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74화
(74)
파란 버섯이 주변에 몇 개 없어서, 동굴 안은 어두침침했다.
발렌시아누스는 다리를 질질 끌고 바닥을 기어가며 제이릴리스에게 다가갔다.
손톱이 죄다 뒤집힌 거 같았지만,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안 돼.”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 용의 가슴 아래에 그녀가 쓰러져 있었다.
몸 절반 이상이 돌바닥 아래에 파묻혀 있는 거 같았다.
백금발은 헝클어졌고, 하얀 얼굴과 팔다리에는 금속 향 나는 액체가 진득했다.
검은 드레스는 거의 재나 다름없이 몸에 들러붙어 있었고, 반신에 가까운 면적에 수포가 가득했다.
그녀의 옷을 장식했던 금실이 다 녹아 살을 지글지글 태우고 있었다.
발렌시아누스는 미친 듯 떨리는 손으로 그녀 위로 덮인 돌덩이들을 치웠다.
엉망진창이 된 손을 움직일 때마다 하얀 무언가가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하, 하하.”
그는 돌무더기 아래에서 제이릴리스를 꺼냈다.
쇠기둥도 걷어차 부러트리던 다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본능적으로 맥을 짚었다.
“광명신이시여!”
아직 살아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황제를 안아 들고 용의 갈라진 가슴 아래에 바싹 붙었다.
등과 목을 바로 세워 기도를 확보하고, 손가락을 넣어 목 안에 이물질이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대로 손에 용의 피를 받아 그녀에게 먹였다.
그의 손이 화상을 입을 듯 달궈졌다.
“제발.”
불처럼 뜨거운 용의 피는 많은 마나와 생명력을 머금고 있는 영약 중의 영약이었다.
손이 자꾸 떨려서, 몇 방울을 흘리고 말았다.
“광명신이시여. 제발. 아직은 안 됩니다.”
세 번 더 흘려 넣었을 때쯤, 제이릴리스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가 다시 감았다.
그녀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이며 입안에 고인 용의 피를 마셨다.
“대공?”
아기 새 같이 힘없는 목소리였다.
발렌시아누스는 다급하게 답했다.
“예. 폐하. 제가 여기 있사옵니다.”
“그대도 마시거라. 어서. 짐은 괜찮으니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그는 다시 피를 받아 제이릴리스의 입가로 가져갔다.
황제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확실히 차도가 있어 보였다.
“그대에게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구나.”
아직 의식이 제대로 돌아오지는 않았는지, 꿈꾸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닙니다. 폐하.”
‘저는 언제나 당신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만 보였습니다.’
발렌시아누스는 이 상황에 도움이 되지 않는 마지막 말을 삼키고, 제이릴리스를 용의 피가 많이 흘러나오는 곳 아래에 기대 머리와 등 전체에 용혈이 타고 흘러내리도록 했다.
“제가 뼈를 맞춰 드릴 테니, 조금 이지가 돌아오시면 혈마법으로 몸을 회복시키십시오.”
“……그래.”
발렌시아누스는 그녀의 다리와 발목, 왼손 손목을 짜 맞췄다.
그래도 호흡이 편해지지 않는 거 같아서 무례를 무릅쓰고 옆구리를 짚었다.
“폐하. 갈비뼈가 부러져 폐를 찌르는 것 같사옵니다. 피가 고이면 점점 더 숨쉬기 어려워지실 것이옵니다. 제가 처치해도 되겠사옵니까?”
눈을 감은 제이릴리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날이 좁은 단검에 마나 블레이드를 두르고, 그녀의 옆구리 아래쪽에 찔러 넣었다.
푸욱.
“으음…….”
발렌시아누스는 제이릴리스가 몸에 힘을 빼려 애쓰는 걸 알아챘다.
소드 마스터의 몸은 용의 가죽 못지않게 단단했다.
단검을 뽑자 구멍 사이로 검은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저게 다 폐에 고여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양이었다.
“살 거 같구나.”
황제가 한결 편안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발렌시아누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에 기대서 용의 피를 받아 마셨다.
짜고 비릿하고 뜨거웠지만, 기이한 단맛이 어려 있었다.
“하하.”
긴장감이 풀리니 고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손과 발이, 몸뚱이 전체가 말 그대로 망가졌다.
거인에게 잡혔다가 바닥에 던져진 거 같았다.
꼬리를 맞은 우반신은 멀쩡한 뼈를 찾는 게 빠를지도 몰랐다.
그래도 죽을 거 같지는 않았다.
발렌시아누스는 흘깃 옆을 바라보았다.
제이릴리스의 안색이 많이 밝아져 있었다.
이깟 골절 따위야 정신 차린 그녀가 혈마법으로 한 번만 쓸어 주면 깨끗하게 나으리라.
용의 피가 사방에 흐르고 있으니 마나도 충분했다.
‘잠깐만 쉬자.’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 그 빌어먹을 웃음소리가 다시 들렸다.
키득키득키득키득.
집채보다 커다란 하늘 해파리들이 푸른 빛으로 발광하며 둥둥 떠내려오고 있었다.
* * *
하늘에 뜬 거대한 몸통이 기이한 빛으로 빛났다.
치지지직-
수십m 길이로 늘어진 촉수에 전격이 튀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등에 버섯이 잔뜩 솟은 그 침식자들도 함께였다.
죄다 끌고 왔는지 100기는 넘는 거 같았다.
“이런 빌어 처먹을!”
발렌시아누스는 육두문자를 퍼붓고 제이릴리스를 부축해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다리에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때 제이릴리스는 눈을 떴다.
숨이 막힐 정도로 찬란한 금안이 발렌시아누스를 꿰뚫듯 응시했다.
“대공. 짐에게 용심을 가져오라.”
그녀는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발렌시아누스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갈라진 용의 가슴팍 속에 상반신을 집어넣고 심장을 찾았다.
“어?”
그건 가져갈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몸길이 45m 생명체의 심장은 마차만큼 거대했다.
이걸 사람이 다 먹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다시 찬찬히 살펴보니 심장 위쪽에 심장을 꼭 닮은 기관 하나가 더 붙어 있었다.
크기는 주먹 두 개를 합친 정도였고, 용의 뿔과 비늘을 닮은 가시가 잔뜩 나 있었다.
야만적이고도 아름다운 붉은 살덩이는 양손으로 쥐고 잡아당기자 허탈하리만큼 쉽게 떨어졌다.
발렌시아누스는 그걸 들고 제이릴리스에게 돌아갔다.
키득키득키득키득.
하늘 해파리들이 어느새 거의 다 내려오고 있었다.
눈을 감은 제이릴리스가 다시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공. 짐에게 용심을 먹이거라.”
“……!”
용의 심장을 먹으면 용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 힘을 사용하면 결국 저주에 걸려 언젠가 용이 되어버리고 만다.
“괜찮다. 대공.”
그는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이미 짊어진 거 많은 그녀에게 더 부담을 지울 수는 없었다.
다친 몸이 용심을 감당하지 못하고 붕괴될 수도 있었다.
그때 제이릴리스가 한 번 더 중얼거렸다.
거의 의식을 잃은 듯한 어조였다.
“……괜찮아. 오빠.”
“!”
발렌시아누스는 그 말을 지금으로부터 체감상 48년쯤 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빌어먹을 만큼 화창한 날에, 쌍둥이 중 한 명을 데려가야 했던 궁무부 관료들과 황립 마도 공방 마법사들의 난처한 표정을 기억했다.
그때도 제이릴리스는 똑같이 말했다.
저렇게나 초연한 얼굴을 하고서.
발렌시아누스는 하늘을 우러러 옛것들이 이 세계에 던져 넣은 이물들을 바라보았다.
다리 길이 50m의 하늘 해파리들이, 키가 4m에 육박하는 침식자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푸른 버섯은 발광하며 전류를 뿜고, 해파리들은 키득키득 웃고, 침식자들은 생전의 단말마를 되풀이하며, 한 번 지키지 못했던 그의 황제는 또다시 목숨을 걸고 짐 하나를 더 짊어지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광명신이시여.”
빛은 잔혹하신 분이고 그림자를 드리우는 분이었다.
“이번에는 안 됩니다.”
발렌시아누스는 용의 심장을 움켜쥐며 맹세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다시 맹세했다.
인륜을 저버리고 천륜을 저버리고 시간을 돌이키고 설령 인간이 아니게 된다 해도 지켜야 할 게 있었다.
“제가 지킬 겁니다.”
‘제가 오빠입니다.’
그는 그를 인간 아닌 것으로 만들 심장을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와직!
끔찍하고 야만적이고 가학적인 웃음소리가 그의 머릿속에서 끝없이 울려 퍼졌다.
* * *
새벽, 루디는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단검을 휘둘렀다.
초대받지 않은 종이 가면의 밤손님이 흔들리고 있었다.
‘당황했을 때 끝내야 합니다. 오래 끌면 불리해요.’
그녀는 오른손에 쥔 단검을 크게 휘두를 듯 치켜들었다.
가면의 암살자는 큰 기술 후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빈틈을 노릴 생각을 했다.
‘그래 봐야 시녀로군.’
그때 루디는 왼손으로 오른쪽 허리춤에 달아 둔 단검을 발도하듯 쏘아냈다.
사악!
본넬과의 대련으로 익힌 속임수는 멋들어지게 들어갔다.
바람을 가르며 쏘아진 단검이 암살자의 허벅지 굵은 근육 사이에 정확하게 박혔다.
푹!
“!”
종이 가면 너머로도 사내가 당황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조용히 사라져 주세요.’
루디는 땅을 박차며 치켜들었던 단검을 밤손님의 어깨에 꽂아 넣으려 했다.
그때 그는 단검 박힌 다리를 축으로 삼아 옆차기를 날렸다.
퍽, 루디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비틀비틀 물러났다.
발렌시아누스가 사준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면 크게 다쳤을지도 몰랐다.
“쳇!”
그녀는 역수로 쥐었던 단검을 똑바로 고쳐 쥐며 자세를 낮췄다.
가면의 암살자는 그녀가 소리 지르지 않는 걸 보며 단검이 허벅지에 꽂혔을 때보다 몇 배로 당황했다.
무력한 표적이 아니라는 것도 놀랐는데, 살아남으려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암살자가 들어왔으면 당연히 몰아내려 하는 게 상식이었다.
저렇게 조용히 반격한다는 건, 암살자가 왔다는 사실조차 숨기려 한다는 것이었다.
‘제법이군.’
그는 허벅지를 박힌 두 번째 단검을 뽑아 들고 자세를 낮췄다.
그 순간 루디는 서늘하게 웃으며 달려들었다.
가면의 암살자는 다친 오른쪽 다리를 먼저 뻗었다.
공격받는 순간 한 걸음 물러나 거리를 벌리고, 반격으로 해치워버릴 생각이었다.
타앗, 나무 바닥 위로 쏘아져 오는 루디의 왼손이 시녀복 치맛자락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는 단검이 날아올 걸 각오하고 고통에 대비했다.
그러나 시녀가 왼손에 쥔 건 단검이 아니었다.
‘저게 뭐……?’
타아앙!
새벽의 정적이 갈라지고 사내의 머리가 날아갔다.
‘마총에 대해 알지도 몰라서 붙어서 쐈는데, 그럴 필요는 없었던 모양이네요.’
루디는 암살자의 시체를 침대 아래로 밀어 넣으며 생각했다.
‘후작성에 암살자가 들어온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아마도 목적은 경고. 저와 폐하의 시녀를 죽여 세레라지에 전하를 다그칠 생각이겠지요.’
정말로 그게 다일까, 하는 의문이 잠시 머릿속을 스쳤다.
그녀는 겨울 외투를 입고 마탄이 든 가방을 맨 뒤, 왼손에 마총을 쥔 채로 오른손으로 거실로 나가는 문고리를 잡았다.
그녀는 어깨를 문에 딱 붙이고 문을 천천히 당겨 열었다.
퍽!
다음 순간 열린 문틈 사이로 작은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정확히 이마 높이였다.
정면으로 문을 열었으면 열자마자 즉사할 뻔했다.
루디는 화살이 꽂힌 각도를 보고 어느 쪽에서 날아왔는지 계산했다.
그녀의 녹색 눈이 한 차례 서늘하게 빛나고, 그녀는 문에 대고 각도를 조절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타아앙!
“아악!”
“뭐야?”
심장을 맞추지 못했는지 비명이 들려왔다.
그러나 발소리와 비명 등으로 놈들이 몇이나 들어왔는지는 알 수 있었다.
루디는 한 번 더 방아쇠를 당겼다.
타아앙!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았다.
한 차레 더 총성이 울리고, 세 명의 암살자가 서늘하게 식어갔다.
루디는 제이릴리스의 시녀에게 배정된 방 안을 확인했다.
“늦었네요…….”
시트 위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표정이 자던 그대로인 걸 보니 죽는 줄도 모르고 간 거 같았다.
루디는 잠시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이며 흐르려 하는 눈물을 다시 집어넣었다.
“하아…….”
그녀 역시 황궁 시녀들의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귀족이었다.
권력을 위해 서로를 죽인다는 건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해와 공감과 설득 사이에는 넘을 수 없고, 넘고 싶지도 않은 벽이 있었다.
발렌 님이 부디 그렇지 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잠시, 그녀는 텐티아의 방을 확인했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루디는 당황하지 않고 낮에 머물던 관측탑으로 향했다.
나선 계단을 오르고 문을 열자마자 세레라지에가 서 있었다.
남색과 노란색의 금은 요동을 어울리지 않게 떨면서.
“루디! 무슨 일이니?”
그녀가 마총을 쥐고 외투를 입고 있는 걸 본 세레라지에가 다급하게 물었다.
루디는 비명처럼 다급하게 말했다.
“시그마인 후작이 암살자를 보냈습니다. 더 올 가능성이 높아요. 전하. 떠나야 해요.”
세레라지에가 더더욱 다급하게 답했다.
“그래. 떠나야 한단다.”
“네?”
루디는 놀라며 의문을 표했다.
관측이 끝나지 않았다고 할 줄 알았다.
세레라지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막 계산이 끝났어. 곧 마경에 핵이 생기고 옛것이 기어 나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