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63화
(63)
나는 많은 걸 할 줄 알았지만, 내 손으로 죽인 사람의 딸을 어떤 얼굴로 대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이상하리만큼 속이 더부룩했다.
아마 이런 분위기를 겪기 싫어서 죄인의 삼족을 멸하는 것이리라.
“그래. 허락하지. 텐티아 경. 검을 치워 주게나.”
“전하?”
텐티아 경이 의아해하면서도 반걸음 물러섰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목발을 주워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자세히 보니 그녀가 앉아있던 곳 역시 그냥 의자가 아니라 손으로 굴릴 수 있는 큰 바퀴가 달린 의자였다.
“저를 시키시지.”
루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외다리 그녀가 오른손으로 목발을 짚고 일어나 무릎을 가볍게 굽히며 예를 취해 보였다.
“비토닉의 딸 코넬입니다. 성은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발렌시아누스 솔레타라온 솔레타라스다. 몇 가지 질문이 있는데, 답해 주겠나? 코넬.”
“고귀하신 분의 뜻에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다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허락하지.”
나는 먼저 주변에 쓰러져 움찔거리는 거구의 사내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
이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미리 알려 주며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함이었다.
“네가 이들, 가칭 ‘목걸이 패거리’의 두목이냐?”
“예. 제가 이들을 이끌고 있습니다.”
“보통 인간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침식의 힘을 이용하고 있나?”
내심 고개를 젓기를 바라고 있었던 거 같다.
하지만 코넬은 그 아버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예. 옛것의 힘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텐티아 경이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검을 치켜들었고, 루디가 녹색 안광을 서늘하게 빛냈다.
“어떻게 침식의 힘을 이용하게 되었지?”
“지하수로에서 어떤 문자를 읽은 뒤로 정신 오염이 시작되었습니다. 조금씩 저 자신을 잃어 가다 성자님께서 탄생하신 뒤 갑자기 정신 오염이 나았습니다.”
아마 벌레 아바도니온을 섬기는 자들에 의해 새겨진 문자였을 거다.
이 세상으로 넘어온 파편이 대부분 사라지며 놈의 영향력도 증발했겠지.
“이후 조직을 키우는 과정에서 제가 그 문자를 들려주면 부하들이 더 큰 힘을 내게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
나는 황급히 그녀의 눈동자를 확인했다.
코넬은 내가 갑자기 눈꺼풀을 뒤집으려 하자 당황했지만, 이내 몸에 힘을 빼고 받아들였다.
“놀랍게도 제정신이군…….”
내가 성직자는 아니지만, 코넬은 적어도 옛것들에게 정신을 침식당하는 중이 아니란 건 알 수 있었다.
텐티아 경이 늠름한 얼굴에 의문을 띄웠다.
“그게 가능합니까? 옛것의 힘을 통제할 수 있다면, 그녀가 일종의 흑마법사나 주술사라는 이야기잖습니까?”
“아마…… 조상 중에 귀족의 사생아가 있었지 않을까 싶군. 코넬, 계속해라.”
“그러다 빈민가의 한 아이가 운하에서 주사기 하나를 가져왔는데, 그 액체와 제 주문을 범용하면 훨씬 강한 힘을 내게 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순간 눈앞이 노랗게 물드는 걸 느꼈다.
그 주사기는 란체아가 허리띠에 차고 있던 거고, 란체아와 싸우던 중에 그 허리띠를 끊어 버린 건 나였다.
루디가 마총을 겨누며 날카롭게 말했다.
“발렌 님. 제가 듣기에는 전부 거짓말인 거 같습니다. 교회로 보내 심문하시는 게 어떨까요?”
코넬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교회에 가기 싫으니 이렇게 순순히 다 말하는 겁니다.”
나는 한 손을 들어 가볍게 루디를 제지했다.
“코넬. 네가 거짓말하지 않고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너는 침식의 힘을 사용해 빈민가에서 연쇄살인을 일으킨 사악한 옛것 사제다. 그리고 제국법상 옛것 사제는 무조건 화형이다. 더 할 말이 있느냐?”
미래가 기대되던 이 명석한 아이가 결국 그 길을 선택했다는 게 너무나 안타까웠지만, 살려 주고 싶어도 살려 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코넬은 처음 듣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 * *
방 안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텐티아 경이 혀를 차며 그 침묵을 깼다.
“거리에 내장을 파먹힌 시체들이 가득하다. 네가 네 힘을 늘리기 위해 저지른 짓이 아니냐?”
“제가 모시는 분은 늑대의 얼굴을 한 아몬 님입니다. 그분은 내장을 공물로 받지 않으십니다.”
나는 텐티아 경과 얼굴을 마주 보았다.
“전하. 아몬이면 옛것 사제라고 하기도 뭣하지 않습니까?”
“경의 말이 맞네.”
아몬은 북쪽 지방에서는 전사들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는 옛것이었다.
명예롭게 전사한 이들을 자신의 세계로 데려가 대접하기에 교회에서도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아직 마경을 한 번도 연 적이 없어 인류에게 그리 큰 피해를 주지도 않았다.
루디가 내게 물었다.
“전하. 이 아이의 말이 옳다면 저희가 본 건 무엇일까요?”
나는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안광이 생각보다도 많았던 걸 회상했다.
“외다리 소녀도 옛것의 지식과 접촉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다른 자들도 할 수 있었겠지. 그 정도일 거다. 빈민가를 본질적으로 정화해야 할 이유가 하나 늘었군.”
루디와 텐티아 경의 분위기가 달라진 걸 느꼈는지, 코넬이 호소하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약을 유통하지 않습니다. 귀족님들 엮인 위험한 물건은 건들지도 않습니다. 청부살인 의뢰도 안 받습니다. 저는 빈민가 밖에서는 제국법을 어겨 가며 활동할 생각이 없습니다.”
텐티아 경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네가 이 거리에서 부하들을 이끌고 수많은 사람을 죽여 온 건 사실이잖느냐?”
“명예로운 기사님께서는 제가 없었으면 이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텐티아 경이 머리 쓰는 건 싫은데, 하는 표정으로 반걸음 물러섰다.
지배자인 우리기에 방금 그 항변을 이해할 수 있었다.
구심점이 제일 중요하지만, 시대와 상황은 구심점을 만든다.
빈민가에 인구가 몰리고 옛것의 지식이 번지는데 겨울까지 오고 있다면 패싸움이 안 일어나는 게 이상하다.
“저는 홍등가에서 내려온 가드들을 통합했고, 조직들이 약에서 손을 떼게 했고, 동쪽의 흉작과 서쪽의 오크 무리에 쫓겨온 유민들에게 일자리를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약 문제로 다른 조직들과 마찰이 생겼고요. 그게 전부입니다.”
코넬이 한 박자 쉬고 말을 이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 제가 죽을 만한 죄를 지었습니까?”
그 아몬드 같은 눈에 깃든 총기가 여전해서.
나는 쉽게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내심 그녀가 언제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 언젠가 빈민가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 궁금했던 탓이다.
본래 황실이 해야 하는 공공사업을 사실상 대신해 주고 있는 것에 대한 부채감도 컸다.
“주사기를 폐기해라. 그건 정말로 위험한 물건이야. 그럼 풀어주겠다.”
그래도 이 부분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
코넬이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의자 아래쪽에서 목갑을 꺼내 열었다.
안에는 큼지막한 주사기 세 개가 들어 있었다.
“제가 가진 건 이게 전부입니다.”
맞는 수량이었다.
“한 번이라도 이걸 주사 받은 자들은 통제할 수 없다. 모두 죽이는 걸 추천하지.”
나는 그것들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발뒤꿈치로 밟아 깨트리고, 주사기와 액체가 흔적도 남지 않을 때까지 불태웠다.
황족의 척수액으로 만든 침식 유도제라니, 존재가 기록되어서는 안 될 끔찍한 액체다.
“아몬께서는 그들에게 리더를 따르는 본성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그 부분까지 걱정해주시니, 유의하겠습니다.”
그녀가 으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루디와 텐티아 경에게 손짓하며 다시 창문으로 몸을 돌렸다.
“조심해라. 제국에서 책임은 결과에 지는 것이다. 그들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면, 네가 책임을 지게 될 거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전하.”
코넬이 큰 바퀴 달린 의자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 * *
마구 중축한 쓰레기 건물들 위로 달이 뜨기 시작한 초겨울 저녁, 홍등가 출신이자 코넬의 부하인 십인장 게레도는 오늘도 묘한 열기를 느꼈다.
요 며칠간 저녁만 되면 몸이 근질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일부러 다른 패거리들의 영역에 들어가 싸움을 걸기도 하고, 동료들과 치고받고 훈련을 해도 열기가 사라지지를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기도 시간마다 코넬이 한 방울씩 주던 주사액이 사라져서 그런 거 같았다.
원래는 주문만 외워도 힘이 펄펄 솟아나더니, 이제 주사액 없이는 뭐가 허한 기분이었다.
이야기를 나눠 보니 부하들도 비슷하다고 했다.
결국 그는 저녁 기도 시간이 말을 꺼냈다.
“대장. 며칠 전에 우리 다 기절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때 뒤로 주사액도 안 주고, 설마 놈들이 빼앗아 간 겁니까?”
저녁 기도를 마쳤지만, 갈증은 여전했다.
그와 같이 코넬을 따르는 동급의 십인장들도 비슷한 기분인 거 같았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 기묘한 갈증이 어린 눈빛.
“주사액은 이제 안 쓰기로 했다. 그건 너무 위험해.”
코넬이 딱 잘라 말했다.
우리 조직은 약을 하지 않고, 소매치기도 하지 않겠다.
그렇게 말했을 때와 같은 목소리였다.
협상의 여지 따위는 없다는 목소리.
순간 게레도는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하고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대장. 그런 걸 우리하고 한 마디 상의도 하지 않고 정하는 겁니까?”
“정작 대장은 나가서 싸우지도 않으면서, 우리는 그 주사액 덕에 잘 싸워 왔는데, 갑자기 안 주겠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제 동생들이 어제 둘이나 죽었습니다!”
그를 포함한 거구의 사내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다리 하나도 없는 어린 게 대장이랍시고.’
‘빈민가 출신 꼬맹이 따위가!’
‘그 주문 때문에 따랐는데, 이제 나도 알잖아.’
‘주사액이 필요해, 주사액이 필요해, 주사액이 필요해, 주사액이 필요해.’
“으아아아아아!”
그 순간.
꾸물럭!
파파파파파파팟-!
방 안에서 나서는 안 될 소리가 났다.
사내들의 이목구비에서 푸른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촉수가 튀어나와 마구 구불거렸다.
코넬은 창밖에 뜬 달을 바라보았다.
“하.”
가장 마나가 짙어진다는 만월이었다.
“다른 옛것에게 물들었구나.”
그가 저들에게 주사액을 나눠준 지는 한 달도 되지 않았다.
“내놔!”
사내들이 촉수로 변한 손가락을 휘저으며 달려들었다.
목덜미와 손목, 배의 털도 살아 구불거리고 있었다.
코넬은 가만히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중얼거렸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창밖에서 날렵한 인영들이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십인장들의 배신을 경계해 그녀가 따로 키워 온 척살조였다.
주사액을 주입하면 덩치가 확 커져서, 날렵한 움직임이 중요한 그들에게 주사하지 않았던 게 신의 한 수였다.
“아악!”
“커어억!”
그들은 힘으로는 밀렸지만, 이미 무장을 단단히 갖추고 싸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반면 게레도와 십인장들은 저녁 기도를 위해 무장을 해제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
게레도는 자신의 목을 찌르려는 척살조 하나의 얼굴을 일곱 손가락으로 움켜쥐고 쥐어짜 뭉개버렸다.
그대로 바닥에 내리쳐 시체를 육편으로 만들어버린 순간, 그의 양 무릎과 어깨, 목덜미를 소검이 찌르고 빠졌다.
쿵!
게레도의 거구가 바닥으로 기울었다.
“커억!”
그가 신음을 토하고, 바퀴 달린 의자가 앞으로 다가왔다.
다리 한쪽 없는 계집애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포, 코넬 님. 살려 주십시오.”
그는 그 다리 한쪽 없는 계집애에게 애원했다.
코넬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몬은 배신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싫어.”
퍽!
끝을 창처럼 만든 목발이 게레도의 촉수 눈을 뚫고 머릿속까지 해집었다.
그때 건물 아래쪽에서도 고함이 들려왔다.
척살조원 하나가 창밖에서 외쳤다.
“코넬 님. 주사액을 주입 받았던 자들이 모두 발광하고 있습니다.”
“거리를 두고 창으로 제압하세요. 생존자는 필요 없습니다.”
“예.”
그녀는 침착하게 척살조원들을 부려 1층에 모여 있던 주사액 받은 전투조원들을 제거했다.
슬슬 진압이 끝나갈 무렵, 골목에서 횃불을 든 인영 하나가 다급하게 달려오는 게 내려다보였다.
곧이어 수백 수천 개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코넬은 이미 쓰러트린 전투조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다른 조직의 영역에서 시비를 걸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한 곳에 모아서 쳐야 최소한의 희생으로 숙청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숙청은 결국 자기 소모였다.
전쟁 중에는 더더욱.
어둠 속에서 수백 수천 개의 횃불이 파도처럼 몰려오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