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69화 (69/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69화

(69)

시그마인 후작과 후작가의 기사들이 황제에게 달려들었다.

마도구인 갈색 판금 갑옷과 붉은 망토는 멋들어지게 펄럭였고, 검마다 마나 블레이드가 불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후작가의 한 기사와 싸우면서도 그 싸움을 바라보았다.

후작이 검을 사정없이 내리치며 제이릴리스를 몰아붙였다.

그러나 제이릴리스는 보검 ‘유리거울’을 뽑지도 않고 오러 두른 나뭇가지로 받아냈다.

캉, 카앙!

검과 나뭇가지가 부딪힐 때마다 되려 후작의 검이 파이고 있었다.

“제이릴리스!”

후작이 천둥처럼 검을 내리쳤다.

“나약하다!”

제이릴리스의 금안이 빛나고, 그녀의 나뭇가지가 한 박자 빠르게 후작의 허벅지 갑옷을 뚫고 허벅지를 깊숙하게 꿰뚫었다.

“제법 설득력 있는 거짓말이었다. 그대로 야심을 버린다면 믿어주었을 텐데.”

시그마인의 자세가 흐트러지며 검이 바닥을 내리쳤다.

쿵!

돌바닥에 금이 가고 눈과 돌가루가 마경 바위틈 아래로 떨어졌다.

“소드마스터도 아닌 놈이 검술로 짐을 이기려 드느냐?”

그녀가 조소하며 일갈했다.

후작가의 아홉 기사가 당장 달려들 듯 검을 쳐들었지만, 제이릴리스는 감춰두었던 기세를 해방했다.

사아아아-!

한겨울 바람보다, 흩날리는 눈발보다 서늘한 살기가 기사들의 손발을 얼어붙게 했다.

그들 역시 마나를 끌어올려 저항하고 있음에도 눈을 뜨고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나는 회귀 전에도 많이 당해 봐서 익숙했지만, 그래도 숨을 헐떡이며 기사에게서 거리를 벌려야 했다.

“짐이 그대들의 주군과 이야기하고 있잖은가?”

제이릴리스의 목소리가 골짜기에 낭랑하게 울렸다.

시그마인이 이를 악물며 바닥에 내리쳤던 검을 다시 뽑아 들었다.

“흐, 하!”

그의 검이 아래에서 위로 베어 올라가고, 위에서 대각선으로 베어 내려왔다.

이어 오른발을 뒤로 빼며 땅을 박차는 동시에 다시 검을 찔러 넣으며 제이릴리스의 가슴팍을 노렸다.

그러나 그녀는 제자리에서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시그마인의 공격을 받아냈다.

첫 번째 공격을 나뭇가지로 쳐내고, 위에서 떨어지는 검을 슬쩍 피하고, 마지막 찌르기는 오러 두른 손바닥으로 받아냈다.

손가락마다 관절 반지 낀 하얀 손에 금색 오러가 덧씌워지고, 예리한 검 끝이 파스슷, 소리를 내며 조각조각 떨어져 나갔다.

까드드득!

제이릴리스가 지긋이 검을 밀어내며 시그마인에게 물었다.

“황제가 되고 싶었나? 아니면 독립국의 왕이 되고 싶었나? 짐이 인질을 보내라 했던가? 아니면 세금을 올렸던가? 아직 그대 같은 대귀족들에게 밉보일 만한 짓을 하지 않았을 텐데…….”

말끝을 흐렸던 그녀가 가학적으로 웃었다.

“대체 어찌하여 가문의 몰락을 자초하는가!”

따다당!

세 번의 찌르기가 연속으로 후작의 갈색 판금 갑옷 위를 두드렸다.

분명 강화 마법이 잔뜩 붙어 있을 그 갑옷이 찰흙으로 만든 양 파였다.

후작이 고함치며 제이릴리스를 바위틈으로 밀어붙였다.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나뭇가지를 베어 올리는 동시에 발을 걸어 후작을 바위틈 아래 마경으로 내던지려 했다.

솔직히 그때 나는 안도하고 있었다.

나는 이 기사를 상대로도 버틸 수는 있었고, 제이릴리스 역시 그걸 알고 있는 거 같았다.

또한, 그녀는 검도 뽑지 않고도 소드 엑스퍼트 상급인 후작을 농락하고 있었다.

그녀가 진심을 발휘하는 순간이 후작과 기사들이 죄다 쓰러질 순간이리라.

“윽!”

시그마인 후작이 오른발을 축으로 한 바퀴 돌며 가까스로 마경에서 벗어났다.

제이릴리스가 가학적으로 웃으며 왼손을 뻗어 그의 왼손 손목을 잡아챘다.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판금 갑옷이 그녀의 손 모양대로 파였다.

“지금이다!”

그때 후작가의 아홉 기사가 반원형으로 둘을 포위한 진영 그대로 땅속에 검을 박아 넣었다.

마나 블레이드가 눈부시게 타오르고 땅이 쩍, 갈라졌다.

나는 기겁하며 기사를 떨쳐내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제이릴리스!”

이름을 부르는 무례를 거리낌 없이 저지르면서.

이 미친 것들이.

후작까지 같이 죽일 생각인가?

갈라진 땅속은 이미 마경에서 번진 푸른 버섯의 균사체로 가득했다.

본래 땅이었을 때보다 약해져, 마나 블레이드 한 방에 지반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거였다.

타앗, 후작이 크게 땅을 박차며 물러서고, 제이릴리스는 후작의 팔뚝을 잡은 그대로 땅을 박찼다.

“쳇!”

일순 그녀의 몸이 흔들렸는데, 반사적으로 비행 마법을 쓰려 한 거 같았다.

시그마인 후작은 무사히 붕괴를 멈춘 지면까지 물러섰다.

제이릴리스는 아직 갈라지는 땅 위에 서 있었지만, 시그마인의 팔뚝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시그마인이 끝 부러진 검을 들어 제이릴리스의 손목을 베려 했지만, 날만 망가질 뿐이었다.

“이익!”

그의 완고한 얼굴에 각오가 떠올랐다.

사악!

나는 눈밭 위로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며 당황했다.

제이릴리스가 피를 흘린 줄 알았지만, 흐르는 건 후작의 피였다.

“어?”

쿠르르릉!

지면이 무너져 내리고 제이릴리스의 몸이 바위틈 아래로, 마경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처음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린 그녀의 왼손에는 후작의 왼팔이 팔꿈치 아래까지 쥐어져 있었다.

“제이릴리스!”

나는 그녀를 향해 한껏 손을 뻗었다.

탁.

관절 반지 끝이 내 손가락에 걸렸다가 미끄러졌다.

저 아래 거대한 버섯들과 전기 해파리들이 보였다.

턱.

이번에는 손을 잡았다.

대신 발이 지면에서 떨어졌다.

제이릴리스가 고함쳤다.

“이 어리석은 망나니 놈!”

* * *

“황제 폐하와 대공 전하를 구출하기 위한 수색대를 모집하겠다. 또한 제국의 안전을 위해 내 기사들을 보내 수도 솔레타라온 방비에 한 손을 보태겠다.”

영주성 밖 광장에서 후작의 포고꾼이 연설을 이어갔다.

“전력 공백을 해소하기 위해 자유 기사들과 방랑 마법사들을 고용할 것이다. 수색이 실패할 경우와 오랫동안 옥좌가 비워질 경우를 대비해 귀족 회의를 소집할 것이며, 그 자리에서 섭정을 결정할 것이다. 마경으로부터 영지를 지키기 위해 징집을 개시할 테니…….”

용병 대장들과 바람잡이들이 손뼉을 쳤고, 멋모르는 영민들도 손뼉을 쳤다.

그러나 교양과 지식을 쌓은 지식인들은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엄마? 어디 가는 거예요?”

그러나 그 손길도 오래 움직이지는 않았다.

어디로 갈 것인가?

하루가 멀게 마경이 범람하는 타국?

프로이하이트와 다르지 않은 다른 귀족령?

대귀족들의 전쟁터가 될 수도?

그렇다고 편안한 마음으로 남을 수도 없었다.

폭군 친족살해자 황제에 대한 소문은 이미 전 대륙에 파다했다.

자신들의 후작이 황제에게 어떤 수작을 부렸음을 못 알아차릴 지식인들이 아니었다.

황제가 죽었다면 곧 일어날 영지전에 끌려갈 테고, 황제가 죽지 않았다면 분노한 황제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녀가 후작 일가에게만 죄를 물을까?

제 친족들을 다 베어버린 황제가?

지식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세레라지에는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며 객에게 주어진 성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를 따라온 기사가 문 앞에서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분명 살아 계실 겁니다. 작위를 떠나 이복 동생이 둘이나 실종을 당하셨으니 심란하시겠지만, 부디 마경 범람 시기와 핵 생성 시기를 알아내 주십시오. 그걸 알아야 저희도 구출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래. 알았다.”

“그리고 혹시…….”

“혹시?”

“오늘 저녁 만찬 자리에 나오실 수 있으십니까? 후작가의 둘째 도련님께서 세레라지에 대공 전하를 뵙고 싶어 하십니다.”

세레라지에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일수록 능력 있는 자들이 화합하여 혼란을 종식 시켜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단다. 기꺼이 받아들이지.”

“감사합니다.”

기사가 나가고, 텐티아와 루디는 세레라지에를 바라보았다.

남색과 노란색의 금은 요동이 격노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주먹 안에서 전격이 흘러넘칠 정도였다.

“무슨 옷을 입을지 기대되는구나.”

그녀는 새침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종이와 펜을 들었다.

[벌써 이럴 줄은 몰랐구나. 도청 마법 대책이란다.]

“후작가 자제면…… 그래도 마법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으려나?”

[만약에 둘이 안 돌아온다면, 내가 공식 계승서열 1위잖니. 나랑 결혼하면 황제나 섭정이 될 수 있어.]

“!”

루디와 텐티아가 눈을 부릅떴다.

세레라지에는 떨리는 손으로 필담을 이어 나갔다.

[폐하도 발렌 그 망나니도 분명히 살아서 돌아올 거야. 그놈이 어디서 쉽게 죽을 놈은 아니잖니. 돌아올 때까지 마경의 마나 흐름을 측정하면서 시간을 끌게. 다들 정신 차리고 버텨야 해.]

텐티아는, 그 늠름한 붉은 머리의 기사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주군은 분명 모든 걸 예측하고 그녀를 세레라지에 옆에 붙여 놓았으리라.

‘폐하가 전하를 위해 몸을 날리지는 않으셨을 테니. 발렌 전하는 황제 폐하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셨겠지요. 너무나 기사답고 위대한 일입니다. 저 역시 당신께서 마지막으로 주신 임무를 다하겠습니다.’

판금 갑옷을 단단히 조이며 그녀는 다짐했다.

루디는 짐가방 속에서 마탄을 잔뜩 끼워 넣어 놓은 가죽 탄띠를 꺼내 허벅지 아래와 허리에 찼다.

시녀복 아래 두 자루 마총의 무게를 느끼며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더 강해질 거예요.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그분을 찾아 떠날 수 있도록.’

* * *

쿠구구구구궁!

굉음을 들으며 나는 눈을 떴다.

“아.”

기절했다 깨어나는 기분은 언제든 더러웠다.

일단 마나를 운용하며 사지가 멀쩡한지 확인했다.

다행히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아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쩡히 살아 있는 걸 보니 공기 자체가 독소인 마경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

그래도 마경은 마경이었기에, 나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동 바위벽 전체에 청록색과 파란색으로 환하게 발광하는 버섯이 빼곡하게 자라 있었는데, 작은 건 손바닥만 했고, 큰 건 10m도 넘어 보였다.

버섯이 내는 빛에 의지해 위를 올려다보니 공동 높이가 300m도 넘는 거 같았다.

위에는 아까 본 거대 전기 하늘 해파리 같은 것들이 둥둥 떠다녔다.

큰 놈들은 파란 몸통 부분만 20, 30m에 육박했고, 다리까지 포함하면 몸길이가 100m도 넘을 거 같았다.

반대로 작은놈들은 다리를 포함해도 5m를 넘지는 않는 거 같았다.

그때 저 앞 거대한 버섯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다급하게 일어서며 검을 뽑아 들었다.

무슨 이물이 나올지 알 수 없는 곳이 마경이었다.

“일어났는가. 대공?”

“폐하?”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이는군.”

버섯 뒤에서 걸어 나온 건 다행히 나의 황제 제이릴리스였다.

백금발 머리카락은 뒤로 넘겨 묶은 그대로였는데, 그건 전투를 치르고 왔거나 치를 준비를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녀가 검은 드레스 위에 걸치고 있던 모피 숄을 벗어 바닥에 깔고 앉았다.

여전히 그 비인간적인 금색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어서, 몹시 안심했다.

“덥지 않나? 그대도 앉도록.”

그러고 보니 내 머리에 땀이 흥건했다.

코트를 벗고 손을 들어 허공을 이쪽저쪽 쓸어 보니 버섯 근처가 후끈후끈했다.

아무래도 버섯이 열을 내뿜고 있는 거 같다.

“폐하. 마법은 돌아오셨습니까?”

제이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지하까지는 마나 봉인이 먹히지 않는 모양이다. 덕분에 그대가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잡아 들 수 있었지.”

“그럼 어째서 다시 올라가지 않으셨습니까?”

“안 그래도 못 올라가서 짜증이 난 참이다.”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날아서 올라가니 크고 작은 하늘 해파리들이 잔뜩 몰려들더구나. 전격이 꽤 강해서 맞아주면서 돌파할 수는 없었다.”

제이릴리스 기준으로 ‘꽤 강한’ 정도면 나에게는 즉사기이리라.

“할 수 없이 큰 기술을 쓰니 그 여파로 주변 벽이 짐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아마 그게 내가 들은 붕괴 소리일 거 같았다.

공동은 위로 갈수록 급격하게 좁아졌다.

아무리 제이릴리스라도 어마어마한 토사를 밀어내며 상승하기는 힘들었으리라.

“그래서 그다음에는 벽을 타고 올랐다. 하지만 저 하늘 해파리 떼가 몰려드는 건 똑같더구나. 게다가 버섯 균사체 탓에 벽 전체가 쉽게 허물어져서 도중에 몇 번이나 떨어질 뻔했다.”

“그럼…….”

“그래. 당장은 어찌 나갈 방법이 없구나. 마법으로 산을 날려버리는 것도 고려해 봤다만, 마경처럼 마나가 불안정한 곳에서 그렇게 많은 마나를 끌어모으는 건 썩 내키지 않아서 말이다.”

확실히 마나가 이상하게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보기 좋게 혀를 쳤다.

비인간적인 외모의 황제가 창백한 빛 아래서 백금발과 노란 눈을 빛내며 무릎을 껴안고 앉아 있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도대체 그대는 왜 짐을 따라왔는가?”

나는 신중하게 말을 골라 답했다.

“폐하 곁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차마 본인도 부정할 수는 없었는지, 그녀가 으음,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 나는 재빠르게 간언했다.

“폐하. 바람을 느껴 보니 아래쪽으로 통로가 있는 거 같사옵니다. 날아서 빠져나가기는 힘들 거 같으니, 내려가 보시는 게 어떻사옵니까?”

제이릴리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육두문자를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반역자 시그마인.”

제이릴리스가 피식 웃었다.

“아, 송구합…….”

“듣기 좋구나. 더 해 보아라.”

“한여름에 온몸에 꿀을 발라 놓고 벌집과 개미집 앞에 던져 줄 놈. 납덩이를 매달고 운하에 던져 버려야 할 놈. 바위에 묶어 두고 독수리에게 간 쪼이는 형벌을 10년쯤 받아야 할 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