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82화
(82)
상아탑 50층의 대회의실에 마법사들이 모여들었다.
대회의실은 제일 낮은 중앙에 원형 단상이 있고, 그 주변을 고리형 의자로 겹겹이 둘러싼 형태였다.
스무 살 이전에 무영창 마법을 쓰거나, 4서클에 오른 신예들이 맨 뒤에서 미래가 결정되는 순간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오늘 결정하는 게 정확히 뭔지 알아?”
“마도서 관련된 거라고 들었는데.”
“마도서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걸 이용하는 방식에 대한 본질적 토론? 이라고 들었어.”
한참 논문을 내고 자가 제작 마도구를 상업화하는 데 성공하며 날고 기는 젊은 마법사들은 중간 열에서 모여 앉아 눈을 빛냈다.
“알만하신 분들이니 사업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만.”
“한 사람의 마법사로서 우리도 따져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하네.”
“진리에 관하여.”
본격적으로 토론에 참여할 각 학파의 거장들과 원로들은 단상 근처에 둥그러니 붙어 앉아서 헛기침했다.
“이미 다들 마음속으로 답을 정해온 모양이구만.”
“진리관은 우리가 스무 살 때부터 찾지 않았나?”
“이제야 이걸 이야기하는 것도 웃기는군요.”
상아탑 전 세대의 엘리트들이 그 자리에 모여 있었다.
암흑학파의 원로, 블라혼이 단상에 올라서 입을 열었다.
그는 보라색 무늬가 새겨진 검은 로브를 입고 관자놀이 위로 한 쌍의 뿔이 돋은 중후한 인상의 사내였다.
“그럼, 시작하도록 하지.”
광학 술식이 번쩍이고 한 거대한 마도서의 환영이 원로의 머리 위에서 나타났다.
“진리는 오로지 스스로 탐구하는 것인가? 이미 있는 것을 이해하는 것인가? 이미 있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그 수단은 상아탑의 규칙에 따라 제한될 수 없는가?”
최근 상아탑의 많은 마법사가 세대를 가리지 않고 빠져든 주제였다.
시작은 한 원로가 한 고대 엘프 문자 체계를 정리하는 데에 성공하면서부터였다.
그 덕에 지금까지는 창고에서 보존만 해 왔던 마도서들을 모두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정령 마법, 부여 마법, 생물 마법, 강화마법 등의 분야에서 엄청난 발전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마도서 중에는 옛것을 ‘다루는’ 방법이 적힌 마도서도 있었다.
옛것을 이해하는 방법은 침식되는 것뿐이고, 그럼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게 세상의 상식이었지만, 고대 엘프들은 모종의 수단으로 옛것의 지식과 힘을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뽑아내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지식과 진리를 탐구하는 마법사들에게 그건 너무나 매혹적인 일이었다.
화염학파의 원로, 이피제가 손을 들고 발언했다.
“우리는 발견하는 자이지, 발명하는 자가 아니야. 우리가 무엇을 찾고 만들든 간에 그것은 원래 존재하는 것이지. 그러니 진리는 찾는 게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다.”
붉은 로브를 입은 하이엘프 혼혈의 그녀는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우리 상아탑은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 있어 어떠한 제한도 두지 않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빙결학파의 원로, 서리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마도서가 발견된 엘프 유적은 초토화되어 있었지. 전쟁에서 패배했거나, 내분이 일어났거나, 진리가 아니라 함정이었을 거다.”
“단정 짓는 발언은……!”
“함정이었다면 더 논할 필요도 없지. 앞의 둘도 같아. 진리라면 모두 이해했을 테니 내분은 없었겠지, 진리를 찾은 자가 전쟁에서 패배했을 리도 없고.”
서리소, 반투명한 머리카락의 겨울 요정 혼혈 마법사는 아무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고 말했다.
“아직 진리를 찾았다는 마법사는 없어. 이미 있는 걸 이해해서 진리에 닿을 수는 없다고. 우리가 최전선이다. 그러니 우리는 탐구자야. 그런데 옛것 따위의 지식에 기대 진리를 찾는다? 수천 년 전부터 이 세상을 노리다 수천 년 동안 패배한 것들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럼…….”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한참 동안 격렬한 토의가 이어졌다.
다들 연구를 위해 한 달 정도씩은 철야 해본 적이 있는 자들이었다.
반박하기 위해 논문 하나를 그 자리에서 읊는 자도 있었다.
학당의 신예들은 모두 받아 쓰다 나가떨어지거나, 정신 오염을 당해 비틀거렸고, 엘리트들은 결과에 따라 사업을 어떻게 확장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가 흐르자 마침내 거수의 시간이 왔다.
* * *
상아탑은 다수결 체제가 아니었다.
진리는 다수결로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소위 ‘안정화’의 측면에서 지나치게 첨예한 안건을 뒤로 미뤄 버리는 데에는 그만한 게 없었다.
“찬.”
“찬.”
“반.”
원로들이 하나둘 손을 들고, 일주일 동안 받아쓰기를 해낸 학당의 신예들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동서기 마법이 없는 게 너무나 한스러울 뿐이었다.
“게스타르테. 네가 마지막이다.”
전격 학파의 장이 말했다.
“아, 미안. 지금 몇 대 몇이지?”
“거의 비등하다. 찬성이 한 명 많아.”
윤기 넘치는 붉은 머리와 그물 망사 드리운 화려한 모자로 눈과 귀를 가린 마법사, 게스타르테.
일류 패션 디자이너 같아 보일 정도로 화려한 옷을 입고 모피를 걸쳤으며, 주먹만 한 석류석이 박힌 지팡이를 든 전격 마법사.
전격 학파 최고의 실력자이자 세레라지에의 스승.
그녀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떴다.
그녀의 성격상 본래라면 찬성했을 것이다.
그녀 역시 진리를 찾는 길에 어떤 방해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울그림의 펜촉에는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원로들께서는 그걸로 고대 마도서를 해독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통제되지 않는 지식을 제멋대로 출력하며 지성을 타락시키다, 끝내 모두를 침식의 길로 이끌 파멸적인 계획이었습니다.’
자신의 제자와 함께 찾아왔던, 지나치게 자신만만하던 그 백발금안의 대공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동서기, 울그림의 펜촉으로 해독하려 했던 마도서가 저것 아니었던가?
“반대.”
곧바로 탄성과 고성이 터져 나왔다.
그녀를 아는 모든 마법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게스타르테!”
“왜 그런 선택을?”
“네가?”
맨 처음 입을 열었던 암흑학파의 원로, 블라혼이 오른쪽 다리를 두 번 앞으로 옮기다 넘어지고,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서리소가 입을 쩍 벌리고, 화염 학파의 이피제가 변장 해제 마법을 날렸을 정도였다.
게스타르테는 그 수많은 시선을 받아내며 세레라지에 이후 새로 들인 제자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는 일주일간 이어진 토론의 모든 대화를 받아쓰는 데 성공한 몇 안 되는 신예였다.
“돌아가면 이번에 보고 배운 점과 느낀 점을 정리하는 시간을 주겠어. 궁금한 게 있니?”
“이제 그 마도서는 봉인되는 건가요?”
“아니. 이건 그냥 의식에 불과하단다. 만약에 잘못되었을 때 반대한 우리에게 책임은 없다는 거지.”
둘은 여전히 고함을 지르고 있는 마법사들을 뒤로하고 복도로 나갔다.
넓은 창문에서 햇살이 쏟아졌다.
“그럼 저들이 멋대로 소환을 치를 수도 있다는 거네요?”
게스타르테는 이피제와 블라혼을 흘깃 바라보았다.
손을 맞잡고 각오를 나누고 있는 거 같았다.
“그래.”
“그러다 우리까지 피해 볼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
“그럼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게스타르테는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집어 정돈하며 말했다.
“우리가 무슨 근거로 말리겠니. 나도 모두가 반대한 실험을 몇 번이나 강행했단다. 심지어 성공했고.”
상아탑은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 있어 어떤 선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럼.”
제자는 주황색 눈을 불안하게 희번덕거렸다.
“탑 바깥 사람을 불러와야지.”
“그것도 금지…… 아!”
복도 창문 쪽에서 걷던 게스타르테가 제자에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윤기 흐르는 붉은 머리, 깃털과 망사로 장식한 풍성한 모자, 화려한 드레스는 안 그래도 장신인 게스타르테가 몇 배로 거대해 보이게 했다.
“네 앞에서 말하기는 미안하지만, 그 아이는 내 최고의 걸작이란다.”
그러나 주황색 눈의 제자는 주눅들지 않았다.
“다음 걸작은 제가 될 겁니다.”
* * *
금은 요동의 세레라지에는 새 시약을 활용한 주문 시안들을 모두 바닥에 집어 던졌다.
“이걸 걸작이랍시고 가져온 거니? 최소한 기존 방안보다는 나아졌어야 하는 거 아니니? 내 설명은 귓구멍이 아니라 콧구멍으로 들었니?”
그녀의 제자들이 바닥을 기어 다니며 애타게 울부짖었고, 생도들은 구석에서 벌벌 떨었다.
“세레라지에 님!”
“제발 한 번만 다시 읽어주십시오.”
“내가 그 버섯 따 오려고 용 살던 굴까지 들어갔는데, 그걸 너희에게 1kg씩 나눠 줬어. 10g도 아니고 100g도 아니고 1kg! 그런데 이딴 걸 가져왔으면 너희라고 다른 반응을 보였을 거 같니? 걸작이라고만 안 했어도 이렇게 화나지는 않았을 거잖니. 나 놀리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제자들이 눈물로 읍소했다.
세레라지에는 처참한 결과물을 보고도 차마 나가라고 하지는 못했다.
그녀 역시 기회를 받아 올라왔기 때문이다.
“100g씩 더 줄게. 이번에도 실패하면 그때는 마법 스크롤 만드는 팀으로 보낼 거란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던 제자들이 파란 버섯 조각을 받아들고 연구실로 뛰어갔다.
나는 세레라지에에게 빵 봉지를 내밀었다.
“나중에 먹여.”
“이미 있단다.”
정말로 한쪽에 빵이 쌓여 있었다.
내가 의외라는 시선을 보내자 그녀가 답했다.
“그런 불량한 눈으로 나를 보지 말렴. 먹여야 결과가 나올 거 아니니. 먹였는데도 안 나와서 화내는 거지.”
“그래.”
“나 혼자 붙들고 있어서는 이쪽에 발전이 없을 것 같구나. 아무래도 스승님을 만나고 와야겠어. 마침 초대장도 보내셨고.”
스승님의 초대장.
그 말을 들은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잘 진행되고 있는 거 아니었어?”
“그건 스크롤 사업. ‘퍼지는’ 거랑 ‘파고드는’ 거. 그쪽은 이제 슬슬 양산화 시작 했어. 빈 애들은 그쪽으로 간 거야.”
역시 천재는 천재였다.
주문 하나를 만드는 건 집중해서 연구해도 년 단위로 걸리는 작업이다.
그걸 스크롤에 각인해서 양산화할 수 있을 정도로 최적화시키고 안정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5년 정도다.
자기 주문을 이용한 공방이 돌아가면 한 사람의 마법사로서 대성했다고 본다.
그런데 그녀는 6개월도 되지 않아 두 개의 주문을 양산화한 것이다.
“그럼 지금 조언 구하려는 건 뭐야?”
“너는 들어도 이해 못 하겠지만.”
“그 부분은 잘라내고 말해 봐. 간단하게.”
“간단하게 말하라는 거면 이해 못 하는 게 맞잖니? 음. 시약 효율에 대한 연구란다.”
“중요하네.”
나는 세레라지에를 따라 제국 마도 공방을 나섰다.
세레라지에는 왜 따라와,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미리 말하지만, 가서 검은 뽑지 말렴.”
“내가 검을 왜 뽑아? 누나 지금 출장 가는 거잖아. 나는 고문 겸 보좌관이고.”
“내가? 그리고 네가?”
“누나는 공방주인 동시에 대 상아탑 전문 소통 위원이야. 명패도 주문해 줄까?”
“내게 언제 그런 직함이 생긴 거니?”
“내가 폐하께 보고해서 만들었지. 뭐가 되었든 기존 조직의 틀을 활용하는 건 중요하다고. 많은 인재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고, 직무가 명확해지지.”
세레라지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40년 차 행정관료 같은 소리구나. 너는 참 대단해. 정말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나를 괴롭게 하잖니.”
“칭찬으로 들을게.”
“아니란다. 남의 말을 함부로 곡해하지 말렴. 나쁜 버릇이야.”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건 곡해가 아니라 선해야. 내가 선해해주는 사람 많이 없다? 영광으로 알아.”
“번개여!”
* * *
상아탑 60층, 게스타르테의 연구실은 그때와 비슷한 광경이었다.
붉은 보석과 은으로 된 장식, 색색의 커튼과 태피스트리가 가득했다.
화려한 의상실에 온 거 같기도 했다.
그때 있던 세레라지에 또래의 제자가 힐끔힐끔 세레라지에를 바라보며 질투 어린 시선을 보냈다.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밝은 회색 생머리와 달리, 강렬한 감정이 깃든 주황색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세레라지에는 한참 동안 그녀의 스승과 대화를 나누었다.
수 겹의 화려한 옷을 입고 깃털 모자를 쓴 마법사와.
“그럼…… 지금 화염학파와 암흑학파 쪽에서는 그 마도서를 결국 볼 생각이라는 거네요? 옛것과 얽힌 마도서를?”
“그렇지. 지금쯤 실험실도 다 꾸려 놨을걸?”
쿨럭!
나는 마시던 차를 다 토해낼 뻔했다.
마법사들이 단체로 미친 모양이었다.
세레라지에가 나를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그녀 역시 잔뜩 불안감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와 함께 침식자들과 몇 번 싸우며 그 위험함을 깊게 체감했겠지.
“동생아.”
“왜. 누나?”
“이건 말려야 할 거 같구나.”
그녀가 금은 요동을 빛내며 일어섰다.
나는 각오를 시험하려 물었다.
“상아탑은 바깥의 윤리와 상식 따위는 신경 안 쓰는 것 아니었어? 또 여기는 자치구잖아.”
“지금 저것들이 탑을 통째로 무너트리려 하고 있잖니. 게다가 법 위에 선 대공이 둘이나 있는데 그깟 자치령 조례 따위. 가자꾸나.”
나는 아릿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럼 검 뽑아도 돼?”
세레라지에가 지팡이에 전격을 끌어모으며 말했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