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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77화 (77/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77화

(77)

서쪽 산 위에서 솟아오른 인영이 점점 가까워졌다.

루디는 녹색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살아 계실 줄 알았어요.”

검은 드레스와 백금발을 휘날리며 황제 제이릴리스가 하늘을 날았다.

그 옆에서는 누더기 같은 코트를 걸친 발렌시아누스가 파충류처럼 세로로 찢어진 금색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용을…… 이겼다고?”

시그마인 후작은 당황과 황당 사이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그 순간 패배를 직감했다.

황제를 마경으로 불렀고, 일부러 침식된 용병들과 싸우게 해서 흥미 위주의 전투로 사고를 유도했으며, 그 감정선이 이어지는 상태에서 검을 뽑아 진심을 내지 않도록 했다.

1년간 엄청난 돈을 써 가며 대마법사라는 황제의 마법을 봉인할 봉인석을 준비했고, 마경에 용까지 이용했다.

그걸 다 뚫고 온 이상, 그가 황제를 이길 가능성은 없었다.

“후작.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이로구나.”

푸른 하늘을 날아온 제이릴리스가 상록수 사이로 착륙했다.

“마경도, 용도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짐은 결국 돌아와 네 앞에 섰구나.”

시그하임은 저도 모르게 반걸음 물러섰다.

발렌시아누스가 황제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폐하. 영광이었사옵니다.”

“즉위 이후 짐의 손을 잡은 건 그대가 처음이니라.”

“저 반역자를 잡아 꿇리면 되겠사옵니까?”

“그래. 대공. 반역자 시그마인을 짐의 앞에 데려와라. 죄목은 황제 시해 미수이니라.”

자랑하던 하얀 제복은 어디 가고 검은 코트만 입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특유의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용처럼 세로로 찢어진 금빛 동공의 광채와 광기는 오히려 더욱 진해진 거 같기도 했다.

발렌시아누스가 부러진 검을 뽑아 들고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죄인 시그마인은 황명을 받들어 황제 폐하 앞에 출석하라!”

시그마인은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저항했다.

그는 이제 막 마나 불레이드에 다시 색을 입히게 된 발렌시아누스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자였다.

하물며 부러진 검 따위로 무슨 재주를 부려도 그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발렌시아누스가 그를 향해 부러진 검을 집어 던졌을 때 의외로 당황하지 않고 쳐낼 수 있었다.

“이런 추잡한! 네깟 놈이 마경은 어떻게 나왔느냐.”

그 물음을 들은 발렌시아누스는 잔혹하게 웃었다.

검을 던진 건 아주 약간의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어느새 그의 양손과 얼굴 앞쪽으로 은은한 금색 아지랑이가 일렁이고 있었다.

아지랑이가 용의 머리 형태를 만들고, 발렌시아누스가 손짓으로 신호했다.

딱!

“용…… 언?”

화르르륵!

용의 머리가 불길을 뿜었다.

후작이 입은 갑옷은 5서클 이하의 마법은 모두 무효화 하는 최고급품이었지만, 용언은 서클에 얽매이지 않는 권능이었다.

“아아아악!”

불꽃에 휩싸인 시그마인이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했다.

발렌시아누스는 성큼성큼 걸어가 후작의 목덜미를 잡아채고 검을 빼앗은 뒤 불길을 거두었다.

불타는 후작을 맨손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는 걸 보며 루디와 텐티아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고, 세레라지에는 이를 악물었다.

불길을 거두며 허공에 띄운 채로 유지하는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건 분명히 그녀가 벼락을 흩은 것과 같은 이치이리라.

“대체, 대체 어떻게!”

후작이 마나로 강화된 육체로 발렌시아누스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의 팔뚝은 요지부동이었다.

되려 후작의 힘을 정면에서 짓누르며 제압했다.

후작이 단검을 뽑아 들어 발렌시아누스의 옆구리를 찔렀다.

연갈색 마나 블레이드가 예리하게 타올랐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 주었다.

카득, 카드득!

금빛으로 빛나는 암적색 비늘이 갑옷처럼 올라와 단검을 가로막았다.

금이 갔지만, 뚫리지는 않았다.

후작은 당황하며 발렌시아누스를 바라보았다.

“용?”

발렌시아누스는 피식 웃으며 후작을 질질 끌고 제이릴리스 앞에 무릎 꿇렸다.

황제는 지면에서 돌로 된 옥좌를 만들어내 앉은 뒤 말했다.

“묻고 싶은 말이나 남기고 싶은 말이 있는가?”

시그마인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바라던 모든 게 이루어지기 직전이었다.

황제는 죽고, 계승권자인 대공을 손에 넣었으며, 누나까지 곧 돌아올 터였다.

그러나 황제는 죽지 않았고, 대공은 그의 손에서 벗어났으며, 누나의 부활도 이제 옛말이 되었다.

“어떻게…… 용을 이기셨습니까?”

“고룡이 아니라 비룡이었지. 마법 봉인만 아니었다면 혼자서도 충분했다.”

“마경은 어떻게 닫으셨습니까?”

제이릴리스가 할 말이 많다는 듯한 표정으로 가볍게 혀를 찼다.

“막대한 뇌기 탓에 핵을 베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그때 어떤 마법사가 바깥에서 뇌기를 죄다 뽑아가 주더구나. 덕분에 발렌 대공의 불길과 짐의 오러로 태우고 벨 수 있었다. 그대의 계획이 성공하기 직전이었는데 아쉽겠구나.”

후작이 입을 쩍 벌렸다.

황제의 시선이 세레라지에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세레라지에는 금은 요동을 새침하게 빛내며 웃었다.

그게 그녀가 혈통에 책임을 지는 법이었다.

황제가 말했다.

“이제 짐이 물을 차례 같구나. 왜 반역했느냐? 황제가 되고 싶었나? 아니면 독립국의 왕이 되고 싶었나? 짐이 인질을 보내라 했던가? 아니면 세금을 올렸던가? 아직 그대 같은 대귀족들에게 밉보일 만한 짓을 하지 않았을 텐데…….”

말끝을 흐린 그녀가 가학적으로 웃었다.

“대체 어찌하여 가문의 몰락을 자초하는가.”

후작이 그 푸른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시그마린.”

“응?”

“역시 기억하지 못하는군.”

“네 누나였는가?”

제이릴리스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그 목소리에 지독한 원한이 어려 있었다.

“기억난다. 갈색 머리에 푸른 눈. 가학적인 여자였지. 하루도 멀다 하고 내려와 이 약물도 주입해 봐라, 저 약물도 먹여 봐라. 난리도 그런 난리가 아니었다.”

시그마인의 눈에 불꽃 같은 분노가 일었다.

“누님을 모욕하지 마라! 누님께서는 그런 분이……!”

“맞았다.”

제이릴리스는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내가 아는 시그마린은 그런 자였다. 단칼에 목을 베어준 걸 감사하거라.”

시그마인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순식간에 10년은 더 늙어버린 거 같았다.

“헛된 꿈에서 깨어났는가?”

황제가 서늘히 선포했다.

“이제 그대가 그대의 가문에 무슨 패악질을 저질렀는지 보아라. 짐이 콩 심은 데에 쑥이 나도록 네놈의 영지를 불태워버리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해 보아라. 황제의 분노를 산 자의 최후가 어떠해야 하는지 본보기를 보일 것이다.”

제이릴리스가 경악하는 시그마인을 보며 가학적으로 웃었다.

“……본래 그리할 생각이었으나 발렌 대공이 눈물로 읍소하더군. 그러니 모든 죄는 네놈의 대에서 끝날 것이다. 짐과 대공의 은혜에 눈물 흘리며 감사하도록 해라.”

시그마인이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가문을 지켜준 것도 크나큰 자비였다.

제이릴리스가 발렌시아누스에게 보검 ‘유리거울’을 건넸다.

발렌시아누스는 황공한 표정으로 그 익숙한 검을 받아들었다.

그는 황제의 참수인으로서, 황제를 대신해 검을 들 때가 많았다.

따지자면 ‘망나니’라는 별명의 본업이기도 했다.

체감상으로는 고작 몇 달 만이었다.

발렌시아누스가 반투명한 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서걱!

시그마인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 * *

프로이하이트 후작령은 도시 인구만 20만에 육박하는 하나의 왕국이었다.

그런 곳의 왕을 죽여 버렸으니, 그 후폭풍은 매우 거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이릴리스는 특유의 카리스마와 후작령을 해체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조를 통해 빠르게 행정 관료들을 휘어잡았다.

“짐은 복수가 아니라 통치를 하기 위해 남았노라.”

소집령에 응한 기사와 봉신들을 돌려보내고, 징집령을 해제하고, 용병대와 자유 기사들에게 고용 해지 서한을 보냈다.

몇몇이 반항했지만, 텐티아가 움직이자 오래지 않아 잠잠해졌다.

어쨌거나 반항은 살아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남은 버섯들은 죄다 긁어 와도 좋다. 너무 아래쪽으로는 내려가지 말아라. 용이 한 마리 더 있을지도 모르니까.”

“성은이 망극합니다. 그러니 부디 그런 농담은 삼가 주소서.”

세레라지에는 시약을 채취하고자 헤레인과 후작령 궁정 마법사들을 거느리고 이제는 닫힌 마경으로 향했다.

푸른 버섯들이 효과를 잃기 전에 모두 따야 했다.

“헤레인. 더 필요하지 않겠니?”

헤레인은 세레라지에 앞에서 성자를 영접한 신도처럼 머리를 조아렸다.

“더 빨리 따라! 손발이 보이는구나!”

그녀가 제자들과 생도들을 마구 다그쳤다.

균사체 하나까지 긁어갈 기세였다.

루디는 황제에게 직접 상처를 치료받았고, 황공함에 잠시 기절했다.

그녀는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 명상 수련을 했고, 그 외의 시간에는 모두 발렌시아누스 곁에 붙어 있었다.

발렌시아누스가 후작성으로 돌아오자마자 피를 토하며 쓰러졌기 때문이다.

그는 일주일 동안 침대에서 단 1초도 일어나지 못했다.

루디가 찬 수건으로 몸을 닦으면 수증기가 피어오를 정도로 열이 펄펄 끓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 망나니 대공은 후작의 장부를 죄다 뒤지며 빼돌린 비상금을 찾는 데 집중했다.

프로이하이트의 모든 건 후계자의 것이지만, 장부에 없는 건 먼저 찾는 자의 것이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루디가 싸 온 짐에서 옷을 다 빼버리고 찬란한 보석으로 채우며 그는 낭랑하게 웃었다.

“알뜰하구나. 그러나 지금 짐은 보석이 아니라 일꾼이 필요하다.”

황제가 대공의 귀를 잡고 질질 끌고 가며 한 말이었다.

거의 일주일간 철야한 제이릴리스는 매우 난폭해져 있었고, 발렌시아누스는 그녀의 발아래 납작 엎드렸다.

“무슨 일이시옵니까? 하명만 하소서.”

“후계 문제다.”

시그하임 후작에게는 첫째 딸, 둘째 아들, 막내딸이 있었다.

황제의 평에 따르자면, 첫째는 전쟁광이었고, 둘째는 탐욕스러웠으며, 막내는 음흉했다.

“누가 다음 후작이 되는 게 황실에 이롭겠느냐?”

그리고 그날 밤, 막내딸이 발렌시아누스의 침실을 찾아왔다.

* * *

“발렌 님. 죽일까요? 아니면 창밖으로 던질까요?”

루디가 후작가 막내딸의 관자놀이에 마총을, 목에 단검을 가져다 대고 물었다.

나는 묘하게 얇은 옷을 입고 온 갈색 단발의 막내딸을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제이릴리스가 음흉하다고 했는지 알 거 같았다.

“일단 풀어줘. 들어나 보자.”

“그렇지만 단검을 가져왔는걸요?”

“?”

루디가 그녀의 옷 안에 마구 손을 넣더니 여기저기서 단검을 꺼냈다.

몇 자루나 가져온 거야?

내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후작의 막내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공 전하. 이 밤에 결혼도 안 한 아가씨가 외간 남자 침실에 찾아가는 게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한 행동인지 이해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누가 들으면 내가 불렀다고 착각할 거 같다? 누가 오래?”

“거두절미하고 말하겠습니다. 저를 후작으로 만들어 주시면 금화 1만 닢을 황실에 바치겠습니다.”

“!”

큰돈이었다.

세금이 아니라 비자금 쪽으로 돌릴 수 있으면 훨씬 유용하겠지.

“그런 약속은 네 언니랑 오빠도 할 수 있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지키지 않을 겁니다. 아니, 지키지 않아도 될 이유가 있습니다.”

나는 흡족하니 웃으며 말했다.

“그래? 궁금해지네. 말해봐.”

“언니는 첩 소생의 첫째입니다. 첫째인 만큼 한번 후작으로 인정만 받으면 그다음에는 세금만 잘 내는 한 황실이라도 간섭할 명분이 없죠. 둘째 오빠도 똑같습니다. 그는 정실 소생이니까요.”

“너는?”

“저는 다른 첩 소생의 셋째입니다. 황실의 힘 없이는 집권할 수 없고, 제가 말을 안 들으면 황실은 언제든 언니와 오빠에게 힘을 실어줘 저를 날려 버릴 수 있지요. 이만하면 괜찮은 목줄이 아닙니까?”

그 담대하고 사악한 음모를 들으며, 나는 한 외다리 소녀를 떠올렸다.

“그래. 괜찮네. 요즘 어린 애들이 아주 똑똑해.”

“저…… 는 이제 며칠 뒤면 스물두 살입니다. 대공 전하는 아직 열일곱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오해한 부분이 있을까요? 아니면 제가 동안이라는 뜻?”

“루디. 내보내.”

다음날 나는 제이릴리스에게 결재 받고 후작의 막내딸을 새 후작으로 공표했다.

셋 다 능력 있고 욕심 있는 젊은이들이었다.

그럼 이왕이면 황실에서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쪽이 좋았다.

새 프로이하이트 후작의 첫 명령은 둘째 오빠를 교역 도시의 총독으로, 첫째 언니를 변경 요새의 총사령관으로 발령내는 것이었다.

의외로 둘은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떠나갔다.

“눈이 녹기 전에 로베로스 경이랑 같이 마경 안쪽을 탐험해봐. 그게 마음에 들면 내년에 충성 맹세를 해줘도 좋아.”

그리고 우리가 수도로 돌아가기 전날, 나는 새 후작에게 작은 거래를 제안했다.

“기꺼이.”

다사다난한 한 해의 끝은 밀실에서 벌어진 밀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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