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61화
(61)
요안나는 운하에서 잠수 일로 먹고사는 빈민가 소녀였다.
가끔 큰 바람이라도 불어 수송선이 흔들리면 대충 묶어둔 짐 상자나 높으신 분의 모자 따위가 물속에 빠질 때가 있었다.
그걸 건져서 돌려주고 사례비를 받거나, 빼돌려 파는 게 요안나의 일이었다.
5m 수심은 얕지 않았지만, 못 들어갈 정도는 아니었고, 가끔 꽤 값나가는 물건을 건져 신세 고친 언니 오빠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는 같이 일하는 오빠 중 한 명이 무슨 주사기 같은 걸 주웠는데, 신성처럼 떠오른 빈민가 거대 조직의 보스가 어마어마한 값에 사 갔다고 한다.
“아. 이미 만석이네.”
수문 근처에서 주웠다는 말이 쫙 퍼져서, 자신 같은 일을 하는 애들 수십 명이 이미 수문 쪽에서 뻘밭을 헤집고 있었다.
최근 흉작이 들고 서쪽에서는 오크 무리가 준동해 피난 온 빈민들이 더 늘었다는데, 그래서인지 빈민가도 더 어수선해졌고 이 일도 경쟁이 치열해졌다.
그러나 애초에 요안나는 그쪽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격자 수문에서는 계속 물이 드나들기에 흐름에 따라 아예 강 쪽으로 쓸려나갔을 수도 있고, 반대로 운하 안쪽으로 밀려갔을 수도 있다.
강으로 쓸려갔다면 어차피 못 찾을 테니, 운하 안쪽을 확실히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녀는 뛰어들기 전 조심스럽게 심장에 운하 물을 바르고, 손끝 발끝을 깊게 담갔다 빼며 몸을 수온에 적응시켰다.
11월 바람은 얼음처럼 찼지만, 맛있는 음식과 주사기에 대한 야심은 그 냉기를 잊게 할 만큼 뜨거웠고, 운하 물은 의외로 들어갈 만했다.
듣기로는 한겨울에도 운하가 얼지 않게 일대의 햇볕을 모아 물을 덥히는 마법진이 있다고 한다.
‘감사합니다.’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마법진을 그린 마법사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며 요안나는 물로 뛰어들었다.
첨벙!
‘어?’
계산이 너무 정확했던 탓일까?
요안나는 물에 뛰어들자마자 저 아래서 뚱뚱한 주사기 두 개가 끼워진 벨트를 발견했다.
어서 주워가 달라는 듯 햇볕을 받아 아른아른 빛나고 있었다.
요안나는 수면 밖으로 나와 주사기를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작은 자루에 챙겼다.
미리 가져온 수건으로 소년처럼 짧게 자른 머리와 몸을 닦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빈민가로 돌아가려 했다.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거 같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인파가 모인 대성당 앞으로 다가갔다.
저렇게 사람이 몰린 곳은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예외였다.
하늘에 와이번이 떠 있는 걸 보니 높으신 분의 행차였다.
여기저기 사복 기사들과 치안감들이 숨어 있다는 걸 아는 소매치기 소년들이 나설 리가 없는 것이다.
그녀는 벤치에 앉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빈민가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떠올렸다.
“교회와 황실이 하나 되어 거대한 악과 맞서기 위해…….”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높으신 분이 어려운 말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는 단상 위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대충 누가 있는지는 알아볼 수가 있었다.
11월에 생화로 장식한 그 단상 위에는 검은 예복을 입은 검은 머리의 청년과 치렁치렁한 붉은 옷을 입은 홍의주교님, 하얀 제복을 입은 훤칠한 소년과 금빛 드레스를 입고 관을 쓴 분이 있었다.
하얀 제복을 입은 소년이 그 유명한 망나니 발렌시아누스일 테니, 아마 그 앞에 선 언니가 황제 폐하일 것이다.
“멋지다.”
요안나는 일순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황제 폐하가 엄청나게 강하고 잔혹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모습을 직접 보니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마치 더 봐서는 안 될 거 같은 위험한 분위기가 온몸에 흘렀지만, 그렇기에 더욱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아.”
그녀는 결국 육성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단상 앞에서 황제 폐하와 검은 예복의 청년이, 그 둘의 뒤에서 망나니 대공과 홍의주교님이 막 악수를 했다.
함성에 묻혀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폐하는 그렇게 말한 거 같았다.
“짐은 교회를 적극적으로 지지할 것을 약속하는 바이다.”
황제 폐하는 정오의 태양 같은 백금발을 단정하게 묶고, 빳빳한 천으로 만든 노란 드레스 위로 검은 숄을 걸치고 있었다.
그분이 무릎을 가볍게 굽히며 인사하자, 검은 예복의 청년은 마주 허리를 숙였다.
요안나는 자루를 꼭 움켜쥐었다.
맥없이 흘릴 거 같아서.
이 거리에서도 그분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보였는데, 평생 기억에 남을 거 같았다.
저렇게 자신감 넘치는 삶은 분명 저런 분만 살 수 있는 것이리라.
* * *
제이릴리스의 집무실은 알현실 위층이었고, 붉은 융단과 금빛 샹들리에로 장식된 곳이었다.
넓은 방에 창문을 등진 책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 검소하다고 말하기에는 융단이 고급지고 샹들리에에 장식된 보석이 컸으며, 사치스럽다고 말하기에는 장식품이 없었다.
그녀는 이곳과 연무장에서 하루 대부분을 보내며, 누군가의 목을 베라는 서류에 서명하거나 누군가의 목을 베는 연습을 했다.
나는 행사를 마치고 돌아온 제이릴리스가 획 집어던진 숄을 잡아채 시종에게 넘겼다.
……이곳에 들어온 건 회귀 전에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빌어먹을 교회 놈들. 짐을 불러놓고 찬 바람 부는 하늘 아래서 세 시간 동안 기도를 하게 만들어?”
“실례지만, 폐하께서는 한서불침의 경지에 오르지 않으셨사옵니까?”
“기분과 기본의 문제이니라! 그래. 잘난 대공 그대가 지껄여 보아라. 도대체 그놈들이 왜 일정을 이따위로 잡았는지 말이야. 짐은 도저히 모르겠고, 알고 싶은 생각도 없도다.”
알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물론 나는 그걸 육성으로 내뱉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아마도 그들은 폐하께서 신실한 모습을 민중 앞에 내보여 민심을 얻고 싶으시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러니 계속 성자님과 함께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모습을 내 비췄겠지요.”
“오해가 깊구나. 짐은 그저 침식자 전선에 한 손을 보태 줄 전우를 원했을 뿐이거늘.”
그녀가 의자에 앉아 통유리창 밖을 바라보며 한탄스럽다는 듯 읊조렸다.
나는 목소리를 단정하게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들로서도 최근 홍의주교 회의 때 난리가 났다는 소문을 잠재울 큰 행사가 필요했을 것이옵니다. 황제 폐하와 친분이 깊은 모습을 보여 반발을 억누르려 하겠지요.”
제이릴리스가 권태롭게 금빛 눈을 빛냈다.
“신실한 신자들이 짐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을 거 같은데, 짐과 친해 보이는 게 교회에 무슨 득이 된단 말이냐? 그들은 운석을 맞기 싫어 짐과 협력한 게 아니더냐?”
나는 차마 고개를 젓지 못했다.
제이릴리스는 똑똑했지만, 동시에 그 똑똑함을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몸이 좋으면 머리가 고생할 필요가 없는 법이었으니까.
“……신자들이 보기에는 교회가 폐하를 교화한 듯 보일 테옵니다.”
내심 제이릴리스가 발끈하리라 생각했지만, 다행히 그녀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하, 마음대로 생각하게 내버려 두어라. 착각은 자유이니라.”
“현명하시옵니다.”
제이릴리스가 옅게 웃었다.
“참. 짐이 큰 실수를 했도다.”
나는 만고의 진리를 말하듯 단언했다.
“폐하께서는 실수하지 않으시는 분이옵니다.”
“듣기 좋구나. 그러나 짐이 한 실수는 대공 그대에게 내릴 포상을 깜빡한 것이다.”
“……크나큰 실수를 저지를 뻔하셨습니다. 기억해내셨으니 진짜 실수로 이어지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녀가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가끔 그대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하도다. 그러나 그걸 보려는 건 황금알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짓이겠지. 짐은 그런 실수는 하지 않겠다.”
제이릴리스가 몸을 돌리더니,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나무 상자를 내 쪽으로 밀었다.
“열어보아라.”
안에 들어 있던 건 금속으로 만들어진 슬라임 같은 액체였다.
주먹 두 개를 합친 정도의 크기였는데, 수은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그대는 언제 싸우게 될지 모르니 언제나 갑옷을 입고 다닐 수는 없지. 그러나 그 귀중한 피를 아무 곳에나 흘리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야.”
그녀가 금빛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짐과 그대의 이복누나가 새로이 개발한 술식이 많은 마도 공방주들에게 동기부여가 되었는지, 한 대지 마법사가 불철주야 노력해 이런 것을 만들어 왔도다. 잘 사용해 보고 후기를 남겨주거라.”
이게 벌써 개발될 만한 게 아닌데?
나는 당황하며 상자를 받아 들었다.
이건 액체 금속을 옷에 스며들게 만들어 입는 마법 갑옷, ‘아콰테그’였다.
강도는 촘촘하게 만든 사슬갑옷보다 뛰어났는데, 중소형 쇠뇌 정도는 가뿐히 막아낼 수 있었다.
옷을 빨아야 할 때는 다시 분리해서 액체 상태로 만들고 새 옷에 스며들게 하면 되었다.
제복 차림으로 온갖 위험한 곳들을 나다니는 나로서는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누나, 아니. 세레라지에 대공이 황립 마도 공방의 마법사들에게 선의의 경쟁자가 되어 준 것 같아 기쁘옵니다. 이런 기물을 내려 주신 황제 폐하의 은혜가 하늘과 같사옵니다. 매일같이 입고 다니도록 하겠습니다.”
제이릴리스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하라.”
“폐하. 혹시 이 갑옷은 어떻게 입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시옵니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고, 다행히 그녀는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피를 먹여 주인을 인식시키고 시동어로 탈착하는 방식인 건 전생과 똑같았다.
아콰테그, 하고 작게 읊조리자 액체 금속이 넓게 퍼지며 내 제복 안으로 스며들었다.
잠시 재킷, 셔츠, 바지가 젖은 듯한 느낌이 나더니 이내 아무 일도 없던 듯 원래대로 돌아갔다.
무게가 약간 늘어나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짐과 교회 사이에 끼어 조율하느라 수고가 많았다.”
그런 나를 보며 제이릴리스가 읊조렸다.
대답을 바라지 않는 목소리였다.
“바오로안 홍의주교와 그를 따르는 성기사들을 아무도 쳐내지 않았더구나. 수도 시민들에게 돌이라도 맞을까 두려웠다고 생각하겠다. 하기야, 본래 숙청이란 자기 소모적인 행위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들은 지방을 돌며 암약하는 침식자들과 싸울 것이고, 성자는 마경을 닫고 정화하겠지.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았구나.”
그녀가 백금발을 묶은 머리끈을 풀며 웃었다.
풍성한 머리카락이 우수수수 흘러내리며 그녀의 목덜미와 등, 어깨를 덮였다.
“잘해 주었느니라.”
“감사하옵니다. 폐하. 생각지도 못한 찬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돌아오는 길에 치안감들의 보고를 들었다. 빈민가 쪽에 다시 연쇄살인이 성행한다는구나. 교회와 막 협정을 맺었으니 우리도 생색은 내야 하지 않겠느냐? 얼굴이라도 비춰 주고 돌아오거라.”
“알겠사옵니다. 폐하.”
* * *
다음날 나는 텐티아 경과 루디를 대동하고 빈민가로 향했다.
아직 이 액체 갑옷은 양산이 되지 않아 루디 몫을 준비할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붉은 띠를 하사받은 덕에 이제 마도구를 대놓고 살 수 있었다.
그래서 텐티아 경을 통해 좋은 마법 무구 상점을 찾아가 시녀복 안에 입을 수 있는 가죽 갑옷을 샀다.
오크 가죽에 기름을 발라 말리고 ‘돌피부’ 마법을 은으로 새긴 것이었는데, 가격은 금화 120닢이었다.
큰돈이었지만, 제이릴리스에게 하사받은 포상금, 홍등가에서 받는 상납금, 와이번핏에서 빼돌린 보석금을 합치면 가뿐히 살 수 있었다.
“120닢이요? 차라리 그 돈을 저 주시고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하세요! 그 돈이면 억울해서 죽지도 못할 텐데. 제, 제, 제 몸값보다 비쌀 거라고요! 어, 발렌 님. 화…… 나셨어요?”
“루디.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마. 화나니까. 사람 목숨을 어떻게 돈으로 따져?”
루디와 텐티아 경이 동시에 기이한 것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말이 내 행적과 앞뒤가 안 맞음을 깨달았다.
발렌 대공이 죄 없는 죄수들을 가혹하게 죽이고 부자 죄수들에게 보석금 뜯어낸다는 소문을 그녀들도 알고 있을 거였다.
“말이 이상했네. 네 목숨은 돈으로 못 따져. 나를 섬기는 네 목숨이 싸다면, 내 품위도 그만큼 싸지는 거야. 그동안 다루는 예산이 좀…… 많이 궁핍해서 한 실수인 거 알아. 이제는 그런 소리 하지 마. 앞으로는 예산을 훨씬 더 많이 다루게 해줄 거니까.”
“네, 네.”
“아, 전하께서 너무 상식적인 말씀을 하셔서 놀랐습니다.”
이게 망나니짓의 부작용 중 하나였다.
가끔 상식적인 반응을 보이면 다들 놀랐다.
“술이 덜 깼나 보군. 헛소리가 나왔네. 잊게나.”
그런 담소를 나누며 우리는 빈민가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죽여!”
“쳐라!”
빈민들이 쇳조각을 갈아 만든 단검을 가지고 사방에서 패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골목에는 시체가 즐비했는데, 그중에는 장기 일부가 사라지거나, 시체 주변에 피로 원과 기괴한 문장이나 문양이 새겨진 것도 많았다.
누가 봐도 침식자의 흔적이었다.
우리는 최소한의 질서조차 사라진 모습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대공 전하. 뭐부터 해야 하겠습니까?”
“대충 얼굴만 비추고 돌아갈 수 없을 거 같은데요?”
나는 일단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수백 대 수백으로 엉켜 치열하게 싸우는 패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일단 저들에게 다가가 보지. 아마 제일 큰 조직일 테니.”
“그건 어떻게 알아보셨습니까?”
“한쪽은 전부 목걸이, 한쪽은 전부 팔찌를 차고 있지 않나? 수백을 동원할 정도로 큰 패거리는 흔치 않지.”
루디가 마총을 꺼내 들고 텐티아 경이 검 자루를 쥐었다.
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둘을 말렸다.
“왜 벌써 나서려 하나?”
둘이 당황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사정을 들거나 정보를 모아야 하잖습니까?”
“아닌가요?”
“싸움이 끝나면 그때 물어보도록 하지. 뭐 하러 저 틈에 끼어서 피를 흘리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