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86화
(86)
용언의 불길을 정통으로 맞은 이물이 바르작거리며 불타 올랐다.
나는 마나 블레이드로 다리를 굳힌 거품을 베어내고 몇 걸음 물러서서 이물을 바라보았다.
치이이이이익!
단단한 하얀 갑각은 거의 불타지 않았지만, 붉은 근육은 수증기를 뿜으며 맹렬히 타올랐다.
이물은 오래지 않아 속이 빈 갑옷처럼 변해버렸다.
쩌적, 쩍!
하얀 갑각도 붉은 근육 없이는 서 있을 수 없었다.
3m에 달하던 무시무시한 이물의 마지막 흔적이 무너져 내리며 잿가루처럼 흩어졌다.
“아, 안 되는데!”
니아르가 달려와 그 잿가루를 손에 쥐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가루들이 완전히 허공에 녹아들었다.
한 줄기 남은 노을빛과 함께, 한 방울 피를 먹고 태어난 이물이 사라졌다.
“대충 다 정리된 듯하구나.”
세레라지에가 손수건으로 피를 닦으며 다가왔다.
나는 품속에서 운 좋게도 깨지지 않은 파란 약을 마셨다.
잠시 온몸에 힘이 풀리고 여기저기 돋아난 비늘이 다시 내 통제 안으로 돌아왔다.
가게 유리를 보니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도 다시 보통의 황금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게.”
상아탑의 마법사들은 과연 상아탑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강했다.
그들은 비행용 빗자루나 양탄자를 타고 하늘을 날며 벼락이나 불덩이, 맹독, 바람 칼날, 냉기 파동 따위를 정확하게 퍼부었다.
속성을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마나 자체를 이용한 파괴 마법을 다루는 이들도 여럿이었다.
막 한 마법사가 제이릴리스가 쓴 거 같은 진노의 창을 발사해 거대한 갑각 들개를 관통하고 그 뒤에 있던 가게를 박살 내버렸다.
“저래도 되는 건가? 가게랑 사람들에게 피해 안 가게 하려고 많이 애썼는데.”
내가 옆구리를 주무르며 씁쓸하게 중얼거리자, 니아르가 붉은색 섞인 크림색 눈을 피했다.
“이걸 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아까 사람들은 대피 끝났고, 가게들은 어찌 되어도 좋다. 그렇게 말한 거 기억하세요?”
“그래. 기억한다.”
“원래 조만간 원로님들이 여기 다 철거하려고 했어요. 최소한 상아탑 주변 300m에는 아무도 못 접근해야 한다고.”
세레라지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니?”
“상아탑으로 장사해서 먹고사는 것들이 계속 주제넘게 굴었거든요. 시약은 바가지 씌우고, 실험 소각 폐기물 빼돌려서 팔다가 사고 나면 우리가 관리 못 했다고 교회에다가 우는소리 해 대고.”
“아.”
“매일같이 바로 옆에서 연극이나 음악회나 퍼레이드 같은 걸 열어 대니 아래층 쪽을 쓰는 애들은 너무 시끄러워서 연구가 안 될 지경이었어요.”
나는 허탈감에 침음성을 흘리며 물었다.
“유동인구가 있으면 상권에 도움이 되는 거 아닌가?”
“그 상권 자체가 우리랑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상아탑 마법사들은 사람들 앞에서 광대 짓 안 해요.”
니아르가 대단한 긍지가 깃든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수익은 관광객들 상대로 나오는 게 아니라 대영주들이랑 거래해서 나오는 거예요. 애초에 솔레타라온 성벽 밖에 탑을 세운 이유가 조금이라도 사람들이랑 멀어지려는 거였어요. 그런데 오히려 관광지가 되어 버렸으니…… 계산을 잘못했죠.”
나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쩐지 마법사가 그렇게 많은데 상아탑 소속 로브는 거의 못 본 거 같다 싶었다. 대부분 배움의 거리랑 마법 거리에서 온 놈들이었군.”
“네. 그 마법사 같지도 않은 놈들.”
“그럼 내가 건물에 피해 안 주려 사렸던 건 모두 다 헛일이었군. 내 옆구리는 공짜로 얻어맞은 거였어.”
나는 옆구리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세레라지에가 새침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많은 사람을 살렸지 않니? 네가 몸으로 버텨 가며 이물을 막고, 불덩이를 잡아두지 않았다면 대피를 끝마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죽고 다쳤을 거란다.”
그게 무척 다행이었다.
나는 한심한 표정을 세레라지에에게 보이지 않으려 얼굴을 돌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내게 남의 목숨을 책임질 자격은 없었다.
반쯤 내가 만든 괴물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를 죽여 놓고 부수적 희생이라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나는 뻔뻔했지만, 그렇게까지 뻔뻔하지는 못했다.
“일단 내 지갑은 지켜지겠군.”
“기껏 띄워줬는데 눈치 없게 무슨 소리니! 텐티아 경이 알면 많이 뿌듯해했을 거란다.”
그랬겠지.
아니면 책을 불태워 증거 인멸부터 하던 걸 보고 경멸했을 수도 있고.
“발렌 대공 전하. 선배 말이 맞습니다. 눈치를 챙기시지요.”
“이제 동문이 쌍으로 나를 갈구는군. 들어가자. 마저 정리 해야지. 누나도 가서 챙길 거 챙겨.”
세레라지에가 아릿하게 웃었다.
“그래. 챙길 걸 챙겨야지.”
* * *
고대 엘프어로 쓰인 마도서는 발렌시아누스와 이피제와 블라혼이 함께 불태웠고, 완전히 잿더미로 변했다.
그 한 권은.
“차곡차곡 쌓아서 순서대로 잘 정리해주겠니? 시간 날 때마다 읽고 정리해서 사본 만들 거란다.”
황립 마도 공방, 땅 속 깊은 나무뿌리 아래 세레라지에의 연구실이 있었다.
은은한 차 향과 진한 커피 향이 피어오르고 주황색 고양이가 ‘애옹애옹’ 우는 곳.
세레라지에의 제자들과 발렌시아누스가 그곳으로 양손 가득 마도서들을 나르고 있었다.
발렌시아누스가 막 네 권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위험도 1급인 애들은 다 태웠지? 혹시 누나가 한두 권 챙긴 거 아니야?”
“함정이라는 걸 알면서 그 위력이 얼마나 센지 확인해보려고 밟을 생각은 없단다. 당장 엊그제 그 고생을 해 놓고 내가 왜 그 미친 짓을 하겠니?”
“무한한 힘과 지식에 대한 열망으로?”
세레라지에는 모자와 로브를 벗어 옷걸이에 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법사는 무한한 힘과 지식을, 진리를 열망하고 추구하지. 그래서 때로는 남들이 이해 못 하는 위험을 무릅쓰기도 하고. 하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게 하나 있단다.”
“뭔데?”
“사실 마법사들은 그냥 진리를 찾고만 싶은 게 아니란다. 이해하고 싶고, 이용하고 싶지.”
“!”
발렌시아누스가 한 방 먹었다는 듯 침음성을 흘렸다.
“정말로 사람과 세상이 싫기만 했다면 상아탑은 수도 성벽 옆이 아니라 수도 옆 산에 지어졌겠지.”
“누나 말이 맞네. 하긴 원로들도 가게들을 다 밀어 버린다는 게 아니었지.”
“숭배받고 인정받는 걸 누가 싫어하겠니.”
세레라지에는 그러니까, 하고 운을 떼며 말을 이었다.
“동생아. 내가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곳으로 가 버릴까 너무 걱정하지 말려무나. 나는 거대한 존재와 하나 되어 진리를 이해하고 싶은 게 아니라, 거대한 존재를 갈기갈기 찢어 뜯어보면서 진리를 이해하고 싶은 거니까.”
그게 마법사와 사제의 차이였다.
발렌시아누스는 더 이상 따지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더 파고들면 실례겠지. 그래도 그건 진짜 조심해서 다뤄야 해.”
“당연하단다. 이미 전적이 있는 연구잖니.”
세레라지에는 품속에서 보고서 종이 뭉치 사본을 꺼내 흔들었다.
이피제는 실험을 보던 모든 사람이 쓰던 기록을 불태웠다.
자신이 쓰던 것만 빼고.
그걸 놓칠 발렌시아누스가 아니었다.
세레라지에는 보고서를 넘기며 흡족하니 웃었다.
“마나를 통한 신체 회복과 물질 창조, 나아가 전기 신호를 이용한 근육과 마나 운용 보조. 후후. 꼭 한 번 연구해 보고 싶었단다. 이걸로 뭘 할 수 있을지 생각하니 너무 기대되는구나.”
“생각하고 있는 거 있어?”
발렌시아누스는 장단을 맞춰 주려 물었고, 묻자마자 후회했다.
그녀가 잔뜩 흥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기 때문이다.
“놈이 순식간에 갑각을 만들어내던 걸 기억하고 있니?”
“당연하지.”
“이번 연구가 잘 되면 그걸 이용해서 네 비룡화를 저지하는 약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단다.”
“어떻게?”
그러나 이어진 말에는 그 역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무식하구나. 생각해보렴. 생성의 반대가 곧 억제잖니. 네 힘을 더욱 끌어낼 약과 잠재울 약은 하나인 셈이지. 바스타틴의 그 싸구려 파란 약은 언젠가 한계가 올 거잖니?”
“싸구려라고 할 것까지야. 하지만 누나가 훨씬 더 믿음직하지.”
“그래. 너도 인정하는구나. 거기에 내 용언까지 더해지면 정말 괜찮은 결과가 나오지 않겠니?”
세레라지에가 꿈꾸듯 말했다.
발렌시아누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은은하게 웃었다.
“기대되네. 누나가 비룡화로부터 나를 구해주는 날이.”
구해주는, 그 말을 들은 세레라지에는 옅게 웃었다.
“네가 먼저 나를 구해줬잖니. 매일 생색내지만 않았으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새침한 얼굴에 아련한 미소가 떠오르고 푸른색과 노란색의 금은 요동이 보기 좋게 반짝였다.
발렌시아누스가 아주 짧은 침묵 끝에 답했다.
“꼭 한 줄을 더 붙여요! ……잘 되면 좋겠네. 내 비룡화도 비룡화지만, 누나도 몸 좋아지면 기동성 더 올라갈 거 아니야.”
세레라지에가 빠르게 말했다.
“당연하지. 하지만 미리 말해두는데, 텐티아 경과의 훈련에 나를 끌어들일 생각은 말렴. 나는 내 발로 시속 4km 이상 이동할 생각이 조금도 없단다. 아. 그래.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이제 돈도 많은데 바로 양탄자나 빗자루부터 하나 사야겠구나.”
발렌시아누스는 얼굴에 철판 열 겹을 깔며 말했다.
“내 것도 부탁해.”
세레라지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여유만만하게 대답했다.
“용처럼 탐욕스럽고 마른 피처럼 들러붙는구나. 음. 양탄자는 네가 타기에는 너무 어려울 거란다. 너는 체계적으로 마법을 배운 게 아니라 혈통의 힘에 많이 의존하잖니. 그래서 속성도 자연 개화한 불꽃밖에 못 쓰고. 빗자루는…… 네가 타기에는 조금 불편하지 않겠니?”
발렌시아누스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누나 스승님이랑 후배 언제 온다고 했지? 슬슬 일어나게. 나 있으면 방해일 거 아니야. 어차피 오늘 가져온 책 보면서 나는 하나도 못 알아들을 소리만 할 거고.”
“눈치가 좋구나. 곧 올 거란다. 두근거리네. 상아탑 마법사의 황립 마도 공방 비공식 방문은 이게 처음이란다.”
“원래 비공식이 한 열 번 이뤄진 다음에 공식이 한 번쯤 이뤄지는 거 아닌가?”
“마법의 세상은 가끔 시곗바늘이 거꾸로 돌거나 기적도 일어나는 법이지.”
발렌시아누스는 비릿하게 웃으며 공방 문을 열고 나섰다.
“즐거운 만남 되기를.”
그는 어두침침한 복도를 걸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짜고 치는 카드 게임 같은 거라지.’
이번 일을 계기로 화염 학파와 칠흑 학파, 혈류학파가 주도적으로 끌고 가던 고대 엘프어 마도서 연구가 죄다 엎어지거나 발목을 잡혔다.
황실의 대표인 그와 세레라지에는 위험 관리, 신뢰성 확보, 교차 검증 등 다양한 명분으로 고대 엘프어 마도서들을 공유해달라 요구했다.
게스타르테는 고대 엘프어 마도서 연구에 반대하거나 소극적이었던 학파들을 모아서 그 요구에 내응했다.
함정 마도서들은 불태웠고, 진귀한 것들은 모두 황궁으로 보냈다.
그리고 세레라지에는 옛 스승 게스타르테를 초청해 공동 연구를 요청한다.
그렇게 고대 엘프어 마도서 연구의 주도권은 황실과 전격 학파로 넘어온다.
* * *
큰 창을 등진 집무실.
제이릴리스가 서류 더미를 넘기며 웃었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 눈을 빛내다 보니, 의회 소집 어쩌고 쓰여 있는 양피지를 본 거 같았다.
“썩 괜찮은 생각이었구나.”
나는 장난스럽게 짧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어떻게든 뭐라도 폐하께 들고 와야 제 목이 어깨 위에 남아 있지 않겠사옵니까?”
“짐이 준 기회가 있지 않은가? 황제의 약속은 무겁다. 무슨 죄든 한 번은 벌하지 않겠다고 말했을 텐데.”
나는 담담하게 답했다.
“그 기회는 영원히 쓰기 싫사옵니다.”
제이릴리스가 황금색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하, 하고 웃었다.
“그대는 진정 충신이로구나.”
이번에도 나는 결과를 냈다.
사망자 0명.
이물이 그렇게 날뛰었지만, 사람은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제이릴리스가 상아탑에서 올린 경위서를 구겨 벽난로로 던지며 말했다.
“그런데 수도 사람들은 그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정말로 즐거워하더구나.”
“이번에는 무어라 말하고 있사옵니까?”
“그대가 성문을 닫으라 명했다고 하더구나. 이물 탈출을 숨기려고 다 죽이려 했다고.”
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마도서를 빼앗긴 칠흑 학파의 사소한 복수일 것이옵니다. 눈감아 주시옵소서.”
“의외로구나. 그래도 그대가 원한다면, 알겠노라. 다 생각이 있을 터이니.”
그녀가 아차, 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걸 가져가서 읽어 보아라.”
의회 소집에 대한 내용이 적힌 양피지였다.