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62화
(62)
우리는 공터 옆에 서서 패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으아아악!”
“살려줘!”
목걸이를 찬 놈들은 생각보다 수가 적었다.
팔찌를 찬 쪽이 5백 명이라면, 목걸이를 찬 쪽은 1백 명도 안 될 거 같았다.
하지만 승기를 잡은 건 목걸이를 찬 쪽이었다.
그들 중에는 주변인들보다 머리 두 개 이상 큰 자들도 있었다.
장작 패는 도끼로 상대를 두 쪽 내거나, 힘으로 사람을 집어 던져 공터 옆 천막을 무너뜨리거나, 아예 발목을 잡고 붕붕 휘두르기도 했다.
“텐티아 경, 저거…….”
“예. 전하. 누가 봐도 침식자입니다.”
그들의 목과 등, 손목 쪽에 검은 바늘 같은 털이 부숭부숭 나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내심 깊은 한숨을 토했다.
저게 알려지면 제이릴리스가 거리를 밀어버리려 할 게 뻔했다.
그녀의 악명을 줄이려면 최대한 내 선에서 해결해야 했다.
승기가 명백히 기울고, 결국 팔찌를 찬 빈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기 시작했다.
“두목, 미안합니다!”
“아악, 저걸 어떻게 이겨?”
루디가 아, 하며 다시 마총을 쥐었다.
“발렌 님. 이제 물어보면 될까요? 일단 제가 다리를 맞출게요.”
“아니. 그쪽 말고.”
“네?”
루디가 녹색 눈에 맑은 의문을 띄우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쟤들에게 가서 너희 침식자지? 이랬다가 100명 대 3명으로 싸우게? 물론 질 거 같지는 않은데, 굳이 그럴 필요 없잖아? 차라리 정보라도 제대로 모아서 돌아가는 게 낫지.”
“그럼?”
“진 쪽을 쫓아가야지.”
흩어져 도망가는 놈들도 많았지만, 무리를 유지하고 부상자들을 부축하며 도망가는 놈들도 많았다.
우리는 놈들을 쫓아 골목골목을 나아갔다.
간혹 겁을 상실한 자들이 우리에게 단검을 들이밀기도 했지만, 제정신인 자들은 텐티아 경의 발소리를 듣자마자 도망쳤다.
“대체 이자들은 무슨 생각으로 기사에게 덤벼든 걸까요?”
텐티아 경이 강철 건틀릿을 한 번 내질러 사람과 벽을 동시에 날려 버리고는 중얼거렸다.
나는 한 놈의 눈꺼풀을 까 보고는 답했다.
갈색 기운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렇네. 미약하지만 정신을 오염당했군. 빈민가에 침식이 번번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야.”
아직 치료가 불가능 한 수준은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이 치료에 필요한 교회 기부금을 낼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발렌 님. 다 온 거 같아요.”
눈앞에는 멀쩡한 4층 건물이 하나 서 있었다.
널빤지 따위로 중축되지 않아 처음 지어질 당시의 세련미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방에 앓는 소리와 고함이 가득했다.
“두목, 누가 왔습니다.”
“기사, 기사입니다! 비싼 옷을 입은 사람도 있습니다.”
“가서 말씀을 드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 목소리가 현관 쪽에서 들려왔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문이 먼저 열렸다.
“나리. 안녕하십니까? 어쩐 일로 귀하신 나리들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셨습니까?”
두목은 나름 제복 비슷한 걸 걸친 사내였다.
짧게 깎은 갈색 머리, 약간 비열한 인상에 눈 아래쪽으로 긴 흉터를 가지고 있었다.
“목걸이 찬 놈들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느냐?”
그가 묻기를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예. 나리. 잘 알고 있습죠. 놈들은 무시무시한 침식자입니다. 얼마 전에 밖에서 들어온 애들과 홍등가 쪽에서 흘러온 전직 가드들을 흡수하면서 세력을 늘렸죠. 식인 의례와 인신 공양을 일삼고…….”
나는 고개를 저어 말을 끊었다.
“묻는 말에만 답하거라. 놈들의 아지트가 어디인지 아느냐?”
“저희도 그걸 제대로 몰라 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리.”
“대충은 알고 있다는 뜻이구나. ”
두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치안감들이 이 지경이 날 때까지 너희와 그놈들을 내버려 두었지?”
내 물음에 두목이 일순 눈을 번뜩였다.
겁을 먹은 거 같기도 했다.
“저희…… 말씀이십니까?”
나는 골목골목 누워 실실 웃고 있는 빈민들을 바라보았다.
“텐티아 경. 저들이 제정신으로 보이는가?”
“……아까 그렇게 강한 놈들을 상대로 이 녀석들이 잘도 버틴다 싶었습니다. 수십 명이 쓰러지는 걸 보고도 달려드는 건 훈련받은 병사들에게도 어려운 일인데, 다 이유가 있었군요.”
그녀가 늠름한 얼굴에 씁쓸한 표정을 띄웠다.
두목의 얼굴이 썩어들었다.
나는 두목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왜 치안감들이 이 지경이 날 때까지 너희와 그놈들을 내버려 두었지?”
두목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최근에 빈민들이 너무 늘었습니다. 밖에서 늘어온 애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그쪽 애들은 빈민가 밖으로 안 나갑니다. 안에서 저희 같은 애들하고만 싸우니 치안감 나리들께서는 오히려 좋아하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저희는 약을 유통하지만, 놈들은 약에 손대지 않습니다.”
나는 씩 웃으며 두목에게 말했다.
“네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겠다. 나와 같이 지금 당장 놈들의 아지트로 간다. 너는 내 앞에 설 것이고, 네 앞에는 네 부하들이 설 것이다. 네 부하들이 다 쓰러지면 그다음은 너다. 부하들을 모을 시간은 주겠다.”
* * *
본래 번듯한 3층 벽돌집이었으나, 널빤지로 중축을 거듭한 끝에 기괴한 요새처럼 변해버린 게 빈민가 거리였다.
그 좁은 골목 사이 사이로 수백 수천의 빈민이 꾸역꾸역 나아가고 있었다.
어느새 저녁이 찾아온 탓에, 언데드 군단이 나아가는 거 같기도 했다.
정신 오염이 상당히 진행된 자들도 있는지 여기저기서 이상한 주문 외는 소리가 들리거나, 푸르스름한 안광 같은 게 보였다.
“물러서는 자는 베겠다! 너희가 살아서 돌아갈 방법은 오로지 전진과 승리뿐이다! 나아가라! 나아가라!”
발렌시아누스는 그 어둠 속에서 등불처럼 서서 외치며 빈민들을 닦달했다.
어둠 속에서 횃불에 비친 금안이 금실로 수놓은 하얀 제복과 함께 번뜩였다.
텐티아는 검을 뽑아 들고 두목의 등에 겨누고 있었다.
두목 앞에 선 친위대가 이를 악물었지만, 붉은 머리에 늠름한 늑대 같은 인상의 기사에게 그 표정을 보일 만큼 용감한 자는 없었다.
“수상한 낌새를 보이면 바로 찌르겠다. 제대로 지휘해라.”
“나, 나리. 살려주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전하께서는 네가 최선을 다한다면 기꺼이 살려 주실 것이다. 네가 동맹 조직들의 부하들까지 긁어모아 오니 무척 흡족해하시지 않았더냐?”
‘이참에 놈들을 몰아내자고.’
‘안 그래도 약도 안 파는 놈들이 주류를 잡으려 드니 꼴 보기 싫었어.’
‘너무 경쟁이 치열해졌지. 숨을 죽여 놓자고.’
‘어린 년이 감히. 끼워 준다면 나야 좋네.’
높으신 분들이 그 목걸이 패거리를 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수많은 조직이 팔찌 패거리 아래 모여든 것이다.
텐티아는 잠시 이것도 발렌시아누스가 예상했을지 의문을 품었다.
고래고래 소리치며 감정을 표출하는 백발 황족의 마음은 시시각각 변해 종이 한 장 같기도 하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바다 같기도 했다.
텐티아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디는 긴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올려 묶으며 그의 곁으로 붙었다.
“발렌 님. 황제 폐하가 대충 상황만 파악하고 오라고 명령하신 게 아니었나요?”
비꼬는 의도 없는 순수한 질문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막 도망치는 침식자 빈민 몇몇을 보고 쏴 버리라고 명령한 뒤, 루디가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기는 걸 보며 잠시 착잡한 표정을 짓고,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능글능글한 목소리로 답했다.
“상황 보니까 이렇게 해야 할 거 같아서.”
“저는 이렇게까지 해야 할 상황인 줄은 몰랐어요.”
루디는 마총에 새 탄을 채워 넣으며 답했다.
“사실 이번 경우에는 침식도 부가적인 문제야.”
“네?”
그녀의 녹색 눈이 커졌다.
침식이 부가적인 문제라, 교회 내부에서 파벌 싸움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듣고 큰 충격을 받을 정도로 신실한 신자인 루디에게는 놀라운 말이었다.
“근본적으로는 사람이 너무 늘어났어. 봐봐. 거의 군대잖아.”
어둠 속이라 전체적인 수도 짐작이 안 될 정도였다.
골목으로 몰려가는 빈민들을 모두 합치면 오늘 나온 자들만 수천을 헤아릴 거다.
“기껏 홍등가를 철거해서 재개발지역 확보한 게 전부 헛일이 됐어. 집도 가족도 없는 혈기 왕성한 떠돌이들이 한곳에 모여불편하게 지내다 보면 싸울 수밖에 없어.”
“아.”
“이제 곧 겨울이야. 빈민 구호는 교회와 영주의 일이지. 황제 폐하는 군비를 늘리려고 홍등가를 치셨고, 교회까지 끌어들여서 옛것들의 공격을 대비하려 하시고 있어. 그분이 빈민들에게 돈을 더 쓰려고 하실까? 나는 아니라고 보고, 사실 아니어야 해.”
루디는 잠시 앞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막 골목을 틀어막은 거한의 목걸이 패 조직원이 도끼를 휘두르며 여럿을 쓰러트렸다.
“이상해요.”
“뭐가?”
“결국 이렇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옛것에 넘어가는 거잖아요. 옛것과 싸우실 생각이라면 왜 여기에 돈을 쓰시지 않는 거죠?”
그녀의 물음이 무색하게도, 발렌시아누스는 곧바로 답했다.
“이런 빈민들이 옛것에 넘어가 봐야 순식간에 진압할 수 있거든. 봐봐. 지난번에 봤던 거대한 침식자는 없잖아. 아마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덤벼도 텐티아 경 혼자서 이길 수 있을 거야.”
침식자로서 강해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침식자로서 소드 엑스퍼트만큼 강해지려면 소드 엑스퍼트가 될 만큼 노력해야 한다.
“폐하께서 경계하시는 옛것은 마경이나 고위급 침식자야. 고위급 침식자가 되려면 이종족 피가 섞인 귀족이나 기사 출신이어야 하지. 결국 지방 영주들을 경계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거야. 이런 빈민가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크게 돈을 쓰실 수 없다는 거지.”
루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 기분이었다.
높으신 분들이 말하는 효율을 이해하게 된 거 같아 씁쓸했다.
말 그대로 어쩔 수 없는 거다.
마경과 반란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그녀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서 이런 빈민들 따위는 어찌 되어도 좋다, 할 만큼 했다고 덮어버려도 되는 걸까?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하는 순간.
그래서, 하고 운을 떼며 발렌시아누스가 하얗게 웃었다.
“나를 보내신 거고.”
“네?”
루디는 테 얇은 사점 안경 너머 녹색 눈의 발렌시아누스에게 돌렸다.
그가 하얀 제복 앞 단추를 풀고 검을 뽑아 들며 싸울 준비를 했다.
“내가 적은 예산으로 확실한 결과를 내오고 있잖냐?”
최악이라도 피하려 발버둥치는 제국 행정의 세상에서, 차선이라도 선택할 수 있는 건 애초에 기대받지 않는 망나니뿐이었다.
발렌시아누스가 텐티아에게 물었다.
“경. 공세는 어떤 상황인가?”
스윽, 일대를 훑어본 텐티아가 곧바로 답했다.
“최악 수준입니다. 교환비가 80대 1이나 나올 것 같습니다. 길이 좁아 수적 우세가 의미가 없고, 목걸이를 찬 놈들은 거의 지치지도 않습니다. 이게 공성전이라면 이겨도 진 전쟁입니다.”
루디는 다시 앞쪽을 확인했다.
두목 앞으로 한없이 길게 뻗어 있던 인의 장벽이 상당히 얇아져 있었다.
어둠 속이라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금 발밑에서 찰박찰박 소리를 내는 액체는 절대로 투명하지 않을 거 같았다.
“좋군. 두목?”
“예, 예. 나리.”
그는 텐티아가 발렌시아누스를 ‘전하’라고 부르는 걸 몇 번 들은 뒤로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부상자와 사망자를 챙겨 후퇴해라. 부상자에게는 마법의 하얀 가루 사용을 허락하지. 사망자는 지하수로에 확실히 한 명 한 명 떠나보내라. 자칫하다가는 그것들이 몽땅 어보미네이션이나 좀비, 스켈레톤으로 되살아날 수도 있으니까. 그때는 빈민가 하늘에 와이번 탄 전투마법사들이 뜰 거다.”
단호한 목소리와 달리 발렌시아누스의 속내는 그리 편하지 않았다.
여러 조직에서 보내온 전투원 중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침식된 자들이나, 약의 부작용으로 심하게 난폭해진 자들을 선두에 세웠고, 그들이 모두 쓰러졌을 때쯤 후퇴를 지시했다.
오늘은 많은 피가 흘렀지만, 내일이면 빈민가에서 패싸움은 크게 줄어들 거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동상으로 발을 자르지 않으려면 발가락을 잘라야 했다.
잘리는 발가락을 생각하면 못 할 짓이었지만, 그 못 할 짓을 하기 위해 대공이라는 작위가 있는 거였다.
그리고 누군가의 이름으로 피가 흘러야 한다면, 그건 제이릴리스가 아니라 그 자신의 이름이어야 했다.
“예. 나리.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두목이 재빠르게 답하고 부하들을 챙겨 빠지기 시작했다.
“아악!”
“저놈들이 도망친다!”
“우리도 후퇴한다. 너무 세!”
“쫓아라! 죽여 놓자!”
어둠 속에서 어마어마한 혼란이 일더니, 순식간에 전선이 무너져 내렸다.
조금씩이나마 앞으로 나아가던 횃불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는 모습은 꽤 장관이었다.
루디는 그걸 보며 순수하게 경탄하고, 텐티아와 발렌시아누스는 목걸이 패거리의 추격대가 어느 건물에서 튀어나오는지 눈으로 쫓았다.
“전하, 저곳입니다.”
“좋아. 누가 저 침식자 괴물들의 두목인지 확인해 보자고.”
* * *
빈민가에 조명 따위가 있을 리 없으니 건물 안은 칠흑처럼 캄캄했다.
그러나 루디도 발렌시아누스도 텐티아도 그 정도 어둠에 발목을 잡힐 수준은 아니었다.
“조심조심 건너와.”
“네. 발렌 님.”
발렌시아누스는 널빤지를 중축한 가건물을 통해 건물과 건물 사이를 건너뛰며 한 건물 창문 앞에 섰다.
텐티아가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가 창문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다들 무릎 꿇고 엎드려라!”
와장창 소리, 무언가 깨지고 날아가는 소리가 잠시 들리다 조용해졌다.
“전하. 넘어오셔도 됩니다.”
발렌시아누스는 루디와 함께 창문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방 안에서는 약간의 노린내가 났고, 침식의 기운이 느껴지는 덩치 큰 사내 여럿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으며, 텐티아가 아마도 두목일 자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자. 얼굴이나 보실까?”
발렌시아누스는 주문을 외워 불꽃을 피워 올렸다.
“어?”
의자에 앉아 있던 건 예상치 못한 얼굴이었다.
길고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카락에는 붉은 기운이 옅게 감돌았고, 아몬드 같은 눈에는 빈민가에 어울리지 않는 총기가 어려 있었다.
몇 달 전보다 확연히 성숙해지고 영악해진 분위기의 소녀는, 여전히 그의 손으로 벤 사내를 닮아 있었다.
이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가 목발을 짚고 일어나 인사를 올리는 걸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울그림의 펜촉을 넘겨받았던 빈민가 매듭 패 두목의 외다리 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