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65화 (65/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65화

(65)

제이릴리스가 대답을 기다리며 관절 반지 낀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나는 그녀의 비인간적인 금안을 올려다보며 답했다.

“아몬을 섬긴다 한들 일신의 무력은 보잘것없는 아이입니다. 무력으로는 제가 전해 준 반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럼 함부로 배신하거나 선을 넘을 수 없을 것입니다.”

“목줄을 채웠구나. 온종일 논밭에 서 있을 수 없으니 허수아비를 만드는 법이지. 훌륭한 선택이었다.”

말을 잇던 제이릴리스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이내 가학적인 장난기가 섞인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맴돌았다.

“헌데, 어째서 의족을 만드는 철명술사나, 새 다리를 만들어줄 생조술사를 소개해주지 않았으냐?”

알면서도 묻는 말이었다.

내 입으로 대답을 듣고 싶어서.

나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제가 다리를 주었다면 빈민가를 떠날 아이입니다. 저는 그 아이의 행복이 아니라, 그 아이가 앞으로도 빈민가를 관리해주기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사실 소개해줄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미 그 아이는 자기가 직접 의족을 구해 신고 있었다.

이미 스스로 일어섰는데, 이제 와서 내가 손을 내밀어 봐야 큰 의미가 없을 거 같았다.

치안감 몇몇이 내 대답을 듣고 눈살을 찌푸리며 자기들끼리 속삭였다.

“어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현지 조력자 자체가 저런 생각을 밑바탕으로 만드는 것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저걸 저렇게 대놓고 언급하다니, 대공 전하의 인성이 의심되는군요.”

“잔혹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제이릴리스는 내 답변이 마음에 든다는 듯 흡족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수아비는 계속 논에 서 있어야 한다 그 말이구나. 그래. 네가 말한 만큼 능력 있는 아이라면, 어차피 오래지 않아 제 발로 나오겠지. 나중에라도 한 번 더 이야기해주거라. 죄인의 자식이 어떤 어른이 될지 궁금하구나.”

나는 내심 답했다.

절대 죄인은 되지 않을 거 같다고.

그 아이가 가진 힘은 우리 귀족들과 달리 혈통이 아니라 지식에서 나온다.

그리고 지식은 혈통과 달리 한번 커지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커진다.

코넬은 곧 빈민가 사람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겠지.

그 ‘사람들’과 함께 얼마나 대단한 걸 수 있을지 기대될 뿐이다.

깊은숨을 내쉰 제이릴리스가 말을 이었다.

“대공. 잘했느니라. 그대는 교회와의 협력 관계에서 황실의 면을 단단히 세워 주었다.”

그래.

“거대한 싸움을 유도해 깡패들을 공멸시켰고, 흐를 피를 최소화했으며, 자생 가능한 사업을 일구도록 했고, 빈민들이 옛것의 지식과 파편들을 교회에 바치도록 하여 안정화의 공을 교회와 나누기까지 했다.”

그랬지.

“전통적인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했으면 금화가 얼마나 들어갔을지 모르겠구나.”

다 알아보는구나.

“아주 평화로운 연말과 새해가 오겠어.”

그 말을 들은 나는 저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들이쉬는 공기가 이상하리만큼 신선하게 느껴졌다.

“아.”

그 말 그대로였다.

언제 전쟁의 불씨가 될지 모르는 붉은 달무리 궁의 황족들도, 느닷없이 침식당할지 모르는 배움의 거리의 사생아들도, 수상한 음모를 꾸미는 홍등가의 지배인들도, 온갖 범죄의 온상인 빈민가의 깡패들도, 민심을 장악한 신성한 광명교회도.

모두 박살 내거나 목줄을 쥐거나 손을 잡았다.

이제 수도 안에 제이릴리스를 흔들 만한 위험은 없었다.

“그러나 짐의 눈에는 언제나 평화가 아니라 분란의 씨앗이 보이는구나.”

황제가 가학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행정관들이 화들짝 놀라며 불안한 눈빛을 나누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예. 폐하.”

“그대는 짐의 쌍둥이이니, 작금의 제국에서 황위 계승자 1순위이다. 게다가 짐보다 먼저 태어났으니, 본래라면 계승 서열도 더 높지.”

그 말을 듣는 내내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소드 마스터이자 대마법사였다.

그녀의 시선과 결단은 나조차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결국 늘 옳았기에 군말 없이 따랐지만, 뜬금없이 어느 나라를 침공하거나 어느 귀족의 목을 베는 일도 잦았다.

“그러니 짐은 도저히 그대를 수도에 남겨 두지 못하겠도다. 반역도당들이 그대를 앞세워 반정을 일으키면 골치가 아파지니 말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옵니다.”

그녀의 말이 길어지자 나는 안도했다.

황제는 베고 싶은 자를 베고 싶을 때 베었다.

이유를 말하고 있다면 최소한 벨 생각은 없다는 뜻이었다.

“하니 짐과 함께 새해맞이 시찰을 떠나자꾸나.”

“예?”

제이릴리스가 비인간적인 금빛 눈을 번뜩이며 잔망스럽게 웃었다.

“프로이하이트 후작이 영지에 마경이 생겼다며 자유 기사들과 용병들을 고용하고 있다. 짐의 눈으로 사실을 확인하고 와야겠구나. 외무부에서 지난 몇 달간 확인하고 조치해달라 청했던 건이다. 수도 안이 평정되었으니 이제 출발할 수 있겠구나.”

“아.”

프로이하이트 후작령.

회귀 전 역사에는 귀족 반란 연합의 한 축이었지만, 반란이 일어나지 않은 이번 역사에서는 어찌 될지 모르겠다.

“내일 점심까지 짐을 챙겨 와이번핏으로 나오거라.”

* * *

내 별궁에서 루디가 비명을 질렀다.

“내일 점심이라니요! 아아. 폐하. 이렇게 갑자기 출발하신다면 대체 짐을 어떻게 싸라는 말씀이신가요?”

“대충 싸. 어차피 그곳에서 우리 돈 쓸 거 아무것도 없어. 옷도 망가지면 그냥 사 입으면 돼.”

“발렌 님. 요즘 뇌물 좀 받아 챙기셨다고 씀씀이가 헤퍼지셨습니다?”

루디가 녹색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나는 금화로 가득 찬 상여금 자루와 그 두 배 크기의 홍등가 상납금 자루를 쓰다듬으며 향기로운 포도주가 담긴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니. 그 뜻이 아니야.”

“네?”

“자기 영지에 방문한 귀족과 그 수행원은 융숭히 대접해주는 게 귀족 문화야. 우리는 황제 폐하를 따라가니 푸대접받을 일은 없어. 거기서 뭘 먹고 뭘 사든 어지간한 건 다 후작이 내줄 거야.”

옆에 앉아 있던 텐티아 경과 세레라지에가 눈을 빛냈다.

“그럼 제가 가지고 싶던 화염 내성 망토도 이참에 장만할 수 있는 겁니까?”

“프로이하이트면 무슨 시약이 유명하니? 분명히 외웠는데?”

“기본적인 의식주 안에서! 텐티아 경. 경은 어차피 그 갑옷이 4서클까지는 막아주잖는가? 누나는 어떻게 된 게 후작 뜯어먹을 생각을 나보다 더하고 있어?”

세레라지에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날 모욕하는 거니?”

“말 나온 김에 누나도 시약을 넉넉히 챙겨가. 누나는 나처럼 수행원으로 따라가는 거 아니야.”

세레라지에가 금은 요동을 가늘게 떴다.

“계승권자를 수도에 남겨 둘 수가 없어서 동행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이하이트 후작 말로는 자기네 영지에 열린 마경이 전기 속성이라고 하더라고. 누나는 그거 조사하려고 가는 거야.”

내심 그녀가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줄 알았다.

하지만 세레라지에는 새침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최고로구나!”

“뭐?”

“마경을 열 정도로 인류를 적대하거나, 인류에 유해하거나,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옛것 중 전기 속성은 많지 않단다.”

나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잘못된 주제를 꺼냈다.

천재 마법사의 전공 분야라니.

“그리고 놈들에게 힘을 받은 침식자나 마물들의 육신은 최고의 시약이지. 전격 증폭과 패턴을 연구할 수도 있겠구나. 제자들과 생도들을 데려가지 못하는 게 한스럽잖니.”

“걔들 누나 노예 아니야.”

“그런 소리나 하는 너랑 같이 가는 게 아니라면 훨씬 좋을 거 같은데, 아쉽구나.”

그녀가 진심으로 풀이 죽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무튼 누나도 늦지 말고 짐 싸서 와. 누나 노예, 아니. 제자들 시키지 말고. 안 그래도 겨울이지만, 특히 따듯하게 싸매고.”

텐티아 경이 아, 하며 와이번핏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았다.

“와이번을 타고 가는 겁니까?”

“그렇네. 프로이하이트 후작령까지 말로 가려면 가는 데만 석 달은 걸릴 테니.”

“제가 벌써 와이번을 타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전하 밑으로 들어온 게 행운이군요.”

“보통 용기사가 되는 데에 5년 정도 걸리나?”

“예. 저는 올해로 3년 차입니다. 동기들보다 2년 정도 앞선 셈이죠. 술자리에서 후기를 남겨 줘야겠습니다. 아, 혹시 전하께서는 와이번 비행법을 알고 계십니까?”

텐티아 경이 사춘기 소녀처럼 웃었다.

전혀 사춘기 소녀와 어울리지 않는 비행 마수를 타는 법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면서.

30년도 넘게 와이번을 탄 탓에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오랜만에 들으니 꽤 즐거워서, 텐티아 경의 퇴근 시간까지 수다를 떨었다.

“그때는 날개를 젖히고 급상승을!”

“아닙니다. 사선 비행을 통해 뒤를 잡는 게 최선 전술입니다!”

* * *

와이번핏은 위가 평평한 도넛 위에 강철 그물로 돔을 씌운 듯한 건축물이었는데, 와이번들이 사는 곳은 도넛 가운데 구멍 부분이었고, 우리가 타고 내리는 곳은 평평한 고리 부분이었다.

그 고리 부분의 넓이도 100m가 넘어서, 그 위에 서 있자면 정말 이게 인간이 만든 게 맞는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제때 왔구나.”

“폐하. 실례지만 수행원이 왜 셋뿐이옵니까?”

제이릴리스는 달랑 백금 기사 한 명과 시녀 한 명, 행정관 한 명을 대동하고 있었다.

대륙을 절반을 지배하는 황제의 행차치고는 너무나 소박했다.

“음. 실례로구나.”

“…….”

내가 말씀 다 하셨냐는 표정으로 침묵하자, 황제는 화제를 바꾸었다.

황제는 무언의 항의를 무시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프로이하이트 후작령까지는 와이번을 타고 난다 해도 며칠은 가야 할 것이다. 짐은 그대가 와이번을 탈 줄 모른다고 아는데, 짐의 기사 뒤에 타겠느냐?”

그녀의 금빛 눈이 비인간적으로 번뜩였다.

‘안 돼.’

나는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여기서 탈 수 있다고 해 버리면 의심을 사겠지만, 와이번 비행은 내가 전생에서 망나니 짓을 그만둔 후 즐기던 몇 안 되는 취미 중 하나였다.

그 재미있는 걸 다시 할 기회가 왔는데 며칠간 기사의 뒤에서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다.

“한번…… 시도해 보고 말씀드려도 되겠사옵니까?”

“그러도록. 올려보내라.”

와이번핏 주둔 병사들이 신호를 보내자 마법사가 주문과 함께 레버를 당겼다.

그물 한 켠이 벗겨지고, 조련사의 호각 소리에 맞춰 와이번들이 한 마리 한 마리 솟구쳐 올랐다.

키이이이이-.

하지만 그들은 그 기세 그대로 하늘로 날아가지 못했다.

강철 뼈대에 전류 흐르는 그물을 씌운 돔 때문이었다.

방향을 튼 놈들이 하나하나 우리가 서 있는 와이번핏 옥상으로 착륙했다.

익폭 20m, 몸길이 15m.

박쥐의 날개와 도마뱀의 몸과 뱀의 목을 가진 마수, 와이번이었다.

“아…….”

“흠, 흠.”

“우와아아아.”

얼마 전까지도 평범한 시녀였던 루디는 겁에 질려 세 걸음이나 물러섰고, 세레라지에는 마법사의 호기심과 인간으로서의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텐티아 경은 동경 어린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다가가 그 암적색 비늘 덮힌 아가리에 손을 댔다.

크르르르-.

어릴 적부터 기사들을 섬겨 온 하늘의 괴물은 순순히 판금 갑옷 입은 자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무척 따듯하군요. 선배들이 타는 걸 보기만 했지, 직접 만져 보는 건 처음입니다.”

그녀가 무척 고양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제이릴리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텐티아 경. 적성이 잘 맞는 듯하군.”

“예, 예! 폐하.”

“경의 주군인 발렌 대공만 괜찮다면, 짐이 그대에게 그 와이번을 내려 주고 싶군.”

텐티아 경이 그 늠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박력 넘치게 호소했다.

“전하! 부디 허락해 주소서.”

등 뒤에 벽이 있었다면 위험했을지도 모르겠다.

“황제 폐하의 뜻을 내가 어찌 거스를 수 있겠나? 경이 와이번을 받는다면 내게도 좋은 일인 것을.”

그렇게 답한 나는 내 옆에 다가온 은회색 와이번에게 손을 뻗어, 놈의 턱 아래를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시이이이이-.

턱뼈 아래 살이 움푹 들어가는 곳을 쓸어 주자 와이번이 기분 좋다는 듯 몸을 흔들며 내 옆에 뱀 같은 머리를 조아렸다.

제이릴리스가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되는 친화력이로구나. 아무리 어릴 적부터 길들였다 해도 천성이 마물이거늘.”

조련사 역시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성질이 더러워 제 말도 잘 안 듣던 놈입니다. 어찌.”

나는 환하게 웃으며 진심과 거짓을 섞여 내뱉었다.

“똑똑한 녀석들이니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아볼 겁니다. 텐티아 경의 와이번도 그녀를 잘 따르지 않습니까?”

텐티아 경도 성공적으로 탄 덕에 내 성공이 빛바래서 다행이었다.

이례적으로 세레라지에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천성이 비슷하니 그럴 수도 있습니다. 발렌 대공과 와이번 모두 싸움과 살육을 좋아하고, 무리를 짓고 서열을 중시하며, 비열하고 오만하지 않습니까? 동족을 알아보는 것이옵니다.”

“재미있구나.”

그 말에 제이릴리스가 가학적으로 웃었다.

……동족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와이번은 용의 몰락한 후손이고, 황실의 피에는 용혈도 짙게 섞여 있으니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2인용 안장을 와이번의 등에 메고 짐을 실은 뒤, 루디에게 손을 뻗었다.

“루디. 무서워하지 말고.”

“네. 전하. 해볼게요.”

그녀는 나와 엎드린 와이번을 번갈아 바라보다 내 손을 잡고 뛰어올랐다.

나는 그녀를 끌어 올렸고, 그녀는 안장 뒤에 앉아 내 허리를 붙들었다.

“떨리네요. 하늘을 난다니. 상상도 해본 적 없었어요.”

“나중에 더 출세하면 네 와이번도 달라고 빌어 볼게. 하늘의 마탄 사수 루디! 멋지지 않아?”

“전하 등에 꼭 붙어 있고 싶습니다!”

조련사가 조종에 대해 몇 가지를 설명하고, 마법사가 정신계 마법을 한 차례 더 걸어 흥분한 와이번이 밖에서 폭주하게 않게 막았다.

“올려라!”

황제가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끼이이이이익-!

기계 장치가 움직이고 돔 천장 한구석의 그물이 걷혔다.

놈이 와이번핏 위를 달리며 비행을 준비했다.

후우욱, 날개를 크게 퍼덕이는 소리가 들려오고 일순 몸에 무게가 없어지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루디가 비명을 지르며 내 허리를 꼭 붙들었다.

나는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상쾌하게 웃었다.

“세상이 내 발아래 있구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 텐티아 경의 뒤에 탄 세레라지에가 소리쳤다.

“너는 왜 그런 소리만 하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