의 성기사가 늘어섰다.
성기사들은 대개 친 지방 파벌이었고, 교회가 주도권을 잡는 형태의 세속 개입을 지지했다.
그들 대부분이 작은 영지의 교회 부속 고아 출신이었기에, 지방 영주들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과는 협력할 수 없다. 타협의 끝은 타락뿐이야.”
“우리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온 힘을 모아 싸워도 모자랄 판에 적을 늘릴 수는 없어.”
“그럼 빛께 심판을 맡기는 수밖에 없겠군.”
인원차는 두 배가 넘었고, 안젤리카는 앙겔루스보다 강했으며 비장의 카드도 있었다.
그녀가 질래야 질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말 울음소리와 마차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번째 홍의주교가 입장하십니다!”
홍의주교들이 하나둘 대성당 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앙겔루스와 안젤리카는 대성당 담 밖에서는 어떠한 갈등도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를 나누었다.
오늘도 대성당 앞을 지나는 모든 사람이 손을 모으며 기도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성기사들이 홍의주교를 납치 감금 추방하느니 마느니 싸우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절대로.
“여섯 번째 홍의주교가 입장하십니다.”
홍의주교는 본래 백 명도 넘게 임명되는 직책이었다.
그들은 고위 관료이자 법관이자 비서이자 의원이었다.
그들은 빈민 구호와 교회 행정, 묘지 관리와 왕들의 휴전 협상까지 대륙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여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홍의주교가 임명된 지 벌써 30년이었다.
많은 이들이 빛의 품으로 돌아가고, 남은 이는 고작 열세 명.
“두 번째 홍의주교가 입장하십니다!”
두 번째 홍의주교는 아르고스였다.
앙겔루스와 안젤리카가 동시에 눈을 빛냈다.
좋게 말하자면 철두철미한, 나쁘게 말하자면 깐깐한 인상의 홍의주교가 성기사들이 줄지어 선 길을 따라 대성당 안으로 향했다.
“첫 번째 홍의주교가 입장하십니다!”
최고령의 홍의주교, 바오로안이었다.
앙겔루스와 안젤리카가, 그 둘을 따라 반으로 갈라진 성기사들이 이를 악물었다.
오늘 하루 동안 빼앗고 또 지켜야 할 둘이 곧 자리에 모인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붉은 깃발을 건 사두마차가 대로를 달려왔다.
워워, 마부가 능숙하게 고삐를 당겨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말머리가 대성당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타아앙!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 마탄이 마차 앞바퀴 두 개를 꿰뚫고 산산조각으로 부수었다.
“어억!”
마부가 비명을 지르고, 콰직, 소리를 내며 마차가 주저앉고, 놀란 말들이 앞발을 들어 올리며 투레질했다.
대성당 옆을 지나던 시민들이 기겁하며 모여들었다.
“앙겔로스! 이게 무슨 짓인가!”
안젤리카는 곧바로 검을 뽑아 들며 따져 물었다.
그러나 앙겔로스 역시 그녀만큼이나 당황하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본 안젤리카가 잠시나마 검 끝을 돌리려 할 정도였다.
“나도…… 모르겠네. 분명 발렌 대공에게도 말을 전했는데, 교회 담 밖에서는 싸우지 않겠다고.”
그러나 이어진 말에 안젤리카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를 믿었단 말인가! 수도 제일의 망나니를!”
“!”
앙겔루스의 눈동자가 사시나무처럼 흔들렸다.
루디는 근처 한 5층 건물의 옥상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며 마총을 다시 허벅지에 차고 시녀복 치마로 가렸다.
“으음, 아무래도 성기사님은 발렌 님과 문 안팎의 정의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있었나 보네요.”
그녀 옆에 선 세레라지에가 고개를 갸웃했다.
“해석의 차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니?”
루디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말머리가 문을 넘었으면 그때부터는 문 안이잖아요?”
세레라지에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네 주인을 닮아 가는구나.”
* * *
성기사는 강하다.
그들은 혈통이 아니라 신앙으로 힘을 받는다.
그들은 수년에서 수십 년간 쌓은 신성력으로 수천 년에 거쳐 혈통을 완성한 기사, 마법사들과 맞먹는 힘을 낸다.
그리고 발렌시아누스는 아군의 두 배에 달하는 성기사들과 전면전으로 맞붙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허를 찌르는 건 아주 중요한 전략이지. 정정당당하게 나아가 싸우는 건 기사다운 일이고.”
“제가 말하는 정정당당은 이런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텐티아를 대동하고 대로 중앙을 걸으며 모델 같은 걸음걸이로 유유히 발 묶인 마차로 다가갔다.
백금발 머리는 오만하게 뒤로 넘겼고, 금빛 눈은 요요하게 이글거렸다.
금실 자수가 들어간 하얀 제복은 교회에 올 때 입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했고, 붉은 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허리춤에 긴 검을 차고 있었는데, 검집 역시 제복과 똑같이 하얀색이었다.
앙겔루스는 당황과 수치심으로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고, 발렌시아누스를 보자마자 바닥에 침을 뱉었다.
발렌시아누스는 하얗게 웃으며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고, 앙겔루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자! 아르고스 님을 지켜야 한다!”
앙겔루스는 결국 발렌시아누스가 미리 이야기해둔 대로, 친 황실파 홍의주교들을 지키려 휘하 성기사들과 함께 대성당 안으로 향했다.
“내버려 둬라! 바오르안 님을 구하는 게 먼저다!”
안젤리카는 바오르안을 구해야 했기에 그들의 진입까지 막을 여력이 없었다.
“누나. 부탁해.”
발렌시아누스는 사악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눈앞에는 2백도 넘는 성기사들이 있었지만, 그는 그의 이복누나를, 희대의 천재 마법사를 믿었다.
“발렌시아누스!”
안젤리카가 그를 노려보며 사자처럼 포효했다.
발렌시아누스는 텐티아에게 말했다.
“경. 경이 홍의주교님을 확보하게.”
“제가 말입니까?”
“그럼 내가 확보하는 게 낫겠나?”
텐티아는 투구를 눌러 쓰며 발렌시아누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하는 게 나을 거 같았다.
“죽지는 마십시오.”
“걱정하지 말게나. 경. 나는 아주아주 오래 살 테니.”
텐티아가 마차 문을 힘으로 뜯어내고, 전력을 다해 덤벼드는 마부를 한 손가락으로 밀어낸 뒤, 홍의주교를 공주님처럼 안아 들었다.
“저 자를 잡아라!”
“예하를 지켜라!”
“와아아아아아!”
발렌시아누스는 몰려오는 성기사들 앞을 혈혈단신으로 막아섰다.
회색 판금 갑옷을 입고 붉은 서코트를 두른 성기사들의 몸에서 하얀 신성력이 줄기줄기 피어올랐다.
그들은 완전 무장하고 있었지만, 발렌시아누스는 제복 차림이었다.
기껏해야 둘, 운이 좋아도 셋이 한계.
“너희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하물며 선두에 선 안젤리카는 회귀 전에도 오랫동안 이름을 날렸던 성기사였다.
그녀를 상대로는 버티는 것도 버거우리라.
타앗, 안젤리카가 땅을 박차며 단숨에 수십m의 거리를 줄였다.
그 순간 발렌시아누스는 중얼거렸다.
“나만 한 미끼가 흔하겠니?”
* * *
근처 옥상, 루디 옆에 선 세레라지에는 남색과 황금색의 금은 요동을 반짝이며 주문을 외웠다.
“깊게 파고드는 전격, 원으로 퍼뜨리는 전격, 굳히고 밀어내는 전격. 따르고 또 따르는 나의 번개여.”
‘마법사가 아니고 주교를 들인다니? 마법이 수상하다니? 마법으로 만든 상하수도로 물을 쓰고 마법으로 만든 도로를 쓰는 놈들이 할 말이니? 나는 정치 같은 건 모른단다. 너희가 마음에 안 드는 가식적인 자식들이라는 걸 알 뿐.’
새침한 입가에 가학적인 미소가 깃들었다.
“내 모든 적을 일소하소서!”
‘진리는 신에게 구걸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탐구해야만 하는 것인데!’
그녀가 심장에서 끌어낸 마나가 언어와 수인과 지팡이를 거치며 술식이 되었다.
아무리 그녀가 강력한 마법사라 해도 아직 수백의 성기사를 동시에 제압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동시에 대륙에서 몇 손가락에 드는 부자이기도 했다.
파지직, 작은 불꽃을 튀기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블루 드레이크의 뿔들이 미친 듯이 반응하며 마나 효율을 증폭시켰다.
시약은 마법의 위력을 올려주지는 않았지만, 캐스팅 속도와 마나 소모량을 줄여주었다.
그 결과는 단순하고도 명료했다.
콰르르르르르릉!
막대한 전격의 파도가 대성당 담 안쪽에서 휘몰아쳤다.
본래 한 점을 치고 끝나야 했지만, 전격은 그녀가 개발한 술식에 따라 연못에 번지는 파동처럼 퍼져나갔다.
“그아아악!”
“커헉!”
대성당 앞 잔디밭에서 정문을 향해 몰려나가던 성기사 수백 명이 바닥을 굴렀다.
본래 판금 갑옷을 입으면 대부분의 전격이 발밑으로 흘러나가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세레라지에는 전격을 몸속으로 ‘밀어 넣는’ 술식도 개발한 뒤였다.
죽이려 쓴 주문이 아니고, 성기사들도 그리 약체가 아니었기에, 전격 자체는 버틸 만했지만, 예상외의 충격이 성기사들을 당황하게 했다.
“대체 무슨 전기 마법이 이런 범위로?”
“옛것이나 악마와 계약한 마법사가 숨어 있다! 잡아라!”
“정신 차려라! 진형을 지켜. 홍의주교님을 되찾아야 한다.”
안젤리카는 흡, 하고 숨을 삼키며 다시 중심을 잡았다.
“내가 이 정도로 쓰러질 거 같았나!”
‘황실에 천재 마법사가 있다는 소문은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 주문을 연속으로 날릴 수는 없어. 발렌시아누스 대공, 자기 몸을 미끼로 삼았지. 잘 됐어. 그 미끼를 받아 가겠다.’
쿵, 그녀가 하얀 신성력을 줄기줄기 피워올리며 대지를 가로질렀다.
그걸 보며 세레라지에는 새침하게 웃었다.
“한 번은 버틸 줄 알았어.”
파지지지지지지지직!
다시 한번 전격의 파도가 휘몰아쳤다.
막 일어났던 성기사들은 등 뒤에서 덮쳐 오는 푸르고 따가운 물결을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악!”
“크윽!”
“대마법사라도 데려온 거냐?”
“정신 차려라!”
그들이 처음부터 신성력을 끌어올려 맞섰다면 지금 세레라지에가 쏜 전격 정도는 그냥 몸으로 막아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판금 갑옷을 뚫고 들어온다는 사실에서 나오는 당황감, 홍의주교가 납치당했다는 상황의 조급함,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또 무슨 짓을 꾸미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성기사들의 마음을 좀먹었다.
그리고 당황하고 조급하고 불안한 사람은 원래 힘의 10분의 1도 못 내는 법이었다.
하지만.
“망나니 발렌시아누스!”
마경을 닫은 성기사 안젤리카는 그 세 감정에 모두 익숙한 편이었다.
이빨 사이에서 전격을 튀기며 그녀가 달려 나왔다.
여전히 움직이는 자들도 수십을 헤아렸다.
발렌시아누스는 여전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기다렸다.
치지지지지지지직!
세 번째 탁류가 성기사들을 휩쓸었다.
“하아, 하아.”
안젤리카가 거친 숨을 내쉬며 검을 쳐들었다.
그녀는 끝끝내 쓰러지지 않고 대성당 담 밖으로 나왔다.
그제야 발렌시아누스는 마차 옆에서 걸음을 옮겼다.
“진짜 강하네. 다행이야.”
“너, 너.”
“보는 눈이 많은데, 괜찮겠어?”
안젤리카는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수백? 어쩌면 수천? 수도 시민들이 모두 당황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높은 담과 정문 앞을 가로막은 마차 탓에 밖에서는 대성당 안쪽 풍경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안젤리카는 일순 최악의 상상을 했다.
그리고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발렌시아누스가 그녀를 향해 다급하게 달려오며 모두 들으라는 듯 소리친 것이다.
“빛의 검, 안젤리카! 괜찮은가? 홍의주교님은 황실의 백금 기사 텐티아가 모셨네! 안쪽 상황은 어떤가?”
“이, 이, 이. 뱀 같은 놈이……!”
발렌시아누스의 악명은 파다했지만, 적어도 오늘 그가 직접 마차에 대고 뭔 짓을 하지는 않았다.
수도 시민들이 마총이나 대성당 안 파벌 같은 걸 알 리가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마차가 갑자기 전복되고, 안쪽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발렌 대공과 백금 기사가 나타나고, 백금 기사가 홍의주교를 챙겨 어디론가 달려간 것뿐이었다.
설마 백금 기사가 홍의주교에게 이상한 짓을 했으리라고 믿는 사람도 없었다.
실제로 텐티아는 옆문 쪽으로 달려가 다른 성기사에게 바오로안 홍의주교를 넘겼다.
그쪽 도로에서 그걸 본 시민들도 여럿이었다.
그 성기사가 아르고스 파벌 성기사였을 뿐.
발렌 대공이 왜 저기 남아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부서진 마차 앞에 남아 있는 게 성기사에게 검을 맞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안젤리카.”
발렌시아누스는 하얗게 웃었다.
“왜 나를 잡으러 왔어? 바로 홍의주교님부터 쫓거나, 대성당 안으로 진입했어야지. 내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설마, 오늘 네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교회 내부의 의사 결정에 황실이 개입해서는 안 되고말고. 내가 뭔가 사악한 짓을 벌이리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오늘 내가 맡은 일은 별거 없어. 내게 뭔가 있는 거처럼 포장해서 바오로안 파벌 성기사들이 죄다 나를 잡으려 몰려오게 하는 것뿐.”
“!”
“지금 저 안에 아르고스 홍의주교님 파벌과 바오로안 홍의주교 파벌의 비율은 어떻게 될까?”
“……성인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안젤리카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성인께서 성자보다 강하실까?”
발렌시아누스의 목소리는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너희가 다 몰려나온 상황에서 이미 진 거야. 결국 다들 안에서 회의하려 모일 텐데, 안을 확보했어야지. 내가 뭐라고.”
그가 낭랑하게 웃고, 안젤리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뭔가 비장의 한 수가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했건만.
발렌시아누스는 그녀를 정중히 부축하며 말했다.
“상식적으로 내가 성기사를 어떻게 이기겠어? 너희는 나를 너무 과대평가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