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75화
(75)
천재 마법사 세레라지에는 아는 게 병이라는 말을 싫어했다.
모든 영광과 권리와 기회를 잃고 홍등가에서 약과 술에 찌들어 살 때도, 차라리 마법과 상아탑을 몰랐으면, 하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지식은 곧 힘이었다.
하지만 예견된 멸망 앞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만큼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보통 사람은 읽기만 해도 정신 오염을 당할 만큼 복잡한 수식과 마법적 기호로 가득한 종이를 한 번 더 확인했다.
“내려가면서 말하자.”
“네. 전하.”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붉은 머리의 늠름한 기사가 투구를 눌러 쓰며 나아갔다.
세레라지에는 중간에서 열심히 발을 놀리며 입을 열었다.
“최대한 간추려서 말해 볼 테니 잘 들으렴.”
“네.”
“예.”
“마경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동을 역산해 봤단다. 원래는 진작 핵도 생기고 범람했어야 했지만, 뭔가 때문에 계속 기운이 약해졌지. 아마 이물들이 계속 죽어서 그럴 거란다. 그래서 저 마경을 연 옛것은 몇 번이나 억지로 힘을 때려 넣어서 핵을 만들려 했단다.”
마경은 이 세상을 옛것의 세상과 섞어서 옛것이 편하게 넘어올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수조다.
수조에 담은 물이 계속 빠져나가니, 물을 몇 배로 부어서 다 빠져나가기 전에 넘어오려 한다.
“그런데 점점 그 주기가 짧아지고 있잖니. 게다가 파동을 분석해보니 밀어 넣는 힘의 총량도 늘어났어. 한번 시도할 때마다 50%가 넘게 증가한단다.”
텐티아는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그래서 오늘 언제쯤 얼마나 강한 이물이 튀어나온다는 말씀이십니까?”
“이물 정도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잖니! 옛것이 직접 넘어올 거란다. 마경 범람에 옛것 강림이라고!”
“!”
텐티아는 일순 발이 꼬여 계단에서 넘어질 뻔했다.
가장 최근의 옛것 강림은 7년 전 남부의 한 왕국에서 일어났다.
교회의 힘으로 어찌어찌 물리치기는 했지만, 집계된 사망자만 78만명.
사실상 멸망이었다.
그곳은 온 대륙의 범죄자들과 침식자 사제들의 천국이 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반드시 마경일 때 닫아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폐하와 발렌 님은…….”
루디가 말꼬리를 흐렸다.
세레라지에는 새침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제일 좋은 경우는 두 분이 핵이 만들어지는 순간 그걸 부수고 마경을 닫아버린 뒤, 하늘을 날아와 우리를 구해 주는 거란다. 제일 나쁜 경우는 그분들은 거기서 죽고, 우리는 후작에게 죽는 거지. 후작이 암살자들을 보냈니?”
“네.”
“내가 점성술도 배웠다는 걸 모르는 거 같아서 다행이다. 너도…… 살아서 다행이구나. 암살자들은 도망쳤니?”
“아니요.”
텐티아가 물었다.
“그럼?”
“다 죽였어요.”
셋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내 텐티아와 세레라지에가 동시에 말했다.
“잘했구나.”
“잘했다.”
계단을 열심히 내려가던 세레라지에가 숨찬 목소리로 물었다.
“텐티아 경. 그래서 어디로 갈 생각이니?”
“일단 와이번핏으로 가려 합니다. 후작을 만나서 상황을 확인하려 들다가는 저희가 모두 죽을지도 모릅니다. 가서 저희의 와이번을 확보하는 걸 우선 목표로 삼지요.”
“그래도 후작에게 마경에 대해 알려줘야 하지 않겠니?”
“아마 이미 모종의 수단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레라지에는 묘하게 확신이 깃든 답변에 내심 당황했다.
그녀가 아는 텐티아는 논리보다 검을 더 잘 다뤘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는 거니?”
“기사의 감입니다.”
“그건 못 들은 걸로…….”
“정말로 언제 핵이 생기고 마경이 열릴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영주라면, 세레라지에 님을 이렇게 대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요.”
“?”
“이기적인 영주라면 재산을 옮기고 도망칠 준비를 했을 거고, 선량한 영주라면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교회와 협력했겠지요. 하지만 시그하임 후작은 어느 쪽도 하지 않았습니다.”
“!”
“그게 그의 착각일 수도 아닐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는 그가 마경을 제어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믿음을 깰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세레라지에 전하의 목숨 또는 자유를 걸 수는 없습니다.”
“텐티아 경. 평소답지 않네?”
확실히 정의와 영광에 목숨을 걸던 기사답지 않은 태도였다.
텐티아는 분명 투구 너머 얼굴이 일그러졌을 거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에게는 다양한 덕목이 있습니다. 세세하게 따지면 끝이 없지만, 주군을 섬기고 약자를 보호하고 빛에 공헌하라. 이 셋은 빠지지 않지요. 예. 만약 후작의 믿음이 틀렸다면, 그리고 황제 폐하가 실패하신다면 적어도 이 도시는 지옥이 될 겁니다.”
하지만, 하고 운을 떼며 텐티아는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여기서 죽는다면 제국 전체가 지옥이 될 겁니다. 그 지옥은 옛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만든 지옥이겠지요.”
“그게 무슨 말이니?”
“만약 황제 폐하나 발렌 전하가 돌아오지 않으신다면, 다음 황위는 세레라지에 전하의 것입니다.”
루디와 세레라지에는 잠시 잊고 있던 사실에 눈을 부릅떴다.
그래서 후작이 자꾸 제 자식과의 저녁 자리에 세레라지에를 초대하지 않았던가?
“전하께서도 돌아가신다면, 그때는 제국의 모든 대영주가 폐하의 즉위 날 빼돌린 황족들을 앞세워 황위를 둘러싼 대전쟁을 벌일 겁니다. 그러니까, 전하께서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셔야 합니다.”
텐티아는 한 마디 더 중얼거렸다.
“아마도 발렌 님은 모든 걸 내다보신 거겠지요.”
세레라지에는 땅이 무너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의 이치와 별들의 기운을 읽어 마경이 언제 열릴지도 알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폐하가 실패하고 후작이 틀렸다면 이 도시는 지옥이 되겠지.”
“그리고 폐하가 실패하고 후작이 옳았다면, 전하는 아마도 후작 부인 또는 백작 부인이 되실 겁니다.”
“정치도 통치도 못 해먹을 짓이로구나.”
세레라지에는 짜증스럽게 내뱉고 와이번핏 쪽을 흘깃 바라보았다.
“가자꾸나. 대신 후작이 틀릴 것 같으면, 마지막에 소리 증폭 마법이나 빛 마법으로 사람들에게 도망치라고 신호할 시간은 벌어줄 수 있겠니?”
텐티아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
그게 기사가 세상과 타협하는 법이었다.
탑을 다 내려온 셋은 주변을 경계하며 와이번핏 쪽으로 향했다.
그때 가면을 쓴 암살자 여럿이 대놓고 정문 앞으로 몰려들었다.
세레라지에는 어이없다는 듯 외쳤다.
“최소한 창문으로 넘어오는 성의는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니니!”
“숙이세요!”
텐티아가 달려 나가고 루디의 마총이 불을 뿜었다.
* * *
집무실, 늙은 집사는 책상 맞은편에 앉은 후작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안심하십시오. 각하. 곧 모두 묶어 각하 앞에 세울 것입니다.”
매같이 완고한 인상의 사내, 시그마인은 고개를 저었다.
“모두 세울 필요는 없네. 세레라지에 대공만 있으면 돼. 단, 다치지는 않게 하게. 내 부인이나 며느리가 되어 줘야 하니까.”
그럼 다다음 대에는 프로이하이트 가문의 피가 섞인 황제가 탄생하는 것이다.
시그마인 후작은 흡족하니 웃으며 집사와 기사단장 로베로스, 프로이하이트 궁정 마법사 헤레인에게 손짓했다.
“혹시 모르니 그대들도 가세하게. 무영창 4서클 마법사라니 쉽게 잡기는 힘들 테야.”
셋이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섰다.
잠시 후, 옆에서 다른 문이 열리고 두꺼운 회색 예복을 입은 인영이 걸어 나왔다.
그가 뒤집어쓴 후드는 보통 후드와 달리 끝이 위로 높게 솟았고, 정수리 부분이 평평해서 마치 후드가 아니라 각진 투구를 쓴 거 같은 형태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키가 천장에 닿을 듯 컸고, 넓은 소매 아래 삐죽 나온 손가락은 예복보다 짙은 회색이었다.
시그하임 후작은 그를 향해 말했다.
“모든 게 자네들 말대로 되었군.”
“예. 각하.”
그의 목소리는 정신 파동과 같이 방 안에 울렸다.
“제이릴리스는 죽을 것이고, 나나 내 아들은 황제가 될 것이네.”
“그리고, 돌아가신 시그마린 아가씨도 돌아오시겠지요.”
후작이 중얼거렸다.
“……영혼의 완전한 부활. 기억은 얼마나 남아 있지?”
“저희의 전례에 따르면, 3년 안에 불러올 경우 기억의 80% 이상이 남아 있었습니다.”
“80%라.”
시그하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황비가 되었던 제 누나를 떠올리면서.
그건 전형적인 대귀족의 정략결혼이었다.
그러나 황제와 누나 사이는 양호했다.
아이도 여럿 낳았고, 가끔 만나는 젊은 정부 역시 용납받았다.
그녀는 취미로 검술을 계속 익혔고, 비슷한 위세의 대귀족 출신 아가씨들과 어울릴 수 있어 즐거워했다.
그는 누나와 편지를 자주 주고받았고, 황제 역시 여러 번 알현했다.
그가 1년 반 전 수도에 간 건 황태자와 1황자 중 어느 한쪽의 편을 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혹시 둘의 싸움에 누나가 휘말릴까 두려워서였다.
그리고 그는 보고야 말았다.
황제를 지키기 위해 검을 든 누나와, 누나를 베고 황제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제이릴리스를.
‘누님!’
시그하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끔찍한 회상을 떨쳐낸 뒤, 다시 눈앞의 사내를 응시했다.
“제이릴리스를 죽여달라는 걸 조건으로 걸 줄은 몰랐네. 하지 말라고 해도 했을 일인데. 내가 더 들어줄 건 없나? 너무 받기만 하는 거 같아서 미안하군.”
“서로의 목표가 일치하는 건 즐거운 일이지요.”
“그럼 그대들은 왜 제이릴리스를 노리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후작은 이미 그들의 정체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옛것들이 추종자들에게 힘과 지식을 내려 교단을 만드는 건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이 세상을 이해한 옛것들은 이제 다짜고짜 마경을 만들고 이물들을 보내는 게 아니라, 인간 사회를 이용하려 했다.
눈앞의 사내 역시 오랫동안 옛것의 힘을 ‘수련’해 온 자이리라.
마법사나 기사의 재능이 없기에, 소드 엑스퍼트만큼 노력해서 소드 엑스퍼트의 힘을 얻은, 그런 자리라.
흔하지는 않았지만, 듣도 보도 못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각진 후드를 뒤집어쓴 사내는 자신들을 가늠할 생각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희 역시 예언을 따를 뿐입니다.”
“그런가? 알겠네.”
시그마인은 그가 싱거운 반응을 보이자 굳이 더 파고들지 않았다.
그는 계약을 이행했으며, 곧 정산을 받을 터였다.
권리 있는 자신이 그들에게 안달복달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었다.
‘지금이면 이미 제이릴리스는 죽었겠지.’
아무리 강해도, 인간이 용맥에서 용을 이길 수는 없었다.
폭군 제이릴리스라면 뭔가를 더 숨기고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 용의 열화본이었다.
황제는 죽었다.
남은 마경도 곧 해결될 것이었다.
아무리 옛것이라도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힘을 밀어 넣지는 않는다.
용이 한두 번만 더 범람을 막아주면 아예 스스로 마경을 흩겠지.
용의 분노?
그 용은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이 밖으로 나가는 순간 욕망에 찬 온 제국의 대영주들이 토벌대를 보내리라는 사실을.
곧 그는 황제 또는 황제의 아버지가 된다.
누나도 곧 돌아올 것이다.
그럼 이 갈증과 강박도 사라지리라.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군.”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응?!”
와이번핏으로 가는 길목에서 예상 외의 난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 * *
한때 갑옷은 전장에서 완전히 밀려났었다.
소드 유저가 철퇴를 휘두르고 소드 엑스퍼트가 마나 블레이드를 뽑아내면 판금 갑옷도 쿠키처럼 깨져 나가기 때문이다.
판금 갑옷은 기본으로 금화 100닢, 잘 만든 건 금화 300닢도 넘었다.
한 방에 부서질 갑옷에 그 돈을 쓸 미친 기사는 없었다.
차라리 그 돈으로 마나 포션이라도 더 사 먹고 수련하는 게 남는 장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상아탑에서 마법 회로를 통한 반영구적 인첸트라는 기술을 개발했다.
마도구가 양산되기 시작하고, 갑옷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강화, 경량화, 마법 반사, 열기 차단, 전류 차단, 독기 차단, 수중 호흡 등 온갖 주문을 새기고서.
바위를 부수는 마나 블레이드도 막아내는 강도다.
일반병들은 뭔 짓을 해도 그 갑옷을 뚫을 수가 없었다.
기사를 이길 수 있는 건 기사뿐이라는 말이 상식이 되었다.
그 말은 기사들 내에서도 통했다.
실력이 어지간히 차이 나지 않는 한, 좋은 갑옷을 입은 기사를 이길 수 있는 건 더 좋은 갑옷을 입은 기사뿐이었다.
그리고 텐티아는 최고의 갑옷과 훌륭한 실력을 모두 갖춘 기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