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72화
(72)
내 검이 사내의 목을 반 뼘 가까이 파고들었다.
금색 마나 블레이드가 타오르며 그 목을 완전히 잘라 내려 했다.
하지만 사내는 목에서 암적색 비늘을 일으키며 내 검을 단단히 붙들었다.
나는 온몸의 마나를 다 끌어올려 검을 내리눌렀지만, 쇠집게에 단단히 물린 듯 검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글렀네.
“감, 히.”
사내가 쉭, 쉭,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이를 악물었다.
부우우욱-
다음 순간 짓이겨진 사내의 손이 제이릴리스의 손아귀 안에서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제이릴리스가 힘으로 찍어 누르고 있음에도 반대쪽으로 꾸역꾸역 자라났다.
잔잔한 어둠 내린 동굴 안에서 그 손의 핏줄이 붉게 빛났다.
“발렌, 피하라!”
제이릴리스가 혀를 차고, 다음 순간 부푼 손이 폭발했다.
퍼버벅!
피와 살점, 뼛조각이 날카로운 붉은 가시와 하얀 가시로 변해 주변을 휩쓸었다.
황제의 관절 반지와 검은 드레스를 찢고 그녀의 몸을 거세게 두드렸다.
혈마법의 주문 중 하나인, ‘핏빛 확산’이었다.
나는 침음성을 흘리며 물러섰고, 제이릴리스 역시 사내의 손을 놔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왔던 길로, 사내는 아래쪽으로 물러서 거리를 벌렸다.
“이 몸의 피를 흘리게 하다니.”
목을 부여잡은 사내가 마나를 끌어모으며 땅을 강하게 밟았다.
파파파파파파파팟!
바닥에서 돌로 된 가시 수백 개가 2m 높이로 치솟아 올랐다.
본래 기습적으로 발등이나 척추를 공격하는 기술이 동굴 바닥 전체를 잠식할 기세로 펼쳐졌다.
하지만 제이릴리스는 가볍게 날아오르는 것으로, 나는 벽을 밟고 뛰어오르는 것으로 피해냈다.
“쥐새끼 같은 것들이!”
사내가 조급한 목소리로 혀를 찼다.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하며 사내를 향해 중지를 올려 보였다.
제이릴리스조차 일순 그 파격적인 제스처에 당황한 듯 입을 벌렸다.
“용찬의 말로 주제에 진짜 고룡이라도 된 거처럼 오만하게 굴지 마라. 추한 것 같으니라고.”
용의 피를 마시면 열기와 냉기와 독에 다치지 않는 몸을 가지게 되고.
용의 피를 바르면 검과 창에 다치지 않는 몸을 가지게 되며.
용의 심장을 먹으면 용의 힘을 다룰 수 있지만, 그 힘을 남용하면 침식당해 용이 되어버린다.
그것이 용찬의 말로.
분명 저 사내 역시 그렇게 용이 되었으리라.
“마지막 고룡 솔레타라스는 천 년에 이 세상을 떠나갔다. 우리 가문의 시조에게 권능과 혈통을 남겨주고 말이야. 그 뒤로 이 세상에 남은 비룡들은 그저 강한 마수일 뿐이지. 너 역시 인간일 때는 이름 있는 용사였겠지만, 지금은 한낱 마수에 불과하다.”
나는 그리고, 하고 운을 떼며 말을 이었다.
“마수를 죽이는 건 언제나 왕과 영웅들의 일이었지.”
제이릴리스가 백금발을 고쳐 묶고 날이 반투명한 보검 ‘유리거울’을 뽑아 들었다.
금실로 장식된 치렁치렁한 검은 드레스가 멋들어지게 휘날렸다.
나는 검에 노란 마나 블레이드를, 손에 불꽃을 끌어모았다.
액체 금속 갑옷을 먹인 하얀 제복이 든든하게 내 몸을 감쌌다.
사내가 핏빛 눈동자로 우리를 바라보며 조소했다.
“그럼 너희는 나를 못 죽이겠구나. 너희는 왕도 영웅도 아니니.”
나는 그런 말을 가만히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낮은 것아. 말을 높이거라. 우리는 네 주인의 후예들이니라.”
제이릴리스가 다시 한번 쓰게 웃으며 ‘유리거울’에 금색 오러 블레이드를 둘렀다.
사내가 이를 악물고, 다음 순간 그의 몸이 붉은 역장에 뒤덮였다.
역장은 우웅, 하는 소리를 내며 거센 바람과 함께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동굴 벽이 갈라지고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질 정도의 위력이었다.
허공으로 붕 떠오른 나와 제이릴리스는 중심을 잃지 않고 무사히 착지했다.
크르르르-
어둠 속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네 말대로 나는 권능 잃은 비룡이지. 그런데 너희를 보니 그런 의문이 들더군.”
정신 파동이 실린 목소리가 동굴 안에 섬뜩하게 울렸다.
“솔레타라스의 후예를 먹으면, 솔레타라스의 권능을 얻을 수 있을까? 궁금해.”
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사람 먹는 악룡이었군. 내 그럴 줄 알았다.”
쿵, 쿵, 쿵.
용이 굉음을 내며 달려 나왔다.
나는 살면서 어지간한 괴물을 다 봤지만, 회귀 전 삶을 포함해도 살아있는 용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와이번의 세 배는 될 거 같은 몸길이에 뿔과 가시로 뒤덮인 머리와 긴 목, 거대한 방패를 겹겹이 둘러놓은 거 같은 암적색 몸.
피막을 접은 한 쌍의 날개는 강인한 팔과 같고, 두 개의 꼬리는 천 개의 채찍 같은 소리를 내며 휘둘러졌다.
압도될 거 같은 그 생명체에 대항하듯, 황금빛 황제가 혜성 같은 빛무리를 남기며 달려들었다.
타앗, 나는 측면을 노리며 검을 찔러넣었다.
* * *
제이릴리스가 용과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히는 동시에 왼손으로 허공에 수인을 그렸다.
극지의 오로라 같은 빛이 거대한 창의 형태를 이루며 허공에 떠올렸다.
투캉! 투캉! 투캉!
방어 마법진을 수 겹으로 발라놓은 성벽도 뚫어버리는 ‘진노의 창’ 여덟 발이 쏘아져 나갔다.
한 발을 발동시키는 데에 강력한 전투마법사 여럿이 모여 30분 이상 캐스팅해야 하는 마법이었다.
놈은 피막을 접고 날개를 팔처럼 써서 달려오고 있었는데, 제이릴리스는 정확하게 오른쪽 어깨에 공격을 집중했다.
퍼억! 퍼억! 퍼억!
천 겹 방패 같은 용의 비늘도 제이릴리스의 마법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마나 블레이드도 통하지 않는 단단한 비늘이 깨져 나가고 허공에 피가 물보라처럼 튀었다.
그녀가 서늘하게 웃으며 시동어를 외쳐 다른 마법을 사용했다.
“터, 져라!”
파바바박!
용의 상처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아오르고 그 피가 붉은 가시로 변해 용의 상처를 다시 헤집었다.
조금 전 용이 사용했던 혈마법, 피의 확산이었다.
크아아-
빠르게 달려들던 용의 몸이 일순 왼쪽으로 휘청였다.
제이릴리스가 노란 눈을 반짝이며 노출된 목의 측면을 향해 땅을 박찼다.
타악!
그녀의 재능은 단순한 마나의 양뿐 아니라, 매우 전술적이고 치명적인 전투 감각도 포함되어 있었다.
약점을 찾는다.
없다면 맹공으로 약점을 만든다.
그 약점을 공략해 적을 방어에 치중시키고, 조금씩 깎아내 버린다.
우우우웅-.
금색 마나를 한껏 머금고 달아오른 유리거울검이 용의 피를 갈망했다.
제이릴리스가 초승달 같은 궤적으로 검을 베어 내렸다.
서, 걱!
“아.”
나는 측면으로 파고들다 말고 침음성을 흘렸다.
용이 암적색 기운을 두른 왼쪽 날개를 휘둘러 제이릴리스를 쳐낸 것이다.
그 대가로 피막이 길게 베였지만, 용의 체급에 비례해 생각하면 그 정도는 새 발바닥을 바늘로 한번 찌른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놈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고, 내가 원한 건 그 잠시였다.
오른쪽 측면으로 파고들어 용의 뒷다리 발목 관절 쪽으로 달려갔다.
몸길이 약 45m인 용의 발가락뼈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키보다도 컸다.
하지만 언제는 나보다 작은 괴물과 싸운 적이 있었던가?
어디를 다친 와이번이 제대로 뛰지 못해 비행도 힘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굵은 힘줄 아래쪽을 노리고 검을 찔러 넣었다.
그곳은 계속 움직여야만 하는 곳이라 단단한 비늘이 붙어있지 않았다.
물론 그 가죽만 해도 마나 블레이드 없이는 흠집도 내지 못하는 강도였다.
온 체중을 실고, 온 마나를 검 끝에 모았는데도 검과 손목이 부러질 듯 떨렸을 정도였다.
푸욱!
그러나 내 검은 끝끝내 용의 힘줄과 뼈 사이로 박혀 들었다.
막 제이릴리스를 쫓아 왼쪽 날개를 칼처럼 휘두르려던 용이 움찔하며 크게 절뚝였다.
크아아-!
작은 가시 하나만 제대로 박혀도 손 전체를 못 쓰게 되는 법이었다.
놈이 분노에 차 두 개의 꼬리로 바닥을 쓸었고, 나는 놈의 발목에 되려 바싹 붙으며 피했다.
체공하던 제이릴리스가 그 순간적인 경직을 틈타 비행 마법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바람으로 몸을 감싸고 동굴 하늘에 붙을 듯 떠서 용을 내려다보는 황제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녀가 금실로 수놓은 검은 제복 자락을 펄럭이며 무영창으로 두 번째 마법을 펼쳤다.
“발렌! 피해라!”
쿠구구구구구-!
동굴 천장이 무너질 듯 흔들리는가 싶더니 먼지와 함께 집채만 한 바윗덩이가 쏟아져 내렸다.
나는 기겁하며 검을 뽑고 몸을 날렸다.
용의 몸통보다도 훨씬 거대한 바윗덩이였다.
용이 천장을 보며 포효했다.
아아아아아아아……!
천둥 같은 포효가 아니라, 기원하는 듯한 포효였다.
암적색 기운이 피어오르고, 용을 짓이길 기세로 떨어지던 바위가 그대로 모래로 변해 사르르륵 흩어졌다.
나는 침음성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용언…….”
용이 날개를 휘저어 바람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제법이로구나. 계속 마법을 쓰게 놔두어서는 안 되었어.”
이번에도 정신 파동이 실린 목소리였다.
40년 차 전사인 나조차도 머리가 지끈거렸고, 제이릴리스도 쩍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용맥의 주인이 말하니, 이 계곡에서 모든 마법이 멈출지어다.”
그 순간 나는 땅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톱니바퀴가 움직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덜컹, 하고 무언가 맞춰지는 소리와 함께 언제든 주문을 쓰려 끌어모았던 마나가 파스스슷 흩어졌다.
동굴 천장에 떠 있던 제이릴리스도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소드마스터인 그녀는 50m 높이에서 추락했음에도 가뿐히 착지했지만,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래도 용맥의 주인은 주인이로구나.”
별이 그 중력으로 행성들을 끌어들이고, 거대한 바윗덩이가 지면을 짓눌러 호수를 만들 듯, 거대하게 모인 마나는 주변 마나를 끌어들인다.
마치 별이 혜성들을 먹어 치우고, 거대한 바위에 짓눌려 낮아진 땅으로 물이 흘러들어오듯.
이게 일정 이상 진행되면 그때부터는 계속 그 지역에 마나가 ‘고인다.’
그렇게 모인 마나는 그 용맥 주인의 색으로 물들어, 철저하게 주인의 뜻을 따르게 된다.
나는 손이 떨리는 걸 감추려 검을 더더욱 단단히 쥐었다.
역사적으로 드래곤 사냥은 우선 레어 밖으로 멀리 끌어내는 게 최우선이었고, 어떤 미친 자도 레어에 들어가서 용을 잡는다는 계획을 실천하지는 않았다는 걸 떠올리면서.
지금 나와 제이릴리스는 완전히 적의 공간에 떨어진 셈이었다.
치지지지지지짓!
저 뒤쪽에서 전격 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거리에서도 하늘 해파리들의 푸른 빛이 잘 보였다.
나와 제이릴리스는 동시에 육두문자를 퍼부었다.
“이런 젠장!”
정말 옛것들이란 하나같이 죽어가는 자의 냄새는 잘 맡는다.
용과 우리가 싸우면 둘 중 하나는 크게 죽고 하나는 크게 다치리라고 생각한 것이리라.
“발렌시아누스 대공. 명령이다. 가서 저 빌어먹을 옛것의 파편들을 죽여라.”
지면에 발을 딛은 제이릴리스가 황금빛 기운을 우우 일으키며 말했다.
오는 길에 몇 번 보았던 그 용언의 힘이었다.
비룡이 눈을 크게 뜬 거 같았다.
그러나 나는 쉽게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폐하를 두고 갈 수는…….”
“지금 네놈 따위가 짐을 걱정하는 것인가?”
나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그렇사옵니다!”
“하?”
제이릴리스가 허탈하다는 듯 웃었다.
“정말 못 하는 말이 없구나. 그럼 명령을 바꾸겠다. 저 이물들이 짐의 등에 벼락을 떨구지 못하게 막아다오. 할 수 있겠느냐?”
여기서 더 망설일 수는 없었다.
비룡 역시 암적색 기운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나는 육두문자를 퍼부으며 뒤돌아 달렸다.
“추한 것아! 네놈은 오늘 갈기갈기 찢겨 사방팔방에 흩뿌려지고, 황제 폐하의 업적에 한 줄을 더하게 될 것이니라!”
* * *
먼동도 트지 않은 이른 새벽, 후작가 외성의 정갈한 손님용 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벽난로에서는 활활 타는 장작이 열을 내뿜고, 창가에서는 두툼한 커튼이 새벽의 한기를 막아냈다.
스르륵, 아무런 전조도 없이 창문이 열렸다.
한기를 느낀 탓인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시녀 루디는 몸을 뒤척였다.
얼굴을 종이 가면으로 가리고 착 붙는 가죽 갑옷으로 무장한 사내가 뱀처럼 방 안으로 기어들어 왔다.
‘경고를 주라 하시는구나. 마법사란 족속들은 하늘을 찌르듯 오만하니, 약간의 독촉을 해야 일이 제때 진행되기 마련이지.’
사내는 단검을 역수로 쥐고 침대로 다가갔다.
첫날은 대공의 시녀, 둘째 날은 황제의 시녀, 가능하다면 셋째 날에는 붉은 머리의 기사.
그가 받은 임무였다.
사사로운 감정은 없다, 하고 입 안에서 중얼거린 사내는 그대로 단검을 내리찍었다.
캉!
그리고 나서는 안 될 소리가 났다.
“쥐새끼가.”
갈색 머리에 안광 없는 녹색 눈을 가진 시녀가 싸늘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잠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음성에, 사내는 본능적으로 실패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퍼억, 루디는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서는 동시에 배게 밑에서 단검을 집어 들었다.
“저는, 반드시 살아서 발렌 님을 기다려야 하거든요. 너는 그러니까, 죽어주세요!”
사아악! 사악!
이른 새벽에 두 칼잡이가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