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81화
(81)
바스타틴이 얼굴까지 녹색 비늘을 끌어올렸다 다시 감추며 빙긋빙긋 웃었다.
“어떠십니까?”
“얼굴 치워라. 사내놈 얼굴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거 싫어한다.”
발렌시아누스는 푸른 액체가 빠르게 퍼지는 걸 느끼며 테이블을 양손으로 꼭 쥐었다.
핏속을 따라 흐르는 마나를 따라 온몸의 근육에 흡수되고 있었다.
몸이 따듯해지는 거 같기도 했고, 힘이 빠지는 거 같기도 했다.
“그거 비싼 겁니다!”
“안 부순다. 그 정도 제어력은 있어.”
쩍!
발렌시아누스의 손아귀에 잡힌 나무 테이블 끝이 떨어져 나가고, 그의 몸이 휘청였다.
바스타틴이 경악하며 외쳤다.
“괜찮니?”
“갑자기 말이 짧아지는구나.”
발렌시아누스가 거친 숨을 내쉬었고, 바스타틴은 고개를 저었다.
“전하 말고 테이블에게 물었습니다! 얼마나 착하고 여린 아이인데요.”
발렌시아누스가 노란 눈을 치켜떴다.
어느새 세로로 찢어졌던 동공이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다.
“네놈. 연초를 피우는 건가?”
“아닙니다! 이거 살아 있는 거라고요. 생나무입니다. 보세요. 창문 밖으로 덩굴이 뻗어 있잖아요!”
발렌시아누스는 테이블 옆으로 길게 이어진 줄기가 생 덩굴이라는 걸 확인하고 내심 경탄했다.
꽤 멋들어진 인테리어였다.
“이건 꽤 좋군. 사과하지. 미안하게 되었다. 어떤 나무지? 나도 구하고 싶은데.”
“베노티아 필로클라디움.”
바스타틴이 유려한 목소리로 학명을 읊었다.
답변을 들은 그가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그거, 금지된 독초인 줄 알았나?”
“예? 당연히 알았…… 아닙니다. 방금 처음 들었습니다.”
“네가 오늘 죽을 고비를 세 번쯤 넘기는구나.”
“넘긴 겁니까?”
발렌시아누스는 잠시 고민하다 몸 상태를 점검했다.
비늘은 쏙 들어가 있었고, 사춘기 소년마냥 오락가락하던 기분도 다시 차분해졌다.
그는 눈을 감았다 뜨며 용언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히익!”
바스타틴이 그 황금색 파동을 보며 비명을 내질렀다.
발렌시아누스는 흡족하니 웃었다.
“그래. 약이 아주 잘 듣는군. 네놈이 오늘 내게 보여준 수많은 무례는 모두 없던 것으로 해 주겠다.”
“무례라니요?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황족 암살 미수는 화형이고, 황족에게 독을 먹이면 와이번핏에서 몸이 찢기지, 황족 모독죄는 재산 다 털리고 거리로 나앉고.”
“살려만 주십쇼.”
“방금 없던 걸로 해 주겠다고 말했잖느냐.”
바스타틴이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발렌시아누스는 가학적으로 웃으며 약병을 흔들었다.
바스타틴이 손을 뚝 떨어트렸다.
환하던 얼굴이 추운 도마뱀처럼 침울해졌다.
“그거 비싼 겁니다.”
“나도 알아. 그럴 거 같다. 그래도 네가 낼 세금보다 비싸겠냐?”
“거리 자체가 무허가로 장사하는 놈들로 이뤄졌습니다! 왜 하필 제게 오셔서……!”
바스타틴이 울컥하며 항변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를 위로하듯 말했다.
“그 세금 너만 낼 거 같냐?”
“예?”
문득 바스타틴은 발렌시아누스가 그 수많은 악명과 망측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이릴리스의 옆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몇 달 전, 홍등가의 지배인들이 탈세와 마약과 살인 청부와 옛것 숭배를 비롯한 온갖 혐의로 갈려 나갔을 때.
그때 유일하게 살아남아 지금 홍등가의 왕이 된 지배인이 발렌시아누스와 밀월관계라는 소문도 들어 본 적 있었다.
그때 황제가 홍등가에서 뜯어낸 돈이 얼마라고 했던가?
바스타틴은 목소리를 착 깔고 물었다.
“전하. 설마.”
“설마?”
“황제 폐하가 마법 거리도 노리시는 겁니까?”
발렌시아누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이곳도 상아탑 특구만큼이나 유명해졌지. 지방 귀족들이 이곳을 찾아와 물건을 살 정도니.”
“예.”
“그런데 애초에 대충 만들어진 곳이다 보니 관리가 하나도 안 되고 있어. 옛것 숭배나 흑마법 계열도 통제가 안 되고. 당장 네놈도 독초를 기르고 있지 않나?”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친족들을 모두 숙청하신 분이지. 그 정도로 통제와 안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 세금도 뜯어낼 수 있는 이곳을 언제까지 방치하실 거 같나?”
바스타틴은 침을 꿀꺽 삼켰다.
돈을 정리해서 숨겨놓을 곳을 구하고, 이상한 약들은 회원제로 판매해야겠다 생각하면서.
발렌시아누스가 안색을 바꾸며 말했다.
“이만하면 네 목숨을 살려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
바스타틴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이 파란 약 있는 대로 줘 봐라.”
이어진 말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나는 파란 약이 가득 담긴 사각 가방을 들고 마법 거리를 나섰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진이 내 옆으로 따라붙었다.
짙은 회색 머리에 약으로 만들어낸 푸른 눈동자. 여전히 잘생기고 성실한 놈이었다.
“방학 기간이라 큰 문제가 여럿 일어났습니다.”
“할 일이 지지리도 없는 놈들이 개인 연구를 시작했겠군. 아카데미다 보니 조금 위험한 책들도 교수 연구실에는 있을 거고.”
“예. 정확하십니다.”
“네 선에서 잘 해결할 수 있었나?”
“다행히 옛것 계열은 아니고 악마 계열이었습니다.”
물론 그 둘의 본질은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악마들은 싸잡아 옛것이라고 부르는 이물들에 비해 훨씬 더 인간 사회를 잘 이해하고 있고, 대화나 협상 역시 가능하다.
“흑마법에 손을 대기 시작했군.”
“저희 황족 사생아 중 몇몇이 소환술 쪽으로 재능을 꽃피웠습니다. 그런데 여기가 장소가 장소다 보니 정령 소환은 불가능하고…… 결국 악마 쪽으로 빠졌지요.”
“오히려 그쪽이 상대하기 어려웠을 텐데. 괜찮냐?”
옛것에 침식되면 이성 없는 괴물이 되지만, 악마와 계약하면 더 교활해진다.
진이 그 단단한 턱을 좌우로 저었다.
“제가 이긴 게 아닙니다.”
“그럼?”
“인신 공양 제물을 구하겠다고 빈민가로 가더군요. 거기서 늑대인간들에게 두들겨 맞고 교회로 끌려간 게 두 놈, 도망치다 제가 처리한 게 세 놈입니다. 일반 학생들도 몇 명 끼어 있어 피곤했습니다.”
늑대인간.
나는 그 단어를 듣고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처리라고 하면?”
“완전히 불태워 운하에 뿌렸습니다.”
“잘했다. 힘들었을 텐데.”
“알면…….”
“황금 치료다. 받아라. 내가 아는 최고의 약 중 하나지.”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건네자 진이 싱글벙글 웃었다.
“고기 사 먹을 생각이냐?”
“사 줘야지요. 최근에 몸을 사리느라 성적이 떨어져서 장학금을 놓친 아이들이 많습니다. 믿어주실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능력 있고 뿌리인 황실에 대한 선망도 있는 아이들입니다.”
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 돌봐 줘야겠군. 인재들이 유출되지 않도록. 하나 더 가져가라. 그리고 네가 보기에 진짜 괜찮은 애가 있으면 데려와. 마법사든 기사든 행정관이든.”
“가능한 겁니까?”
“가까이 두고 부려 먹으며 감시하겠다고 하면 폐하께서도 좋아하면 좋아하셨지 반대는 안 하실 거다. 특히 마법사 쪽.”
나는 제이릴리스가 언제나 군비 확충을 열망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금속 술사나 주술 회로 잘 새기는 애들 곧 많이 필요하게 될 거야. 스크롤을 양산하고 황실의 네 기사단에서 쓰는 수준의 갑옷을 더 만드실 생각이거든. 올해 졸업하는 애들 준비시켜 놔. 꽂아줄게.”
세레라지에의 공방에서 밥도 못 먹고 구르게 되겠지만.
진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고개 들어라. 어서 들어가. 최근에 내 악명이 더 늘었다니, 누가 보면 큰일이다.”
나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진이 그 자리에서 물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빈민가. 마차 한 대 잡을 생각이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그쪽 많이 변했습니다.”
그곳을 바꿀 만한 사람이라.
짚이는 바가 있었다.
* * *
여기저기에서 망치질 소리와 톱질 소리가 들리고 벽돌 쌓는 손길들이 보였다.
사방에서 널빤지를 중축한 가건물들이 허물어지고, 측량 기사들이 빈민 인부들의 인사를 받았다.
나는 임시치고는 꽤 번듯한 목제 조립식 교회로 들어섰다.
“아이고.”
“광명신이시여.”
몇몇 부상자들이 누워 있었는데, 주먹다짐이나 칼에 찔려 난 상처가 아니었다.
옥상 작업을 하다 떨어지거나, 못을 밟아 다친 상처가 대부분이었다.
다행히 진료 공백은 없어 보였다
“치료 받으시고 기도회 참석하시고 가시면 됩니다. 일이 급하시면 주일에 오세요.”
방학을 맞아 몰려온 신학생들이 임시 교회에 바글바글했다.
한쪽에서는 화덕을 설치해 놓고 세 번 구워 어지간해서는 썩지 않는 비스킷을 굽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커다란 국 통에 물을 붓고 있었다.
또 한쪽에서는 빈민들이 모아온 이단이나 침식자의 물건들을 정화하고 있었고, 그 옆에서는 커다란 고리 십자가 목걸이를 찬 사내가 치유의 은총을 베풀고 있었다.
저기 새겨진 주문이…… 존재 인식 저하?
후작가의 그 돌기둥에 새겨진 것과 기본 배경이 비슷해서 금방 알아보았다.
“마지막 분이시죠? 앞으로 조심하셔야 합니다.”
“예. 선생님. 다음부터는 기도회에서만 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은밀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성자님. 여기서 뭐 하십니까?”
“발렌 대공? 어떻게 알아본……!”
칠흑 같은 머리에 칠흑 같은 눈동자를 가진 훤칠한 사내.
화형선고자, 검은 성자 마테오스 투모르가 빈민가에서 빈민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화려한 예복 대신 신학 대학의 옷을 입은 채였다.
“홍의주교님께는 비밀입니다.”
그가 눈을 이글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능글맞게 웃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잠시 자리를 옮기지요.”
성자가 나를 임시 교회 뒤로 끌고 갔다.
“발렌 대공. 나를 찾아온 게 아니라면, 여기는 왜 온 겁니까? 설마 인간 사냥은 아니겠지요?”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아직도 제가 그런 짓을 하고 다닐 줄 아십니까?”
“아직도?!”
성자가 기겁했다.
나 역시 다급하게 해명했다.
“아니, 그 뜻이 아니라. 성자님께서는 아직도 제가 그런 일을 할 거 같다고 보시는가, 그 말이었습니다.”
“200명의 성기사를 농락하고 홍의주교를 납치하자고 했던 발렌 대공이라면 충분히…….”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저를 찾아온 게 아니고, 인간 사냥을 하러 온 것도 아니면, 대공이 여기는 왜 온 겁니까? 봉사 활동을 하려고 오지는 않았을 거 아닙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저도 봉사 활동 좀 할 수 있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그런 게 있습니다. 그렇게 알아 두십시오.”
그가 검은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수상한 음모를 꾸미고 있나 보군요. 알겠습니다. 설마 프로이하이트 후작령에서와 같은 일은 아니겠지요?”
이번에는 내가 한숨을 쉴 차례였다.
벌써 여기까지 전해졌나?
역시 교회의 정보력은 대단했다.
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니, 성자가 다급하게 물었다.
“황제를 등에 업고 시그마인 후작을 불태우며, 그 막내딸을 범한 뒤 꼭두각시 후작으로 앉혀 놓고, 도움이 되어 줄 언니와 오빠는 추방한 게 맞습니까?”
나는 눈을 부릅뜨며 답했다.
“예. 제가 분명히 그렇게 했고 말고요. 다 제가 한 게 맞습니다. 후작을 불태우고 그 딸과 한밤중에 밀회를 나누었지요. 설교 시간에 그렇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광명신이시여!”
그가 졸도할 거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내 등짝을 후려갈기고 회개하라 울부짖은 검은 성자를 뒤로하고 코넬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막 가건물 철거가 끝난 듯 깔끔해진 벽돌 건물에서 늑대의 시선이 느껴졌다.
계단을 한 칸 한 칸 오르고 있으려니 몇몇 사내가 위아래로 나를 둘러쌌다.
빈민가 출신답게 않게 몸이 단단하고 눈빛이 강렬한 자들이었다.
전사를 사랑하는 늑대 옛것, 아몬의 기운이 느껴졌다.
늑대 인간에게 두들겨 맞았다고 했었지.
나는 피식 웃으며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노란 동공을 세로로 바꿔 뜨면서.
“코넬.”
“어째 더 강해지셨습니다.”
단발로 자른 밝은 적갈색 머리와 약간의 주근깨가 있는 뺨, 영악하고도 총명한 인상의 소녀.
밝은 상아색 코트를 단정하게 입고, 의족과 지팡이를 짚고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관리는 잘 되어가는 모양이구나?”
“검증이 필요하십니까?”
“아니. 되었다.”
나는 진심으로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미 충분히 보았다.”
이제 곧 빈민가는 빈민가가 아니게 될 거였다.
저 소녀의 손에서.
“받아라.”
“이제…… 이건 괜찮습니다.”
나는 돈주머니를 건넸고, 코넬은 돌려주었다.
순방의 끝에서 본 건 꽤 마음에 드는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