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7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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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 원목과 하늘색 깃발로 장식된 시그하임 후작의 집무실은 단정하고도 위엄 있었다.
집무실 안에는 기사와 마법사가 각각 한 명씩 들어와 있었는데, 기사는 프로이하이트 가문의 기사단장 로베로스였고, 마법사는 프로이하이트 궁정의 수석 마법사 헤레인이었다.
시그하임은 잘린 왼팔의 단면을 헤레인에게 맡겼다.
헤레인은 잘린 팔을 붙이는 정도는 가볍게 할 수 있는 강력한 혈마법사였지만, 팔을 자라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신경을 최대한 회복시키고 의수에 잇는 것에 집중했다.
단면에서 하얀 실 같은 게 자라나 금속 팔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너무나도 기이하고 신비로웠다.
찰칵, 마지막 신경이 이어지는 소리와 함께 회색 강철로 만들어진 왼팔이 움직였다.
꼭 손과 비슷한 크기의 건틀릿을 낀 거 같았다.
“다 되었습니다. 각하. 한동안 음주는 자제하셔야 합니다. 조금씩 회복하다 보면 5년 안에 팔이 완전히 자라날 테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마법사에게는 받기 힘든 부드러운 배려의 말이었지만, 밝은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후작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심려고 뭐고 없네. 꼭 필요한 선택이었어. 제이릴리스를 마경에 떨어트릴 방법은 그뿐이었으니.”
화제가 다시 마경으로 돌아오자 기사단장 로베로스는 두 눈에 불을 켜고 애써 억눌렀던 호기심을 토해냈다.
후작이 치료를 받기 직전 폭발 마법 같은 발언을 던져 놓고 그가 궁금해서 미치려 하는 모습을 즐겼기 때문이다.
“각하. 용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용들은 모두 오래전에 다른 세상으로 떠나지 않았습니까?”
용들은 옛것들이 본격적으로 넘어오기 시작하자 모두 다른 세상으로 떠났고, 인간을 사랑한 마지막 용은 제 혈통을 한 인간에게 나누어주었다.
용의 피를 받은 인간은 모든 혈통의 정점에 서서 대륙의 절반을 정벌했다.
그게 솔레타라온 제국의 건국기였으니, 용이 이 세상을 떠났음은 대륙의 모든 인간이 다 아는 상식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나도 그런 줄 알았네. 하지만 잠에 취한 용 한 마리가 더 남아있던 모양이더군.”
후작이 어울리지 않는 농담을 던졌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십니까? ……대체 각하께서는 어떻게 용이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 겁니까?”
시그하임은 회상하는 듯한 표정을 답했다.
“직접 보았네. 조부께서 발견하셨고, 아버지께서 그 비밀을 이어받으셨지. 나는 아버지에게 이어받았고.”
“서쪽 산을 개발하지 않으신 이유도 그것이십니까?”
“그렇네. 혹여 용이 나왔다가는 영지가 죄다 불살라질 테니.”
“각하께서 와이번이나 드레이크 따위를 잘못 보셨을 리도 없지요.”
로베로스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말했다.
이야기 속의 존재들은 산전수전 다 겪고 마흔이 넘은 사람도 설레게 하는 힘이 있었다.
“확실히 용이었네. 내 남은 팔까지 걸어도 좋아.”
“그러시지는 마십시오.”
“그래. 하여간 아무리 황제라도 살아나올 수 없다는 건 확실하네.”
로베로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괜스레 용의 존재를 확인해보고 싶어 싱숭생숭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말했다.
“세레라지에 대공은 명백히 시간을 끌고 있다고 합니다. 이쪽이 마경 범람 일시에 무척이나 신경 쓸 수밖에 없다는 걸 이용하고 있습니다.”
시그하임은 가볍게 혀를 찼다.
그는 타고난 지략가는 아니었지만, 살벌한 세상에서 수십 년간 대귀족으로 살아오며 쌓은 연륜이 있는 사내였다.
“마냥 기다려줄 수는 없지. 헤레인. 버섯 채취를 시작하게. 언제 터질지 모른다고 보물창고를 가만히 놔두고 있을 수는 없으니.”
헤레인은 희비가 교차하는 표정으로 간언했다.
“마법사인 제게 있어서는 너무나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응?”
“마경이 열릴 날짜는 확실히 알아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늘에서 벼락이 비처럼 떨어지면 영지에 피해가 클 겁니다.”
후작은 짜증스럽게 답했다.
“내가 방금 말하지 않았나? 용이 있다고. 왜 마경이 여태껏 범람하지 않았겠는가? 집 근처로 이물들이 들어찰 때마다 용이 이물들을 다 죽여 버린 거네. 핵이 왜 안 생기는지는 모르겠지만, 용이 있으니 핵이 생기는 날이 마경이 닫히는 날이야.”
“그럼 세레라지에 대공에게 부탁한 건.”
“푸른 버섯을 언제까지 캘 수 있을지 정도만 알아내면 그만이네. 그쪽도 곧 정리해야지. 물론 대공은 죽이면 안 돼. 내 아내나 며느리가 되어 줘야 하니까.”
로베로스와 헤레인이 감명받은 표정으로 깊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후작은 그가 황제의 남편이나 시아버지가 될 날을 떠올리며 그 완고한 얼굴을 누그러트렸다.
‘시그마린.’
잃은 것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손에 넣어야 했다.
* * *
제이릴리스는 맹공을 퍼부어 일시적으로 그 하늘 해파리들을 몰아냈고, 우리는 계속 아래쪽으로 이동했다.
30분 정도 더 걷다 보니 점점 푸른색 버섯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천장도 조금씩 낮아져 이제 높이가 50m도 안 될 거 같았다.
마나의 흐름도 정상화되어가는지 피부로 느껴지는 결이 달라졌다.
곧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마경은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되는 공간이었다.
“폐하. 이상합니다.”
“무엇이 말인가?”
“마경이 생각보다 너무 작습니다. 아까 그 정도 이물들이 있던 마경이 이렇게 작을 리는 없습니다.”
제이릴리스가 금색 눈을 서늘하게 빛냈다.
“그대는 마경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모양이로군. 내가 알기로 그대는 마경에 들어가 보기는커녕, 수도 밖도 벗어난 적이 없을 텐데.”
“!”
내가 이렇게 사소한 걸 놓치다니.
나는 일순 당황하여 오른발과 오른손을 같이 내뻗으며 걷다가, 간신히 설득력 있는 대답을 골랐다.
“교회 쪽과 만나던 중에 성기사들에게 들었사옵니다. 그들은 마경을 닫고 돌아다니는 게 일이잖습니까.”
“흐음.”
그녀가 육식동물 같이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되었다. 그대가 의외로 잡학 다식하다는 건 알고 있었느니라. 어쨌든 곧 짐의 마법이 제대로 통하는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 아니냐? 그럼 이제 무엇이 걱정이겠느냐?”
“맞사옵니다.”
“일단 그대가 뭐라고 하던 후작 성에 ‘진노의 창’을 서른 발쯤 떨궈야겠노라. 그다음 일은 그다음에 생각하겠다.”
나간 다음에.
바싹 긴장하고 있던 몸이 일순 휘청이고, 불현듯 그동안 생각하지 않고 있던 주제가 떠올랐다.
“폐하. 만약 후작이 세레라지에 대공을 인질로 잡는다면 어찌하실 생각이시옵니까?”
제이릴리스가 아, 하며 혀를 찼다.
“짐이 그 정도 조준도 못 할 거 같은가?”
나는 피를 볼 각오를 하고 물었다.
“무례를 무릅쓰고 한 번 더 여쭙겠사옵니다. 폐하의 복수와 일행의 안전 중 어느 쪽을 우선하시겠사옵니까?”
제이릴리스가 이례적으로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그대가 이렇게까지 안달복달하는 건 처음이로구나. 그래. 그 셋을 짐이 살려 주겠노라. 복수를 포기하더라도.”
“!”
이렇게 쉽게 답을 얻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왜 그리 놀란 표정이냐? 짐도 알고 있다. 텐티아 경과 세레라지에 대공은 거목으로 자라날 인재고, 그 시녀는 그대의 목줄이 아니더냐? 짐은 인재를 아끼는 황제가 될 것이니라.”
“감사하옵니다.”
“……그대 말을 들어 보니 그대가 짐을 따라온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드는구나. 그들은 후작이 짐과 그대를 죽이려 한 줄 모를 거 아니냐.”
“짐작은 하고 있겠습니다만, 섣불리 복수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만약 그대가 짐을 따라오지 않았으면 그대도 죽고, 후작은 그 셋도 죽이려 했겠지. 최소한 텐티아 경과 그 시녀는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언제 그 셋이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빨라졌다.
“망나니라 불리는 거치고는 정을 깊이 준 모양이구나?”
제이릴리스가 가학적으로 웃었다.
나는 그 공격을 능숙하게 흘려넘겼다.
“망나니의 첫째 조건은 편애와 차별이라고 생각하옵니다.”
“맞는 말이다. 사실 폭군의 조건도 다르지 않도다.”
“폐하께서는 성군이십니다!”
두 번째 공격은 받아넘기지 못했다.
걸으면 걸을수록 파란 버섯들이 확연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마나가 약간씩 정상화되는 동시에 시야는 어두워져 갔다.
슬슬 불이라도 피워 올려야 하나 생각했다.
“응? 멈춰라.”
그때 제이릴리스가 어둠 속을 향해 미간을 찌푸렸다.
“예?”
“누군가 오고 있구나.”
누군가?
“알아보시겠사옵니까?”
“아니. 하지만 확실히 인간은 아니다.”
“예?!”
* * *
인간은 아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 말을 들었음에도 생각보다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회귀 전에는 드워프, 엘프, 리자드맨, 뱀파이어, 오거, 인어, 각종 수인종까지 다 만나 보았다.
따지고 보면 그와 귀족들 모두 순혈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인간 아닌 지성체와의 조우는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사내는 회귀 전 만나보았던 어떠한 이종족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약간 곱슬곱슬한 암적색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가지고 있었고, 얼굴은 화강암 조각상을 떠올리게 하는 단단하고 차가운 인상의 미남이었다.
발렌시아누스 그 자신처럼 뺨이 약간 핼쑥하게 들어가 있었고, 제이릴리스처럼 눈매가 위로 휘어 오만해 보였다.
아주아주 오래전에 유행했던 무늬가 들어간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아랫단은 아직 변환이 끝나지 않아 누더기인 채였다.
“이곳에 인간이 들어오는 건 수십 년만이군. 프로이하이트는 아닌 것 같은데. 훨씬 많이 섞였군.”
발렌시아누스는 그의 중저음 목소리가 제이릴리스와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톤은 전혀 달랐지만, 압도적인 강자로서의 자신감이 전해져 왔다.
자연스럽게 최악을 먼저 생각하는 버릇이 나왔다.
발렌시아누스는 은근슬쩍 제이릴리스의 옆에서 거리를 벌렸다.
싸우게 되었을 때 둘이 동시에 노려지는 상황이 생기면 안 되었다.
그걸 알아차린 듯 피식 웃은 제이릴리스가 암적색 머리의 사내를 향해 말했다.
“상황이 급하니 짐의 혈통을 논한 죄는 묻지 않겠다. 이대로 내려가면 이곳을 나갈 수 있나?”
“없다. 이 동굴의 끝은 더 깊은 지하로 통한다.”
“!”
발렌시아누스가 이를 악물고, 제이릴리스는 혀를 찼다.
“그럼 날려버려야겠군.”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권하지 않는다. 이곳은 네 생각보다 깊은 지하고, 암반층과 암반층 사이에 토사층이 있다. 어떤 마법을 쓰든지 천장이 뚫리고 밖으로 나가기 전에 토사가 먼저 쏟아질 거다.”
발렌시아누스는 상대가 대화의 주도권을 잡으려 한다는 걸 알아챘다.
“그럼 그대는 어떻게 나갈 생각이지?”
그는 적당한 타이밍에 질문을 던져 암적색 머리의 사내를 붙들었다.
그가 혀를 차고 답했다.
“나 역시 몇 달 동안이나 나가지 못하고 있다. 마경의 핵을 부수고 너희들이 내려온 위쪽으로 나가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핵이 생기지 않는군.”
발렌시아누스는 내심 육두문자를 퍼부었다.
그는 회귀 전 세상에서 교회의 지식과 자신의 경험을 이용해 마경에 관한 정보를 총망라한 자였다.
‘몇 달? 몇 달이나 이곳에 있었다고? 빌어먹을. 왜 마경이 범람하지도, 핵이 생기지도 않았는지 알겠군.’
마경은 옛것이 넘어오기 위해 주변 환경을 옛것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범람 한 번 정도는 일어날 만큼 이물들로 그 마경이 가득 차고 기운이 충만해져야, 핵을 통해 옛것이 넘어올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내가 몇 달 동안이나 이 마경의 이물들을 죽여온 탓에, 핵이 만들어지고 옛것이 넘어올 만큼의 기운이 모이지 않던 것이다.
참담하게도, 그건 지금 말할 수도 따질 수도 없었다.
제이릴리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공동 높은 곳에 바위틈이 있다. 짐이 틈을 벌릴 테니, 그대가 그동안 하늘 해파리들을 견제하도록.”
“내가 할 수 있다는 걸 어찌 믿지?”
“그것도 못 하면서 마경 아래서 몇 달을 살아남았다는 건가?”
사내가 가볍게 이죽거렸다.
“무섭군. 백금발, 금색 눈. 너희는 솔레타라토인가?”
제이릴리스가 눈을 가늘게 떴고, 발렌시아누스는 머릿속으로 상대의 정체에 대해 복잡한 계산을 하며 물었다.
“우리 가문에 대해 아나?”
“알다마다. 여전히 강력하군. 좋은 건 다 끌어모아다가 탐욕스럽게 합쳐 놓고, 부작용으로 부작용을 억누르며 군림하는 자들. 아직도 안 무너졌나?”
제이릴리스가 서늘하게 쏘아붙였다.
“더 지껄이면 황실 모독의 죄를 묻겠다.”
“너희의 법으로는 나를 얽맬 수 없다.”
“짐이 곧 법인데,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만들어진 괴물 주제에 오만하군.”
일순 제이릴리스의 하얀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노란 눈동자가 풀리고, 입술에 핏기가 사라졌다.
그토록 오만하고 자신감 넘치던 황제는 그 순간 다시 열네 살 이전 황립 마도 공방 최하층 비밀 실험실로 돌아갔다.
“오래도 살아서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구나. 짐이 괴물이라는 걸 알고도 지껄이다니.”
그러나 그녀는 충격을 받았을 때 무너지는 대신 더더욱 날카로워지고 단단해지는 자였다.
베일 거 같은 살기가 흘러넘쳤다.
어지간히 담이 큰 자도 백 걸음 안에 들어왔다가는 심장 마비로 즉사할 수준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다급하게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폐하. 고정하십시오. 일단 나가는 게 우선이옵니다. 함께 나간 뒤에 무례를 따져도 늦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대도 더 이상 폐하를 도발하지 마시오! 같이 토사에 깔려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리고 제이릴리스를 돌아보며 오른쪽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제이릴리스는 혀를 차며 살기를 가라앉혔다.
“그래. 짐의 영토 안에 있으면 짐의 신민이지. 뭐라 지껄이든 화낼 것 없었도다.”
그녀가 관절 반지를 손가락마다 낀 하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우선 밖으로 나가는 게 어떠한가?”
암적색 머리의 사내가 발렌시아누스를 쏘아보았다.
“뱀 같은 혀를 가졌구나.”
듣기만 해도 섬뜩해지는 목소리였다.
척, 그가 제이릴리스의 손을 마주 잡았다.
와드득!
그리고 제이릴리스가 그의 손을 쥐어짜듯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수십 개의 주술 회로가 새겨진 강철 건틀릿도 으스러트렸던 악력이다.
사내의 큰 손이 망치로 내리친 듯 짓이겨졌다.
사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뒤져라, 이 가짜 용 새끼야!”
발렌시아누스는 그 틈을 타 제국 검술 3단계 자리이타를 펼쳤다.
후발선점의 묘리가 그 손에서 펼쳐지고 금색 마나 블레이드 두른 검이 초승달 같은 궤적을 그리며 사내의 목을 쳤다.
“해치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