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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67화 (67/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67화

(67)

우리는 다음 날 먼동이 터 오자마자 출발했다.

중간중간 와이번 착륙장에서 쉴 때마다 오크나 고블린, 때로는 키가 7m에 달하는 트롤에게 습격을 당하기도 했지만, 제이릴리스는 모두 금빛 잔상 같은 용을 불러내 불태웠다.

나중에는 아예 은은한 기세를 흘리며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막았다.

세레라지에는 특유의 통찰력과 지식으로, 발렌시아누스는 회귀 전의 경험으로 그녀가 사용하는 마법의 진가를 알아보았다.

그건 엘프족으로부터 비롯된 서클 마법이 아니라, 용들의 권능인 용언이었다.

“황가에 이종족의 피가 여럿 흐름은 그대들도 알고 있지 않느냐? 발렌 그대도 열심히 연습해 보아라. 짐의 쌍둥이니 금세 성과를 거둘 수 있지 않겠느냐?”

“쓰는 순간 목을 쳐버리겠다, 같은 표정을 하시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제이릴리스가 낭랑하게 웃었다.

“흐음. 들켰구나. 그런데 세레라지에 대공은 요새 무엇에 그리 심취했는고?”

“폐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대 역시 전격의 용언을 다룰 줄 앎을 알고 있도다. 괜히 무리하지 말고 차차 연습하거라. 그대가 힘 조절을 잘못할 때마다 와이번을 모는 텐티아 경이 감전되어 움찔움찔 떨지 않더냐?”

세레라지에가 얼굴을 하얗게 물들이며 물었다.

“혹시 폐하께서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습니까?”

“마나의 흐름으로 아는 것이다. 보는 듯 느껴지니 뒤통수에 눈이 달렸다고 해도 되겠구나.”

저녁마다 모닥불가에서 그런 대화를 나누기를 열 번.

그제야 우리는 프로이하이트 후작의 영향권에 들어설 수 있었다.

발렌시아누스는 새벽하늘 아래 눈 덮인 숲과 산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신이 나서 늘어놓았다.

루디는 그가 와이번을 탈 때면 올해 4월 전으로 돌아가는 거 같다고 생각했다.

“루디. 이 산맥 일대가 프로이하이트 후작의 영향권이야.”

“영지가 아니라 영향권이요?”

“이 근처 영주들은 다들 프로이하이트 후작의 봉신이라는 뜻이지. 프로이하이트는 다섯 개의 백작 가문과 마흔 개가 넘는 남작 가문을 거느려.”

“어마어마하네요. 혹시 예전에 왕가였나요?”

“응. 지금 후작령 전체가 고스란히 하나의 왕국이었어.”

루디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이 발렌시아누스의 시녀가 되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영지, 기사, 제국, 정책, 군대.

그녀의 삶과는 연이 없을 줄 알았던 거대한 이야기들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었다.

“제국에는 유독 후작위가 많은 거 같아요. 이유가 있나요?”

“후작 작위 자체가 타국과 국경을 맞댄 변경 영주에게 전쟁 나면 막고 있으라고 이런저런 특권을 주면서 생겼지. 그런데 제국은 계속 정복 전쟁을 벌였고.”

“아.”

“새 영토가 생길 때마다 거길 봉토로 받은 귀족은 후작이 된 거야. 그래서 중앙에서 멀어질수록 죄다 후작령인 거고.”

“신기하네요.”

발렌시아누스는 한쪽에 보이기 시작한 거대한 나무들을 가리켰다.

“루디. 봐봐. 멋지지.”

“세상에. 무슨 나무가 저렇게 커요? 300m은 될 거 같아요.”

옆에 있는 산보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더 높았다.

“거대수야. 수종이 따로 있는 건 아니고, 엘프들이 살았던 숲은 정령 덕에 저렇게 된다고 해. 저걸로 거대한 군선을 만들지. 가끔 엘프들이 돌아오기도 해서, 영주들은 거대수림을 잘 관리하려 애써.”

발아래로 높은 산에 둘러싸인 분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분지 가운데는 자연석을 쌓아 만든 거친 탑과 건물들로 가득했다.

높은 산들과 거대수림이 번갈아 펼쳐지는 곳, 산 위에 1년 내내 녹지 않는 눈이 있는 곳, 드워프가 판 광산이 있는 곳.

프로이하이트 후작령이었다.

* * *

프로이하이트 후작령의 와이번핏은 수도의 것보다 작았지만, 만만찮게 거대했다.

다행히도 영주성 바로 옆에 있어서 찬 바람을 쐬지 않고 편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와이번 타고 찬 바람 쐬는 건 노는 거지만, 걸으며 찬 바람 쐬는 건 중노동이다.

“자유 기사 나리들께서는 오른쪽 호텔에 묵어 주시면 됩니다!”

“마법사님들은 내일 저녁에 테스트가 있겠습니다! 마음 편하게 대기해 주십시오!”

“지금부터 이름 부르는 용병단장님들은 고용 확정입니다! 단원들 데리고 숙영지로 이동하십시오!”

성 앞 대로와 광장은 수도 못지않게 넓고 깔끔했다.

광장의 단상에는 포고꾼이 서서 자유 기사들과 용병단 단장들과 방랑 마법사들에게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후작령에 내리고 베일을 쓴 제이릴리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군을 모으는 건 확실히 사실이로구나.”

텐티아 경은 자유 기사들의 각종 문양과 약장,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갑옷을 보고 붉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늠름한 얼굴에 호승심이 잔뜩 떠올랐다.

그녀는 영주성으로 들어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을 향해 눈을 부라리거나, 당장 달려 나갈 듯 자세를 잡거나, 기사들의 수신호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봐도 중지를 펴는 것뿐인 신호를 주고받았다.

물론 그 기 싸움의 결과는 언제나 황립 강철 공방과 황립 마도 공방의 걸작을 입은 텐티아 경의 승리였다.

“몸에 걸친 무구가 곧 기사의 격인 법!”

“발렌 전하의 말이 옳습니다!”

“끼리끼리 잘도 노는구나.”

반면 세레라지에는 방랑 마법사들에게 깊고 복잡한, 동정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돈 많고 권력 있는 영주 밑에서 시약을 마음껏 써 가며 연구와 수련을 할 수 있는 건 엘리트 마법사의 특권이자 낭만이었다.

찬 바람 부는 날 밖에 서서 포고를 듣느냐, 대귀족을 따라 성에 들어가 의미심장한 덕담과 조언을 주고받느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잘들 있어 주겠니? ‘만약의 나’들아.”

“그게 누나의 덕담이야?”

나는 제이릴리스를 따라 성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잠시 세레라지에를 기다렸다.

문 앞의 경비병은 빨리 들어가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지만, 차마 내게 그 말을 할 용기는 없는 거 같았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네가 아니었다면 나도 저렇게 되었겠지?”

“저것보다 못했지. 여기는 교회도 없는 줄 알아?”

“나 같은 천재가 저렇게 영락하면 제국의 손해인데.”

“그래서 내가 누나 찾아서 왔잖아.”

“누군가가 나를 필요하다고 해주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니. 그렇게 네게 감사하던 내가, 너를 이런 눈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구나.”

세레라지에의 금은 요동은 여전히 분노와 경멸에 차 있었다.

“망나니 동생아. 왜 상아탑과 나 사이의 마음의 거리를 벌렸니? 내게 미움받을 걸 알았잖니? 이런 게 좋은 거니?”

나는 비릿하게 웃으려 애쓰며 답했다.

“그럴 리가 있나? 해야 했으니까 했을 뿐이야.”

세레라지에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가끔 나는 네가 황제 폐하처럼 느껴진단다.”

“무슨 큰일 날 소리를!”

“제멋대로인 거 같은데 까 보면 옳아서, 믿고 싶게 만들어.”

“…….”

“그러니 앞으로도 옳아 주렴. 큰 기회를 준 너를 미워하기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이 이기적이고 잘난 척 좋아하는 주정뱅이 망나니 동생아.”

“……그냥 마지막 말이 하고 싶던 거지?”

“명석하구나.”

그건 칭찬이 아니었다.

저 안쪽에서 루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렌 전하! 세레라지에 전하! 빨리 들어오세요!”

우리는 동시에 문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속 문을 열어놓고 있던 문지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걸 듣고 킬킬 웃으면서.

* * *

후작은 만찬회장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만찬회장은 제이릴리스의 알현실처럼 천장이 높았고, 벽에는 나무와 붉은 방패가 그려진 프로이하이트 가문의 깃발과 화려한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거대수의 널빤지로 만든 게 분명한 원목 테이블은 길이가 무려 50m에 달했다.

“조부의 조부께서 엘프들에게 선물 받은 것이지. 반갑소. 발렌시아누스 대공. ‘드높은’ 프로이하이트의 후작. 시그마인 엘제누스 프로이하이트요.”

그는 옅은 갈색 머리에 한기가 감도는 푸른 눈을 가졌고. 한곳을 향해 가고 있는 완고한 매 같은 인상의 사내였다.

나이는 30대 정도로 보였지만, 내가 알기로 그는 이미 장성한 자식이 셋이나 있는 가장이었다.

외모를 가꾸는 취미는 없는지 묘하게 옷차림이 유행에 뒤떨어졌지만, 그는 대귀족 특유의 품격을 갖추고 우리를 맞이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황제 폐하의 고문, 발렌시아누스 솔레타라온 솔레타라스입니다.”

내가 대공은 대공이었지만, 송곳 꽂을 땅도 없는 이름뿐인 대공과 왕국 하나 크기의 땅을 차지한 후작 사이에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데려온 수행원들의 식사를 따로 준비하라고 일러놓았으니 걱정 마시오. 그들로서도 주군이 없는 곳에서 먹는 빵이 더 부드러울 테니 말이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나는 그걸 고려해도 다소 비굴한 태도로 후작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야, 곧 제이릴리스가 테이블을 뒤엎는 수준으로 후작을 몰아붙일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회귀 전에도 어지간해서는 수도를 떠나고 싶지 않아 했다.

그렇기에 한 번 수도를 떠나면 모든 걸 끝내고 돌아왔다.

50m 거대한 테이블에 앉은 건 나와 제이릴리스와 세레라지에, 그리고 후작뿐이었다.

물론 주변에 시종과 시녀, 하인과 하녀들이 있었지만, 황제와 후작이 마주 앉은 이 자리에서 기사 이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내심 그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내며 음식을 기다렸다.

다행히도 음식은 아주 맛있었다.

훈제한 사슴 다리가 메인 디쉬였는데, 은은한 참나무 연기 향과 함께 입안에서 살살 녹아내렸다.

내 옆에 앉은 세레라지에가 귓가에 속삭였다.

“곧 시작하겠구나.”

제이릴리스와 후작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는데, 막 제이릴리스가 포도주로 입가심을 했다.

긴 백금발을 단정하게 묶은 그녀가 얇은 베일 아래서 금빛 눈을 빛냈다.

“독이 안 든 포도주를 먹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하루에 세 명씩 하인을 베어도 계속 어디선가 첩자와 암살자들이 들어온단 말이지. 아주 깊은 맛이야. 고맙네. 후작.”

후작이 고개를 마주 들며 말했다.

“천만의 말씀이옵니다.”

“그런데 이 만찬회장이 기사들로 가득 차면, 내가 마실 몫은 줄어들겠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짐의 무위는 그대도 알고 있을 테지.”

프로이하이트 후작이 숨을 들이켰다.

그 역시 다른 대귀족들처럼, 황태자 파벌과 1황자 파벌이 공멸하고 제이릴리스가 즉위한 그 날, 수도에 있었다.

“짐이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날 그대가 챙겨 간 짐의 이복 남매들부터 숨겼을 테고.”

그날 대귀족들은 자신의 영지로 도망치듯 돌아가며 제이릴리스에게 도망친 황족들을 한둘씩 챙겨 갔다.

언젠가 황제가 약점을 보이면 너도나도 칭제하거나 독립을 요구하겠지.

그걸 알면서도 제이릴리스가 가만히 있는 이유가 있었다.

그날 그녀의 무위를 본 만큼 함부로 개전하지는 못 하리라는 기대가, 대귀족들이니 침식자 부분은 알아서 잘 관리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플라니티에스 후작은 아내의 복수를 위해 개전했다.

심심하면 전쟁을 벌이는 대귀족들조차 아내의 복수 정도는 되어야 개전할 마음을 먹게 할 만큼, 그녀의 무위는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짐의 친족들과 함께 마경도 같이 숨긴 건가?”

“폐하.”

“짐이 와이번을 타고 날아오는 내내 그대의 영지와 그대 봉신들의 영지에서 침식자나 옛것의 기운 따위를 느낀 적이 없음이야.”

프로이하이트 후작이 뭐라 말하려 했지만, 제이릴리스는 한 손을 들어 행정관들에게 하듯 그의 말을 끊었다.

대귀족 봉신에게 하기에는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누구도 진노한 황제를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군대를 모아 영지전을 벌이려 한다고 둘러대기라도 하지 그랬나?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저주나 기어스라도 걸렸나? 대체 기사와 마법사와 용병들을 모아 무엇을 하려 했는가? 짐이 어리다하여 얕보았는가? 대답하라.”

넓은 만찬회장에 그녀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울렸다.

후작은 그녀가 어떠한 기세도 끌어 올리지 않고 있음에도 기가 눌린 듯 땀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그가 큰 결심을 하듯 내뱉었다.

“내일 마경을 직접 보여 드리겠습니다.”

“당연히 그리 해야 할 것이다. 어째서 짐에게 큰 자비라도 베푸는 듯 이야기하느냐?”

“그것도 내일 알게 되실 겁니다. 하오니 부디 분노를 가라앉히고 편안한 밤을 보내시지요.”

식사는 그렇게 끝났다.

어느새 그의 입가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다.

만약 내가 군대를 모으다 제이릴리스가 찾아왔다면 일단 발치에 엎드리고 봤을 텐데.

* * *

제이릴리스는 마경과 후작을 한 번씩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깊은 한숨과 함께 내뱉었다.

“이해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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