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8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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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시아누스는 사내가 그리 심각한 중독자나 침식자가 아니라, 나름 이름있던 한 악사가 마땅한 노래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중압감에 저지른 짓이라는 걸 확인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하겠습니다.”
“네놈. 방금 침식자가 될 뻔했다.”
“예, 예?”
사내가 기겁하며 가지고 있던 연초를 모두 내놓았다.
둘 다 인생을 망치는 건 똑같지만, 그래도 침식은 마약보다 훨씬 위험한 짓이었다.
기호품과 마약의 경계선에 선 애매모호한 연초들이 교회의 묵인 아래 허용되는 것과 달리, 침식은 아무리 사소한 전조라도 화형이 기본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악상을 대가로 네 가장 소중한 걸 빼앗을 거다. 돈이나 박수가 필요하면 광장에서 거리 공연이라도 해. 네 사돈의 팔촌까지 죄다 끌려갈 일은 하지 말고.”
“아, 알겠습니다.”
발렌시아누스는 잔뜩 겁먹은 사내를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적가면이 여우 가면을 턱 아래로 분리하고 히죽 웃었다.
“그래도 요즘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변명할 필요 없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 동네 지배인들이 슬슬 눈치를 보고 있다는 뜻이겠지. 내 눈치든 네 눈치든. 그게 그거기도 하고.”
“작년 압수 절차를 밟을 때 별 이상한 게 다 기어 나오더군요.”
“어디까지 봤나?”
“책이 제일 많았죠. 사람을 재료로 별걸 다 만드는 걸 보고 저도 꽤 놀랐습니다.”
“젊음, 제복, 건강, 자식. 사람은 소중한 걸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지. 뭐든지 할 수 있는 자가 돈과 권력이 있으면 쉽게 망가지고. 아. 혹시나 해서 묻는데, 빼돌린 건 아니겠지?”
발렌시아누스는 들어가지 않는 손등 비늘을 억지로 피부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물었다.
적가면의 수완이라면 창고 몇 개를 채워 놓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바라는 건 돈 벌 자유고, 돈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걸 위해 전하와 손잡고 제 상사를 담갔죠. 그런데 돈 따위를 위해서 다른 놈들에게 영혼을 목줄 잡히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그래. 아주 좋은 자세군. 앞으로도 그렇게만 생각해주게.”
둘은 고급 술집에서 거리로 나갔다.
술집의 지배인과 기도들이 적가면의 등에 대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하급이라지만 전원이 용병 출신 소드 유저로 꾸려진 호위대가 적가면과 발렌시아누스의 앞, 뒤, 양옆을 둘러쌌다.
이 거리에서 그녀의 입지를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몇 %나 손에 넣었지?”
“100개의 가게가 있다면, 그중 35개 정도가 제게 직접적으로 보호비를 내고 있습니다.”
“얼마나 더 손에 넣을 생각인가?”
“40%는 넘지 않으려 합니다.”
“왜지?”
적가면은 그 천연덕스러운 물음에 내심 혀를 찼다.
자기는 눈치 못 채는 거 같지만, 발렌시아누스는 서로 다 아는 걸 굳이 듣고 싶어 하는 가학적인 면이 있었다.
그건 그가 타고난 것인지 그의 쌍둥이 동생에게서 옮은 것인지는 몰랐다.
“품질 관리의 측면이 있습니다. 노려질 만한 애들을 보호해줘야 의미가 있지요. 제 쪽에서도 어중이떠중이들이 제 이름을 팔면 안 되니까요.”
“그리고.”
“고인 물은 썩지요. 제가 이 거리를 완전히 지배하게 되면 썩어갈 테고, 그럼 저를 잘라내실 게 아닙니까?”
정답이었다.
“저는 연못 안 잉어, 우물 안 개구리, 호랑이 없는 산의 여우로 있겠습니다. 사람이 있는 한 붉은 등의 거리는 없어지지 않겠지만, 그곳의 주인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으니까요.”
“그럼 우리 오래 볼 수 있겠군.”
발렌시아누스는 그제야 흐뭇한 목소리로 답했다.
적가면은 그가 그어놓은 선을 명심하며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응?”
“최근 돌기 시작한 소문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서쪽에서 온 상인에게 들었지요.”
서쪽, 그의 발걸음이 잠시 꼬였다.
“어떤 소문인가?”
“수도의 망나니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시그마인 후작을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발렌시아누스는 내심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고민했다.
“그 막내딸을 범한 뒤 꼭두각시 후작으로 만들고, 언니와 오빠는 변경으로 추방했다.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겠지요.”
사실 이건 믿기 어려운 소문이었다.
프로이하이트 후작은 어린아이도 아는 대귀족이고, 아무리 망나니라도 송곳 꽂을 땅도 없는 발렌시아누스 ‘따위’는 그 앞에서 고개를 들 수도 없다.
하지만 홍의주교를 납치하고 제 형제자매들을 주살했다는 발렌시아누스다.
그라면? 하고 의문을 가질 만한 수준의 이야기다.
황제 제이릴리스가 함께 있었고, 마경과 얽힌 복잡한 비밀이 있다고 하니 사람들이 혹할 만도 했다.
게다가 발렌시아누스가 시그마인을 참수한 건 사실이고, 새 후작이 막내딸인 것도 사실이며, 그 언니와 오빠가 주도(主都)를 떠나 변경으로 향한 것도 사실이다.
사실에 기반을 둔 이야기에는 강한 매력과 설득력이 있다.
“그대가 알려줄 정도면 이미 수도에 널리 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군.”
“아직은 알음알음 떠도는 정도입니다만, 곧 시장바닥을 떠돌게 되겠지요.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후작의 저주를 받아 몸에 비늘이 돋는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발렌시아누스는 내심 후작가 사용인들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어지간해서는 고용 승계를 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어지간하지 않은 자들이 물갈이되는 건 피할 수 없다.
제이릴리스가 피로 즉위하는 걸 보고도 마담 라베시아와 서궁의 고용인들이 예산을 빼돌리던 걸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새 후작이 즉위하고 쫓겨난 사용인들이 술집에서 온갖 푸념을 늘어놓았을 게 뻔했다.
“그건 마냥 흘려들을 수는 없겠군.”
어느새 ‘희망’ 앞을 지나게 된 둘.
발렌시아누스는 적가면에게 돈주머니를 받아 들며 말했다.
손등에 반투명한 암적색 비늘이 다시 돋아 있었다.
‘예상보다 진행이 빨라. 이대로는 안 된다.’
* * *
야광 버섯이 5층 집을 뒤덮고, 사람 먹는 덩굴을 화분에서 기르고, 머리 셋 달린 뱀이 주인을 산책시키는 곳.
2층 굴뚝 위로는 초록색 연기가, 방 창문으로는 노란 연기가, 거실 창문으로는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 앞에서 발렌시아누스는 멈춰 섰다.
그곳은 배움의 거리 북쪽의 마법 거리, 황족 사생아 중 한 명인 바스타틴이 운영하는 마법약 가게였다.
그가 가볍게 문을 두드리자 곧바로 문이 왈칵 열렸다.
“어서 오십쇼! 바스타틴의 마법약 상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원하시는 게 있다면 뭐든지 말해 보십시오. 상처 치유의 물약? 정신을 맑게 해주는 약? 암기를 잘하게 되는 약? 행운을 가져다주는 약? 정력제? 찾으시는 모든 약이 여기 있습니다.”
엉클어진 녹색 머리카락에 병아리 같은 노란 눈을 가진 장난기 넘치는 인상의 사내가, 유쾌한 목소리로 그때와 토시 하나 달라지지 않은 인사말을 외쳤다.
오늘도 그는 셔츠 앞에 깔끔한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는데, 마법사보다는 잘생긴 꽃집 주인이 떠오르는 차림이었다.
여전히 가게 안은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
바스타틴은 새 손님의 얼굴을 보자마자 옆문을 열고 외쳤다.
“죄송합니다! 오늘 영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네?”
“아니, 아직 다 고르지도 못했는데.”
“내일 대기표 1번으로 넣어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백발 금안에 붉은 띠를 두른 사내가 파충류처럼 세로로 찢어지려 하는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업원에게 배움의 거리 가서 진 불러오라고 해. 여기서 보고도 같이 듣도록 하지.”
“예, 예.”
바스타틴은 과거와 달리 발렌시아누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리자드맨, 나가, 메두사 등 파충류 계열의 혈통이 강하게 발현된 사생아였고, 지금 발렌시아누스는 비늘 달린 자들이 본능적으로 섬기는 용의 기세를 은은히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렌시아누스는 자연스럽게 가게 안쪽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요즘은 독기 다루는 연습도 많이 하나 보군.”
“하하. 티가 납니까?”
“머리카락, 손목의 혈관, 가게에 새로 들어온 약들. 그리고 자네가 지금 그 차에 탈까 말까 고민하는 그 액체.”
“하하. 바로 들켰군요.”
“웃으면 없던 일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아악! 항복! 항복! 제가 몸 바쳐 침식자를 쓰러트리는 데 일조했는데 저를 죽이실 겁니까?”
발렌시아누스는 비늘 돋친 손을 거두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바스타틴은 목숨을 걸어 혈통을 책임질 능력과 자격을 갖췄음을 증명했다.
“그래. 그럼 우리 지성인답게 대화를 하도록 하지. 비룡화를 멈출 수 있는 독이나 약을 내놓아라.”
바스타틴은 발렌시아누스의 요구에 경악하며 혀를 내둘렀다.
“대체 그 어디가 대화입니까. 저는 장사꾼입니다. ……받는 게 있어야지요!”
그가 표정을 바꾸고 초록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으로 원을 만들어 보였다.
발렌시아누스는 대화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그 시도를 조소했다.
바스타틴은 나이에 맞지 않은 수완가였지만, 그는 40년간 온갖 인간 말종과 인간도 아닌 말종과 엮이며 살아간 자였다.
기세 싸움에서 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래. 받을 거라? 자네. 세금 낸 지 얼마나 됐지?”
“?!”
농민은 수확량의 10%를 영주에게, 10%를 교회에 낸다.
그러나 도시에서 활동하는 장인들과 영지를 오가는 상인들의 세금은 다르다.
영지마다 세금 받는 물건과 액수가 다르고, 특정 길드나 상인회에 특혜를 주기도 하는 등 매우 복잡하다.
“마법약은 최근 개정된 상법에 따라 육성 지원 사업이라 세금이 낮지.”
“아.”
“순수입의 50% 정도?”
“히이이이이익!”
제조 능력 자체가 중요한 사업이라 원가의 수십 배로 이윤이 남았다.
당연히 세금도 높은 편이었다.
바스타틴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숨이 멎을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 마법약 협회에 등록은 했나?”
발렌시아누스는 그의 여동생 같은 가학적인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안 했다는 걸 알고 하는 질문이었다.
마법 거리는 아카데미 졸업 후 취업 못 한 궁정귀족 가문 차남 이하 마법사들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각 길드와 협회의 정당한 항의를 혈통과 능력으로 찍어 누르면서.
“마법사의 미등록 영업은 불법이지. 최소 압류, 최악의 경우에는 교회에서 이단으로 찍혀 화형당할 수도 있네. 정말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하나 없는 삶을 살았나?”
“대공 전하. 잠시만 제 말을…….”
“그리고 그게 성자와 황제 폐하의 회담을 성공시킨 내 입김보다 강할 거 같나?”
“예!? 언제 그런…… 아! 아악!”
발렌시아누스의 황금색 동공이 파충류처럼 세로로 찢어지기 시작했다.
“비룡화 되어가는 대공에게 감히 뭐 뜯어낼 생각 말고 아는 대로 말해라! 이 빌어먹을 변이를 억누를 수 있는가, 없는가?”
발렌시아누스가 천둥처럼 고함치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목 아래까지 암적색 비늘이 솟았다 내려앉았다.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차를 비웠다.
“미안하게 되었네. 이게 부작용으로 감정 조절이 잘 안 되는 거 같은데. 어? ……자네 결국 독을 넣었나?”
“어, 그게. 전하. 제 말을…….”
발렌시아누스가 피 섞인 침을 뱉고 검을 뽑았다.
“리자드맨 피가 섞였으니 어디 하나 잘라도 다시 나겠지?”
“전하! 전하!”
* * *
“일단 검사부터 해보지요.”
바스타틴은 평생 의족을 차야 할 뻔한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더더욱 엉클어진 녹색 머리를 대충 쓸어넘긴 그가 발렌시아누스에게 파란 액체가 담긴 약병 하나를 내밀었다.
“용찬이라는 걸 직접 본 건 처음이지만, 전하의 증상은 저도 비슷하게 겪어 보았습니다.”
발렌시아누스는 노란 눈을 빛냈다.
“그런가?”
호기심과 절박함을 숨기기에는 너무 중요한 일이었다.
제이릴리스의 신뢰를 받은 지 며칠도 되지 않아 그녀의 손에 토벌당할 수는 없었다.
“저도 그랬고, 저 말고도 파충류 계열 특성이 강하게 드러난 황족들이나 귀족들도 꽤 자주 찾는 약입니다.”
“흔한 증상인가?”
“예. 제가 보기에는 전하는 비룡화보다는 그저 힘을 제어하지 못하시는 거 같습니다.”
발렌시아누스는 분노를 억누르며 경청했다.
바스타틴이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황실은 원래 용혈을 품었잖습니까? 그게 자극당해서 조금 험하게 드러나는 정도일 겁니다.”
“그럼.”
“이 약이 들면 전하께서는 전하가 얻은 능력, 그러니까 화염 능력이나 비늘 같은 걸 훨씬 잘 다루실 수 있을 겁니다.”
발렌시아누스는 내심 흡족하니 웃었다.
바스타틴의 목소리에는 나름의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그가 회귀 전에 관심을 가질 일이 없어서 그렇지, 꽤 연구가 진행된 분야인 거 같았다.
“약이 안 들면?”
“악룡이 되어 토벌당하시겠지요.”
발렌시아누스는 곧바로 약을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