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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78화 (78/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78화

(78)

프로이하이트 후작령에서 황실 직할령 수도로 돌아오는 데에는 다시 일주일 정도가 걸렸다.

“양과 이불, 데운 술까지 모두 준비 끝났습니다!”

이번에는 중간중간 들린 모든 와이번 착륙장마다 관리인들이 대접 준비를 잘 마쳐 놓았다.

본래 제이릴리스는 연초에 귀환할 생각으로 일정을 계획했다고 한다.

하지만 후작 사후 혼란을 수습하느라 열흘 정도가 더 걸린 탓에, 우리는 거의 1월 중순이 되어서야 수도의 와이번핏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도에서는 이미 연말 분위기와 새해 분위기가 지나갔고, 시민들은 다시 생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제이릴리스가 행정 관료들에게 말하기를.

“짐이 없어 연말 연초 모두 일찍 퇴근할 수 있었겠구나. 그동안 국도 정비를 위한 지방 대귀족 가문과의 협력과 운하 건설이 얼마나 진척되었는지 들어 보자꾸나.”

그렇게 한동안 과중한 업무가 주어질 것을 예고하며 황제는 복귀했다.

그녀의 첫 임무는 새해부터 함께 구른 신하들에게 포상을 내리는 것이었다.

“세레라지에 대공.”

“예. 폐하.”

긴 남색 생머리, 노란색과 파란색의 금은 요동을 빛내는 새침한 인상의 마법사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황제는 그녀의 옥좌로 돌아가 앉고는 흡족하니 웃으며 공을 치하했다.

“그대에게 1주의 휴가와 짐 앞에서도 지팡이를 짚을 권리를 내리노라.”

“감사합니다.”

그동안 또 다른 걸 연구할 생각인지, 세레라지에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지난번처럼 일주일간 안 자고 안 먹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중간중간 가 봐야겠다.

황제가 기껍다는 듯 흥겹게 말을 이었다.

“또한 자유 연구를 허하노라. 이번 연구만 마치면 다음에는 원하는 주제를 탐구해 논문을 써도 좋다. 연구비는 당연히 짐이 지원할 것이다.”

“!”

세레라지에가 금은 요동을 부릅뜨며 환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니, 아니. 정말이십니까?”

연구비 때문에 기뻐하는 건 아니었다.

“그대도 이번에 권능에 대한 감을 잡았을 텐데. 잊기 전에 잘 키워 보도록 해라. 짐의 궁정에 대마법사가 탄생하는 건 언제든 환영이니라.”

“폐하. 자유 연구라 하니 청하고자 싶은 게…….”

“마경과 옛것, 침식자 연구도 포함이니라. 이번에 따 온 시약을 활용하려면 당연히 포함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대공이 침식되면 짐이 친히 목을 쳐 줄 테니 민폐를 생각하지 말고 마음껏 탐구해보도록.”

“!”

세레라지에가 그 새침한 얼굴을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녀처럼 붉혔다.

“황은이 망극합니다.”

그녀는 성자를 영접한 신도처럼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섰다.

“텐티아 경?”

“예. 폐하.”

전신 판금 갑옷 차림의 기사가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백금 기사단의 하얀 판금 갑옷에 여기저기 긁힌 자국이 선명했다.

텐티아 경은 지난 한 달간 천국과 지옥 사이를 몇 번 오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늠름한 얼굴에 드리워진 음영이 처연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모르기는 몰라도 나와 황제가 모두 마경 속으로 사라진 상황에서 적잖은 마음고생을 했겠지.

“발렌 대공이 경에게 휴가와 금화를 줄 테니, 짐은 경에게 짐만이 줄 수 있는 걸 주어야겠지.”

그렇게 말한 제이릴리스가 시종이 은쟁반 위에 들고 온 붉은 망토를 집어 들었다.

은은한 품격과 불꽃 같은 맹렬함을 두루 갖춘, 척 봐도 고급스러운 마도구였다.

“어지간한 화살은 모두 막아줄 것이다. 갑옷 없이 편하게 입고 싶을 때 두르거라. 또한 5서클까지의 불꽃 마법에 완전히 면역이니, 그대는 불지옥에서도 자유로우리라.”

제이릴리스가 텐티아 경에게 직접 망토를 여며 주었다.

“폐하. 영광이옵니다.”

제이릴리스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또한 그대에게 와이번 라이더의, 용기사의 적성이 있음을 확인했다. 2주간 짐의 눈으로 확인했으니,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줘야겠지.”

“아!”

“수시로 가서 돌봐 주고 함께 날아 주거라. 발렌 대공도 와이번을 잘 타니, 함께 날아가기도 쉽겠군.”

그녀가 시종에게서 은으로 장식한 뿔피리를 받아 텐티아에게 건네주었다.

뿔피리에는 기수와 와이번의 이름을 함께 새길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좋은 이름을 정해 주거라.”

“영광이옵니다. 폐하.”

텐티아 경이 한결 밝아진 얼굴로 물러났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돈주머니를 찔러 주며 작게 속삭였다.

“2주일 뒤에 보자.”

“예?”

“연말 휴가와 연초 휴가와 특근 휴가를 다 더한 값이야.”

“하오나.”

텐티아 경이 그건 말도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반박을 허용치 않겠다는 듯 단호히 말했다.

“나도 별궁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갈 거야. 술 먹고 싶으면 그때 찾아와. 한동안 대공 포도주 절임 상태로 있을 생각이니까.”

그녀가 그건 조금 마음에 든다는 듯 웃었다.

“예. 전하.”

나와 제이릴리스는 두 충신을 먼저 보내고 집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휘황찬란한 샹들리에와 황량한 방 안 모습은 여전했다.

그녀는 잠시 책상 앞에 나를 세워 두고 산처럼 쌓인 양피지 더미 중 시급한 것들을 훑어보았다.

가끔 신음성을 내기도 하는 게 정말 적잖이 급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반려와 통과로 나누어 도장을 찍다 중얼거리듯 말했다.

“세레라지에 대공에게 다른 뜻은 정말로 없나 보군.”

나는 그 중얼거림에 익숙하게 답했다.

“예. 폐하. 정말 다른 뜻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후작이나 그의 아들과 손잡고 제위를 노렸을 것이옵니다.”

“천성이 마법사야.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에는 관심이 없지.”

“그렇사옵니다.”

“그래서 슬프구나. 이 세상에서 강력한 마법사는 모두 왕공귀족일 수밖에 없는데.”

서류 더미에 가려 보이지 않는 얼굴은 지금쯤 가학적으로 웃고 있을 거다.

“예. 슬픈 일이지요.”

“잘 이겨내 주어 고마울 뿐이다.”

“앞으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어떻게 확신하는가?”

“제가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옵니다. 천성대로 마법사로 살 수 있도록.”

잠시 침묵이 어렸다.

결국 제이릴리스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

“믿겠노라. 대공이라면 어떻게든 해낼 거 같으니.”

* * *

나는 2주의 휴가, 새 액체 갑옷 ‘아콰테그’, 금화 200닢을 받아들고 의기양양하게 별궁으로 돌아왔다.

별궁에는 루디가 사용인들에게 지시하며 그녀가 방금 사 온 물자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포도주 여덟 통, 위스키 서른 병, 포도주 스무 병, 훈제 햄과 소시지, 말린 과일과 생과일. 모두 정리했습니다. 새 제복은 내일 의상실에서 직접 올 예정입니다. 포도주 데워 드릴까요?”

그녀는 오늘도 하얀 블라우스 위로 검은 원피스를 겹쳐 입는 깔끔한 시녀복 차림이었다.

갈색 머리는 깔끔하게 묶어 올렸고, 녹색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났으며, 얼굴에는 다정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어떤 고용주에게도 환영받을 좋은 시녀의 모습.

하지만 나는 그녀가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는 걸 알고, 그녀가 명상 수련을 한다는 걸 알고, 그녀가 초일류 마총 사수이자 단검 사용자라는 걸 안다.

그녀가 그렇게 된 건 다 나 때문이었다.

“루디. 정말 고생했어. 미안…….”

“발렌 님. 사과하지 말아 주세요.”

그녀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사점 안경 너머 녹색 눈동자가 은은한 열기를 품고 빛났다.

“칭찬해 주세요. 열심히 했다고요. 다음에는 더 잘할게요.”

“!”

그녀가 평범하게 살기만을 바랐다면 회귀한 그 날 그녀를 해고하는 게 맞았을지도 모른다.

이쪽 세상과 엮일 일이 없도록.

하지만 그녀는 이미 내게 맹세했고, 내 명령대로 란체아를 쏘았다.

여기서 사과하면 그건 너무 이기적인 행동이다.

나는 발렌시아누스답게, 수도 제일의 망나니답게 웃었다.

“그래. 루디. 잘 버텨 줘서, 다시 날 맞아 줘서 고맙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본가는 수도에 있나? 일주일 정도 휴가를 주고 싶은데.”

그녀가 난처하게 웃었다.

“전하 앞에서 말씀드리기는 부끄럽지만, 저희 집안도 어디서 꿇리지 않을 막장이랍니다.”

“……그럼 가서 패악질 좀 부리고 올래? 보석 장신구 빌려주고 홍등가 기도들 붙여줄게.”

“발렌 님!”

그녀가 장난스럽게 소리치고,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전하 옆에 있는 게 제 최고의 휴식입니다.”

나는 진심으로 기쁨을 느꼈다.

“포도주 좀 데워 주라. 같이 마시자.”

“네. 발렌 님.”

쿵쿵.

그때 누군가 별궁 문을 두드렸다.

“텐티아 경? 아직 숙소로 안 들어갔나? 어?”

그녀는 전투용 하얀 갑옷을 벗고 회색 훈련용 중갑을 입고 있었다.

나와 루디는 동시에 얼굴을 창백하게 물들였다.

“발렌 대공 전하. 루디. 궁으로 돌아왔으니 다시 일과를 시작해야 합니다.”

“경. 조금만 기다려 주게. 경은 피곤하지도 않나? 경 지금 휴가 중이야! 나도 휴가 중이고!”

마지막 말은 거의 비명이었다.

“1분 늦게 나오실 때마다 연무장 한 바퀴 추가하겠습니다. 이번에는 패악질 부리지 않으시고 일을 해결하신 거 같은데, 아주 좋습니다. 그 근성을 몸에 새겨 드리겠습니다. 기사답게.”

“여기에 기사는 경뿐……!”

“59.”

“아니……!”

“58.”

“으아아악!”

* * *

황궁에는 몇 개의 크고 작은 응접실이 있었고, 제이릴리스는 그 중 노을빛 태피스트리가 벽에 걸리고 주황색 갓을 씌운 샹들리에가 있는 곳을 애용했다.

그녀는 이틀간 철야 작업으로 지난 한 달간 쌓인 서류를 처리하고 나를 그곳으로 불러냈다.

허겁지겁 달려가니, 그녀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고 있었다.

백금발은 편안하게 풀어 어깨와 등으로 흘러내리게 놔두었고, 황금색 눈동자에도 힘을 뺐다.

숄 하나 걸치지 않고 얇은 보라색 드레스만 입고 있었는데, 평소와 달리 관절 반지도 끼지 않고 하얀 팔을 드러내고 있었다.

벽난로 덕에 한겨울임에도 방 안은 따듯했다.

“대공. 한 잔 따르라.”

그녀가 감미롭게 말했다.

넓고 앉은 테이블 위에는 포도주가 가득했다.

‘황무지의 눈물’, ‘피의 환희’, ‘다이아몬드 찬사’ 등 제국 최고의 포도주들이었다.

이미 혼자서 꽤 마셨는지, 테이블 아래에 빈 병도 여럿 서 있었다.

회귀 전에도 제이릴리스는 술을 즐겼다.

그녀는 해독 능력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잘 취하지는 못했지만, 그 맛과 향과 기분을 즐길 줄 알았다.

나는 두 손으로 ‘다이아몬드의 찬사’를 집어 들었다.

제이릴리스가 혀를 찼다.

“그 병은 건들지 말아라. 독이 들어가 있었다.”

“예?”

나는 그걸 일단 테이블 아래 내려놓았다.

“당장 시종이나 하인을……!”

“이미 와이번핏으로 보냈다.”

“준민하신 결정이시옵니다.”

“하루빨리 섭정을 세워야겠구나. 짐이 한 달간 궁을 비웠다고 꼴이 말이 아니다.”

“현명하신 생각이시옵니다.”

나는 입 안의 혀처럼 굴었다.

물론 평소라고 그렇게 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녀가 이렇게 마음먹고 술을 마실 때는 그게 제일 현명한 선택이었다.

‘피의 환희’를 공손히 따르고, 아무 이야기나 해보라는 그녀에게 텐티아 경이 휴가 첫날부터 나와 루디를 불러 데굴데굴 굴렸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덕분에 푹 잤습니다.”

“하하. 역시 그녀는 성실하구나. 분명 경지에 오를 테지.”

“저도 그렇게 생각하옵니다. 그런 기사를 제 곁에 붙여 주신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제이릴리스가 잔을 완전히 비웠다.

잠시 우리 사이에 침묵이 찾아왔다.

“대공.”

“예. 폐하.”

“대공은 정말로 감사하는군.”

“……당연히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하옵니다.”

“그래서 짐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나?”

“아.”

나는 그때 마경 안에서 용찬 의식을 했다.

그 야만스럽고 아름다운 살덩이를, 비룡의 심장을 먹은 것이다.

“죽을 수도 있었다.”

“알고 있사옵니다.”

“앞으로도 보통 사람으로는 못 살 것이다.”

중의적인 의미의 질문에 나 역시 중의적으로 답했다.

“저도 황족이옵니다. 태어날 때부터 보통 사람은 아니었사옵니다. 용심을 먹기 전에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고, 지금도 그러니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의무와 권리, 그리고 문자 그대로의 혈통 모두 보통 사람은 아니다.

내 답에 제이릴리스가 옅게 웃었다.

“짐이 우문을 던졌군.”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충성은 계약이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봉건제도의 핵심이 곧 계약이었다.

“텐티아 경은 명예와 황금을 위해 짐을 섬기고, 짐은 짐의 전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녀에게 황금과 믿음을 내려주지. 이 세상 모든 관계는 계약이니라.”

인망도, 사랑도, 강압도, 낭만도, 황금도, 결국 저울추에 올릴 한 조각이라는 점에서는 같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대는 언제나 짐이 준 것보다 많은 걸 주려 하는군. 짐이 그대가 목숨을 바칠 만한 낭만을 보여 주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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