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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84화 (84/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84화

(84)

큰 유리창에서 환한 볕이 들어오는 긴 곡선 복도에 수십 명의 마법사와 한 명의 대공과 한 명의 마법사 대공이 있었다.

“방금…… 그게 탈출한 겁니까?”

“어디가 잘못되었던 겁니까?”

우리는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붉은 안개와 흰 뼈가 구슬처럼 변하고, 피가 닿자마자 거품처럼 부풀어서 날아오르더니, 척추가 만들어지고 창문 밖으로 도망쳤다.

나는 세레라지에가 승강기 쪽으로 달려가는 걸 보며 머리를 서늘하게 식혔다.

놈의 속도는 빨랐고, 정신 파동도 강렬했다.

용찬을 한 나도 일순 눈을 감았을 정도였다.

나랑 세레라지에 둘이서 찾아서 잡으려다가는 역으로 당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일단 잡아도 그다음이 문제였다.

상아탑에서 황제의 인가도 없이 불법으로 옛것 연구를 하다 사고를 친 상황이…… 아니다.

나와 세레라지에가 말하지 않았나?

우리의 참관 아래 실험이 진행되었다고.

즉, 이 사태에서 피해가 발생할 경우 우리 책임도 상당하다는 거다.

다 우리 책임이라도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쩌지?

나는 진심으로 고민했다.

제이릴리스에게 그 면벌부를 이번에 쓰겠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사형은 면하겠지만, 기껏 얻은 신용을 추하게 날려 먹을 거다.

이게 그녀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내 선에서 막아야 했다.

그러려면 상아탑을 끌어들여야 했다.

적어도 그들이 나와 세레라지에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하아.”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실험을 진행할 영광을 받아서 들떠 있던 신예 마법사는 자결하고 싶어 안달 난 표정이었고, 그 스승 이피제는 붉은 로브를 꽉 쥐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이엘프 혼혈이라는 긴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예상보다는 좋은 반응이었다.

적어도 내게 책임을 뒤집어씌울 생각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이물이 도망쳤는데 이런 것부터 생각하는 내가 싫었지만, 세레라지에까지 나랑 같이 죽일 수는 없었다.

“이피제 님.”

“대공 전하.”

그녀 역시 나만큼이나 황망한 표정이었다.

나는 일단 마도서를 바라보았다.

사고를 쳤을 때는 증거부터 인멸해야 한다.

“저게 계속 여기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아직도 붉고 흰 기운이 남아 있는 거 같습니다만. 이피제 님과 모두를 속인 만큼 계속 놔두면 위험할 거 같습니다.”

‘속인’에 강세를 주어 말했다.

우리 모두를 옛것의 술수에 넘어간 피해자로 만들어주는 단어였다.

이피제가 귀를 움찔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처음부터 함정이었군요. 우리 모두가 속았습니다. 물질화하기 이전까지 그렇게 정순할 줄은 몰랐습니다.”

머리에 굽은 뿔이 돋은 블라혼이 지원사격을 해주었다.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경우였네. 엘프들의 기록이 잘못되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고대 엘프어 마도서들이 해독된 후 옛것 관련 지식을 이용해보자고 가장 소리 높여 외친 게 그였다.

내가 제이릴리스에게 가서 다 죽여주시옵소서, 하고 외치지 않을까 안달복달이겠지.

나는 원로 둘과 눈을 마주쳤다.

그들 역시 상아탑에서 협잡과 음모와 세력 다툼을 벌이며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태우는 게 어떠십니까?”

“태우지.”

“나도 그게 좋겠네.”

우리는 저게 남아 있어 봐야 누구에게도 좋을 게 없다고 합의했다.

“마지막까지 먹어 치우는 불꽃.”

“검게, 영혼을 불사르는 불꽃.”

“불, 타라.”

내가 용언의 불을, 이피제가 최상위급 화염 마법을, 블라혼이 칠흑 마법의 불길을 사용했다.

사람 상반신만큼 큰 책이 불꽃에 휩싸이고, 붉고 흰 연기를 내며 타올랐다.

블라혼와 이피제가 학파에 속한 마법사들에게 지시했다.

“실험실을 정리하게.”

“시약들은 폐기하고, 기록은 불허한다.”

이피제가 기록은 불허한다, 하고 말한 순간 그곳에서 실험 내용을 적던 모든 종이와 양피지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로브 안주머니에서 연기가 치솟아 당황하는 마법사도 있었다.

그러나 그 불은 사람과 주변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딱 종이만 태운 뒤 꺼졌다.

* * *

우리는 책과 기록을 불태워 1차로 증거를 인멸한 뒤 머리를 맞댔다.

진정한 증거 인멸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건 다른 말로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도 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

“예. 이피제 님.”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랬지요.”

“그러나 저희 상아탑에서 책임은 결과에 지는 것입니다.”

“황실에서도 그렇습니다.”

“아까 정신 파동을 잘 견디시는 걸 봤습니다. 실험체를 회수하는 걸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국의 대공이자 황형으로서, 그리고 실험의 참관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이피제는 ‘도와’줄 수 있겠냐는 말로 책임의 주체가 상아탑임을, 다시 말해 나와 세레라지에에게 덮어씌우지 않겠다는 걸 약조했다.

동시에 ‘회수’라는 표현을 통해 상아탑이 이 실험의 모든 결과물을 가져갈 것이라고 천명했다.

즉, 모든 증거를 긁어모아 없던 일로 하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참관자’라는 표현을 통해 책임을 같이 지겠다고 이야기하는 동시에, 아예 없던 일로 하기는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뜻을 은연중에 내비쳤다.

그 정도면 감수하겠다는 듯 이피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블라혼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흑마법사인 내가 하려니 조금 민망한 말이기는 하다만, 민간인 피해는 최소화되어야 하네. 놈이 수도 안쪽으로 향하면 안 돼. 성문을 닫고 사역마들을 풀어 수색을 진행하는 게 어떤가?”

해석해 보면, 제이릴리스의 눈과 귀에 이번 사건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꽤 훌륭한 대처이기도 했다.

슬슬 저녁 무렵이니 상아탑 특구에 관광 온 사람들은 대부분 솔레타라온 안쪽이나 특구 안의 호텔로 들어갔을 거다.

“고견에 감사드립니다.”

내가 동의하자마자 블라혼이 옆 창문을 열고 검은 숨을 내쉬었다.

안개 같은 숨결이 수십 마리 박쥐로 변해 각 성문과 10층으로 향했다.

“내 제자들과 여러 흑마법사에게 상황을 전했네.”

“저희도 수색에 참여하겠습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레라지에가 새침하게 웃으며 금은 요동을 빛내고 있었다.

그 뒤로 게스타르테와 남색 로브를 두른 전격 학파의 마법사들이 여럿 늘어서 있었다.

“회수는 상아탑 전체의 일입니다.”

동시에 수색의 결과물을 나눠 먹고 싶다는 뜻이기도 했다.

“감사할 따름이지.”

“고맙구나.”

블라혼과 이피제가 동의했다.

나는 흡족하니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는 이제 나가서 발로 뛰겠습니다.”

당장 밖에서 무슨 일이 터지고 있을지 모르는데, 이런 협잡질부터 해야 한다는 건 슬픈 일이다.

하지만 회귀 전 40년에서 배운 게 있다면, 전리품 분배에 대해 협의하지 않은 동맹은 시작도 할 수 없으며, 어찌어찌 시작한다 해도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싸우게 된다는 거다.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만 온 힘을 쏟을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선한 사람이거나, 책임질 게 적은 사람이거나, 얼간이일 뿐.

그리고 이 자리에는 그 세 유형이 하나도 없었다.

“동생아. 가자. 우리가 놓친 이물이 저 밑에서 사람 뷔페를 열기 전에.”

세레라지에가 손짓하며 먼저 달려 나갔다.

“예상외로 말이 곱게 나온다?”

나는 따라붙으며 물었다.

“대체 얼마나 멍청하면 실험을 바로 옆에서 봐 놓고도 이물이 탄생하는 걸 못 알아채니?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나도 똑같잖니.”

“이미 말했어.”

승강기에 타서 닫힘 버튼을 연타하고 있으니 인영 하나가 문 사이로 뛰어 들어왔다.

“선배. 같이 가자.”

끝이 붉은 긴 크림색 머리에 긍지 높은 갈색 눈을 가진 마법사, 게스타르테의 현 제자였다.

세레라지에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금은 요동을 번뜩였다.

그러나 그녀의 후배 되는 마법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스승님의 제자는 나잖아?”

“!”

세레라지에가 벼락을 불러올 거 같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남색 기운이 그녀의 양손에서 안개처럼 모여들었다.

“누나. 참아!”

“황궁 마도 공방주 세레라지에 님. 협력에 감사드립니다?”

“너도 까맣게 타기 싫으면 입 다물어.”

그러나 세레라지에는 지팡이를 내리치지 않았다.

그녀는 고깔모자 챙 아래로 눈을 감추며 말했다.

“스승님이 어중이떠중이를 들이지는 않으시겠지.”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목소리로.

“보고 싶어지는구나. 얼마나 대단한 대체품을 구하셨는지.”

제자가 잠시 울컥하는 표정을 짓더니, 잔망스럽게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니아르라고 해. 잘 부탁해. 선배.”

“세레라지에 대공 전하라 부르렴. 너는 황족도 아니잖니? 내게 상호 존대를 받으려면 원로급은 되어야 한단다.”

“와. 역대급 태세 전환이네? 상아탑 안에서는 신분도 뭐도 없다고 하고 다녔다면서.”

“그 상아탑이 나를 버렸잖니.”

* * *

겨울 해는 빨리 떨어졌고, 낮에 북적이던 상아탑 자치구의 거리는 비교적 한산해졌다.

마법사들은 딱히 야간통행금지를 시행하지 않았지만, 숙소를 자치구 바깥에 잡은 관광객들은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자. 이제 집에 가야지?”

부모 손을 잡은 유복한 가정의 아이는 집으로 돌아가려 동쪽으로 걸었다.

그러나 그들이 본 건 굳게 닫힌 거대한 철문이었다.

아무리 저녁 시간이라 해도 남은 관광객은 수천에 달했다.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열어 주세요.”

당황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렸지만, 경비병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상아탑 원로의 말을 거역했다가는 내일 뜨는 해는 못 볼 게 분명했다.

마법사들을 상대로 거래하는 시약 상인들은 거리에 짐마차를 세워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왜 갑자기 성문을 닫아버렸는지 아는가? 자치구 동문은 슬슬 닫힐 시간이지만, 남은 세 문은 왜 닫았지?”

“다들 큰 손해를 보게 생겼네. 그 친구는 내일 아침까지 공급해줘야 할 물량이 서른 상자나 있다는데.”

“듣자 하니 탑의 원로님이 급하게 명령을 내리셨다는군. 뭔가 키메라 같은 게 탈출했다는 말도 있고.”

한 상인이 어이없다는 듯 한숨 쉬었다.

“허, 참. 상아탑이 별 실수를 다 하는군.”

다른 상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분들도 의외로 서투른 면이 있다네. 생각해 보게나. 7, 8살부터 저 안에 들어가서 나오지도 않고 마법, 마법, 마법. 가끔 실습한다고 몇 번 나가는 걸 빼면 거의 30살까지 저 안에만 있는데, 세상에 대해 뭘 알겠나?”

다른 상인이 폭소했다.

“이야기 속 마법사들이 다들 신비롭고 초연한 분위기인 이유를 알겠군. 그냥 몰라서 입 다물고 있는 거였나? 크하하하.”

따다다닥-

그때 상인의 웃음소리에 맞춰 기이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커다란 거미 같은 게 판석 바닥을 기어간 거 같았다.

“방금 보았나?”

“그래! 보았네. 저쪽 골목으로 들어갔어.”

“바로 가서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닌가?”

폭소했던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왜 신고하나? 우리가 잡아서 되팔면 되지. 키메라 한 마리가 얼마인지 알잖나?”

“허. 이 친구 지난번에도 실습 과제 소각로 뒤져서 마도구랑 키메라 찾아 팔더니, 그 버릇 아직도 못 고쳤나? 그거 절도야, 절도.”

“절도는 무슨 절도인가? 버린 걸 주워가는 건데.”

그가 짐마차에서 부지깽이 하나를 들고 내렸다.

“이리 와라. 귀여운 것아.”

그가 골목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 직후 피슉, 하는 소리가 났다.

양손으로 달걀을 감싼 다음에 눌러서 까면 비슷한 소리가 날 거 같기도 했다.

상인들은 의아해하며 골목 안쪽을 바라보았다.

“어, 어?”

“저게 뭔가?”

그리고 벌벌 떨며 경악했다.

옛것의 기운이 너무 강한 나머지, 그들로서는 망막에 제대로 상이 맺히지 않아 어렴풋이만 보였다.

그래도 그것이 절대 사람이 아니라는 건 명백했다.

사아악!

거대한 집게발이 떨어졌다.

상인들은 몸이 굳어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때 하얀 제복을 입은 검객이 유성처럼 달려들어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금색 마나 블레이드 두른 검이 거대한 집게발과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찾았다! 이 잣 같은 새끼!”

소년과 청년의 경계의 선 듯한 나이, 잘생겼지만 잔혹하고 오만한 인상, 세로로 찢어진 금빛 눈동자와 백금발.

“바, 발렌시아누스!”

“망나니 대공이다!”

상인들은 이물을 본 듯 경악했고, 발렌시아누스는 오만하게 고함쳤다.

“나를 처음 보는 것이냐? 마침 잘 만났구나. 목숨 구해준 값을 받을 거니까 돈을 꺼내 놓거라. 안 내놓으면 때리고 뺏을 것이다.”

그는 상인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야 주변에서 기웃거리지 않고 멀리 도망친다는 걸 전생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예상대로 그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고, 발렌시아누스는 쓰게 웃으며 한 걸음 물러서 자세를 가다듬었다.

“잣 같은 새끼. 그새 더 변했네.

이물의 얼굴과 등판은 마치 하얀 솔방울이나 잣을 보는 거 같았다.

붉은 근육 위에 가죽 없이 곧바로 비늘 같은 뼈 갑옷을 띄엄띄엄 두르고 있었다.

두 앞발은 게나 가재의 것을 보는 거 같았고, 네 개의 끝이 뾰족한 다리로 바닥을 기어 다녔다.

갈비뼈는 앞으로 길게 튀어나와 또 다른 입처럼 움직였는데, 그중 몇 개는 아예 마디가 있는 작은 집게발 형태였다.

그야말로 이물, 섞이지 못한 다른 생명체가 하늘이 떠나가라 정신 파동을 터뜨렸다.

동시에 발렌시아누스 역시 불꽃을 피워올리며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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